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4화
144. 영원한 1등은 없다 5
강지영 본부장이 내 오른손에 코를 대고 킁킁거렸다.
“아니 대체 얼마나 마셨길래 술 냄새가 아직 안 사라져요? 그동안 술 많이 늘었나 본데 나랑 한잔 안 할래요? 좋은 와인 있는데?”
위스키 냄새에 눈을 번뜩인 강지영 본부장이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난 한숨을 푹 내쉬며 답했다.
“많이 마시긴요. 딱 한 잔 마셨습니다.”
“한 잔이요?”
“예. 한 잔만 받겠다고 하니까 1200만 원짜리 싱글몰트 위스키를 한 잔에 다 부어버리더라고요.”
“아. 혈압! 장웨이 그 사람 진짜 상종 못 할 인간이네! 글렌피딕 40년산을 바닥에 버려? 미친 거 아녜요?”
이야기를 들은 애주가 강지영이 목덜미를 붙잡고 버럭 하고 화를 내질렀다.
술을 아끼지 않는 인간과는 도저히 같은 하늘 아래서 살 수 없다면서.
덕분에 술 마실 기분이 싹 날아갔다며 씩씩댄 터라 무사히(?) 그녀의 집에서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
* * *
장웨이 회장을 만난 다음 날 새벽.
눈을 뜨자마자 구성철 실장에게 늦게 출근하겠다는 문자를 보내놓고 유진이의 집으로 향했다.
김동수라면 유진이의 집으로 찾아올 가능성이 있으니까.
문을 열고 들어가자 잠에서 덜 깬 유진이가 날 반겼다.
오전 7시가 안 된 이른 시간이라 아직 파자마 차림이다.
“오늘은 왜 이렇게 아침 일찍부터 왔어요?”
“일단 미소 옷부터 입혀 이 작가님 집으로 가자.”
“지금요?”
유진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가면서 차 안에서 이야기해줄게.”
다행히 오늘 미소가 유치원에 가는 날이 아니었기에 함께 데려갈 수 있었다.
유진이는 잠에 취해 헤롱대는 미소를 안아 옷을 입혔다.
축 늘어졌던 미소가 옷을 입으며 조금씩 잠에서 깨어났다.
“어? 삼촌······이다?”
미소가 작은 손으로 눈을 비벼대며 끔뻑였다.
“이거 꿈이야?”
“아니. 우리 미소 자고 일어나면 바로 온댔잖아. 기억나?”
“응! 기억나요!”
어제 헤어지기 전 자고 일어나면 앞에 있을 거라 한 약속을 지킨 셈이 되었다.
“미소야. 삼촌이랑 놀러 갈 거니까 옷 입자?”
“응.”
잠에 취한 미소의 옷을 갈아 입힌 뒤 캐리어 하나에 옷을 담아 차에 실었다.
차가 출발하자마자 다시 미소가 잠에 빠지는 걸 보고 유진이에게 어제 있었던 일을 말했다.
“예? 그럼 우리 도망가는 거예요?”
“똥이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냐? 일단 내일까지만. 모레 오후에 장 회장이 출국한다니까 그때까지만 몸을 사리자는 거지.”
유진이가 고개를 끄덕이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물었다.
“아 참. 근데 이 작가님 허락은 받으셨어요?”
“당연히. 어젯밤에 연락했더니 얼마든지 오라고 하시더라고. 남는 방 많으니까 같이 살아도 된다고 하시던데?”
“하긴 그 집. 혼자 사시기에는 엄청 크더라. 그 정도 크기면 몇 평이나 해요? 한 200평?”
“아니 400평.”
“와~. 엄청나다. 진짜.”
“너도 몇 년 정도 지나면 그런 데 살 수 있을걸.”
유진이가 피식 웃는다.
그렇게 큰 집은 원치 않는다지만 그런 여건이 되면 좋겠다면서.
벌써 1년에 수억을 번 것치고는 꿈이 작은 건지 아니면 그런 미래가 그려지지 않는 건지 모르겠다.
* * *
한남동에 있는 이지연 작가의 집에 도착해 미소를 깨웠다.
“미소야. 다 왔어.”
미소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으응. 여기 어디야?”
그 순간 이지연 작가의 집 주차장 문이 위로 들리며 대궐 같은 집이 눈앞에 나타났다.
“우와! 궁전이다!”
잔디가 잘 정돈된 마당 그리고 엄청난 크기의 2층 주택을 본 미소의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열린 현관문으로 인기척을 내며 들어가자 이지연 작가가 소파 한쪽을 가리켰다.
“다들 잠깐만 기다려. 난 마무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금방 끝나.”
이지연 작가는 인사도 못 한 채 미리 와 있던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김찬성 변호사.
연예계 업무 전문을 하는 변호사로 나 역시 그와 일해본 적이 있었다.
별명은 ‘예스맨’.
의뢰자의 질문에 예스만 답하는 게 아니라 의뢰자의 부탁과 요구를 무조건 이뤄낸다는 뜻의 ‘예스맨’이다.
“김 변. 일단은 제작사 교체부터 진행해줘요. 투자사도 대체해 주고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일까지 완벽히 마무리 짓겠습니다.”
김찬성 변호사가 일어나 우리에게 인사한 뒤 밖으로 나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지연 작가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작사 변경 때문에 새벽 3시부터 일했더니 머리가 어지러워.”
“아침부터 찾아와서 죄송해요 작가님.”
“죄송은 무슨. 내가 오라고 했는데. 그리고 유진은 급해지면 언제든지 내 핑계 대면 돼. 내가 뒤에 있으니까 자신감 잃지 말고. 알겠지?”
“네. 작가님.”
유진이와 인사를 끝낸 이지연 작가는 곁에 있던 미소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얘가 미소구나.”
미소가 엄마 치마를 놓고선 두 손을 모았다.
그리고 우렁찬 목소리로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리라 유치원 정미소입니다! 며칠 전부터 연예인이에요!”
미소의 소개에 이지연 작가가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호호! 요 땅콩만 한 게 연예인이라니.”
“죄송해요. 작가님. 미소야 그렇게 소개하는 거 아냐.”
당황한 유진이가 그렇게 인사하면 안 된다고 하자 미소가 고개를 갸웃한다.
“엄마. 나 연예인 아냐?”
“아니. 일단 계약은 했으니까 연예인은 맞는데······.”
이지연 작가가 당황한 유진이를 놓아두고 미소 앞에 무릎을 굽혀 시선을 맞췄다.
“난 이지연이라고 해.”
“알아요. 무서운 선생님!”
이지연 작가는 애한테 무슨 소리를 한 거냐며 매서운 눈빛으로 나를 째려본다.
내게 ‘유노. 두고 봐?’라는 섬뜩한 입 모양을 한 이지연 작가는 미소와 시선을 맞췄다.
“그나저나 미소도 이제 연예인이 되었으니까 TV에도 나가야겠네?”
“네! 유노 삼촌이 저 맛있는 거 먹는 방송에 출연시켜 준다고 했어요.”
미소가 뿌듯한 표정으로 자랑한 탓에 이지연 작가가 더 큰 웃음을 터트렸다.
“좋아. 그럼 우리 미소. 내 작품에도 출연해 볼래? 이 아줌마가 사실은 무서운 선생님이 아니라 엄청 유명한 선생님이거든. 너희 엄마가 나온 아침이 간다 알지?”
“네.”
“그것도 내가 쓴 거란다.”
미소의 눈이 함지박만 하게 커졌다.
“진짜요?”
그 순간 유진이가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다.
“작가님. 아직 미소는 드라마 출연까지는 생각 안 하고 있어요.”
“왜? 너튜브에서 춤추는 거 보니까 카메라 앞에 서는 것도 아무 문제 없던데?”
“그래도 본인 의사를 확인해야······.”
“그럼 지금 확인해 보면 되겠네.”
이지연 작가가 미소에게 생글대며 웃음을 보였다.
“미소야. 엄마와 함께 출연할래?”
유진이가 당황해 말리려 했지만 미소의 고개가 빠르게 끄덕여졌다.
“응! 나 할 거예요!”
미소야말로 예스맨 아니 예스 걸이다.
이거 좋아해야 하는 건지 싫어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신의 이름으로>에서 어린 청명의 역할은 분량이 많지는 않지만 종종 회상 씬으로 나온다.
극이 끝날 때까지 출연 분량이 잡혀 있기에 1 2화에 잠깐 얼굴을 비추는 다른 드라마의 아역에 비해 상당히 큰 비중이고.
“그럼 그렇게 해 우리 미소도 이제 내 작품의 배우야.”
“우와! 진짜요?”
“그럼.”
“감사합니다~!! 선생님 최고!!”
미소가 해맑게 웃으며 이지연 작가에게 안겼다.
“어이쿠.”
혹여 이지연 작가가 화라도 내면 어쩔까 걱정했지만 이지연 작가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괜찮다고 손짓했다.
“호호호. 이제는 이 선생님이 안 무서워?”
“네! 하나도 안 무서워요!”
미소의 대답에 이지연 작가의 얼굴에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아무래도 미소는 연예인이 되기 위해 타고난 것 같다.
일곱 살의 나이에 이지연 작가의 마음을 휘어잡을 줄이야.
* * *
이지연 작가와 대책 회의를 마치고서 오전 11시가 넘어서야 폰을 켰다.
내 폰에는 이기철 이사와 김동수 실장 그리고 이상식 대표의 부재중 통화와 까톡 메시지가 100개가 넘어가고 있었다.
“어지간히 몸이 달았군.”
일단 만나서 이야기하자는 내용이다.
심지어 김동수는 내 예상대로 유진이의 집까지 찾아갔다는 주인아줌마의 까톡도 와 있었다.
일단 유진이는 이지연 작가의 핑계를 대면 되고 이젠 내 차례였다.
난 먼저 구성철 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회사 분위기를 확인했다.
-정 대리. 어디야?
“이지연 작가님 집인데 곧 회사로 들어갈 겁니다.”
-아니야! 지금은 때가 안 좋아. 강 본부장께 이 이사님이랑 김 실장이 찾아와 언성을 높이고 있으니까 넌 그냥 오지 마.
“출근하지 말라고요?”
-아니. 그러면 또 꼬투리가 잡힐 수도 있으니 그냥 현장에나 나가 보라고. 지금 MBS에 체리블라썸 있으니까 거기 온종일 붙어 있으면 되겠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할게요.”
-그래. 이따가 전화하자. 수고하고.
전화를 끊자 유진이가 곁에서 묻는다.
“어떻게 됐어요?”
“회사에 오지 말라고 하시네. 알아서 하신다고.”
“다행이다.”
하지만 장웨이 회장이 한국에 있는 이상 안심할 수는 없었다.
* * *
MBS에 도착해 체리블라썸을 찾으려 폰을 들었다.
그런데 때맞춰 김동수의 전화가 걸려왔다.
-야! 왜 이렇게 전화가 안 돼! 지금 유진이 어디 있어?
“글쎄요. 오늘은 유진이 스케줄이 없어서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전 지금 MBS 체리블라썸 현장에 와 있습니다.”
정인지 아줌마도 시치미를 뗐다기에 나도 똑같이 말했다.
-야! 네가 모르면 누가 알아? 너 지금 거짓말하는 거지?
“아닙니다.”
-술이 안 되면 밥 한 끼면 된다니까? 아무 일도 없을 거래도!
김동수가 애가 달았는지 말을 속사포처럼 내뱉었다.
유진이를 이렇게 애타게 부르는 걸 보니 받아먹기로 한 돈이 많긴 많은가 보다.
-정 대리. 이대로 끝나면 이사님이 널 가만히 둘 거 같냐? 지금 붉은달 이 대표가 얼마나 난리인지는 알고? 이런 식으로 유진이만 챙기면 붉은달이 만드는 드라마에 출연하는 우리 굴렁쇠의 다른 배우들도 다 덤터기를 쓰는 거야!
그러면 반대로 다른 배우들을 위해 유진이가 피해를 보는 건 괜찮고?
턱도 없는 소리였다.
“하여간 유진이와 연락이 되면 바로 전화 드리겠습니다. 아 그리고 실장님. 지금 김 PD님이 부르셔서 가 봐야 할 거 같습니다.”
-야! 야! 끊지 마.
김동수의 목소리가 다급했지만 난 깔끔히 전화를 씹어버렸다.
벨 소리를 무음으로 하고서 체리블라썸의 곁에 붙어 있는 정상봉에게 전화를 걸려 했다.
그런데 이번엔 차기작 <신의 이름으로>의 감독으로 내정된 김성운 PD의 전화가 걸려왔다.
-정 대리. 지금 어딥니까?
“예. 지금 막 MBS 1층 로비 지났습니다.”
-잘됐네요. 지금 제 방으로 좀 와 주세요. CP님이 할 말이 있다고 하시거든요.
김명학 CP가 내게?
무슨 일인지 몰랐지만 전화로 PD에게 꼬치꼬치 물어볼 순 없었다.
“예. 바로 올라가겠습니다.”
전화를 끊고서 곧장 6층 김성운 PD의 방으로 향했다.
김성운 PD의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김명학 CP와 김찬성 변호사가 함께 모여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CP님.”
“안녕해야 하는데 솔직히 안녕은 못 해.”
김명학 CP가 근엄한 표정으로 한숨을 쉰다.
MBS의 <밤하늘의 달빛 내림>은 <파란 하늘>에 밀려 시청률이 한 자리대까지 떨어진 상태였으니까.
“죄송합니다. 김 CP님.”
내 사과에 김명학 CP가 날 가만히 쳐다보다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 파란 하늘에 밀려서 괜히 심술부린 거니 오해하지 마. 죄송은 무슨? 우리가 더 잘했어야지.”
아재 장난에 당했다.
연기자도 아니면서 쓸데없이 연기력만 좋아 깜빡 속아 버렸다.
“그런데 진짜 미안한 표정인데. 왜? 뭐 찔리는 거라도 있어?”
“아닙니다 김찬성 변호사님이 와 계시니 제작사 변경 때문에 혼도 내실 줄 알았거든요.”
김명학 CP가 피식 웃는다.
“제작사 변경을 왜 정 대리가 미안해하지? 그거야 작가님과 제작사 간의 일인데.”
“그 그래도요.”
“실없는 소리 말고. 하여간 궁금한 게 있어 불렀어.”
“말씀하십시오.”
“이번 작품도 잘될 거 같아?”
솔직히 이번 작품은 나도 미래를 모른다.
원래라면 역사에서 사라졌던 작품이니까.
물론 이지연 작가의 실력에다 유진이의 1인 2역 연기를 생각하면 충분히 성공 가능성이 있었다.
연출자도 제대로 된 실력자가 붙었고.
남은 건 주연 두 사람의 연기지만 그건 이지연 작가와 김성운 PD가 잘 고를 거란 확신이 있었고.
“이지연 작가님이 심혈을 기울이신 작품이니 당연히 잘될 겁니다.”
성심껏 대답했지만 김명학 CP가 납득가지 않는 듯 고개를 젓는다.
“에이. 그런 애매한 대답 말고. 이왕이면 정 대리한테 확답이 듣고 싶어. 말해 봐 어서. 박수무당 정 스타라며?”
나조차 몰랐던 내 별명이 김명학 CP의 입에서 오르락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