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2화
142. 영원한 1등은 없다 3
“유노. 아까 이 대표가 말하는 거 보니까 그냥 넘어갈 분위기가 아니더라. 조심해. 저 인간. 그냥저냥 저 자리에 올라간 거 아냐.”
이상식 대표의 성격이 집요하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장웨이가 아니라 중국 주석이 와도 절대 데리고 나갈 생각 없습니다. 차라리 드라마 출연을 안 하고 말죠.”
내 대답에 이지연 작가가 피식대며 웃었다.
“유진이가 내 드라마 출연 안 할까 봐 무서워서라도 제작사를 바꿔야겠네.”
“그러고 보니 결론이 그렇게 나네요?”
“능글맞긴. 하여간 더는 이런 짜증 나는 곳에 있기도 싫으니까. 김 변도 집으로 오기로 했으니 집에 좀 데려다주고.”
“네. 작가님.”
이지연 작가를 집에다 다시 데려다준 뒤 유진이네 집으로 향했다.
유진이의 집 앞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6시.
이지연 작가의 경고가 있었기에 유진이에게도 경고했다.
“혹시 이 대표가 연락해 올지 모르니까 내 전화 말고는 받지 마.”
“네. 오빠.”
그때였다.
차 소리를 들은 미소가 문밖으로 뛰쳐나왔다.
“삼~촌!”
주인아줌마의 손을 잡고 나온 미소가 운전석으로 조르르 달려와 백미러를 덥석 붙잡았다.
“보여줄 게 있어요! 어서 들어가요!”
주인아줌마도 잠깐 들어왔다 가라고 한다.
“그래. 정 대리. 바빠도 식사라도 하고 가. 정 대리 덕분에 내가 이 나이에 직업도 얻고. 고마워. 근데 월급이 너무 많던데 이래도 돼?”
난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미소를 키워주신 공이 있는데 당연히 받으셔야죠. 그리고 유진이도 이제 돈 잘 버니 부담가지지 마세요.”
유진이도 주인아줌마의 팔짱을 끼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래요 딸이 엄마한테 용돈 주는 거라고 생각하세요.”
“유진아······.”
주인아줌마가 또 한 번 감격해 눈물을 찍어냈다.
훌쩍거리던 주인아줌마는 저녁 준비를 하겠다며 황급히 주방으로 나갔다.
“삼촌. 어서 가요. 어서요~.”
“잠깐만.”
차를 대고서 미소의 손에 이끌려 못 이기는 척 2층으로 올라갔다.
미소가 거실에 있는 검은색 4단 책꽂이의 가장 높은 칸을 가리켰다.
“저거요!”
미소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계약서가 든 액자가 놓여 있었다.
미소가 콧대를 높게 치켜들고 뿌듯한 표정을 짓는다.
그 순간 미카엘라 수녀님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이들 상대로는 리액션이 중요하다고 했었지.
액자에 파워터프걸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어 있어 조금은 지저분했지만 두 손을 흔들어대며 세상에서 제일 멋진 걸 본 듯한 리액션을 취했다.
“우와! 액자가 너무 멋진데?”
“헤헤. 진짜요?”
“응!”
내 과장된 반응에 미소가 뿌듯한 듯 배를 앞으로 쭉 내민다.
자랑을 끝낸 미소가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질문을 던져왔다.
“근데 삼촌. 나는 언제부터 텔레비전에 나와요?”
“글쎄? 방송국과 출연 계획을 잡아야 해서 아직은 몰라.”
미소가 조심스레 되물었다.
“······그러면 시간 많이 걸려요?”
벌써 스케줄 독촉까지 하다니.
연예인으로 대성할 기미가 보이는구나.
“우리 미소가 어떤 게 하고 싶냐에 따라서 달라지겠지? 우리 미소는 어떤 방송에 나가고 싶어?”
곰곰이 생각하느라 머리를 기울이던 미소가 생각을 끝내고는 오른손을 번쩍 들었다.
“그림! 동글동글 친구들에서 그림 그리는 코너에 나가고 싶어요!”
EBC 방송국에서 진행하는 ‘동글동글 친구들’은 미취학 아동들을 대상으로 하는 최고의 인기 학습 프로그램이다.
그곳에 나와 그림을 그려서 친구들에게 자기 실력을 뽐내고 싶다니.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지만 태연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미소야. 이거 어쩌지? 그림 그리기 코너에는 자리가 없을 거 같아.”
“히잉. 난 동글동글 친구들이 좋은데.”
동글동글 친구들에 나오는 아이들이 그림을 얼마나 잘 그리는데.
어린아이들이지만 다들 수채화에 유화에 동양화까지 척척 그려낸다.
하지만 미소 그림은 개와 고양이를 구분하기 힘들 정도였다.
다리가 4개에 꼬리가 달렸다는 것 정도가 공통점이랄까?
입체파로썬 이미 피카소와 자웅을 겨룰 경지지만 일반인들의 시각에선 좋은 평가를 받기 힘든 수준이다.
미소가 실망한 표정을 짓자 유진이가 키득대며 웃고 있었다.
슬쩍 눈치를 줬더니 유진이가 웃음을 멈추고 미소를 안아주며 달랬다.
“미소야. 아쉽지만 다른 방송에 나가자. 우리 미소 먹는 거 좋아하잖아. 음식을 먹는 방송에 나가는 건 어때?”
미소의 살짝 튀어나온 입술이 조금은 들어간다.
난 이때다 하고 유진이의 말을 받았다.
“그래. 삼촌 생각에도 맛있는 거 먹는 방송에 나가서 친구도 사귀고 시청자들에게 맛집을 소개해 주면 참 좋을 것 같은데?”
다시금 고민에 빠진 미소가 결국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금세 초롱초롱한 눈빛을 하고서 묻는다.
“그러면 언제부터 나가요? 내일? 아니면 모레?”
맛집 탐방 프로그램으로 장르를 정하자마자 다시금 미소의 독촉이 시작되었다.
기대에 찬 미소의 표정을 본 순간 나도 모르게 답했다.
“2주 아니 일주일?”
“아싸! 내일 자랑해야지. 영희랑 순이랑 철수랑······.”
미소가 손가락을 꼽으며 자랑할 애들의 이름을 부르는 동안 난 맛집 프로그램 PD들에게 다급히 까톡을 보냈다.
일주일 만에 미소를 데뷔시키고 프로그램 고정도 얻어내야 했으니까.
* * *
덜컹!
이기철 이사의 방문이 열리고 김동수 실장이 급히 뛰어 들어왔다.
“이사님. 붉은달 이 대표가 부탁할 게 있다면서 좀 보자고 합니다.”
“이 대표가? 언제?”
“오늘 저녁입니다.”
“쯧. 무슨 일정을 이런 식으로 잡나 그래?”
배우 1실과 배우 3실 소속의 배우 중 붉은달이 제작하는 드라마에 출연하는 이들의 수만 12명이 넘으니 붉은달이 갑 굴렁쇠가 을인 입장이다.
즉 붉은달의 부탁이라면 쉽게 거절할 수 있는 상황이 안됐다.
김동수 실장은 이상식 대표가 말한 부탁을 전했다.
“그러니까 유진이하고 가벼운 술자리 한번 주선해주면. 섭섭지 않게 찔러 주겠다?”
“예. 중국 쪽에서 엄청난 VIP가 들어오시는데 유진이의 팬이라고 합니다. 자리만 만들어 주면 뒤는 알아서 하겠다는군요.”
“엄청난 분이라면 누구?”
“화연 미디어 그룹 회장님이시랍니다.”
이기철 이사가 고개를 갸웃한다.
“화연이면 장웨이 회장 아냐? 그런 거물이 한국은 왜 온대?”
“한국으로의 진출을 타진 중이라고 하더군요.”
소파에 몸을 기댄 이기철 이사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야~. 이 대표. 능력도 좋네. 그런 거물이랑 놀고. 근데 왜 우리에게 연락했대? 유진이는 정 대리가 관리하잖아.”
“안 그래도 저도 물었더니 정 대리가 단칼에 거절했다는군요.”
이기철 이사가 피식하고 웃는다.
“하여튼 그놈 제정신이 아니라니까. 한낱 대리 놈이 화연 회장 제의를 까? 겁이 없는 거야 개념이 없는 거야?”
잠깐 고민하던 이기철 이사가 커피를 마시며 손을 휘휘 저었다.
강감찬 대표의 라인이 된 정윤호를 건드는 건 쉬운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없던 일로 해. 그 미친놈이 가만히나 있겠냐? 우리가 납치라도 하면 또 모를까.”
김동수는 소극적인 이기철 이사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기 이사님.”
“왜?”
“강 대표님도 없으니까 이제 이 이사님이 회사의 주인 아닙니까? 이제 좀 강하게 나가 보시죠?”
“강하게?”
“회사의 주인으로서 정당한 업무 지시를 내리는 것 정도는 할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김동수의 말에 이기철 이사가 헛기침을 했다.
“크흠. 그 그렇기야 하지. 하지만 강 대표가 돌아오면 문제가 커지지 않겠어? 강지영 고년도 눈에 불을 켜고 내가 실수를 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연예인을 영입하며 기회를 노리고 있다지만 여전히 강감찬 대표가 신경 쓰이는 이기철 이사였다.
강감찬 대표가 휴가로 자리를 비웠는데도 주주들은 여전히 자신보다는 강감찬 대표를 더 신뢰했으니까.
이기철 이사의 대답을 들은 김동수는 노골적으로 실망감을 드러내며 말했다.
“이사님이 늘 그렇게 주저주저하시니까 투자자들이 강 대표를 더 믿는 거 아닙니까!”
“야! 김동수! 너 지금 뭐랬어?”
투자자들에게서 신뢰받지 못한다는 말은 이기철 이사에게는 금기와도 같았다.
“이런 말씀 죄송합니다만 이사님을 위해 드리는 충언입니다. 언제까지 강 대표 눈치만 보고 사실 겁니까?”
씩씩대던 이기철 이사가 털썩 주저앉았다.
사실 김동수의 말도 틀린 건 아니었으니까.
“끄응. 그래서 어쩌라고?”
이기철이 애써 화를 삭이자 김동수는 자신이 알아낸 사실을 말했다.
“실은 강 대표가 휴가를 간 게 아니랍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부부가 같이 몇 달간 미국 일주하고 유럽까지 돌고 온다고 했잖아.”
김동수가 고개를 저었다.
“조금 의심스러워서 제가 따로 알아봤는데 지금 강 대표. 존스홉킨스 병원에 있습니다. 뇌수술을 마치고서 회복 중입니다.”
“뭐······ 뇌 수술을 해?”
“예. 수술은 무사히 끝나 회복 중인데 그렇다고 해도 부위가 부위니 8월까지는 돌아오기 힘들 거 같습니다. 거기다 재활까지 한다면 더 늦춰질 수도 있고요.”
“뇌 수술이면 복귀가 힘들 수도 있겠네?”
이기철 이사가 고민에 빠졌다.
이 정보가 틀리지 않았다면 지금이야말로 굴렁쇠 엔터의 주주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어필할 기회니까 말이다.
“주주분들은 제가 관리할 테니까 이사님이 이제 크게 보고 움직이십시오. 장웨이 회장은 이번 만남을 조건으로 붉은달에 100억을 투자한다고 합니다.”
“여자 한 번 만나는 데 100억? 고작 술 한 잔에?”
이기철 이사가 놀란 표정을 짓자 김동수가 씨익 웃는다.
“흐흐. 그럴 리야 있겠습니까? 일단 만나기만 하면 넘어뜨릴 자신이 있으니 저러는 거지요.”
“좋아. 그러면 난 뭘 하면 되지?”
“이 대표가 바라는 대로 자리 주선만 하시고 저흰 떨어지는 콩고물만 먹으면 됩니다.”
“자리 주선 정도라면야 추진해 볼 수도 있겠군. 이리됐든 저리됐든 장 회장이랑 인사해 두면 우리도 좋을 거고.”
“예. 대표이사님.”
“어허! 이 사람. 아직은 아니지.”
“흐흐. 곧 올라가실 텐데요. 뭘.”
김동수의 사탕발림에 이기철 이사의 얼굴은 흥분으로 달아올랐다.
* * *
드라마도 보고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덧 밤 10시가 되었다.
조금 전부터 미소의 눈꺼풀이 감기는 걸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소야. 그럼 잘 자고 내일 또 보자.”
엄마 품에 안겨 꾸벅꾸벅 졸던 미소가 조막만 한 손으로 내 바지를 붙들었다.
“나 나 안 졸려요. 삼촌.”
왼쪽 눈은 아예 뜨지도 못하면서 안 졸린다고 우긴다.
유진이가 미소를 말렸다.
“안 돼. 미소야. 삼촌 가셔야지.”
미소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가지 말라고?”
“응!”
내가 뭐 그리 좋다고 매번 헤어지기 싫다고 투정을 부리는지.
하지만 속으로는 고마웠다.
내게도 이렇게 늘 보고 싶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말이다.
“미소야. 내일 또 올게. 자고 일어나면 삼촌이 눈앞에 딱 있을 거야.”
“꼭?”
“응!”
“알았어요. 삼촌 빠이~.”
미소가 흐느적흐느적 손을 흔들더니 아쉬운 표정으로 엄마의 품에 머리를 기댔다.
곧 미소의 눈이 완전히 감기더니 엄마 품에 안겨 잠에 빠져들었다.
“유진아. 김수희 선생님이 말씀하신 노인정 봉사는 내가 따로 알아보고 연락 줄게. 3 4일은 걸릴 거야.”
“네. 오빠.”
유진이가 배웅한다며 대문까지 따라 나왔다.
그런데 그때 이기철 이사의 전화가 걸려왔다.
-정 대리. 지금 뭐 해?
“유진이 스케줄이 끝나서 이제 집에 가려는 중입니다.”
대충 말을 둘러대자 이기철 이사는 다행이라며 다급히 말했다.
-잘됐군. 지금 유진이 데리고 강남에 있는 에비앙으로 와.
에비앙은 룸이 따로 구비된 고급 바였다.
하지만 이 늦은 시간에 왜?
“이사님. 밤 10시가 넘었습니다.”
-야. 일하는 데 밤낮이 따로 있냐? 상황이 급하니까 바로 오라고. 주소는 찍어 줄 테니까.
이기철 이사는 더는 자세한 말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엔터 업계는 기본적으로 사무실의 안과 밖을 가리지 않고 일을 한다.
그렇기에 무턱대고 이기철 이사의 업무 지시를 무시할 수 없었다.
특히나 강감찬 대표가 없는 동안에는 이기철 이사가 최고 결정권자니까.
유진이가 자신의 어깨에 기대 잠에 빠진 미소를 안아 든 채 걱정스레 묻는다.
“오빠. 저 지금 가야 해요?”
“아니. 넌 그냥 집에 있어.”
“같이 오랬잖아요.”
난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일인지도 모른 채 유진이를 데려갈 수 없었으니까.
“괜찮아. 나만 믿고 폰은 아예 꺼 둬. 오늘 너무 힘들어서 쉰다고 말할 테니까 말 잘 맞추고. 급하면 미소 폰으로 연락할게.”
“알았어요.”
“그럼. 간다. 내일 봐.”
이기철 이사가 부른 장소로 홀로 향했다.
무슨 일이 생길지 알지도 못한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