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9화
159. 하루하루 1
1년 차에 대리를 달고 2년 차에 팀장을 달게 되었다.
연차로 따져서 1년이지 사실상 4개월 만에 팀장을 단 셈이었다.
서예종 라인의 반발이 있을 게 뻔한데도 강지영 본부장의 태도는 자신만만하기만 했다.
“팀장 발령은 3일 뒤에 바로 낼 거니까 그렇게 아세요.”
“이기철 이사님 측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그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
구성철 실장도 평소와는 다른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격려했다.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쉽지는 않을 거다. 내가 지원은 최대한 해주겠지만 이제부터 네 책임하에 일이 돌아가야 할 테니······”
뒤이어 내가 맡을 ‘정 팀’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구 실장님이랑 이야기해봤는데 정 팀은 특별 운용을 해야 할 거예요.”
‘정 팀’은 배우와 가수 모두를 관리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단 체리블라썸은 현재의 한명호 팀장과 함께 공동으로 관리해야 했고.
부족한 경험으로 갑작스레 많은 직원과 배우들을 관리하게 된 내가 걱정스러웠는지 구성철 실장의 얼굴에 근심이 묻어 나왔다.
“할 수 있겠냐 윤호야?”
구성철 실장은 내가 얼마큼의 능력이 있는지를 모른다.
회귀 전 접대만 다니는 김동수를 대신해 탑 엔터테인먼트의 전 스타를 혼자서 관리하다시피 했던 게 나였다.
대리로 시작해 부사장에게 올라가기까지 그 와중에 일어난 내부의 권력투쟁 외부의 경쟁사들과 싸워나간 비화를 묶으면 책 10권은 너끈히 나오고도 남을 거고.
난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구성철 실장에게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실장님.”
강지영 본부장이 웃으며 구성철 실장을 타박했다.
“구 선배. 설마 윤호 씨 못 믿어요?”
“믿지. 자기 할 일은 똑 부러지게 하니까. 하지만 업무가 광범위하니 일을 하다 보면 실수가 나올 거고 그렇게 되면 꼬투리만 잡으려는 서예종 라인이 물어뜯으려 할 게 뻔하잖아.”
씩 하고 웃으며 구성철 실장에게 대꾸했다.
“물어 뜯어보라죠. 자기네 이빨만 나갈걸요?”
구성철 실장이 장난스럽게 주먹을 들어 올렸다.
“이 녀석아. 건성으로 듣지 말고.”
이크 하며 뒤로 물러났다.
피식 웃는 구성철 실장을 보니 역시나 사회생활은 리액션이 중요하다 싶다.
그 뒤로는 팀원 구성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현재 내가 관리하는 배우는 유진이와 미소 그리고 이태풍과 하루까지 총 4명이다.
현재 배우 매니저로는 이대호와 정상봉이 있었기에 대리급 한 명을 추가할 수 있게 되었다.
반면 가수 팀은 대리 한 명과 평직원 한 명을 아예 새롭게 뽑아야 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곧바로 가수 1실의 은지유 대리를 요청했다.
골든로드가 활동을 중단했으니 지금이 그녀를 빼 오기 딱 좋은 시기였으니까.
“은 대리를 저희 정 팀으로 불러오고 싶습니다.”
“은씨 성을 가진 대리라면 가수 1실에 있는 은지유 대리?”
“네.”
“그래요. 본인이 반대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발령조치 하죠.”
스타일리스트는 차후 따로 뽑기로 한 채 대략적인 인적 구성을 마무리 지었다.
“감사합니다. 본부장님.”
연이어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하루 숙소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굴렁쇠 엔터는 다른 대형 엔터 회사들처럼 지방에서 올라온 미성년자들에게는 숙소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법적 보호자 대행을 한다.
하루의 경우는 내가 후견인 역할을 해야 했기에 당연히 함께 살아야 했고.
“숙소는 유진이네 집 근처로 구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동 거리가 멀면 불편한 것도 불편한 거지만 스케줄 관리가 힘들어질 수 있을 것 같아서요.”
“하긴 그 동네가 싸니까 좀 더 큰 데 구할 수 있겠네.”
구성철 실장은 쓰리룸까지는 괜찮다며 내게 직접 방을 고르라 지시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본부장님. 곧 회사로 사과 박스가 들어올 건데 직원들 나눠주세요.”
“사과 박스요?”
“예. 세리 할아버지가 질 좋은 부사로 50박스 정도 보내 준다고 하시더라고요.”
강지영 본부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슨 사과를 50박스나······. 요즘 사과가 얼마나 비싼데 그 많은 걸 덜컥 받아요?”
“저도 사양을 했는데 도저히 말릴 틈도 없었습니다. 남아도는 게 사과더라고요.”
세리네 집안에서 소유한 과수원이 어찌나 넓은지 눈이 닿는 곳 모두가 세리네 집안의 땅이고 과수원이었다.
“사과밭에 내려가서 사과랑 사람이랑 다 가지고 왔구나.”
구성철 실장의 말에 빙긋이 웃음으로 답했다.
“그럼 나가 보겠습니다.”
그때였다.
강지영 본부장이 일어서려는 날 붙잡고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냈다.
“아 외근 나가기 전에 정수혁 이사님과 이야기를 한 번 나눠보세요. 앞으로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하는 데 큰 도움이 될 분이니까.”
“재무이사님은······ 왜?”
“만나 보면 알 거예요.”
강지영 본부장이 알쏭달쏭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 * *
엔터 회사와 흥신소는 떼려 해도 뗄 수 없는 사이다.
영입하려는 연예인의 뒷조사를 위해 흥신소와 비밀리에 관계를 맺는 경우가 부지기수.
때로는 찌라시를 터트리려는 연예 신문사와 연결 고리로 쓰기도 한다.
문제는 흥신소 사람들의 입을 잘못 놀릴 수도 있기에 대형 엔터 회사들은 자체적인 정보 팀을 운영하곤 한다.
중요한 사건은 스스로 알아보기 위해서.
하지만 굴렁쇠 엔터는 공식적으로는 정보팀이 없었다.
그런데 강감찬 대표는 비밀리에 정보팀을 운영하고 있었다.
바로 정수혁 재무이사의 관리하에서.
“뭐하나. 차 식네. 어서 들게.”
난 멍한 표정으로 정수혁 이사에게 물었다.
“재무이사님께서 이런 일을 하시는 데 왜 아무도 모르는 겁니까?”
정수혁 재무이사가 빙긋이 웃으며 되물었다.
“내가 하는 일이 뭔가?”
“돈 관리······ 아!”
정수혁 재무이사는 비자금을 이용해 독자 정보팀을 돌리고 있다고 말했다.
“대단하시네요. 재무와 동시에 정보까지 관리하시다니.”
“허허허. 누가 할 소릴. 고작 그 말 한마디에 거기까지 알아차리는 사람도 드물지. 그것도 젊은 친구가 말일세.”
괜히 머쓱해 머리를 긁적였다.
정수혁 이사는 언제든지 정보를 요구하라 말했다.
곰곰이 생각하다 하루 엄마의 근황을 알려달라 부탁했다.
“새로 영입한 신인의 엄마를 찾아달라고?”
“예.”
“흠. 못 할 건 없지. 혹시 신상 정보 같은 거는 있나?”
나는 서울로 올라오기 전 모아둔 정보를 내밀었다.
“이거면 되겠습니까?”
하루 엄마인 나탈리아의 사진과 동네 사람들이 그녀에 관해 알고 있는 걸 적은 파일을 내밀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네. 다만 시간은 걸릴 거니 그리 알아두고.”
“잘 부탁드립니다.”
“부탁은 무슨. 아 그리고 강 대표도 정대리 칭찬을 많이 하시더군.”
“대표님이 절요?”
들뜬 표정으로 되묻자 정수혁 재무이사가 한층 밝아진 표정으로 강감찬 대표의 말을 전하기 시작했다.
-지금처럼만 해라.
강감찬 대표는 내 활약을 듣고는 병실이 떠나가라 너털웃음을 터트렸단다.
“강 대표가 우리 정 대리 아니 정 팀장 이야기를 그렇게 좋아하시더라고. 내게도 도울 수 있는 건 적극적으로 도우라고 신신당부를 하셨고.”
괜히 코끝이 찡해진다.
“제가 한 게 뭐 있다고요.”
“하하하. 이 친구. 가수 1실을 초토화해놓고도 그런 말을 하나? 그게 다 우연의 일치라고?”
정수혁 재무이사의 눈빛이 번뜩였다.
‘경계하는 건가?’
하지만 몇 마디 말을 나눠보니 ‘어디서 내가 정보를 얻었기에 그런 일 처리를 할 수 있었나?’에 관한 궁금증이란 걸 알아차렸다.
하지만 난 시치미를 뚝 떼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가진 정보는 누군가와 공유할 수 없었으니까.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은 절 믿어주신 대표님의 눈을 믿어보시라는 것뿐입니다.”
정수혁 이사가 흐뭇하게 웃으며 한 걸음을 물러났다.
“하긴. 자네 내심이 궁금하긴 하지만 그건 급한 게 아니지. 아. 그리고 이은향 그 친구는 퇴직금을 넉넉히 줘서 입막음을 해뒀네. 별도 계약서도 작성했고.”
어쩐지 그 여자 성격에 연락이 없더라 했더라니.
이동민 실장이 알아봐 준 회사로 옮길 때 살짝 손을 썼다고 한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일 처리가 깔끔해졌네요.”
“감사는 무슨. 내가 해야 할 일을 한 건데.”
정수혁 이사는 그쯤은 당연한 일이라며 손사래를 친다.
하지만 이런 든든한 편이 있다는 걸 알수록 점점 생각이 깊어졌다.
현재 굴렁쇠 엔터는 양에서 음으로 강감찬 라인이 꽉 틀어쥐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미숙한 김동수와 역량이 부족한 이기철 이사에게 먹힌 건지 알 수가 없다.
물어볼 수도 없고 알아볼 수도 없는 질문을 속으로 하며 반드시 그 비밀을 캐겠노라 다짐했다.
그래야 굴렁쇠 엔터가 쪼개지는 일을 막을 수 있을 테니까.
* * *
하루를 데리고 내 원룸에 들어오자 괜스레 미안해졌다.
10평도 되지 않은 작은 공간은 누울 자리를 찾기도 쉽지 않은 까닭이다.
“불편해도 조금만 참아. 숙소 구해지면 바로 이사 갈 거니까.”
어디에 가방을 놓을지 살피던 하루가 히죽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에요. 전 여기도 아늑하고 좋은데요. 뭘.”
아늑하긴 하지.
상 놓고 마주 앉아 두 다리 뻗으면 닿기 딱 좋을 정도로.
“숙소 옮기면 나랑 같이 살게 될 거야. 좋든 싫든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는 둘이서 같이 살아야 해.”
하루가 다행이라는 듯 환하게 웃는다.
“네.”
“그리고 앞으론 형이라 불러. 삼촌 아저씨. 다 싫으니까.”
“네. 형!”
하루가 힘차게 대답한다.
세리 빼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서울로 와서 많이 불안할 거다.
그나마 세리도 바빠 얼굴 보기가 힘들 거고.
그렇기에 호칭을 바꾸는 것부터 시작해 하루를 몇 번이고 안심시켰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거나 다름없는 하루였기에 무한한 신뢰를 주기 위해 노력했다.
내 엄마.
미카엘라 수녀님이 그랬던 것처럼.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따뜻한 밥 내음이 코끝을 찔렀다.
뭔가 하고 봤더니 밥상으로 쓰는 작은 상에 막 지은 새하얀 쌀밥과 된장찌개 그리고 계란말이를 비롯한 밑반찬들이 정갈하게 담겨 있었다.
“이게 다 뭐야?”
“아 냉장고에 있는 거 가지고 제가 좀 해봤어요. 드셔보세요.”
하루가 30분 전에 일어나서 준비했다면서 배시시 웃는다.
“먼저 먹지 왜 기다렸어?”
“형이랑 같이 먹으려고 기다렸어요.”
그나저나 너무 피곤했나 보다.
좁은 원룸에서 음식을 차리고 있는데 그걸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깊게 잠들었다니.
“다음부터는 먼저 먹어.”
“같이 먹어야죠. 그나저나 형. 씻고 와서 드세요.”
“그래. 빨리 씻고 나올게.”
간단히 세수만 하고 나와 자리에 앉았다.
“잘 먹겠습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찌개를 떠서 하루의 앞접시에 덜어주고 나도 떠서 한입을 맛봤다.
그런데 애가 만든 음식이라 별다른 기대 없이 떠먹었는데 깜짝 놀랄 정도의 맛이다.
“마 맛있는데?”
“진짜요?”
“대박. 이대로 팔아도 되겠다. 진짜.”
하루가 만족한 듯 환하게 웃는다.
연기를 시켜야 하는 게 아니라 요리사로 키워야 하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헤헤. 형이 맛있다니 좋네요.”
“그런데 앞으로는 이렇게 식사를 안 챙겨도 돼. 이런 건 매니저가 해야지.”
“아녜요. 제가 할 수 있어요.”
“당분간이다? 어차피 스케줄이 생기고 레슨을 소화하다 보면 집안일을 할 시간도 없을 거니까.”
“네. 알았어요.”
“그럼. 먹자.”
흰 밥 위에 노란 계란말이를 얹어 한입에 넣었다.
그런데.
녹진.
달콤한 계란말이가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내렸다.
세상에. 이게 아이스크림이야? 계란말이야?
놀라운 하루의 요리실력에 다시 한번 감탄하며 밥을 먹고 있을 때 문뜩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다.
“하루야. 아무래도 네 데뷔를 좀 앞당겼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데. 괜찮겠니?”
“언제로요?”
“다음 달.”
하루가 숟가락을 든 채로 그대로 얼어 붙어버렸다.
* * *
회귀 전 하루는 MBS의 <사자의 고뇌>란 드라마에 주인공 아역으로 출연하며 이름을 알린다.
다만 <사자의 고뇌>는 앞으로 3년이나 지난 후에야 제작에 들어가는 드라마다.
그러니 어차피 다른 작품을 골라야 했었다.
그런데 하루의 요리실력을 본 순간 적합한 방송 하나가 떠올랐다.
[에브리데이 V10]
[날짜 : 2020년 7월 3일]
-PM 05:20 <먹방의 대가> 우성찬 오디션.
김동수가 애지중지 키우는 배우 3실의 우성찬이 <먹방의 대가>의 주인공이 된다.
하지만 난 그 주인공을 하루로 대체할 생각이었다.
우성찬에게는 심각한 결격사유가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