제172화
172. 승승장구 2
도란희의 질문을 듣자마자 그녀의 입을 막은 게 실수였다.
유진이한테 받았다고 말해도 되는데 괜히 입을 막아 버려 호기심만 키워버렸다.
내 손에 입이 막힌 도란희가 눈을 큼직하게 뜨고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읍읍읍!”
“풀어줄 테니까······ 조용할 거라면 고개를 끄덕여 봐.”
하지만 도란희는 고개를 끄덕이기는커녕 입을 오물거리기 시작했다.
빼꼼히 나온 그녀 혀가 손바닥에 닿았다.
“야! 핥지 마!”
축축한 감각에 화들짝 놀라 손을 떼자 도란희가 므흣한 표정으로 자신의 입을 스윽 닦았다.
“짜요!”
미친 도란희 같으니라고.
책상에 있는 물티슈로 손을 닦고 있으니 도란희가 능글맞은 표정으로 날 쳐다본다.
“팀장님.”
“왜!”
“누구예요?”
“누구라니?”
“선물해 준 상대가 누구길래 제 입까지 막으려 들었을까요? 여친? 사진 있어요?”
“일단 탕비실에서 이야기하자 사람들 출근하고 있으니까.”
“호호호. 제 입은 무거우니 걱정하지 마세요.”
왜 기뻐하는 건데?
신이 난 도란희를 데리고 탕비실로 향했다.
비어있는 탕비실에서 내 정장이 유진이의 선물임을 알렸다.
“대~박! 여친이 아니라 유진 씨가요?”
“내가 여친 사귈 시간이 어디 있냐? 팀장 승진 선물로 유진이한테 받았어.”
도란희가 침을 꼴딱 삼킨다.
“설마 팀장님. 제가 생각하는 그런 관계······는 아니죠?”
“아냐! 니가 뭘 생각하든 아냐!”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던데요? 팀장님 본인은 아니더라도 유진 씨가 정 팀장님을 좋아할 수도 있는 거고······”
“아니래도!”
“일단은 믿어드릴게요.”
“일단은?”
“솔직히 회사에서 팀장님이랑 유진 씨 그렇고 그런 거 아니냐는 소문이 돈단 말이에요.”
유진이와 내가?
처음 듣는 소리였다.
“누 누가 그런 소문을 퍼트려?”
여자 연예인과 남자 매니저.
두 궁합은 여러 가지 상상을 일으키곤 한다.
매니저는 연예인과 24시간을 보내면서 모든 것을 도와주곤 하니까.
특히나 내 나이가 문제였다.
스타와 나이대가 비슷한 이성 매니저였으니까.
“설마 너까지 의심하는 건 아니겠지?”
“‘정 팀’에 오기 전까지는 의심했었죠.”
“지금은?”
도란희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쳐다보다 고개를 젓는다.
“솔직히 두 사람. 너무 친해 보여서 의심이 가긴 하지만 그래도 믿을게요. 팀장님이 거짓말하실 분은 아니니까.”
“그래. 난 사귀면 사귄다고 말하고 사귀는 타입이라고.”
도란희가 입을 삐죽 내민다.
마치 재미있는 스캔들 정보가 가짜였다는 걸 알고 맥이 빠진 것처럼.
“그나저나 사람들이 알면 소문이 나쁘게 날걸요?”
장난을 치긴 했어도 ‘정 팀’이 된 이상 나와 유진이를 걱정해주는 도란희였다.
“괜찮아. 란희 너만 입을 다물면 소문 안 날 거야.”
하지만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파란 하늘> 회식에서도 에이스 엔터의 매니저가 같은 질문을 했었으니까.
그런데 도란희가 갑작스레 입맛을 다시며 웃기 시작했다.
“글쎄요. 제 입이 무거워지려면 뭔가 오가는 정이 있어야······”
어라?
조금 전까지 ‘정 팀’을 위해서 충고해주고 비밀을 지키겠다는 것처럼 말하지 않았니?
“그럼 나보고 어쩌라고?”
도란희가 뻔한 걸 왜 묻냐는 듯 말한다.
“한우요.”
“넌 거래의 시작이 무조건 한우부터야? 돼지갈비 같은 것도 있잖아. 삼겹살 안 좋아해? 상추랑 깻잎 같은 많이 먹어야 몸에 좋아! 무한으로 즐겨요~ 이런 노래도 몰라?”
“네 몰라요. 한우님이 몸에 제일 좋아요. 한우님으로 즐길래요.”
한우님같은 소리하네.
‘돈 없어 배째!’라고 말하려 했지만 탕비실에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린 순간 나도 모르게 외쳤다.
“콜!”
유진이한테 선물 받은 걸 밝히는 게 왜 이리 힘든지 모르겠다.
그때였다.
“뭔데 콜이에요?”
탕비실에 커피를 가지러 온 이영진이었다.
도란희가 배실배실 웃는다.
이영진인 줄 알면 콜을 외치지 않았어도 되었을 텐데.
하지만 그 순간 도란희에게 복수할 방법이 떠올랐다.
“아~. 오늘 체리블라썸 무대에 얘 데리고 갈 거라고 했더니 좋아하네? 그래서 콜이라고 한 거야.”
“아~ 그래요?”
곁에 있던 도란희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제가요?”
“어.”
“저 오늘 하나 씨 너튜브 콘텐츠 기획해야 하는데요? 팀장님?”
도란희가 고개를 저으며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그건 다녀와서 해. 란희도 올해 가기 전에 대리 달아야지. 안 그래?”
“팀장님. 저는 가늘고 길게 가는 게 목푠데요.”
“내 목표랑 다르네? 난 굵고 길게 가는 거거든. 그러니까 우리 란희도 빡시게 일하자?”
“티 팀장님? 이거 혹시 복수······?”
“아닌데? 전혀 아닌데?”
도란희를 향해 씨익 웃어주며 등을 떠밀었다.
‘한우님 영접하려면 그 정도 일은 해야지 안 그래? 란희야?’
탕비실에서 밀려가던 도란희는 이영진을 향해 도와달라 말했다.
하지만 이영진은 커피를 타며 웃음 지을 뿐이었다.
“잘하고 와. 같이 대리 달자.”
“으아아. 시끄럿! 내가 먼저 승진해서 막 갈굴 거야!”
승진을 시켜준다고 해도 악담을 해대는 도란희를 끌고 체리블라썸의 스케줄을 위해 주차장으로 향했다.
* * *
[체리블라썸 9주 연속 1위 달성! ]
9주 연속 1위를 달성하자 기사들이 미친 듯 쏟아지기 시작했다.
2010년 이후 깨어지지 않던 연속 1위 기록과 동률을 달성한 탓이었다.
기뻐하는 팬클럽 운영진들과 대화를 나눈 후 곧바로 회의에 참석했다.
그런데 오늘 회의에는 평소와 달리 매니저들뿐 아니라 체리블라썸 멤버 4인도 전원 출석한 상태였다.
아쉽지만 다음 주를 끝으로 이번 음반 활동을 쉬기로 결정 내렸기 때문이다.
“자 윤호도 왔으니 이번 활동 마무리에 관해 이야기해보자.”
이동민 실장이 입을 연 순간 세리가 손을 번쩍 들었다.
“실장님.”
“왜 세리야?”
“저희 힘들게 올라왔잖아요. 그니까 3주만 더하면 안 돼요? 네? 조금만 더 할 수 있게 해주세요~ 아잉~.”
세리가 안 되는 윙크로 양쪽 눈을 찡긋거리며 애교를 피웠다.
늘 세리에게 태클을 걸던 양은비도 이번에는 세리의 말에 동의했다.
“이번엔 저도 세리 말에 동의해요. 이런 순간이 매번 찾아오는 건 아니잖아요.”
고생만 하다 성공의 단물을 맛본 탓일까.
다른 두 멤버도 연이어 반대 의사를 냈다.
그러나 이동민 실장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마음은 알겠는데 그래. 이번 주까지만 하자. 10주 연속 1위. 그 기록만 찍고 내려오면 되겠네.”
세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왜 더하면 안 돼요? 저희 할 수 있다니까요? 이것 보세요!”
세리가 아직도 춤출 힘이 너끈하다며 의 키 포인트 댄스를 시작했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세리의 가느다란 팔이 힘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음방 활동에 행사에 연습에.
차에서 이동하며 쪽잠을 자며 2달 넘게 달렸다.
체력관리를 한다고 했지만 이제 한계였다.
다들 피로가 누적되는 차원을 넘어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고.
근육통이 심할 텐데 생글대며 웃는 세리의 모습을 보자 괜스레 가슴이 짠해졌다.
이동민 실장은 더는 못 보겠는지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활동을 그만두자는 건 내가 건의한 내용이었으니까.
“정 팀장. 이다음부터는 네가 이야기해라. 난 도저히 못 하겠다.”
“알겠습니다. 실장님.”
순간 체리블라썸 멤버들이 일제히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다들 자기편을 들어달라 신호를 보내온다.
아직도 고무풍선처럼 흐느적대는 춤을 추는 세리는 연신 쌍 윙크를 보내고 있었고.
일단은 세리부터 진압해야겠다.
“다음 주는 무슨. 바람 빠진 고무풍선처럼 흐물거리는 걸 보니 당장 이번 주 출연도 힘들어 보이는데 그냥 오늘까지만 활동할까?”
“아 아니요!”
세리가 냉큼 팔을 내리고 자리에 앉았다.
“다들 열심히 하려는 마음은 알겠는데 현재 너희들 몸 상태면 조그만 타박상에도 근육 파열이 생기거나 인대가 늘어날 수 있어. 그러면 한두 주가 아니라 올 한해가 다 날아간다. 몰라?”
누적된 피로 때문에 응급실로 실려 갔다가 그 여파로 오랫동안 활동을 쉰 배우와 가수들이 상당히 많다는 걸 설명하기 시작했다.
가만히 내 이야기를 듣던 우연희가 아쉬운 표정으로 결국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것까진 생각 못 했어요. 괜한 고집 부려서 죄송해요.”
“죄송하긴. 솔직히 이만큼 해준 것만 해도 진짜 잘한 거야. 그러니까 다음번에는 준비 잘해서 더 오래 하자. 그리고 선우가 차기 곡도 잘 뽑아 뒀으니 걱정들 하지 말고.”
“알겠어요.”
내 설득을 받아들인 우연희는 다정한 얼굴로 엄마처럼 멤버들을 토닥이기 시작했다.
“얘들아. 단 한 번만 1위 해 봤으면 뭐든 하겠다고 한 게 불과 몇 개월 전이야. 무리한 욕심으로 다음을 망치지 말자.”
우연희의 말에 멤버들이 하나씩 수긍하기 시작했다.
“윤호 오빠가 저렇게까지 말한다면야······”
하지만 허풍선이 세리가 살짝 투정을 부렸다.
“씽. 그래도 난 좀 더 하고 싶은데.”
“세리 너 오늘 아침에도 피곤해서 늦잠 잤잖아. 스케줄 펑크 날 뻔했고.”
“아냐. 키가 크는 소리가 들려서 잠깐 더 눈 감고 있었던 거야.”
키 크는 소리?
아무래도 꿈인 거 같은데 그거.
단 1mm의 키가 변화도 없으면서 잘도 뻥을 친다.
이동민 실장이 헛기침하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자자. 그럼 그렇게 결정 났으니까 그동안의 활동 정리나 좀 해볼까?”
“예.”
한명호 팀장이 목청을 가다듬고 체리블라썸의 그동안의 실적을 말해주기 시작했다.
“지난 두 달간의 성적은······”
한명호 팀장은 지난 두 달이 넘는 시간 동안 CF 5개 매출 18억 관련 너튜브 조회수 총합 3천800만 회 등의 엄청난 성공을 연이어 말했다.
더불어 일본과 중국 쪽에서도 자체 팬클럽 사이트가 생기고 있다는 소식도 말이다.
“노래가 쉬워서 그런지 아시아권 반응이 기대 이상으로 좋습니다. 다음 음반은 아예 해외 진출을 노리고 만드는 것도 고려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한명호 팀장의 보고에 체리블라썸 멤버들의 얼굴이 활짝 피기 시작했다.
“진짜요?”
“대박!”
체리블라썸 멤버들의 눈이 큼지막하게 커지더니 연이어 웃음을 터트렸다.
“연희 언니! 그럼 우리 일본에서 빌보드 차트 1위 노리자!”
세리의 말에 양은비가 결국 참지 못하고 한마디를 한다.
“세리야. 일본은 그게 아니라······.”
“나도 알아. 농담한 거였어. 오리콘 차트잖아.”
양은비뿐 아니라 회의실 모두가 놀라며 환호했다.
“오올~ 우리 세리. 제법인데?”
“세리. 공부 많이 했네? 그런 것도 알고?”
매니저들이 환호에 세리가 으쓱해 대답했다.
“당연하죠! 전 이제 예전의 세리가 아니라니까요?”
당당한 포즈를 짓던 세리가 내 쪽을 보며 눈을 찡긋한다.
‘그래. 잘했어.’
요즘 들어 까톡으로 시사 상식 공부를 시킨 보람이 든다.
내게는 한명호 팀장이 알려준 모든 성적보다 당장 이게 더 기쁜 일이었다.
‘하면 되는구나. 우리 세리.’
세리는 다시 한번 떨리는 팔로 기쁨의 마구잡이 승리 댄스를 췄고 덕분에 회의실은 웃음으로 피어나고 있었다.
* * *
스타일리스트.
연예인들의 의상을 담당하는 스태프를 말한다.
연예계 관련 직종 중 기자와 팬덤에서 까이는 직업 1순위이기도 하고.
그리고 나는 오늘 ‘정 팀’의 마지막 한 조각인 스타일리스트를 구할 생각이다.
“어디 가세요? 팀장님”
“스타일리스트 영입하러 갈 거야.”
“오올. 어떤 분이신데요?”
“대단한 분.”
오늘 영입하려는 ‘이미리’는 뉴욕 보그(Vogue) 출신의 에디터로 차기 편집장 후보 겸 콘데나스트의 차기 예술 감독 후보로 꼽히던 재원 중의 재원이다.
4년 전 딸이 소아백혈병에 걸리자 악명 높은 미국의 병원비를 감당하지 못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선택은 실수였다.
급히 딸을 입원시켜놓고 일자리를 찾았지만 정작 한국에서는 그녀를 받아주는 곳이 없었으니까.
한국도 패션 잡지 쪽은 사양산업인 탓이었다.
거기다 기존의 에디터들은 해외에서 잘 나가던 재원이 경쟁자로 들어오는 걸 꺼렸고.
결국 그녀는 제대로 된 일을 찾지 못했고 지금은 딸을 간호하는 데 집중하는 상태였다.
그리고 현재 같은 업계에서 일하던 남편이 동대문 의류 상가에서 일하며 돈을 버는 거로 생활 중이었다.
그런 사정을 들려주자 도란희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보그니 콘데나스트니 하는 걸 보니 엄청 대단하신 분인 건 알겠는데······ 그래도 패션지 에디터 출신은 좀 아닌 거 아니에요?”
“그게 왜?”
“왜긴요. 현장 일을 해본 경험이 없잖아요.”
그거야말로 모르는 소리였다.
앞으로 1년 후.
돈이 없어 수술도 못 받고 허무하게 딸을 잃은 이미리를 김동수가 스카우트한다.
그리고 일에 미친 그녀는 단숨에 한국 최고의 스타일리스트가 된다.
그러니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슈퍼 스타일리스트 이미리.
그리고 온리 원(Only One)으로도 불리는 그녀가 바로 내가 영입할 사람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