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3화
153.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지 3
어젯밤.
장은영은 이은향을 숙소로 불러들여 우연희의 협찬 신발에 장난질하라고 시켰다고 한다.
만약 일이 잘 풀리면 한 달 내로 골든로드 정식 스타일리스트로 채용해 주겠다면서 말이다.
이은향은 장은영과의 통화 목록을 내밀며 자신이 거짓말하는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시키지도 않은 것까지 털어놓았다.
이은향의 자백을 녹음하고서 잠깐 생각에 잠겼다.
이은향을 경찰에 넘겨버리는 건 쉬운 일.
하지만 그보다는 이걸 장은영을 무너뜨릴 카드로 사용해야겠다 싶었다.
“은향 씨. 제가 시키는 대로 할 건가요?”
“네! 뭐든요! 그러니까 경찰에는 제발 알리지 마세요.”
“좋아요. 그럼 잠시만 기다려 봐요.”
난 곧장 이동민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현장 상황을 들은 이동민 실장의 뚜껑이 열려 버렸다.
-뭐? 은영이 그게 감히 우리 애들을 건드려? 당장 경찰에 신고부터······
“실장님. 진정하세요. 이은향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한다네요.”
잠시 정적이 흐르더니 전화기 너머로 안도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하자고? 생각해 둔 방법이라도 있고?
난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박이윤에게 말했다.
“선배. 잠시만 자리 좀 비워 주세요. 은향 씨와 할 이야기가 좀 있어서요.”
“조금 전에 언성 높인 건 미안해요. 내가 미리 관리했어야 하는 일인데······.”
“괜찮습니다.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전 박 선배 믿으니까요.”
“고마워요. 나 얼마 전까지 골든로드를 담당하다 왔잖아요. 사건이 터지면 무조건 내가 범인으로 몰릴까 싶어 눈앞이 깜깜해지더라고.”
“몰아붙여서 죄송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진상을 밝히기 힘들 것 같아서 그만······”
“아녜요. 사정 이해하니까 나중에 소주나 한잔해요.”
“알겠습니다. 박 선배.”
박이윤은 이은향을 매섭게 째려보고는 대기실을 나섰다.
탕.
이제 대기실에는 나와 이은향 단둘만이 남았다.
그때부터 난 이동민 실장과 통화하며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했다.
-괜찮은 것 같네. 일단 은향이는 바로 나한테 보내라. 뒤처리는 내가 알아서 하도록 할 테니.
“예. 실장님. 이 일은 아는 사람이 없도록 부탁드립니다.”
-쓸데없는 걱정은.
전화를 끊고서 이은향에게 말했다.
“은향 씨. 이제부터 생각 잘하세요. 방금 들은 이야기가 노출되면 전 바로 경찰로 갈 겁니다.”
이은향은 반쯤 넋이 나간 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겠어요.”
“경찰에 안 넘기는 걸 다행으로 생각하세요. 아셨죠?”
“네. 저 앞으로는 절대로 이런 실수 안 할게요.”
“아무렴요.”
내키지는 않았지만 당장은 믿어주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내가 원하는 건.
그녀의 입으로 골든로드의 리더 장은영이 시킨 짓을 언론에 털어놓는 거니까.
“실장님과 상의해서 인터뷰만 잘 마치세요. 제보자는 방송국 스태프 중 한 명으로 말할 거니까 입 잘 맞추시고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은향이 안도하며 고개를 연신 숙였다.
자신이 터트리는 기사가 골든로드의 목줄을 끊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다.
하지만 누구나 자기 안위가 가장 소중한 법이었다.
기자와의 인터뷰 조건으로 이동민 실장이 다른 회사에 자리를 알아봐 주기로 했기에 그녀의 입장에서는 이게 유일한 살길이었다.
“그럼 어서 나가보세요.”
이은향이 연신 고개를 숙이며 대기실을 나섰다.
* * *
“또 1위야?”
“와. 진짜 알박기 오지게 하네.”
“이러다가 9주 1위 가는 거 아냐?”
대기실 밖에서 아이돌과 매니저들이 웅성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부러워하는 소리.
시기 질투하는 소리.
스태프들의 놀라워하는 소리 등등 온갖 소리가 섞여 체리블라썸의 현재 위상을 표현해주고 있다.
‘이대로만 가자. 얘들아. 더러운 일 힘든 일은 내가 다 처리해 줄 게.’
체리블라썸을 위해서라면 뭐든 다 해 줄 수 있다.
난 그녀들의 매니저니까.
잠시 후.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대기실 문이 열렸다.
우연희가 이주영 대리에게 업혀 해맑은 표정으로 트로피를 치켜들고 들어왔다.
“윤호 오빠! 오늘도 1위 했어요~!”
“축하해. 그보다 발목은 좀 어때?”
“아 그게 오빠가 해준 테이핑 덕분에 아무렇지도 않아요.”
고통을 참느라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게 뻔히 보이는데 거짓말하기는.
“일단 병원부터 가자. 잘 아는 데가 있어.”
우연희가 이주영 대리의 등에서 내려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내 눈치를 살피며 말을 흐렸다.
“병원 싫은데······”
그 모습에 세리가 곧장 고자질한다.
“유노 오빠. 연희 언니 진짜 병원 싫어해요. 애도 아니고 진짜 무서워한다니까요?”
“아니거든!”
애가 애를 놀리네.
우연희가 세리를 째려보자 곁에 있던 양은비가 피식하고 웃었다.
“우리 완벽한 리더의 유일한 약점이지 아마? 병원 싫어하는 거?”
뭔가 병원 치료에 트라우마라도 있나?
하지만 지금 가지 않는다면 다음 주 활동은 장담하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 9주 연속 1위도 물 건너가는 거고.
괜찮다고 버티는 우연희의 말을 깔끔히 무시하고 한명호 팀장에게 의견을 전했다.
“수명 연장 클리닉이라고 하는 곳이 있는데 거기가 염좌 치료를 정말 잘합니다.”
“이름만 들어보면 침술원이나 한의원이 아닌 것 같은데?”
“가정의학과 선생님이 하시는 전문 클리닉입니다.”
그동안은 비용 제한 때문에 데려가지도 못했지만 이젠 달랐다.
8주 연속 1위를 한 걸그룹에게는 고가의 치료 경비를 쓰는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니까.
우리 체리블라썸.
확실히 많이 컸다.
* * *
‘수명 연장 클리닉’은 가정의학 전문의였던 김수명이 자기 이름을 따서 세운 대한민국 최고의 개인 클리닉이다.
아 물론 지금은 아니고 5년쯤 지난 후에나.
지금은 클리닉을 설립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으로 고객 확보에 한창 열을 올릴 때였다.
“아야야야!”
“아직 시작도 안 했어요. 엄살이 좀 심하시네 우리 환자분.”
김수명 원장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우연희의 발목을 만지고 있다.
도수 치료와 찜질 그리고 침을 병행해 가면서.
김수명 원장은 가정의학 전문의에 도수 치료와 접골도 할 수 있는 데다 한의사 자격증까지 있기에 다양한 치료가 가능했다.
우연희가 울상을 한 채 소리를 질렀다.
“선생님! 진짜 아프거든요!”
“아닙니다. 환자분 안 아프세요.”
“꺄아악! 아파!”
“안 아프다니까요?”
“아파요! 진짜 아파요! 아아악!”
치료 테이블 위.
우연희는 연신 비명을 질러댔지만 그와 반대로 김수명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아프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바늘! 제발 바늘 좀 저리 치워요!”
“바늘이 아니라 침입니다.”
우연희가 치료하는 모습을 보던 체리블라썸 멤버들이 연신 웃음을 터트렸다.
“연희 언니 진짜 엄살 심하다.”
“원래 그랬잖아.”
“맞아. 맞아.”
우연희가 빽 하고 소리치며 같은 멤버들에게 외쳤다.
“진짜 아프다니까! 이 의사 아저씨가 거짓말하는 거······ 꺄악!”
“아저씨 아니에요. 저 아직 총각입니다.”
김수명 원장의 나이는 올해 38살.
하지만 장가를 가지 않은 탓에 아저씨라고 불리긴 싫은 나이였다.
“아 알았으니까 제발 살살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한바탕 소란이 있고서야 김수명이 보조기구를 오른 발목에 채웠다.
“오늘은 발목 움직이지 마시고 내일도 나오세요.”
“내일도요?”
“네. 매일 이렇게 치료하시면 다음 주말 정도에는 무대에 설 수 있을 겁니다.”
김수명이 예상하는 날짜는 99%로 정확했다.
회귀 전에도 저걸 안 믿었다가 나도 엄청난 손해를 봤지.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우연희는 발목을 움직여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많이 좋아진 것 같은데······ 내일 스케줄은 하면 안 될까요?”
인기 1위를 찍은 아이돌의 간절한 부탁에 마음이 안 흔들릴 남자가 있을까?
있다.
바로 저분 김수명 원장.
김수명 원장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우연희를 쳐다본다.
“치료 도중 발목을 쓰게 되면 상태가 나빠질 가능성이 큽니다. 다음 주 음방 무대에 서기 싫으시면 내일 스케줄 하시고요.”
한명호 팀장이 방법이 없냐 묻는다.
분명히 안 된다고 할 게 뻔했지만 내가 나서서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리허설 없이 본 녹화만 하면 안 될까요? 선생님?”
김수명 원장이 날 빤히 쳐다본다.
“그러면서도 다음 주 무대를 서게 해달라는 거고요?”
“예.”
김수명 원장이 고민하기에 한 가지 제안을 꺼냈다.
“그렇게만 되게 해주시면 회원권 끊어서 이 병원만 다니겠습니다.”
“회원권이요?”
회귀 전 유명해진 ‘수명 연장 클리닉’은 회원권을 사야지만 관리를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그런 시스템이 없나 보다.
“아 그러니까 월간으로 관리비를 내고 다닌다는 말입니다.”
잠깐 생각하던 김수명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냥 자주 와서 검진하고 치료만 받으세요. 그거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대신 내일 무대를 서고 나면 다음 주 음방 무대까지는 모든 스케줄을 캔슬하셔야 합니다.”
한명호 팀장이 쓰린 속을 달래며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현재는 방송 하나보다 9주 연속 1위를 노리는 게 더 중요했으니까.
우연희의 치료가 끝이 났다.
하지만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우리 김수명 원장의 매출 좀 올려주고 가야겠다 싶었다.
8주간 1위를 했으니 그 정도는 비용으로 써도 되니까.
“팀장님. 온 김에 나머지 셋도 도수 치료나 받고 가죠.”
“다른 애들도?”
“예. 지난 8주간 스케줄이 오죽 많았습니까? 애들도 몸 상태가 엉망입니다.”
“흠. 그렇긴 하지.”
뒤틀린 자세를 바로 하는 도수 치료를 해준다고 하자 체리블라썸 멤버들이 신이 나 치료 침대 위로 올라갔다.
“나부터 할래!”
가장 먼저 세리가 침대에 누워 손을 들었다.
“알겠습니다. 김세리 환자부터 하겠습니다.”
“어? 나 환자 아닌데요?”
“환자 맞을걸요?”
김수명 원장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세리의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긴장 푸시고요······ 갑니다.”
우두둑!
“꺄아아악!”
세리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안 아픕니다. 환자분.”
“아파요! 쌤!”
우드득!
“으아아아! 아프······ 아프!”
세리가 발을 동동 굴리며 곡소리를 무려 10분간이나 내었다.
세리의 관절과 근육이 제자리를 찾은 뒤 차례로 은아와 양은비도 도수 치료를 받았다.
“꺄악! 아파요 선생님!”
“엄마! 살려줘! 선생님! 나 죽는다니까? 네? 아악!”
체리블라썸 멤버들의 멱따는 소리가 수명 연장 클리닉을 울려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치료를 끝낸 우연희가 팔짱을 끼고 깔깔거렸다.
“거봐. 내가 뭐랬어? 아프댔잖아.”
병원에 오는 게 무서웠을 뿐이지 우연희가 제일 엄살이 적은 편이었다.
* * *
체리블라썸의 모든 치료를 마치고 회사에 도착하자 시간은 벌써 밤 10시.
클리닉을 출발하기 전 연락받은 대로 5층 소회의실로 향했다.
회의실에는 이기철 이사와 실장급 이상의 주요 간부들이 모여 있었다.
“왔군.”
이동민 실장이 자기 옆자리를 가리켰다.
자리에 앉자 회의를 빌미로 한 징계위원회가 열렸다.
주제는 당연히 ‘장은영의 비밀 계정’에 관한 것.
이기철 이사가 날 노려보며 질책을 시작했다.
“정윤호 대리. 오늘 이 자리에 자네를 왜 불렀는지는 아나?”
“네.”
“그러면 이야기하기가 편하겠군.”
이기철 이사가 목청을 가다듬고 날 닦달하기 시작했다.
“정 대리. 오늘 같은 일은 윗선에 보고부터 하고 처리해야지! 자칫 소문이라도 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랬나?”
어떻게 하기는.
소문이 나기를 바라니까 입을 다문 거지.
미리 말했으면 유야무야 덮고 넘어갔을 게 뻔하잖아.
이기철 이사는 덩달아 이동민 실장도 몰아붙였다.
“그리고 이동민 실장. 자네도 그래! 정 대리가 이렇게 설치면 막기라도 했어야지!”
이기철 이사의 질책이 이어지는 동안 강지영 본부장도 불만스러운 속을 내비쳤다.
“은영이가 비밀 계정을 숨긴 걸 알아냈으면 제게라도 먼저 이야기했어야죠. 그리고 지금 에이스 엔터에서도 항의가 들어오고 있어요. 정 대리가 ZIZAK 멤버에게 폭력을 썼다면서요?”
경영진들이 날 몰아세우자 기수 1실의 차상진 실장은 이때다 싶었는지 얄밉게 깐족거렸다.
“에이스 엔터에서 너 콩밥 먹이겠다고 그러더라.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
“말로만 그러지 절대로 고소 못 할 겁니다.”
이기철 이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또 무슨 자신감이야?”
나는 ZIZAK 박현우의 쪽지 복사본을 꺼냈다.
“필적 조사하면 박현우라고 나올 겁니다. 아 그리고 이건 녹음 파일입니다.”
폰으로 박현우와의 대화를 녹음한 파일을 재생시켰다.
클럽 BLUE에서 있었던 박현우의 말이 재생된 순간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의 안색이 다들 변하기 시작했다.
장은영의 사주를 받은 박현우가 체리블라썸 멤버들을 추행하려는 내용이 담겨 있었으니까.
“크흠!”
“박현우 이거 완전 미친놈 아냐?”
하지만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아무도 장은영의 죄를 언급하지 않았다.
칼을 쓴 사람보다 칼을 비난한다?
내가 이럴 줄 알았다.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장은영을 혼내 되 골든로드의 활동은 계속 이어갈 수 있을까?’에 골몰하기 시작했으니까.
심지어 차상진 실장과 이기철 이사는 이런 터무니없는 말까지 해댔다.
“이사님도 잘 아시겠지만 걸그룹 사이에서 기 싸움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거 아니겠습니까?”
“하긴 설마 진짜 추행을 했겠어? 겁만 주려 한 거겠지. 얘들도 생각이라는 게 있는데.”
서예종 라인들이 뒤늦게 맞장구를 쳤지만 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이제 밤 10시 59분.
곧 스캔들이 터질 시간이었으니까.
잠시 후.
폰의 시계가 11시를 가리켰다.
회의실의 문이 벌컥 열리며 홍보팀의 성민석 팀장이 외쳤다.
“이 이사님. 큰일 났습니다!”
다이어리의 일정처럼.
삽시간에 회의의 주제는 내 징계에서 ‘골든로드 스캔들 대책’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제 시작이야. 장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