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화
17. 떡밥을 뿌리다
연기를 마치고 나온 두 사람을 본 이지연 작가가 환히 웃으며 두 사람을 칭찬했다.
“수고했어. 은영. 유진. 연기 많이 좋아졌더라.”
“감사합니다. 작가님.”
“아냐. 유진이 잘해서 참 보기 좋아. 내가 달려온 보람이 있어.”
아이처럼 활짝 웃는 이지연 작가의 모습은 처음 본 것 같다.
그때였다.
주차장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작가니임!”
시간을 보니 9분 58초.
아직 10분이 되기 전이다.
김명학 CP가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곁에는 드라마국의 PD들을 데리고.
그리고 그 순간.
기다렸던 V10 다이어리의 일정이 삭제되고 있었다.
[에브리데이 V10]
[날짜 : 2019년 12월 24일]
-PM 10:00 <일정 삭제>
(삭제된 일정 : <아침이 간다> 22화 모니터링. 시청률 19.5%)
드디어 변하지 않던 시청률에 변화가 생겼다.
그런데 변한 건 그뿐이 아니었다.
23화와 24화에 시청률을 적어둔 일정도 삭제되고 있었다.
됐다.
이젠 진짜로 안심이다.
숨을 헐떡이는 김명학 CP는 이지연 작가를 보며 말했다.
“헉헉헉. 자 작가님! 약속대로 10분 만에 왔습니다. 끄어억. 콜록. 콜록.”
죽을힘을 내어 달려왔는지 김명학 CP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왜 이리 빨리 왔어?”
“자 작가님이 기다리신다 생각하니 발이 막 저절로 움직이더라고요. 헉헉헉.”
올해 딱 45살을 찍은 김명학 CP는 숨이 넘어가기 직전의 모습으로 이지연 작가 앞에 섰다.
“오면서 사정 들었지?”
“아 예. 그 그게. 예.”
중간에 스태프들 몇 명이 빠져나가 상황 보고를 했을 거라 눈치챈 이지연 작가다.
“명학~. 어쩔 거야?”
이지연 작가의 재촉에 김명학 총괄 CP는 박두식 PD를 째려보며 이를 아득바득 갈았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싹 정리하겠습니다. 후우~ 후우~”
숨을 몰아쉰 김명학 CP가 박두식을 노려보며 살벌하게 말했다.
“두식이.”
“예?”
“너 현장에서 손 떼라.”
김명학 CP의 얼굴은 흉신악살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험악했다.
“CP님. 그건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박두식 PD는 회사 쪽 인물인 김명학 CP가 자기편을 들지 않자 억울한 표정이다.
하지만 그건 박두식 PD의 착각.
PD는 대체가 가능하지만 이지연 작가 수준의 S급 작가는 대체 불가능이다.
거기다 이번 일로 이지연 작가가 다른 방송국으로 넘어가기라도 하면 김명학 CP의 출세 가도도 막힐 게 뻔했다.
특히 원고료를 2배까지 올려 부른 이지연 작가의 제안을 무마하려면 이 정도는 해 줘야 했다.
“박두식. 너 상황 파악 못 하지? 당장 본사로 안 돌아가?”
김명학 CP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토로한 뒤 함께 온 PD를 불렀다.
“태식아. 현장 바로 이어서 진행할 수 있지?”
“예. 현장을 잘 아는 AD 몇 명만 붙여 주시면 하겠습니다.”
함께 온 장태식 PD는 여전히 숨이 잘 안 쉬어지는지 가슴을 두드리며 답했다.
김명학 CP는 고개를 끄덕이곤 얼어붙어 있는 스태프들 몇몇을 향해 손짓했다.
“최송현 김성운 너희 두 사람. 둘이 커버 가능하지?”
“그 그게······”
“가능해? 안 해?”
“가능합니다!”
얼떨결에 지목당한 최송현 AD와 김성운 AD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인 김명학 총괄 CP가 박두식을 향해 다시 말했다.
“두식이. 지금 회사로 안 돌아가면 이쯤에서 안 끝난다. 어쩔래?”
“CP님 아니 선배님! 이럴 때일수록 회사가 제 편을 들어 주셔야······”
“야 박두식. 네 멋대로 현장에서 사고 치고 이럴 때만 회사를 찾냐? 당장 국장님에게 연락 드릴까? 어?”
MBS 드라마 국장의 이름은 김격식.
아주 격식 좋아하는 양반인데 그 양반이 끼어들면 좋게 덮을 수 있는 일도 엉망이 된다.
일벌백계를 너무 좋아하는 사람이거든.
“제기랄.”
얼굴을 붉으락푸르락 대던 박두식 PD는 대본을 땅바닥에 던지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파라락.
대본 책의 실밥이 풀려 A4 크기의 대본 페이지들이 산산이 흩어졌다.
흙바닥에 나뒹구는 대본들을 본 이지연 작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곁에 있던 보조 작가 김솔잎 작가의 얼굴도 발갛게 달아올랐다.
끝났다.
드라마 작가에게 자식과도 같은 작품의 대본을 내던진 걸 봤으니 앞으로 저 PD는 드라마국에서 활동하긴 틀렸다.
작가들이 저 인간에겐 작품을 주지 않을 테니까.
“저 저게! 시청률 잘 나온 게 지 덕인 줄 아나?”
김명학 CP가 이지연 작가의 눈치를 보며 화를 버럭 내었다.
놀란 AD들이 땅바닥에 떨어진 대본을 줍는 사이 김명학 CP가 이지연 작가에게 허리를 굽혔다.
“아이고~ 작가님.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저 새X. 본사 들어가면 제대로 조처하겠습니다!”
잠시 박두식 PD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지연 작가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명학. 생각해 보니 고료 올린다고 한 거 내가 꼭 갑질한 거 같지? 요즘 갑질 그거~ 말 많잖아. 그니까 그건 말한 적 없는 거로 해도 괜찮겠어?”
이지연 작가의 푸념에 김명학 CP는 몇 번이고 허리를 굽신거렸다.
“아이고 작가님. 감사합니다.”
“그만해. 진짜 갑질하려고 한 건 아니니까. 그리고······”
“그리고······?”
이지연 작가의 말에 김명학 CP가 굽히던 허리를 멈추고 귀를 쫑긋 세웠다.
“여주랑 새로 넣은 애의 케미가 완전 좋아. 그래서 2화 정도 더 써 주려는 데 어때?”
“저 정말이십니까? 연장하자고 그렇게 부탁을 드려도 안 한다고 빼시더니.”
“싫음 말고~.”
“아닙니다. 작가님! 어떤 미친 아니 어떤 사람이 작가님 연장 대본을 마다하겠습니까? 저요? 전 아닙니다.”
김명학 총괄 CP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시청률 20%에 근접하는 드라마를 두 편이나 더 내보낼 수 있다는 건 MBS 방송국으로선 특혜나 마찬가지다.
“명학이 여기까지 달려왔으니 나도 체면을 살려 주려면 이 정돈 해 줘야지. 안 그래?”
“크! 역시 제 마음을 알아 주시는 분은 이 작가님뿐입니다. 딸랑딸랑!”
김명학 총괄 CP가 두 손을 귀 옆에 대고 종을 울리듯 흔들어댔다.
“명학~. 재미없어. 호호호. 그거 언제 적 유행어야~?”
재미없다는 것치곤 제대로 먹혔다.
“혹시 4화로 연장하시는 건······”
“셔러~업!”
“아니. 아닙니다. 2화! 2화면 충분하죠. 아 예. 하하하.”
와 그 와중에 더 찔러 보다니.
얼굴에 철판을 깐 김명학 CP가 아주 조금은 달리 보였다.
아니지 대단한 사람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저렇게까지 자신을 내려놓다니.
물론 이지연 작가가 웃으며 셔럽~이라 말하자 냉큼 후퇴했지만.
김명학 총괄 CP는 곧장 회사로 전화해 편성표를 수정하라고 고함을 쳐대기 시작했다.
* * *
“정 매니저님. 커피도 연락도 감사해요. 작가님이 꼭 인사하라고 말씀하셨어요.”
주변에 보는 눈이 많아 김솔잎 작가가 이지연 작가의 전언을 가지고 왔다.
보온병을 건네주던 김솔잎 작가는 주변을 한번 살피곤 속삭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그리고 유진 씨는 25화랑 26화에도 나올 거라고도 미리 이야기해 두시라고 하셨어요.”
유진이를 2화나 더 출연시켜 준다고?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았다.
그런데 이지연 작가의 선물은 하나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것도 받으세요.”
손바닥만 한 종이에 직접 쓴 듯한 글자가 적혀 있었다.
[이지연 작가]
[010-9XXX-1234]
“이지연 작가님 전화번호예요. 까톡도 이 번호로 추가해 두시면 돼요.”
이지연 작가는 아무에게나 명함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마음에 드는 배우가 생겼을 땐 종종 이런 행동을 하곤 했다.
차기작에 유진이를 꽂으려고 하는 건가?
하지만 이지연 작가의 차기작에는 문제가 있다.
정확히는 작품 자체의 문제가 아닌 외부적인 문제지만.
평소라면 이건 분명히 선물이지만 위험한 선물이다.
이지연 작가의 제안을 대놓고 거절해야 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일단은 기쁜 표정을 지으며 두 손으로 받아들었다.
“감사합니다. 김솔잎 작가님.”
김솔잎 작가는 머리를 넘기며 배시시 웃었다.
“아 근데 진짜 매번 볼 때마다 작가 작가 하니까 진짜 작가 된 거 같잖아요.”
“작가 맞으시잖아요.”
“아직 제 작품을 TV에 걸지도 못했는데요. 무슨 작가씩이나. 호호호.”
김솔잎 작가가 웃는 걸 본 나는 조금 과감한 선택을 내렸다.
내가 원하는 진짜 작품은 이지연 작가의 차기 작품이 아닌 김솔잎 작가의 데뷔작이니까.
주변을 살폈다.
유진이는 현재 촬영 중이고 오덕구 팀장은 통화 중이다.
아무도 듣지 않는다는 걸 확인한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김 작가님. 실은 작가님께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뭔데요? 말씀만 하세요.”
이지연 작가한테 할 부탁이라면 자기에게 말해도 된단다.
소문과 달리 의외로 따뜻하고 여린 분이라며 자기 말은 잘 들어준다면서.
“그것보단 김 작가님의 데뷔작에 우리 유진이를 꼭 좀 써주셨으면 합니다.”
“예? 이지연 작가님 차기작이 아니라······ 제 데뷔작에요? 뭐 잘못 부탁하신 거 아녜요?”
김솔잎 작가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닙니다.”
드라마 작가를 준비 중인 사람은 1만 명이 넘는다.
그중에서 실제 자기가 쓴 대본이 드라마화되고 방송되는 단계까지 가 본 사람은 대략 100명 미만.
네임드라는 대작가 반열에 오르는 사람은 열 손가락에 꼽히고.
대학 입시와도 비교되지 않는 확률을 뚫고 살아남은 작가들이 흔히 말하는 자극적이고 통속적인 드라마를 쓰는 작가들이다.
하지만 김솔잎 작가는 그중에서도 특별했다.
치밀하고 짜임새 있는 구성과 센스 있는 대사로 시청률과 평단의 호평을 함께 잡는 몇 안 되는 작가가 되니까.
“표정을 보니 진심이신가 보군요.”
“예. 진심입니다.”
김솔잎 작가가 다시 내 표정을 살폈다.
“휴우. 매니저님. 드라마라는 게 대본도 나와야 하지 투자자도 있어야 하지 편성도 받아야 하지. 제 첫 대본이 나온다고 해도 그때쯤 되면 정 매니저님도 절 잊으실 것 같은데요?”
아니.
김솔잎 작가의 대본은 이미 준비되어 있고 드라마화는 곧 이뤄진다.
며칠 이내로 4월로 편성된 SBC <최강의 아내> 제작 일정이 펑크 나면서 이지연 작가가 적극적으로 김솔잎 작가의 데뷔를 돕고 나서니까.
투자자가 몰리고 이지연 작가가 자기 이름을 팔아서 김솔잎을 띄워주니 물 흐르듯 제작까지 연결 될 거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김솔잎 작가는 혼잣말로 투덜거렸다.
“제가 어떤 글을 쓰시는지도 모르시면서······”
‘아. 그거였어?’
작가로서 에고가 있는 모든 이들은 자기 작품을 알아봐 주길 바란다.
하지만 대본도 없는 상태에서 이런 부탁을 한 게 아무 생각 없이 들이댄다는 오해를 샀다.
회귀 전 <파란 하늘>을 세 번이나 봤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랬다간 미쳤다고 하겠지?
대신.
지금 이 순간 나와 그녀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좋은 사람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순간 웃고 있던 김솔잎의 얼굴이 어색하게 변했다.
<좋은 사람>은 김솔잎 작가가 ‘파랑새’라는 필명으로 드라마 작가 지망생들 카페인 ‘드작’에 올린 습작이니까.
김솔잎 작가는 어색한 미소로 내 눈길을 외면했다.
“그 그게 뭔가요? 호호. 저 별로 좋은 사람이 아니······”
“파랑새님 이러시면 곤란······ 읍읍.”
김솔잎 작가가 번개처럼 내 입을 가로막았다.
작가 지망생들 사이에서는 꽤 유명했지만 본인은 부끄럽다고 했었지 아마.
“설마 매니저님도 드작에 가입해 있었어요?”
입이 막혀 있어 대답할 수가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 죄 죄송해요. 대신 절대로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김솔잎 작가가 남은 손가락을 입에 대며 간절히 부탁한다.
고개를 다시 한번 끄덕끄덕.
그제야 풀려날 수 있었다.
“헉헉. 죽는 줄 알았습니다.”
“하여간 너스레는······”
28살의 김솔잎 작가가 얼굴에 손부채를 부치며 당황스러워하더니 이내 피식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꽤 귀여운 사람이다.
“도대체 파랑새가 내 필명인 거 어떻게 알았어요? 말 안 해 주면 나 진짜 궁금해서 잠도 못 잘 거 같은데.”
“말씀드리는 대신에······ 유진이 오디션 잘 볼 수 있게 힘 좀 써주십시오.”
“캐스팅은 제작사가 관리하는 거 아시면서 그러신다.”
“그거 말고요. ‘작가 추천’이란 게 있잖습니까? 김 작가님이면 두 자리 정도는 가능하실 거 같은데요?”
그 순간 김솔잎 작가가 날 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