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7화
157. 사과밭에는 사과만 있는 게 아니다 3
이형문은 세리 할아버지 김판석 옹에게 매질을 당하면서도 일절 대응하지 못했다.
마을 유지인 김판석 옹이 이형문을 먹여 살린 까닭이다.
이형문이 세리네 과수원에서 일을 해주고 일당을 받고 산다는 건 알지만 사정을 들어보니 이 집도 세리 할아버지가 내준 거였다.
“이 금수만도 못한 것아! 너한테 이 집을 내준 게 한이다.”
씩씩대던 김판석 옹은 다시 기력을 회복해 지팡이를 들어 올린다.
나는 급히 김판석 옹의 곁으로 다가가 지팡이를 붙잡았다.
당장은 이형문을 혼내는 것보다 하루를 영입하는 게 더 중요했으니까.
“어허! 이거 뭐하는 짓인가!”
“어르신 잠시 고정하시지요.”
“자넨 나서지 말게! 하루는 내가 거두고 이놈은 마을에서 쫓아내고야 말 테니!”
그래선 안 된다.
김판석 옹의 뜻대로 이형문을 마을에서 쫓아내면 계약이 꼬이게 될 가능성이 컸으니까.
설령 계약한 뒤 내쫓아도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계약을 맺었다며 무효를 주장할 수도 있고.
그러니 김판석 옹에게 이형문의 목줄을 쥐여 놓는 게 원만한 해결책이었다.
다시 한번 만류하자 그제야 김판석 옹이 천천히 지팡이를 내려놓았다.
“커험! 자네가 말리지만 않았다면 저놈의 다리를 똑 분질러 버렸을 것을!”
김판석 옹이 길게 숨을 고른다.
동시에 이형문이 황급히 허리를 굽신거렸다.
“어르신. 두 번 다시는 하루한테 손 안 대겠습니다. 믿어주십시오.”
이형문이 두 손을 싹싹 빌며 애원하지만 난 그걸 믿지 않았다.
중독에 빠진 사람들이 곤란을 모면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건 너무나 흔한 일이니까.
그래도 기세가 확 꺾였으니 난 김판석 옹의 힘을 조금 더 빌리기로 마음먹었다.
“저 어르신.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내가 도울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돕지. 편히 말해보게.”
김판석 옹이 나서자 이형문의 얼굴이 썩은 감을 씹은 듯 일그러졌다.
“왜? 불만이라도 있는 게냐?”
“아 아닙니다. 어르신!”
슬그머니 날 올려보던 이형문의 고개가 빛의 속도로 고꾸라진다.
나는 김판석 옹의 든든한 엄호를 받으며 본격적인 협상을 시작했다.
“증인이 되어주십시오.”
“증인?”
김판석 옹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 현재 저와 이형문 씨의 하루 매니지먼트 계약이 온전한 상태에서 이뤄졌다는 걸 증언해 줄 분도 필요합니다.”
“자네가 하루를 관리하겠다는 말인가?”
“예. 서울로 데려가서 연예인으로 키울 생각입니다.”
김판석 옹이 날 빤히 훑어본다.
“가능성은 있고? 형문이 놈 때문에 되지도 않을 애한테 헛바람만 넣는 거라면 나한테 맡겨두게. 하루는 내가 직접 거둬 먹이면 되니까.”
“절대 그런 게 아닙니다. 하루는 충분히 제 몫을 할 아이입니다.”
내 눈을 뚫어지게 보던 김판석 옹이 고개를 끄덕인다.
“하긴 세리도 자네가 키웠다고 했었지. 알겠네.”
김판석 옹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번엔 하루에게 물었다.
“하루야. 진짜 이 친구를 따라가고 싶은 게냐?”
하루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 할아버지. 제게 재능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알아볼 기회라도 가지고 싶어요.”
하루를 측은하게 바라보던 김판석옹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알겠다. 네게 원하는 게 그거라면 할 수 없지. 해 보거라.”
김판석 옹은 하루를 따스한 눈빛으로 쳐다보다 내게 알겠다고 말했다.
“자네가 해 달라는 대로 해 주겠네.”
그 순간 세리 할머니 이영숙 여사도 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나도 그 증언이란 걸 해줌세.”
“암. 우리 마누라가 나보다 20년은 오래 살 것 같으니 그리해.”
“싱거운 영감같으니.”
이영숙 여사가 째려봤지만 김판석 옹은 아무렇지 않은 듯 헛기침한다.
“감사합니다.”
이제는 이형문이 술에 취해서 계약을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억지도 못 쓰게 만들었다.
김판석 옹이 하루를 불렀다.
“하루야.”
“예. 할아버지.”
“이럴 게 아니라 서울 올라갈 옷가지랑 책들 가지고 오거라.”
“지금······요?”
하루가 고개를 갸웃하자 김판석 옹이 인자한 표정으로 말했다.
“말이 태어나면 제주로 보내고 사람이 태어나면 서울로 보내라는 옛말이 있다. 가려면 하루라도 빨리 가는 게 좋지. 전학 문제는 이 할애비가 해결해주마.”
하루는 그래도 되냐며 내 허락을 구했다.
“그래. 내일 올라갈 거니까 미리 짐 챙겨둬.”
“네.”
하루는 아빠의 눈치를 힐끔 보다 쌩하고 자기 방으로 향했다.
이형문이 떫은 표정을 지었지만 김판석 옹이 노려보고 있기에 더는 불만을 말하지는 않았다.
그때였다.
나무 현관문이 삐거덕대며 30대 중반의 남자가 주춤대며 들어왔다.
2대 8 가르마를 한 정장의 남자는 눈치를 힐끔힐끔 살피며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여기 서울 굴렁쇠 엔터에서 오신 분이 있다고 하던데 계십니까?”
회사의 연락을 받고 나온 지역 변호사였다.
“여기요.”
변호사는 내게 인사한 뒤 곁에 있는 김판석 옹에게도 고개를 숙였다.
“어르신. 오랜만에 뵙습니다.”
“우준이냐? 그래 아버님은 무탈하시고?”
이 동네는 할아버지가 꽉 잡고 있다던 세리의 말이 새삼 실감이 난다.
두 사람이 인사를 마치자 형우준이란 이름의 변호사가 계약서를 이형문에게 내밀었다.
“천천히 읽어보셔야 합니다. 이형문 씨.”
하지만 이형문은 계약서를 보지도 않고 사인을 해버렸다.
“돼 됐어. 그냥 돈만 넣어줘. 그리고 데리고 가면 되잖아!”
“그러지 마시고······”
“됐다니까?”
변호사가 여러 번 강조했지만 이형문은 볼 마음이 없다고 말했다.
이 상황도 녹음하고 있었기에 혹여라도 이형문이 계약을 무를 방법은 이제 제로에 이르고 있었다.
더불어 세리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계약이 문제없이 이뤄졌다는 걸 증언한다는 서류 작성까지 마쳤다.
이렇게 철두철미하게 하는 건 그만큼 미성년자의 계약이 불안하기 때문이다.
난 계약서에 사인을 마치자마자 회사에 사본을 보내고 입금을 요청했다.
그리고 1분 뒤.
“입금했습니다. 확인해보시죠.”
이형문은 김판석 옹의 눈치를 보다 자신의 오래된 스마트폰으로 계좌를 확인했다.
3천만 원이라는 돈이 들어 있다는 걸 확인했는지 얼굴에 웃음이 깃들고 있다.
그사이 하루가 짐을 챙겨 나왔다.
“하루야. 이제 가자.”
“네.”
하루는 주춤대다 아빠에게 허리를 굽혔다.
“저 진짜 가요. 아빠.”
“가든지 말든지.”
퉁명스러운 이형문의 말에 하루의 어깨가 잔잔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빠에 대한 원망 그리고 새로운 삶에 대한 두려움 등이 섞여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 순간 나는 세리만큼이나 가녀린 하루의 어깨를 살포시 감쌌다.
이제부터는 내가 챙겨야 하는 내 배우였으니까.
“괜찮아. 하루야. 우리 잘해 보자.”
“네.”
내 손의 온기가 전해지자 하루의 어깨 떨림이 천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 * *
세리와 할머니를 먼저 집으로 돌려보낸 후 하루의 몸 상태를 살피기 위해 인근 병원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옷을 갈아입고 나온 하루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젠장. 뼈 밖에 안 남았네.’
헐렁한 검사복을 입은 하루의 몸 상태는 말랐다는 수준을 넘어서 기아 상태로 보일 정도였다.
‘살부터 찌워야 해야겠다.’
하루를 데리고 진료실로 들어갔다.
침대에 엉덩이를 걸치고 웃옷을 벗기자 다시 한번 한숨이 흘러나왔다.
전신이 멍투성이였으니까.
하루의 상태를 보던 의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혹시 형문이가 한 짓입니까?”
김영훈 원장도 이형문을 알고 있었다.
“영훈이 너만 알고 있거라.”
“안 됩니다. 어르신. 이 정도면 범죄입니다. 지금이라도 경찰에 신고를······”
김판석 옹이 한숨을 내쉬며 현재 상황을 대신 설명해줬다.
사정을 알게 된 김영훈 원장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진단서가 필요하다 이거죠?”
“예.”
“잠시만요.”
김영훈 원장이 엑스레이를 걸어놓고 하루의 상태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뼈가 상한 곳은 없었다.
진단 결과는 전치 4주.
뼈가 부러진 건 아니어서 그 이상의 진단서 발급이 힘들다곤 하지만 이 정도면 나중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진료를 마치고 나가려는데 김영훈이 김판석 옹에게 말했다.
“어르신. 하루 데리고 가서 옷 좀 갈아입히시지요.”
“으흠. 알았다.”
김판석 옹이 눈치를 채고 자리를 비켜준다.
둘만 남은 진료실.
김영훈 원장이 날 빤히 쳐다본다.
“젊은 분이 꽤 철두철미하시군요. 영입과 동시에 진단서를 달라시다니.”
“저희 업계에서는 부모들과 법정 다툼까지 가는 경우도 드물지 않거든요.”
“저도 TV에서 봐서 그런 일이 드물지는 않다는 건 압니다. 언제든지 증언이 필요하면 불러주십시오. 그 말을 드리려 남아달라 부탁드렸습니다.”
이제는 이형문이 어떤 짓을 한다고 해도 하루의 계약을 물릴 수 없게 되었다.
김영훈 원장은 내친김에 하루의 집안 이야기를 더 들려주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한 것보다 복잡한 사정들이 얽혀 있었다.
“······하루가 혼혈이라고요?”
“쿼터죠. 하루 엄마 나탈리아가 러시아 혼혈입니다.”
어쩐지 하루의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피부가 하얗더라니.
“원래 형문이 저놈이 술을 좋아하긴 했어도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크게 사기를 당하면서 집안이 풍비박산 났지 뭡니까.”
“사기요?”
원래 원양어선을 타다 아내를 만난 이형문은 고향으로 돌아와서 정착했고 대대로 알고 지내던 세리네 할아버지로부터 과수원에 일자리를 얻었다.
그런데 과수원에서 하는 일로 큰돈을 못 버니 원양어선을 타며 모은 돈으로 사업을 해 보려 했단다.
그러다 그만 사기를 당하고 전 재산을 홀랑 날려버렸고.
그 이후 점점 다툼이 잦아지다 석 달이 지났을 무렵 나탈리아는 집을 나가 버렸다고 한다.
“참 좋은 여자였는데 형문이가 술에 의지하면서 손찌검이 심해지다 보니 결국에는 견디지 못한 거죠. 돈을 벌어 하루를 데리러 온다고 하더니······”
김영훈 원장이 한숨을 쉬며 말을 얼버무렸다.
“그러면 혹시 하루 어머님 연락처를 아실만한 분은 없습니까?”
“거기까지는 모릅니다. 아무튼 저도 형문이 그놈을 한번 만나 보겠습니다. 알코올 중독이라고 판단되면 강제로 입원이라고 시켜야죠. 뭐.”
“부탁드립니다.”
“하여간 하루 녀석 잘 부탁드립니다. 세리를 담당하시는 분이라고 하니 안심이 되네요.”
“그리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김영훈 원장과 인사하고 나오며 하루의 엄마를 찾기로 마음먹었다.
김영훈 원장의 말대로면 좋겠지만 아니라면 손을 써야 할 수도 있었으니까.
* * *
세리네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서울로 올라가던 중 뒷좌석에 앉은 세리는 하루를 붙잡고 연예계 생활에 대한 연설을 시작했다.
“하루 넌 여자들이 좋아하는 스타일이니까 진짜 조심해야 해. 겉으론 아닌 척하면서 은근히 남자를 밝히는 나쁜 언니들이 많거든!”
“응.”
진지한 표정으로 한참 연설을 이어가던 세리가 갑자기 눈을 부릅떴다.
“아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쁘띠모랑 핑크다이아란 걸그룹이야. 걔들은 무조건 피해야 하는 일 순위니까.”
“왜?”
세리가 눈을 부라리며 하루를 쳐다본다.
“그냥 무조건 내가 시키는 대로 해!”
“그래 알았어.”
설명이나 잘하던지.
나중에 따로 차근차근 말해줘야겠다.
하루는 세리의 말에 토를 달지 않고 마냥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세리가 주먹을 불끈 쥐며 말하자 다들 웃음을 터트렸다.
“세리야. 잔소리 좀 그만해.”
“그래. 하루가 네 동생도 아닌데.”
멤버들의 타박에 세리가 고개를 젓는다.
“하루는 어릴 때부터 내가 챙겼단 말이야. 그러니까 서울에 올라가서도 챙겨줘야지. 에헴.”
“세리야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들어봤니?”
양은비가 코웃음을 치며 말하자 세리가 고개를 갸웃한다.
“그게 뭔데?”
“너부터 학교생활 잘하고 지각하지 말라는 이야기야.”
“어 언니!”
세리가 얼굴을 붉히며 외치자 다시 한번 뒷좌석에서 폭소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세리의 걱정이 틀린 건 아니었다.
회귀 전에도 유독 연상들과의 스캔들로 고생했던 하루였으니까.
“아냐. 이번엔 세리 말이 맞아. 하루야 세리 말대로 조심해. 알았지?”
코너에 몰리던 세리가 활짝 웃었다.
“거봐. 유노 오빠도 내 말이 맞는다잖아!”
세리가 가슴을 쭉 펴자 멤버들이 키득거리며 웃는다.
서울로 올라와 유진이와 체리블라썸을 각자 숙소와 집으로 내려다 준 뒤 하루를 데리고 회사로 향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는 습관적으로 다이어리를 살폈다.
그런데 11월까지 있던 골든로드의 일정은 다 사라졌는데 12월 컴백 일정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에브리데이 V10]
[날짜 : 2020년 12월 12일]
-AM 07:30 골든로드 포레스트 미용실 S급 세팅.
-PM 05:30 골든로드 컴백 무대 준비. AD에게 음향 체크 요청.
이 일정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건 올해 12월이 되면 골든로드가 컴백을 한다는 뜻.
‘컴백 일정은 그대로라니. 도대체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 거야?’
이 정도 사건이면 해체까지는 아니더라도 1년 이상은 쉬어줘야 정상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