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1화
171. 승승장구 1
[<파란 하늘> 시청률 28.5%로 대미(大尾)!]
[흥행성에 완성도를 더하다. 작가 김솔잎과의 대담.]
[주영인과 정유진. 올 상반기를 뜨겁게 달군 두 여배우를 만나다.]
파란만장했던 <파란 하늘>이 드디어 끝났다.
<파란 하늘>의 최종화에서 주영인이 주인공으로 결혼을 하지만 제일 마지막 씬은 유진이가 부케를 받는 씬.
드라마에 화룡점정을 찍은 장면 덕에 현재 실검 1위는 우습게도 <파란 하늘> 시즌 2였다.
심지어 <파란 하늘> 시즌 2에서는 유진이를 주인공으로 해달라는 요구도 쏟아지고 있었고.
그 덕분에 배우 2실의 회의실을 차지한 나와 팀원들은 물밀 듯 밀려오는 광고 제안을 처리하느라 눈코 뜰 새 없었다.
“예. 예. 아 ABS 마트요? 아 죄송합니다. 유진 씨가 신발은 휠리스와 독점 계약이 되어 있어서요.”
“죄송합니다. 유진 씨가 의류는 LM 의류랑 독점이 되어 있습니다.”
“해피 제과의 만루홈런볼이요? 1년에 5천이요? 흐음. 일단 상의 후 회신 드리겠습니다. 담당자분 연락처 좀 찍어주세요.”
우리 팀 매니저들이 전원 투입되었고 폰은 과열로 터져나갈 지경이다.
그런데 도통 끊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영진이 진땀을 닦으며 외쳤다.
“팀장님! 광고비 하한선이라도 잡아주십시오!”
홍보팀 김미혜 대리도 뒤이어 말했다.
“이러다가는 업무 마비될 거 같아요. 지금 각 방송국에서도 출연 제의를 해오는데 광고 문의를 처리하느라 대응을 못 하겠어요.”
본래 광고는 실장급이 처리한다.
하지만 ‘정 팀’의 경우에는 내게 모든 권한이 일임되어 있다.
그게 강지영 본부장에게 받아낸 또 다른 조건 중 하나였으니까.
잠깐 고민하던 난 직원들에게 벨 소리를 묵음으로 돌리라고 지시했다.
잠시 후.
회의실이 조용해지자 곧바로 이영진에게 물었다.
“영진 씨. 현재 받은 광고 중에서 가장 높은 금액의 광고가 뭡니까?”
이영진이 적어놓은 파일을 뒤져보다 반색하며 말한다.
“칠성 전자가 세탁기와 건조기 세트 광고 문의를 해왔습니다. 유진 씨와 미소가 함께 출연하는 조건입니다. 가족적인 컨셉이라 부담도 없고요.”
“광고 금액은 얼만가요?”
“3억입니다.”
“기간은요?”
“1년요.”
“혹시 경쟁사인 LZ 전자는 연락이 없었습니까?”
“LZ 전자는 냉장고에 3억 2천입니다. 역시나 유진 씨와 미소의 동반 출연을 요구하고 있고요. 기간은 1년이고요.”
한국 최고의 전자 회사 두 군데에서 연락이 왔다는 말에 웅성대는 소란이 커졌다.
두 회사에서 광고하는 것만으로도 배우의 평가가 달라졌다는 걸 의미했으니까.
하지만 만족스럽지가 않았다.
“팀장님! 표정이 왜 그러세요? 안 기쁘세요? 칠성 전자랑 LZ 전자잖아요.”
도란희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짜네요.”
“예?”
“광고비가 짜요.”
“예? 3억2천이요?”
“둘이 합쳐서잖아요.”
“아!”
“미소도 엄연히 우리 팀 배우란 걸 잊지 마세요. 둘 다 따로 광고비를 측정해야 합니다.”
“죄송해요. 팀장님.”
“아닙니다. 일단 유진 씨 몸값부터 정하죠.”
우선 유진이의 CF 광고 단가를 정하기 위해 김미혜 대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김 대리님. 작년 주영인 씨 몸값이 얼마였죠?”
“동종 제품 광고를 안 하는 조건으로 4억이었습니다.”
“김 대리님 생각에 지금 유진이가 주영인 씨보다 인지도가 떨어진다 생각하시나요?”
김미혜 대리가 고개를 젓는다.
“아니요. 어제 끝난 파란 하늘에서도 유진 씨가 주인공 같았잖아요.”
“그렇다면 다시 묻죠. 현시점에서 유진 씨의 몸값은 얼마가 되어야 할 것 같습니까?”
연말부터 화제의 중심에 선 탓에 지금 유진이의 인지도는 말 그대로 정상급이다.
가끔 배우를 관리하다 보면 한 번씩 이런 시기가 온다.
사람은 하나지만 원하는 이는 많은 시기.
배우의 몸값은 이럴 때 과감하게 몸값을 올려야 했다.
주춤대던 김미혜 대리가 눈을 딱 감고 외쳤다.
“작년에 주영인 씨는 4억부터 시작했습니다. 올 한해 유진 씨의 인지도를 생각하면 신인이라고 하더라도 같은 금액에서 시작하면 될 것 같습니다.”
유진이의 6개월간 인지도가 드라마 한편으로 주영인의 수년간의 노력을 단번에 따라잡아 버렸다.
난 팀원들을 보며 환한 미소를 질렀다.
“자. 이런데도 둘이 합쳐 3억2천인가요?”
이제 입사 2년 차가 된 이영진이나 도란희가 겪기엔 조금은 이른 상황이었다.
하지만 총명한 두 사람이었기에 금세 각자의 의견을 제시했다.
“아뇨. 유진 씨와 미소의 광고비는 각각 4억이랑 5천. 합해서 4억 5천은 불러야겠네요.”
이영진의 말에 도란희가 고개를 젓는다.
“영진 오빠. 체리블라썸 카피 동영상 1위가 미소 때문인 거 몰라요? 유진 씨가 4억이면 미소는 최소 1억은 더해서 5억을 불러야죠! 설마 지금 미소 무시하는 거예요?”
잠깐.
미소를 무시해?
이영진을 슬쩍 째려보자 이미 이영진은 눈치를 채고 내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내가 미소를 얼마나 아끼는지 알고 있으니까.
“내 내가 왜 미소를 무시해! 란희 너 내가 팀장님한테 쪼이는 걸 보고 싶어서 그러지? 응?”
이영진의 항변에 도란희가 혀를 배에 내민다.
도란희는 미소가 카피 영상에서 압도적인 귀여움으로 인지도를 계속 늘려가는 중이라 주장했다.
현재 9주 연속 1위를 코앞에 둔 체리블라썸의 공식 동영상의 조회수는 1532만.
그리고 유진이와 미소가 함께 춘 카피 영상은 1117만이었으니까.
“금액 자체는 란희 씨보다 영진 씨가 제시한 금액이 타당하네요.”
미소가 아무리 인지도가 있다고 해도 아직은 광고비로 1억 이상은 무리였다.
아직 제대로 된 활동을 하는 아역이 아니었으니까.
그때였다.
양소리 대리가 뜬금없는 질문을 던져왔다.
“근데 그 카피 영상에 우리 팀장님도 나왔잖아요. 팀장님 앞으로도 광고 들어왔는데 팀장님은 생각 없으세요?”
“제 앞으로 광고가 들어왔다고요?”
“예.”
이영진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묻는다.
“어디서? 어디서 광고가 들어왔어요?”
“아. 그게요······”
내 눈치를 힐끔 쳐다보던 양소리 대리가 조심스레 말한다.
“그게 저 ‘봉봉 레깅스’에서 1년에 2천만 원을 주겠다고······”
“풉!”
“큭!”
이영진과 도란희가 연달아 웃음을 터트렸다.
알록달록한 에어로빅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가장 유사한 레깅스 생산업체에서 연락이 왔단다.
심지어 은지유 대리도 쿡쿡대며 웃고 있었다.
‘봉봉 레깅스라니.’
꿈에서도 나올 것 같은 이름이다.
난 발갛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손 부채질로 식히며 고개를 저었다.
“흠흠. 전 광고 안 나갑니다. 제 앞으로 들어오는 건 얼마가 되었든 끊으세요.”
“예. 알겠어요. 킥.”
양소리 대리가 웃으며 알겠다고 말하자 도란희가 눈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근데 양 대리님. 왜 우리 팀장님을 모델로 삼으려고 했대요? 잘생겨서? 옷빨이 잘 받아서?”
“란희 씨. 굳이 그걸 물어볼 필요가······”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다.
그 말은 도란희에게도 통용되는 말이었다.
“엉덩이가 탱탱하셔서 마음에 쏙 들었대요.”
에어로빅 레깅스를 입은 도드라진 엉덩이가 눈에 띄었단다.
“푸하하하.”
“크이이익.”
“푸훕.”
양소리 대리의 발언에 다시 한번 온갖 웃음이 터지고 있었다.
쪽팔렸다.
아마도 내 인생에 다시는 에어로빅복을 입는 일이 없을 것 같다.
한참을 웃고 있는 직원들을 향해 헛기침을 내뱉었다.
“크흠!”
눈물을 찍어내던 직원들이 가까스로 웃음을 그쳤다.
“일단 칠성이랑 LZ 두 업체에 유진 씨 몸값은 4억 미소 몸값은 5천이라고 공식 답변하세요. 그리고 한 가지 유념할 건. 두 회사 모두에게 상대편에서 제안이 왔다는 사실을 주지시키세요. 컨셉도 비슷하고 유진이뿐 아니라 미소도 필요로 하는 것까지요.”
“예! 팀장님.”
힘차게 대꾸한 이영진이 칠성 전자와 LZ 전자에게 각각 공식적인 제안을 걸었다.
배우의 급은 이렇게 매니저가 정하는 법.
다만 연락이 올 때까지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양 회사 모두가 정한 등급보다 한 단계 더 높은 금액을 불렀으니까.
* * *
“예. 예. 그렇게 하시죠. 감사합니다. 실장님.”
칠성 전자의 홍보실장 이요준 실장과의 통화를 끝냈다.
회의실에 있는 공용 전화기의 수화기를 내려놓는 순간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5억!”
LZ 전자와 칠성 전자 간에 몇 번의 핑퐁 게임 끝에 유진이가 4억5천 미소가 5천의 몸값에 맞춰 최종 광고 금액이 정해졌다.
순간 회의실에 모여있던 직원들이 환호를 내질렀다.
설마 이렇게 광고비가 뛸 줄 생각지도 못했다는 표정으로.
하지만 나 역시 솔직히 놀라웠다.
단번에 이렇게 광고비가 뛰다니.
“대~~박!”
“팀장님! 이거 꿈 아니죠?”
이영진의 말에 도란희가 콧대를 높인다.
“오빠. 내가 뭐랬어? 5억이라고 했잖아!”
“그래. 인정! 완전 인정!”
중간 과정은 완전히 다르지만 어쨌든 결과는 도란희가 말한 대로 되었다.
왁자지껄 소란스러운 가운데 은지유 대리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팀장님. 아까 광고비 제안에 하한선을 정하신다고 하셨잖아요. 그건 어떻게······”
“이미지 소모를 줄이기 위해 1년 2억 언더는 모두 취소하세요.”
“예 팀장님.”
지시를 마친 난 김미혜 대리에게 한 가지 지시를 더 말했다.
“김 대리님. 광고 계약서 쓰고 나면 각 신문사에 보도자료로 슬쩍 뿌리세요.”
“신문사에요?”
“예. 유진이와 미소의 몸값이 얼마인지 기사 뜨면 알아서 얼토당토않은 금액의 광고 문의는 알아서 줄어들 겁니다. PD들도 출연료 연락해 올 거고요.”
김미혜 대리가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유진이가 사 준 값비싼 정장을 입을 자격이 되는 것만 같다.
* * *
[칠성 전자 신형 세탁기 건조기 광고 모델 정유진. 정미소와 동반 출연으로 5억!]
기사가 나간 즉시 반응이 나타났다.
광고 금액이 낮은 광고들은 연락이 뜸해졌고 PD들은 출연료 인상을 외치기 시작했다.
[SBC 최태응 PD : 정 팀장. 출연료 재조정해서 연락 줄게.]
[MBS 이만태 PD : 우리 사정 좀 봐주라. 응? 우리 제작비가 편당 1억이 안 돼요. 그걸로 로케부터 고정이랑 게스트 10명 출연료에 이것저것 하면 500만 원이 한계라고.]
[KNET 양승오 PD : 정 팀장님. 우린 650만 원까지는 가능합니다. 관심 있으면 연락 줘요.]
드라마 출연료의 기준이 천만 원으로 올랐지만 그간 예능 출연료는 100만에서 200만을 오갔었다.
하지만 기사가 나가자 여기저기서 금액을 올려주겠노라는 제안을 해왔다.
이 정도 출연료라면 이젠 예능 출연을 생각해봐도 되겠다 싶다.
고정 예능 하나 잡으면 국민 배우 되는 길이 확 빨라질 테니까.
지하주차장에 차를 댄 뒤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출근하는 배우 1실과 홍보팀 직원들이 다가와 친한 척을 해 왔다.
“정 팀장. 또 한 건 했다며?”
“운이 좋았습니다.”
“그게 어디 운으로 돼? 하여간 대단해. 팀장 달자마자 대형 광고도 따내고.”
“하여간 될 놈은 뭘 해도 된다니까.”
“아 그리고 올해부터 일반 매니저들도 수익 배분을 받을 수 있게 개정된 거 다들 알지?”
“알지. 덕분에 마누라 앞에서 체면이 좀 섰는데.”
“그 일이 사실은 정 팀장이 적극적으로 건의해서 이루어진 거라고 본부장님이 말씀하시더라고.”
“그랬었어?”
“난 그것도 모르고. 이야 이거. 우리가 정 팀장한테 한턱내야 하는 건가? 하하하.”
강지영 본부장은 수익 분배가 마치 내 건의인 듯 직원들에게 알렸다.
그리고 자신은 살짝 숟가락만 얹었다고.
덕분에 나에 대한 시기와 질투가 줄어들고 있었다.
물론 배우 3실과 가수 1실의 매니저들은 그러든 말든 적개심을 드러냈지만.
“말이야 누군들 못해?”
“거 주주분들이 결정하신 걸 엉뚱한 인간이 생색내네.”
퉁명스럽게 말하는 배우 3실 매니저들 탓에 분위기가 싸해졌다.
그런데 그때 주차장에 차를 댄 주영훈 팀장이 날 발견하고 다가왔다.
“정 팀장. 그동안은 몸이 근질거려서 어떻게 참았어? 응?”
“그러게 말입니다.”
“잘했어. 칠성 전자 백색가전 쪽을 잡았으니까 다음에는 칠성 전자 스마트폰이랑 아파트랑 화장품도 잡아보라고!”
배우 3실 매니저들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주영훈 팀장이 배우 3실 매니저들이 있든 말든 큰소리로 외친 까닭이다.
엘리베이터에 올라 각자 층에 내리는 동안 다들 아무 말이 없었다.
띵.
배우 2실이 있는 4층에 내리자마자 주영훈 팀장이 너털웃음을 터트린다.
“으하하. 너도 3실 놈들 표정 봤지? 속이 다 시원하네.”
“팀장님도 참. 괜히 도발해서 한바탕 난리라도 나면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셨어요?”
“나면 나는 거지. 뭘 걱정해? 그동안 저 자식들이 우리가 돈 못 벌어 온다고 뒷담화를 얼마나 깐 줄이나 알아? 하여간 잘했어 진짜!”
주영훈 팀장과 인사한 뒤 내 자리에 도착했다.
“팀장님. 좋은 아침.”
먼저 와 있던 도란희가 파티션 너머로 인사를 해 왔다.
“일찍 왔네.”
“예. 그리고 시키신 대로 출근하자마자 지하실 내려가서 도시락 배달했어요.”
“밥 먹이는 거 잊지 마. 안 그러면 걔들 다 굶어 죽을걸?”
“삼시 세끼 꼭꼭 챙겨 먹이고 있어요. 밥 빵 면 고기 야채 민트 초코 골고루.”
뭔가 사람이 먹지 말아야 할 게 하나 끼어있는 거 같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대화를 나누던 도란희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다.
“근데요 팀장님.”
“응?”
“지금 입으신 거. 혹시 여자한테 선물 받으신······ 읍읍읍.”
순간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도란희의 입을 막아 버렸다.
덕분에 상황이 묘하게 꼬여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