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6화
156. 사과밭에는 사과만 있는 게 아니다 2
이하루의 아빠 이형문이 휘두른 소주병을 뺏은 뒤 이하루의 상태를 살폈다.
“네······. 괜찮아요.”
이하루의 상태를 살펴보니 속에서 뜨거운 무엇인가가 올라왔다.
얇은 옷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옅은 멍 자국.
그리고 세리와 동갑인 16살인데도 제대로 먹지 못했는지 키가 너무 작았다.
생각해보면 회귀 전에도 이하루의 키는 170cm에서 조금 모자랐다.
워낙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잘생기고 비율이 좋았기에 배우가 될 수 있었지만 그를 캐스팅하던 감독들이 모두 다 아쉬워했었다.
키가 5센티만 더 컸어도 맡을 수 있는 역할이 배는 늘었을 거라며.
“걱정하지 마. 이제.”
이형문은 힘으로 나를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거친 말로 협박을 해 왔다.
“야! 너는 뭔데 남의 집 일에 끼어들어? 죽고 싶어? 이거 안 놔?”
“내가 누군지는 알 거 없고. 경찰 부를 테니까 그렇게 아세요.”
큰 소리가 난 터라 들어오기 전부터 녹음 어플을 실행한 상태.
가정 폭력은 제삼자가 신고는 할 수 있어도 막상 유야무야되곤 한다.
하지만 녹음 파일이 있다면 최소한 아빠에게서 잠깐이나마 벗어날 시간을 벌어줄 증거는 될 거다.
경찰에 신고하고 복지과에 연락하면 일시적으로 친권을 박탈할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난 그 시간 동안 이하루를 영입할 방법을 찾을 거고.
힘으로 날 이겨내지 못한 이형문이 다시 이하루를 잡으려 들었다.
“야! 이하루. 너 이리 안 와?”
이하루가 움찔하고 몸을 웅크리며 내 뒤로 피했다.
아무래도 당장이라도 수를 내야 할 분위기다.
“걱정하지 마. 하루야.”
폰을 꺼내 경찰에 신고하려 하자 이형문 코웃음을 쳤다.
“크크크. 신고? 해봐! 이 동네 서장이 내 술친구야! 이거 왜 이래!”
“그래요? 알겠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하죠.”
곧장 경찰에게 전화를 걸려 했지만 막상 통화 버튼을 누를 수는 없었다.
다름 아닌 오른팔에 느껴진 묵직한 무게감 때문에.
이하루가 내 팔을 붙잡고 말리고 있다.
“안 돼요.”
이하루의 눈이 공포로 물들고 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이렇게 폭행을 가하는 아빠를 왜 지키려고 하는 거지?
하지만 그 순간 보육원 시절의 다른 친구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부모의 폭행을 피해 보육원에 온 아이들이 밤이 되면 눈물을 흘리며 엄마와 아빠를 찾았었던 그 모습이 말이다.
동시에 이하루가 왜 이러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삶이 지옥 같더라도 아이는 본능적으로 부모에게 의존하고 필요로 있었다.
순간 가슴속에서 울컥하는 뭔가가 치솟아 올랐다.
‘이런 인간도 부모라고······’
회귀 전 이하루가 가출한 게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 거의 성인이 된 이후의 일이다.
아무리 아빠가 싫다고 해도 아직은 아버지를 버릴 용기까지는 내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둘 수는 없었다.
“하루야 걱정하지 마. 형이랑 같이 서울로 가자. 하루 넌 내가 연예인으로 만들어 줄게.”
“제가 연예인······이요?”
“그래. 내가 세리 매니저라는 건 알지? 우리 회사는 너처럼 괜찮은 인재라면 언제든지 환영이거든.”
이하루의 눈에 혹시나 하는 기대가 어리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갑작스레 이형문의 표정이 변했다.
“잠깐만. 당신이 서울에서 왔다는 그 매니저 양반이라고?”
“예.”
이형문이 반색을 하더니 양반다리를 하고 바닥에 앉았다.
“뭐 해? 당신도 이리 와서 앉아 봐.”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크흐흐. 나도 비즈니스라는 거 한번 해 보려고. 일단 앉아 보라니까.”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하지만 일단은 들어나 보자 싶었다.
어쨌든 이하루의 법적 보호 권한을 가지고 있는 ‘보호자’니까.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의 말대로 자리에 앉았다.
순간 이형문이 능청스럽게 제안을 해 왔다.
“거 하루를 연예인 만들면 계약금은 어떻게 되나? 저놈이 미성년자이니만큼 부모 허락이 필요할 것 같은데? 응?”
마치 자식을 팔겠다는 투로 말을 한 탓에 하루의 고개가 푹 하고 숙였다.
이형문이 이하루를 보며 싸늘한 표정을 짓는다.
“왜? 넌 이 애비가 싫다며? 나도 너 싫어. 니 엄마 닮은 얼굴 보기 싫으니까 이 기회에 헤어지자.”
말 한마디 한마디에 가시가 돋아 이하루의 심장을 후벼 파고 있었다.
이딴 인간에게 돈을 주긴 싫었지만 생각해보면 그게 가장 편한 방법이긴 하다.
친권을 박탈시키지 않는 한 미성년자의 계약은 부모가 절대적인 권리를 가지고 있으니까.
“돈만 주면 된다 이겁니까?”
이형문이 반색한다.
“그래. 돈만 주면 돼. 크크크.”
“얼마 필요합니까?”
“한 2천? 아니다 3천만 원! 그래 3천만 원만 주면 내가 통 크게 도장 팍 하고 찍어주지.”
알겠다고 말한 뒤 바들바들 떨고 있는 이하루에게 재차 연예인이 되겠냐고 물었다.
하지만 아빠가 자신을 버린다는 듯한 태도가 꽤 충격이었는지 이하루는 하얗게 질려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덜덜 떠는 이하루의 손을 살포시 잡으며 안심시켰다.
“하루야. 형이랑 같이 가자. 회사에는 세리도 있어. 학교도 세리가 다니는 중학교로 보내 줄게.”
“······”
얼이 나가버린 아이가 현실을 깨닫는 건 어려웠다.
16살은 세상에서 홀로 되긴 어린 나이였으니까.
하지만 따뜻한 말을 연이어 건네자 이하루가 어렵게 용기를 내었다.
“혹시 동정심으로 이러시는 거예요?”
“동정심이라니. 세리에게 물어봐. 이 형이 미래의 재목을 알아보는 데는 일가견이 있어.”
맞은편에 앉은 이형문은 꿈같은 소리 한다며 키득대고 있었다.
하지만 난 일절 그를 상대하지 않고 이하루에게 계속해 말을 걸었다.
이하루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거린다.
난 손을 뻗어 이하루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내가 네 매니저가 될 거야. 그러니까 같이 해 보자. 우리. 응?”
“알겠······어요.”
이하루가 내 손을 꽉 하고 잡는다.
나 역시 이하루의 손을 꽉 잡은 채 이형문에게 말했다.
“3천만 원 바로 드리죠. 그리고 계약 기간은 5년입니다. 혹여 그동안 계약을 파기할 생각을 하시면 위약금은 5배입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날 속일 셈이면······”
“안 속입니다. 회사가 어디 장난으로 계약하는 줄 아십니까? 변호사한테 공증도 받아서 계약서까지 적어 드리겠습니다.”
“알았어. 당장 계약서만 가지고 와. 이놈 내줄 테니까.”
마음 같아서는 접근을 금지한다는 걸 계약서에 조항으로 넣고 싶었지만 부자 사이에 그런 계약 조항이 허용될 리는 없었다.
그러니 일단은 계약이 우선이다.
하루에게 이 사람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건 그다음에 할 일이고.
강지영 본부장에게 전화를 걸려 하는데 이형문이 흥얼거리며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어. 김형. 막걸리 한 짝만 배달해 줘. 뭐? 돈 달라고? 외상값? 일단 와. 와서 받아 가.”
전화를 끊은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어이 이봐. 외상값 좀 대신 내줘.”
“얼맙니까?”
“한 20만 원 될걸?”
염치도 없는 인간 같으니.
하지만 지갑을 열어 비상금 30만 원을 내밀었다.
지금은 상대가 해주는 대로 해주는 게 계약을 쉽게 하는 일이었으니까.
홱!
돈을 가로챈 이형문이 환한 얼굴을 짓는다.
“으히히히. 이건 계약금에는 안 들어가는 거지?”
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이하루를 데리고 마당으로 나왔다.
“하루야. 잠깐만 전화 좀 할게.”
“네.”
하루의 손을 잠시 놓고서 강지영 본부장에게 전화를 걸어 이곳의 사정을 말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정 대리. 어린 친구가 불쌍하다고 데리고 오는 거라면 계약은 힘들어요. 내가 개인적으로 도와줄 수 있지만······ 아시잖아요. 지금 정 대리한테 특혜를 주다가는 입지가 흔들릴 수도 있다는 거.
골든로드의 일의 여파가 여전하다는 뜻이다.
잠깐 고민하던 난 한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제가 팀장이 되면요?”
-네?
“본부장님이 시키는 대로 팀장이 되겠습니다. 제가 팀장이 되면 팀 소속 배우를 영입을 진행할 권리가 생길 게 아닙니까?”
-그렇긴 하지만······.
고민하는 강지영 본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3천만 원 정도의 돈이라면 나도 가지고 있다.
사는 건 내 원룸에서 함께 살면 되고.
하지만 지금 이하루에게는 두 다리를 뻗고 잘 수 있는 곳 이외에 자신의 미래를 의탁할 수 있는 곳이 필요했다.
그것만큼은 내가 당장은 마련해줄 수 없었다.
“약속드린 대로 박은성 씨의 영입도 서두르겠습니다. 좋은 배우가 될 수 있는 아입니다.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본부장님.”
긴 한숨 소리가 이어지다 결국엔 승낙이 이어졌다.
-알겠어요. 뭘 보고 그렇게 고집을 부리나 모르겠는데 일단 믿어보도록 하죠. 계약서는 곽 팀장 편으로 처리하라고 할게요.
“최대한 빨리해주십시오. 서울로 올라갈 때 데려가고 싶습니다.”
-곽 팀장님이 변호사를 세리네 집으로 보낼 거예요. 주소나 문자로 주세요.
“감사합니다 본부장님.”
전화 내용에 귀를 기울이던 이하루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태어나고 자란 이곳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사실이 꿈만 같은가 보다.
“변호사님 올 때까지 세리네 집에서 나랑 같이 있자.”
그런데 그 순간 방문이 벌컥 하고 열렸다.
“야! 누구 맘대로 데리고 가? 계약서 사인하기 전에 데리고 가면 유괴로 신고할 거야!”
이형문의 말이 사실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곽무혁 팀장에게 이하루네 집 주소를 찍어 보낸 뒤 변호사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그때였다.
현관문이 끼익하며 열리더니 분노한 김판석 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문이 네 이노오옴!”
세리 할아버지 김판석 옹이 붉은 지팡이를 짚으며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세리 할머니 이영숙 여사와 세리가 그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김판석 옹이 들어오자 망나니처럼 굴던 이형문의 기세가 꺾였다.
“아니 어 어르신이 여긴 어쩐 일로······”
“내 문밖에서 다 들었다! 함부로 아는 척도 하지 말거라 이놈!”
“아니 그게 무슨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오해? 오해라고 했느냐 이놈? 아비가 되어 자식을 돈에 팔아!”
“어르신 그런 게 아닙니다.”
이형문이 변명했지만 김판석 옹은 들을 생각도 없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일장 훈계를 시작했다.
“네 마누라가 사라져서 상심이 크겠거니 해서 그동안 이해하려 했는데 그 분풀이를 하루 저 어린것에게 하고 있었더냐!”
“아. 어르신. 그건 저 새X가 시키는 심부름을······”
그때였다.
김판석 옹이 ‘갈!’이라 외치더니 방으로 올라가 박달나무 지팡이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퍽퍽!
‘아프겠는데?’
단단한 박달나무 지팡이가 연신 이형문의 몸에 내리꽂혔다.
퍼버벅.
“아악! 어르신. 제 제발 그만!”
“아비 자격도 없는 놈! 맞아 죽어도 싸다! 이놈!”
김판석 옹의 지팡이질에 이형문이 방구석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혀를 차던 세리의 할머니가 이하루의 곁으로 다가왔다.
“우리 하루. 괜찮누?”
“하 할머니.”
“이리 힘들면 이 할미한테라도 이야기했어야지.”
이하루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세리 할머니의 눈가로 눈물이 글썽거렸다.
연이어 세리 할머니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내가 널 더 챙겼어야 했는데 죽어서 너희 친할머니를 어찌 볼꼬. 미안하구나. 하루야. 이 못난 나를 용서하거라.”
이하루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 아니에요. 저······ 진짜 괜찮아요.”
세리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하루의 등을 토닥였다.
“이제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가 절대로 널 건드리지 못하게 할 테니.”
이영숙 여사는 하루를 달랜 뒤 김판석 옹에게 말했다.
“영감. 아주 혼쭐을 내주구려.”
하지만 힘이 달린 김판석 옹이 매질을 멈추고는 숨을 헐떡였다.
“그 그래야 하는데. 헉헉. 늙어서 힘이 달려. 임자가 애들 좀 불러오구려. 이놈한테 그동안 빌려준 것도 다 받아내고 마을에서도 내쳐야겠어.”
그 순간 이형문이 무릎을 꿇고 싹싹 빌기 시작했다.
“어르신. 잘못했습니다. 그 그러니까 그것만은······”
김판석 옹을 두려워하는 이형문을 본 순간 불완전한 하루의 매니지먼트 계약을 보호할 방법이 불현듯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