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60화
160. 하루하루 2
12화짜리 케이블 드라마인 <먹방의 대가>.
케이블 방송 TVM에서 평균 시청률 7%를 달성한 먹방 드라마로 동 시간대 케이블 시청률 1위를 달성한 작품이다.
당시 배우 3실에 소속된 19살 우성찬이 이 작품으로 한 방에 라이징 스타가 된다.
하지만 우성찬이 학폭 사건의 가해 당사자라는 게 밝혀지면서 3개월간의 짧은 전성기를 끝으로 연예계에서 퇴출당한다.
당시 피해자가 얼마나 한이 맺혔는지 청와대 게시판에 절절한 글을 올려 네티즌들을 충격에 빠트렸었다.
그리고 그때의 기록은 여전히 내 다이어리에 남아 있었고.
어쨌건 <먹방의 대가> 오디션 자격 요건에는 요리를 잘할 것이라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드라마와 동시에 <먹방의 테이블>이라는 요리 예능프로도 촬영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성찬은 부모님이 잠실에 유명한 한정식을 한 터라 그 기준에 부합했다.
그러나 하루라면 우성찬보다 더 잘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우성찬도 제법 잘생긴 편이지만 하루에 비하면 두 급수 정도는 떨어지니까.
당연히 요리실력도 더 좋고.
다음 달에 방송에 나갈 거라는 말에 한참이나 고민하던 하루가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형이 시키는 대로 할게요.”
굳게 앙다문 입을 보니 자기가 할 일이 생겼다는 게 동기부여가 된 모양이다.
“오케이. 나만 믿어.”
이제 하루의 키를 확인하는 문제만 남았다.
“하루야. 밥 다 먹었으면 옷부터 갈아입자. 설거지는 놔두고. 형이 나중에 할 테니까.”
밥을 먹자마자 설거지를 하려던 하루는 장갑을 낀 채 눈을 동그랗게 뜬다.
“어디 가는데요?”
“클리닉.”
“클리닉이요?”
“어. 너 몇 센티까지 클 수 있는지 확인하려고.”
김수명 원장의 수명 연장 클리닉은 성장 클리닉도 겸했기에 하루를 데리고 그의 병원으로 향했다.
* * *
회귀 전 하루의 키는 프로필 상 170cm 실제로는 168cm를 조금 넘었다.
하지만 검사한 순간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결과를 들을 수가 있었다.
“뭐 뭐라고요?”
“176cm에서 180cm까지 클 수도 있겠네요.”
김수명 원장은 평소처럼 무덤덤한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했다.
“그게 정말입니까?”
“성장판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엑스레이를 찍은 하루는 진료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고 혼자 결과를 듣는 중이다.
김수명 원장은 성장판을 찍은 엑스레이가 띄워진 화면을 수십 배 확대해서 본 후 최종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어처구니가 없어 재차 확인해 달라고 했지만 돌아온 답은 더욱 기가 막혔다.
“진~짜 노력하면 181cm까지도 가능하겠네요.”
“171cm가 아니라 181cm란 말씀이시죠?”
계속해서 되묻는 내 태도에 김수명 원장이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음식 섭취 잘하고 잠 잘 자면 제가 말씀드린 범위 안에는 무조건 들어갑니다.”
“그 그럼 밥을 잘 안 먹으면 어떻게 되나요?”
김수명 원장이 왜 그런 이상한 질문을 하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회귀 전.
하루는 워낙 잘 먹지 못해 키가 크지 않았다고 했다.
사정이 넉넉했더라면 고기도 먹고 우유도 많이 마셔 키가 컸을 거라고.
그래서 물었건만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 들려왔다.
“기아 수준의 영양결핍으로 오늘 내일 하면 또 모를까 먹는 건 키에 거의 영향을 못 미칩니다. 다 유전자에 각인된 대로 큽니다. 그래서 예상 편차치가 있는 거고요.”
대부분이 유전자 빨 이라고?
그렇다면 회귀 전에는 영양결핍에 걸릴 정도로 못 먹었던 건가?
괜히 하루의 아버지 이형문의 얼굴이 떠올라 짜증이 팍 하고 치솟았다.
그런데 일그러진 내 표정을 살피던 김수명 원장이 한 가지 경우를 더 말한다.
“혹시나 키가 안 클 때를 걱정하셔서 그러는 거라시면 안심하십시오. 가끔 성장판을 다치거나 하면 성장이 멈춰버리는 경우 말고는 그럴 일이 없으니까요.”
“사고로 성장이 멈춘다고요?”
회귀 전 하루는 교통사고를 겪은 적이 있다 했었다.
심부름을 가다가 후진하는 차에 가볍게 무릎을 부딪친 적이 있다고.
큰 사고는 아니었다고 했었는데 그런 사고로라도 성장판에 손상이 올 수 있다나.
그렇다고 하루 아버지 이형문에 대한 미움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 심부름이라는 건 분명 술 심부름이었을 테니까.
“일단 큰 문제는 없는 것 같으니까 안심하십시오. 일단 매달 검진을 받아보고 성장 호르몬 주사를 맞는 건 상황을 봐서 판단하시죠.”
“일단은 잘 먹고 잘 재우면 된다 이거죠?”
“그렇죠.”
과잉 진료는 하지 않는 김수명 원장이었기에 감사하다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 체리블라썸도 성장판 검사나 받아보게 할까?
세리는 언제나 자신의 키가 170cm까지 클 거라는 망상을 품고 살고 있었으니까.
“나중에 체리블라썸 멤버들도 성장판 검사 좀 부탁드립니다.”
파일 정리를 하던 김수명 원장이 고개를 저었다.
“굳이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저번에 오셨을 때 찍은 엑스레이를 보니 다들 성장판들이 닫혔더군요.”
순간 지금 물어봐 다행이다 싶었다.
혹여 세리가 들었다면 한 일주일 정도는 우울했을지도 모르니까.
“원장님. 세리한테는 말씀하지 마세요. 그 이야기 들으면 많이 실망할 겁니다.”
김수명 원장이 무덤덤한 태도로 해결책을 제시했다.
“환자에게 거짓말을 할 수 없으니 아예 검사를 안 받도록 매니저분께서 신경을 좀 더 쓰시는 게 어떻습니까?”
자기 일 아니라고 너무 편하게 말한다.
하여간 덕분에 신경 쓸 게 하나 더 생겨버렸다.
* * *
김수명 원장의 클리닉을 나오자 하루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내심 자신의 작은 키가 신경이 쓰였나 보다.
“다행이다. 그치?”
“네. 형.”
한층 밝아진 하루를 데리고 내친김에 천호동으로 향했다.
유진이한테도 내가 살 집이 근처라는 걸 말해주는 게 좋을 것 같아 부동산보다 유진이네 집을 먼저 들렀다.
정인지 주인아줌마가 우릴 환하게 반겼다.
“아이고. 사내가 뭐 이리 이쁘게 생겼누.”
하루가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숙였다.
이럴 때면 정말 세리 성격 딱 절반만 떼서 붙여주고 싶었다.
“저희 조만간 이 근처로 이사 올 거예요 아줌마.”
“잘됐네. 잘됐어. 이 동네도 살 만해.”
차를 타온 유진이가 들뜬 표정으로 물어왔다.
“언제요?”
“글쎄. 아직 부동산도 가기 전이라서 일정은 안 정했는데 일단 내 배우한테 보고부터 하려고 왔다.”
유진이가 만족했다는 듯 피식 웃는다.
“그 대답. 마음에 드는데요?”
100점 만점에 99점짜리 대답이었다는 유진이의 평가가 있었다.
그런데 미소가 내 바지를 잡아당겼다.
“미소야. 왜 그래?”
“삼촌. 우리 윗집에 오면 안 돼요?”
“윗집? 옥탑방?”
미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우리 윗집요.”
유진이네 집은 옥탑방까지 있는 3층 집이다.
말이 옥탑방이지 꽤 넓은 투룸에 평상을 놓을 마당까지 있었다.
지금은 돌아가신 유진이네 주인아줌마의 남편께서 그 아들의 아들까지 삼대가 모여 사는 걸 꿈꾸며 지은 집이었으니까.
다만 현재로는 3층이 거의 창고처럼 방치되어 있었다.
“삼촌이 이사 오면 매일매일 놀 수 있잖아요.”
미소가 큰 눈을 끔뻑이며 졸라대자 유진이가 나섰다.
“미소야. 안 돼. 여기 옥탑방은 안 쓴지 너무 오래되어서······”
그 순간 주인아줌마가 나섰다.
“아냐. 허름한 거야 얼른 사람 불러다 수리하면 되고 정 대리가 없을 땐 하루 밥도 내가 챙겨 주면 좋잖아.”
정인지 아줌마의 말과 동시에 유진이와 미소가 날 초롱초롱하게 쳐다본다.
혹여 하루가 불편해하지는 않을까 물어보려 했지만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어느새 미소와 친해진 하루가 미소 곁으로 다가가 나란히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으니까.
꼭 장화 신은 고양이 한 쌍이 날 쳐다보는 것 같다.
“여기서 살아도 괜찮아요?”
어 돼.
그냥 막 돼.
하루의 눈을 보니 그냥 막 빨려 들어간다.
묘빨남이라고 하더니.
예전엔 이상한 이름도 잘 가져다 붙인다며 비웃었지만 진짜 빨려 들어가는 것 같다.
“그러면 일단은 회사에 허락부터 받아볼게.”
회사에 전화로 사정을 말하자 잘됐다는 답변이 재깍 돌아왔다.
인테리어 경비는 회사 비용으로 처리하라는 대답과 함께.
덕분에 우린 천호동 유진이가 사는 집의 3층에 세를 드는 걸로 결정 났다.
“오케이. 허락 떨어졌다.”
전화를 끊은 순간 미소가 하루와 맞잡은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만세!”
두 사람의 환호에 기뻐하는 걸 보며 난 하루를 아줌마에게 맡겼다.
“그러면 아줌마. 오늘 하루만 하루 좀 부탁드릴게요.”
“무슨 일이라도 있어?”
“예. 오늘 좀 바빠서요.”
이제부터는 강지영 본부장에게 미리 약속했던 탑스타 박은성을 영입하는 작전을 펼쳐야 했다.
오늘 밤.
박은성은 ‘강한 엔터’라는 신생 엔터 업체에서 보낸 건달들에게 납치를 당한다.
강한 엔터는 박은성을 보고 소속사인 블루 엔터를 인수했는데 정작 박은성이 재계약을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납치를 당한 박은성은 무슨 협박을 들었는지 그대로 5년 재계약을 해버렸다.
덕분에 이날의 일은 기사에도 나지 않고 묻혀버렸다.
하지만 차후 박은성이 탑 엔터테인먼트로 이적해 이날의 일을 내게 털어놓았었다.
물론 자신이 잡혔던 장소와 시간도 함께 말이다.
* * *
탁탁탁.
잠실의 뒷골목.
골목길을 요리조리 피해서 달려가는 박은성은 숨이 턱에 걸려 있었다.
“헉헉헉. 빌어······먹을.”
3년을 함께 한 매니저가 조폭으로 보이는 자들과 수군거리는 걸 보고는 무작정 달렸다.
요즘 들어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받는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설마 탑스타인 자신에게 손을 댈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게 실수였다.
자신의 소속사도 관여되어 있을 줄이야.
박은성은 어두컴컴한 골목길을 요리조리 꺾어가며 큰 길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주변에 원룸들이 있었지만 소리를 쳐서 도와달라고도 할 수가 없다.
조폭에게 쫓기는 사진이라도 찍혔다간 자기 이미지는 나락으로 떨어질 테니까.
심지어 폰을 떨어뜨려 112에 신고할 수도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곳이 어릴 적 살았던 곳이라 지리에 익숙하다는 거였다.
숨이 턱까지 온 박은성이 마지막 골목길에 접어들었다.
‘50m만 더 가면 큰길. 큰길이 나온다.’
그때였다.
정장을 입은 남자가 큰길로 향하는 골목을 막아섰다.
“헉헉! 잠깐만! 큰형님 얼굴만 뵈면 된다니까! 더럽게 발은 빨라서는?”
30m 정도 떨어진 곳에서 정장의 남자가 앞을 가로막고 있다.
막히지 않은 길은 자신이 온 골목길과 삥 돌아가는 왼쪽 골목길뿐.
그런데 자신이 온 골목길에도 정장의 남자가 나타났다.
“거 뭔가 오해가 있는 거 같은데 일단 이야기만 좀 해 보자고.”
이제 남은 건 왼쪽 골목길.
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이긴 하지만 큰길까지 가기에는 삥 돌아가야 했다.
다리가 후들거려 포기할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때였다.
끼익.
박은성의 눈앞에 벤츠 승용차가 서더니 조수석이 활짝 열렸다.
“어서 타세요!”
“그쪽은······”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저것들은 따돌려야죠! 빨리!”
그 순간.
박은성은 떡대들의 고함을 뒤로한 채 벤츠에 올랐다.
* * *
박은성과 나는 <아침이 간다>를 찍으며 인사를 나눈 탓에 서로 안면이 있었다.
박은성은 유진이의 찰진 따귀를 맞고 멋진 리액션을 선보였고 촬영이 끝난 후 찾아와 유진이와 나와 인사를 나눴었으니까.
“헉헉. 어 어떻게······ 여기에 온 겁니까? 정 대리.”
나는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며 태연하게 뻥을 쳤다.
내 원룸이 잠실이었으니 완전히 틀린 말이 아니기도 했고.
“퇴근하다가 보니까 누가 떡대들에게 쫓기고 있더라고요.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아 그 그건 나중에 천천히 이야기합시다.”
박은성은 곤란한 듯 말을 흐리며 좌석에 몸을 기댔다.
“일단 물부터 드세요.”
미리 준비한 생수를 내밀자 놀란 박은성이 단숨에 벌컥벌컥 들이켰다.
잠시 후 진정한 박은성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지금 어디로 갑니까?”
납치를 당할 뻔한 탓인지 말투에 긴장이 묻어 나왔다.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지금 집으로 가실 형편은 아닌 것 같네요. 오늘은 호텔에서 보내시죠.”
“그러면 리치 호텔로 가주십시오. 거기가 제가 사용하는······”
“안 됩니다.”
“예?”
“박은성 씨 동선은 저 친구들도 다 알고 있을 겁니다. 그냥 인터콘티넨탈 호텔로 가시죠.”
박은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 말도 일리가 있네요.”
“그냥 편하게 오늘 하루만 매니저라고 생각하고 제게 맡겨주세요.”
“후우. 알겠습니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
박은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시트에 몸을 기대더니 이내 코를 골기 시작했다.
“어지간히 지쳤나 보네.”
그나저나 이 인간을 설득하는 것도 난관이다.
강한 엔터가 신경 쓰이지 않는 건 아니지만 막 출범할 무렵인 이 시기의 강한 엔터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오히려 문제는 박은성 본인에게 있었다.
그의 성격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