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62화
162. 박은성 2
호텔에서 자고 난 다음 날.
혼자 돌아가기 불안하다며 우리 집 앞까지 따라온 박은성은 결국 두 손을 들었다.
“전 이제 현장에 나가봐야 합니다. 소속사 재계약 문제는 잘 풀리셨으면 하네요. 그럼 다음에 또 뵙죠.”
축객령을 내린 순간 박은성이 내 팔을 붙잡았다.
“자 잠깐만. 잠깐만요! 그러지 말고 나와 이야기 좀 해요!”
슬슬 넘어온다.
오늘 당장이라도 스케줄은 해야 하는데 믿을 사람이 없을 테니까.
어려서 연예인이 된 사람 중 지하철도 혼자 못 타고 가게에 가서 물건을 못 살 정도로 사회에 서툰 이들이 있는데 박은성이 바로 그런 부류다.
어려서는 엄마가 커서는 매니저가 모든 걸 해 줬으니 혼자서 어떻게 해야 할지 그저 막막하기만 할 터.
하지만 여기서는 한 번 더 튕겨줘야지.
“어제 박은성 씨를 쫓던 사람들 아무리 봐도 조폭들 같던데요. 그런 일에는 더 깊이 엮이고 싶지 않습니다.”
박은성이 정색하며 외쳤다.
“정 대리. 나랑 계약합시다. 조건이 뭐든 간에 그쪽이 부르는 대로 할 테니까. 나 이런 부탁 잘 안 하는 사람인데 제발 사람 하나 살리는 셈 치고 좀 도와줘요!”
탑스타의 자존심이 완전히 꺾였다.
이제는 받아들여야 했다.
더는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가는 될 대로 되라며 나가버릴 수도 있으니까.
“나중에라도 딴소리하시기 없습니다?”
박은성이 고개를 끄덕인다.
“당연한 소리.”
“그 생각 변치 않으시길 바랍니다.”
“절대! 절대로 안 변한다니까요? 내가 원해서 계약을 강행했다고 서류로 남겨달라고 해도 해줄 테니. 제발······ 블루 엔터에서 나오게만 해달라고!”
성공이다.
난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미리 생각했던 계획을 지시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일단 오늘 스케줄은 모조리 펑크 내도록 하죠.”
“펑크요?”
데뷔한 이후 펑크를 한 번도 낸 적이 없는 박은성이다.
새로이 계약할 회사에서 처음으로 한 요구가 펑크라니 당황할 수밖에.
“아 그건 좀. 계약이 걸려 있는데······.”
“제가 하는 말은 다 듣기로 하셨죠?”
“그 그럼 위약금은 어떻게 하려고요?”
“그 문제라면 제가 깔끔하게 처리하겠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박은성이 결국엔 고개를 끄덕거렸다.
믿을 곳은 이제 우리 굴렁쇠 엔터뿐이었으니까.
박은성을 안심시키고는 곧장 회사로 전화를 걸었다.
이제 낚은 대어를 뜰채로 걷어 올릴 시간이다.
* * *
[(속보)인기 스타 박은성. 폭력배들에게 피습!]
[(단독)박은성 강북삼성병원 입원 중! 현재 의식 불명!]
김동수는 배우 3실의 신인 배우 우성찬의 신작 드라마를 고르다 속보로 뜬 연예 기사를 보고 피식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하여간 이 업계는 바람 잘 날이 없어. 그치?”
김동수의 곁에 앉은 주호성이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게 말입니다. 하지만 그래서 이 일이 재미있는 게 아닙니까?”
그때였다.
정윤호의 뒤를 캐보라고 보냈던 날새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김동수는 냉큼 날새의 전화를 받았다.
“나온 거라도 있어?”
-그 자식 고등학교 시절에 강한파라는 조직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은 적이 있어.
“확실해?”
-사진 한 장 보낼 테니까 받아 봐.
김동수의 폰으로 사진 한 장이 도착했다.
고깃집을 무대로 한 그 사진에는 수많은 깍두기 머리 사이에 인상을 찌푸린 정윤호가 보였다.
-단합대회 사진인데 오른쪽에 정윤호 그놈이 있어. 보이지?
“이게 가입 증거라고?”
-아니 가입한 건 지인이고 그놈은 가입은 안 했대.
김동수는 보육원 출신인 정윤호라면 분명 사고를 쳐도 몇 번은 쳤으리라 생각했었다.
그리고 만약 사고를 친 게 밝혀지면 그걸 빌미로 퇴사 시켜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정윤호는 국가대표를 꿈꾼 엘리트 체육 선수라 사고는커녕 운동만 하는 재미없는 생활을 살았다는 날새의 보고가 있었다.
심지어 조직 폭력배의 하부 조직 회식에서도 사진만 찍고 뛰쳐나와 버렸고.
“그러면 이 사진은 왜 보냈어? 이유 없이 보낸 건 아닐 거 아냐?”
전화기 너머에서 날새가 키득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사진에 있는 정윤호 바로 오른쪽에 있는 놈이 강은기라는 놈인데 같은 보육원 출신에 형제처럼 지냈어. 그런데 그 친구가 현재 강한 엔터라는 신생 회사의 이사라더라고.
“강한 엔터라고?”
-맞아. 오늘 뉴스에 난 박은성 알지?
“알지.”
-그 친구가 소속되어 있던 블루 엔터라는 회사가 있는데 그 회사를 인수한 게 강한 엔터야. 강은기는 그 강한 엔터에 이사고.
“그래서 뭘 어쩌라고? 그놈 친구가 엔터 회사 이사니까 잘 보이라고? 엉?”
-에이 그것 때문에 전화했겠어?
“그러면?”
-두 사람이 거의 형제처럼 지냈는데 지금은 얼굴도 안 볼 정도로 원수가 되었다고 하더라고.
순간 김동수의 얼굴에 이채가 흘렀다.
형제처럼 지내던 두 사람의 사이가 벌어졌다?
누구보다 서로의 비밀을 잘 아는 사이가 벌어졌다면 그 틈을 파고들어 정보를 캘 수 있겠다 싶었다.
특히나 강은기는 강한 엔터의 이사.
그렇다면 자신이 가진 패를 이용해 정윤호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들뜬 김동수가 날새에게 물었다.
“혹시 뭣 때문에 두 사람 사이가 벌어졌는지는 몰라?”
-그것까지는 못 캤어. 하여간 강은기라면 정윤호에 대해서 아무도 모르는 것도 알 수 있지 않을까?
“오케이. 그러면 강은기는 내가 만나 볼 테니까 그 인간 프로필부터 보내 봐.”
-안 그래도 메일로 보냈어. 확인해 봐.
“그래.”
전화를 끊자마자 김동수는 날새가 보낸 메일을 확인했다.
김동수는 강은기에 관한 정보를 순간 감탄사를 터트렸다.
“야 이 새X. 장난 아닌데? 경력 한번 살벌하네.”
그때였다.
벌컥 문이 열리더니 강명길 팀장이 뛰어 들어왔다.
“시 실장님! 배우 박은성이 저희 회사로 이적한답니다! 그것도 배우 2실로요!”
연이어 이어진 기분 나쁜 소식에 김동수가 벌컥 소리를 내질렀다.
“그건 또 무슨 개 같은 소리야? 지금 병원에 입원해 있다고 기사까지 떴는데?”
“진짭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항의하겠다고 블루 엔터의 이 대표와 강한 엔터의 강은기 이사가 회사로 찾아왔습니다.”
“강은기 이사?”
“예.”
기회가 저절로 굴러왔다.
정윤호의 친구 강은기 이사가 회사에 나타날 줄이야.
“주 팀장. 나 잠깐 나갔다 올게.”
“어디 가시게요?”
“강은기 보러!”
김동수는 부리나케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 * *
배우 2실의 회의실.
원탁형 테이블 맞은편에는 블루 엔터의 이영철 대표와 강한 엔터의 강은기 이사가 우릴 쳐다보고 있었다.
이영철 대표는 큰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는데 선글라스 밖으로 멍 자국이 보였다.
그리고 저 멍은 아마도 강은기가 만든 걸 거다.
‘오랜만이네. 강은기.’
강은기는 나와 동갑으로 보육원에서 형제처럼 자랐는데 10살 때 신내림을 받은 무당 엄마에 의해 보육원에 맡겨졌다.
엄마 밑에서 자라면 살을 맞는다나 어쨌다나.
나이가 같은 탓에 우리 둘은 한방을 쓰게 됐고 첫날부터 우린 주먹다짐을 벌였다.
이미 벌어진 일 이제부터 어떻게 살지 고민하라고 했을 뿐인데 말이다.
물론 가볍게 녀석의 주먹을 피한 다음 정신을 번쩍 차리게 해줬지만.
그렇게 1년이 지났을 무렵.
보육원 생활에 적응한 녀석은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동료 형제가 되었었다.
여름에 계곡으로 물놀이를 갔을 땐 계곡에 빠진 나를 목숨을 걸고 구해주기도 했었고.
하여간 그날부터 우린 의형제를 맺고서 날 늘 졸졸 따라다니는 3살 아래의 꼬맹이 이연실과 함께 진짜 가족이라도 된 것처럼 사이좋게 지냈었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들어간 이후 모든 게 바뀌었다.
권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국가대표를 지향하던 난 강은기와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
양아치들과 어울려 다니는 은기와 함께 다니다가는 코치의 눈 밖에 날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런데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강은기는 여러 이유로 국가대표 진출이 좌절되고 절망하던 날 기운 차리게 해준다며 고깃집으로 불렀다.
그 자리는 안산의 한 조직 폭력배 사무실의 회식 자리였고 난 그곳에서 강한파의 중간 보스에게 스카우트를 받았다.
정신을 번뜩 차린 난 죄송하다고 말한 뒤 곧장 가게를 나섰다.
당시 뒤따라 나온 강은기가 날 붙잡고 말했었다.
-윤호야. 거지발싸개 같은 게 우리 인생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길 말고는 위로 올라갈 방법이 안 보이더라. 같이 하자. 너와 내가 함께 한다면 간부까지는 올라갈 수 있잖아. 우리 이제는 좀 떵떵거리고 살아보자 응?
하지만 난 강은기를 등지고 자리를 떠버렸다.
그리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서울로 향했다.
어차피 보육원을 나와야 할 나이도 되었고 그대로 있다간 나 역시 그 세계로 들어갈 것 같았으니까.
그 뒤로도 가끔 강은기가 날 찾아왔었다.
내가 사는 고시원에서 자고 가기도 했었고.
그때만 해도 친구임은 변함이 없었지만 5년 전 ‘그날의 일’ 이후로는 난 그를 더는 친구로도 생각하지 않았다.
강은기는 여전히 날 친구로 생각하는 듯하지만 말이다.
“오래간만이다. 윤호야.”
강은기가 날 아는 척하자 우리 일행들은 영문을 몰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 팀장이 강 이사님과 안면이 있었나?”
구성철 실장의 질문에 강은기가 대신 답했다.
“어릴 때부터 친굽니다.”
하지만 난 곧장 강은기의 말을 반박했다.
“친구 아닙니다. 어지간하면 안 봤으면 하는 사이죠.”
“새끼. 까칠하게 굴기는. 그런데 네가 여기 얽혀 있을 줄은 여기 와서야 알았다. 알았으면 이런 식으로 찾아오진 않았을 건데.”
“관여?”
“왜 시치미를 떼지? 그날 벤츠. 너잖아.”
“글쎄.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강은기가 한숨을 푹 내쉰다.
“박은성이 탐나는 거는 나도 이해하는데 그렇다고 알짜배기를 쏙 빼가는 건 상도의가 아니지. 안 그래?”
조폭 그것도 경기권에서 손꼽는 폭력조직에서 회장의 측근까지 올라간 놈이 상도의를 따지다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아무튼 윤호 너랑은 다투기 싫으니까 이쯤에서 손 떼라. 대신 보상은 확실하게 해 줄게.”
그럴 수는 없었다.
내가 사인을 보내자 구성철 실장이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상도의니 보상이니 그런 소리를 하기 전에 이것부터 보시죠.”
[전속계약 해지 요청서]
서류를 본 강은기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구성철 실장은 우리 측에서 조사한 사실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사설 CCTV를 통해 박은성의 뒤를 쫓은 이들이 강한 엔터의 직원이라는 걸 밝혀냈다.
그리고 정보팀을 가동해 블루 엔터의 주식을 강한 엔터가 소유하고 있다는 증거도 찾아 놓았다고.
박은성의 뒤를 쫓던 놈들의 얼굴을 찍어 놓은 것도 증거 중 하나였고.
하나하나 나오는 증거에 블루 엔터의 이영철 대표가 큰소리를 질렀다.
“이 이건 사기야! 계약 위반이라고!”
“그래요? 박은성의 납치를 시도한 괴한들의 뒤에 강한 엔터와 블루 엔터가 있다고 밝혀져도 그딴 말이 통할 거 같습니까?”
이영철 대표의 입이 쏙 들어갔다.
곽무혁 법무팀장도 구성철 실장의 말을 거들며 서류 한 장을 더 내밀었다.
“박은성 씨는 블루 엔터가 자신과의 계약해지에 응하지 않을 경우 관련자 모두를 고소하시겠다는 의지를 밝혔습니다. 고소장은 여기 있습니다.”
강은기가 한숨을 내쉬며 이영철 대표를 불렀다.
“이 대표. 이 서류 제대로 된 거 맞습니까?”
“아 저······ 그 그게······”
“대답을 속 시원하게 못 하는 거 보니까 대충 알겠군요. 먼저 나가 계세요.”
“가 강 이사님! 저기 제가 좀 더 이야기를······”
“됐습니다. 상황 끝났으니까 먼저 회사로 돌아가서 대기하세요. 우린 나중에 이야기 좀 합시다.”
강은기의 눈이 마치 늑대의 그것처럼 번뜩였다.
녀석의 오른쪽 눈썹의 흉터가 꿈틀대는 걸 보니 엄청나게 화가 난 모양이다.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호흡을 고른 강은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일이 이렇게 된 거 구질구질하게 하지 말고 깔끔하게 갑시다.”
“어떻게 말입니까?”
“박은성은 넘겨 드리겠습니다. 대신 내일까지 기사는 다 내리세요. 앞으로도 우리 회사 이름은 절대 거론 안 되게 하고.”
생각한 대로 강은기의 강한 엔터는 언론에 나오는 걸 극도로 경계하고 있었다.
강한 엔터가 대형 조직 폭력배를 근간으로 한 회사라는 건 아직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모회사에 해당하는 강한파의 검은 자금을 세탁하기 위해 세운 강한 엔터의 입장에서는 언론의 주목을 받는 걸 피해야 했다.
나도 애당초 그걸 생각하고 일부러 협상 여지를 준 채 기사를 낸 거였다.
최소한 이 사건의 배후에 강한 엔터라는 신생 회사가 있다는 사실은 기자들에게도 알리지 않음으로써.
“알겠습니다. 깔끔하게 물러나 주신 데 대한 호의로 남은 계약기간인 3개월에 해당하는 수익은 그쪽 회사에 넘겨드리겠습니다. 서류 보내드릴 테니까 변호사에게 검토하시고 회신해 주세요.”
“오케이. 그렇게 하죠.”
강은기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변 사람들에게 말했다.
“저기 다들 자리 좀 비워주시겠습니까? 저는 제 친.구.랑 이야기를 좀 해야겠는데요?”
잠시 웅성대는 소란이 일 뿐 나가는 사람이 없었다.
그 순간 강은기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좋은 말로 할 때 다들 꺼지라고. 안 그러면 계약이고 나발이고 확 뒤엎어버릴 테니까.”
강은기의 돌발 발언에 분위기가 싸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