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1화
141. 영원한 1등은 없다 2
고급 중식 레스토랑 화룡의 천장에는 붉은색 용이 걸려 있고 가로로 늘어선 12개의 붉은 기둥에는 금빛 용이 음각으로 새겨진 채 번쩍이고 있었다.
분위기에 압도된 유진이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여기 진짜 비싼 데 같은데. 괜찮을까요?”
“비싸긴 한데 큰맘 먹으면 못 올 정도는 아냐. 1인당 10만 원 정도?”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유진이가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어떻게 밥 한 끼에 10만 원을 내고 먹어요? 그거면 국밥이 몇 그릇인지 아세요?”
얻어먹을 땐 그런 계산하고 싶지 않거든?
이지연 작가가 한 해 벌어들이는 돈이 얼만데.
“국밥이 스무 그릇이에요 오빠.”
“알아. 그래도 조용히 해. 얻어먹을 땐 그런 말 하는 거 아냐.”
“그래도 셋이면 국밥이······”
모든 걸 국밥으로 계산하는 유진이 때문에 약간은 심란한 마음이 들었다.
눈치를 살피는 유진이를 조용히 시킨 뒤 안내하는 직원의 뒤를 따랐다.
직원을 따라 예약한 7번 방으로 들어가자 미리 상이 세팅되어 있었다.
1인당 무려 15만 원짜리 코스요리인 ‘화요’ 코스였지만 유진이에게 금액을 말하진 않았다.
또다시 국밥이 몇 그릇인지 계산할 것 같아서.
“많이들 들어.”
“감사합니다. 작가님.”
이지연 작가가 젓가락을 들자 코스요리가 하나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음식을 먹는 동안 유진이는 이지연 작가가 해주는 연예계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어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난 다이어리에 적힌 붉은달의 부도를 어떻게 알려야 할지 고민에 빠져 있었다.
[에브리데이 V10]
[날짜 : 2020년 8월 5일]
-PM 11:00 드라마제작사 붉은달 부도 대책 회의. 6F 회의실
<신의 이름으로>는 당장 다음 달 초인 7월 1일에 크랭크인이 예정되어 있다.
MBS의 방송 편성은 다음 달 말인 7월 29일인데 붉은달의 부도는 8월 5일.
즉 <신의 이름으로>가 2화가 방송된 시점에서 제작사가 부도가 나버린단 소리다.
회귀 전 한창 방송 중이던 붉은달이 제작하던 드라마들은 급격한 시청률 하락을 겪는다.
회사가 부도난 탓에 제작 스태프들이 돈을 못 받을까 전전긍긍했고 배우들은 분위기에 휘말려 연기에 집중하지 못했으니까.
그나마 방송국들이 급히 나서 수습을 하긴 했지만 엉망이 된 스태프들의 사기를 완벽히 회복하진 못했었다.
당시 붉은달은 <신의 이름으로>의 제작 실패가 투자금 회수 때문이라고 알려졌었다.
하지만 지금 보니 붉은달의 대표 이상식이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이 100%였다.
어쨌건 그 일이 일어난다는 걸 이지연 작가에게라도 알려야 했다.
나는 젓가락을 놓고서 깐쇼새우를 맛있게 먹고 있는 이지연 작가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작가님.”
“왜? 중식은 별로야? 왜 도통 먹지를 않아?”
별로일 리가.
없어서 못 먹는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작가님. 붉은달과 연락하신 지 얼마나 되셨습니까?”
“음. 지난번 최준우 교체 사건 이후로 알아서 잘하기에 한동안 놔뒀어. 최근에는 대본 수정을 한다고 바빠서 연락 못 했고.”
앞접시에 깐쇼새우 하나를 더 덜어놓던 이지연 작가는 굳은 내 표정을 보고서 젓가락질을 멈췄다.
“할 이야기 있으면 해. 붉은달에 문제라도 있어?”
“······아무래도 재정 상황이 많이 안 좋은 거 같습니다.”
이지연 작가가 한숨을 내쉰다.
“유노가 내게 헛소리를 할 리는 없고. 그래. 얼마나? 얼마나 안 좋은데?”
“드라마 제작이 엎어질 정도로요.”
이지연 작가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렇게까지 돈이 없다고? 천하의 붉은달이? 드라마제작사 1위가?”
“예. 제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다음 달을 넘기기 힘들 거 같답니다. 8월 초 정도면 사고가 터질 거 같고요.”
이지연 작가가 깐쇼새우를 가만히 바라보다 그대로 내려놓았다.
“입맛이 뚝 떨어지네.”
“죄송합니다. 작가님. 더 일찍 말씀드려야 했는데 확인하느라 늦었습니다.”
“아냐. 유노가 신도 아닌데 그런 것까지 어떻게 다 알아? 미안해할 것 없어.”
잠깐 고민하던 이지연 작가의 입이 다시 열렸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지금 한번 붉은달에 가볼까? 유노랑 유진이도 같이 가자.”
“예? 저랑 유진이는 왜?”
“왜긴. 내가 지금 보조작가가 있니 매니저가 있니. 그렇다고 유진이 혼자 집에 보낼 수도 없잖아. 그냥 다 같이 가서 직접 확인이나 해보자고. 직접 가보면 확실해지겠지. 안 그래?”
“끄응. 그럼 그렇게 하시죠.”
우린 식사를 채 마치지도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은 음식을 싸가자고 하는 유진이의 눈빛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말이다.
“오빠 음식 남은 거 다하면 국밥이······”
유진이가 내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지만 다시 한번 무시해 버렸다.
“안 들린다 안 들려.”
* * *
붉은달은 MBS PD 출신의 이상식 사장이 설립한 한국 최고의 드라마제작사다.
명실상부한 한국 제1의 제작사라는 명성에 걸맞게 최근에는 영화 제작에까지 손을 뻗치고 있기도 했고.
그런데 회사 앞에 도착한 순간 이 회사가 왜 자금난을 겪게 되었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회삿돈을 부동산에 다 썼네.’
최근 새롭게 건축한 10층짜리 신사옥은 강남역 3번 출구 인근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화려한 건물이다.
앞서 <신의 이름으로>의 제작이 엎어져서 받은 타격보다 이 신사옥을 지으며 소비한 돈이 백 배 천 배는 더 많아 보였다.
끼익.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 차를 댄 우리 일행은 곧장 로비로 올라갔다.
“구석구석까지 으리으리한데요.”
이지연 작가가 혀를 내둘렀다.
“그러게. 전에 왔을 땐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사이 인테리어를 다시 했나 봐.”
건물 내벽은 모두 최고급 대리석으로 깔려 있어 대기업 본사 건물에나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데스크 안내 직원은 이지연 작가의 얼굴을 보자마자 급히 인터폰으로 연락을 하더니 우릴 대표이사실로 안내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이번에는 바닥 전체에 깔린 고급 카펫이 보였다.
이 정도면 한마디로 건물을 돈으로 도배해 놓은 거다.
“저쪽입니다.”
대표이사실로 들어가자 이상식 대표가 환히 웃으며 우릴 반겼다.
“아이고! 이 작가님. 어떻게 연락도 없이!”
“왜? 내가 못 올 데 왔어?”
“하하하. 농입니다. 원하신다면 최고층에 작가님 작업실을 내준데도 거절하시더니 괜히 까칠하게 그러신다.”
붉은달의 재정 불안에 대해 들은 탓에 이지연 작가가 싸늘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됐고. 나 오늘은 제작 상황 체크 하러 왔으니까 그렇게 알아.”
이상식 대표는 움찔했지만 이내 안색을 바꾸고 답했다.
“어휴. 왜 또 심술이세요? 지난번 일도 제가 잘 처리했지 않습니까? 이번엔 실수 없을 테니 제발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난번 일이란 최준우 사건으로 드라마가 엎어진 걸 말한다.
“그거야 보면 아는 거고.”
이상식 대표는 곤란한 듯 유진이를 보며 슬그머니 말을 돌렸다.
“오늘은 유진 씨도 데리고 오셨네요.”
이상식 대표가 고개를 까딱 숙였다.
“반가워요. 유진 씨. 파란 하늘 잘 보고 있어요. 중반에 들어서도 힘이 빠지지 않는 걸 보니 종방 전까지 25%는 너끈히 넘기겠던데요.”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내 차례가 되었다.
그런데 날 쳐다보는 이상식 대표의 눈빛은 그렇게 호의적이지가 않았다.
“그쪽이 정윤호 대리?”
“예. 반갑습니다. 이 대표님.”
“큼! 그쪽이 일을 키운 덕분에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알아? 미리 우리 쪽에 알렸으면 어련히 잘 처리했을 텐데 말이야.”
내가 최준우 사건을 터트린 장본인이니 곱게 보지는 않을 거라는 것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내 탓인 것처럼 말할 줄은 몰랐다.
드라마가 방영되다가 엎어지는 걸 막았으니 최악의 상황으로 흘러가는 걸 막아준 셈이다.
그런데 고맙다는 인사는커녕 원망의 화살을 내게 돌린다고?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태연하게 인사를 받았다.
곧 부도가 나서 사라질 회사의 대표와 날을 세울 이유가 없었으니까.
“제가 아직 경력이 부족해서 큰 실수를 했습니다.”
“아니 뭐. 실수랄 거까지야. 아무튼 지나간 이야기는 덮고 새롭게 시작하자고.”
뻔뻔하게 웃는 이상식 대표는 인사를 마치자 현재의 제작 상황에 대한 장황한 브리핑을 시작했다.
어마어마한 제작비를 들이고 제대로 된 스태프를 붙여 <신의 이름으로>를 최고의 드라마로 만들 거라고.
하지만 이지연 작가는 이상식 대표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한 가지 요구 사항을 말했다.
* * *
“······ 그래서 못 해주겠다고?”
“작가님. 드라마 제작비를 이렇게 갑자기 별도의 위탁 계좌에 충당해 놓으라시면 어떻게 합니까?”
위탁 계좌에 들어간 돈은 회사가 부도나도 드라마 제작비 외에는 쓸 수가 없다.
그러니 제작비를 위탁 계좌에 넣는다는 것만으로도 회사 재무 상황이 튼튼하다는 걸 증명하는 셈이다.
이지연 작가는 업계에서 통용되는 방법으로 붉은달의 재무 상황을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예상한 대로 이상식 대표는 곤란한 표정으로 이지연 작가의 제안을 거절했다.
“저희 회사가 제작하는 드라마가 20개가 넘습니다. 돈이 돌고 돌아야 하는데 신의 이름으로 하나에 돈을 묶어두면 자금 유동성에 문제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못 하겠다고?”
“못 하는 게 아니라 사정이 그러니 이해해주십사 하는 거죠.”
이지연 작가가 이상식 대표의 눈을 가만히 쳐다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내가 무리한 걸 요구했나 봐. 미안해.”
이지연 작가가 순순히 일어났다.
“유진. 유노. 인사 끝났으니까 가자.”
온 지 10분도 안 되어 일어나자 이상식 대표가 이지연 작가를 다급히 붙잡았다.
“어이쿠! 오래간만에 이렇게 오셨는데 그냥 가시면 제가 섭섭합니다. 식사라도 함께하시죠.”
“아냐. 우리 막 밥 먹고 왔으니까 신경 쓰지 마.”
이상식 대표가 연신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다음 주에 여배우 오디션 할 때 뵙겠습니다. 이번에 지원자만 2천 명이 넘습니다. 으하하.”
호탕하게 웃는 이상식 대표의 얼굴은 자신만만하기만 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배웅을 나온 이상식 대표가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정 대리. 오늘 유진 씨 스케줄 있나?”
“예. 스케줄이 2개 정도 있습니다.”
이상식 대표와는 어울리고 싶지 않았기에 거짓말을 내뱉었다.
이상식 대표가 실망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다시 한번 압박을 해왔다.
“그 스케줄 좀 미루면 안 될까? 마침 오늘 중국 쪽 투자자 한 명이 오는데 그분이 유진 씨의 엄청난 팬이거든.”
“팬이요?”
“그래. 장웨이라고. 상하이 쪽 미디어 재벌인데 한국에 오면 꼭 유진 씨를 보고 싶다 하셨어.”
순간 난 이상식 대표의 면상에 주먹을 꽂을 뻔했다.
장웨이 회장.
화연 미디어 그룹의 회장인 그는 여색을 밝히기로 유명한 인간이다.
투자를 빌미로 한국 쪽 여자 연예인들과 술자리를 가지며 차마 입에도 담기 힘든 짓을 하곤 했었고.
그런 미친놈을 소개해 준다며 생색이라니.
난 끓어오르는 화를 식히느라 애를 써야 했다.
장웨이의 엽색 행각은 앞으로 몇 년 뒤에나 사람들이 알게 될 것들이니까.
“죄송합니다만 빼기 곤란한 스케줄입니다.”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이상식 대표의 인상이 구겨졌다.
“쯧. 젊은 친구가 이렇게 사회생활 갑갑하게 해서 어떻게 하려 그래? 앞으로 나랑 일 안 할 거야?”
이상식 대표가 언짢은 기색으로 재차 말을 꺼내는 순간 이지연 작가가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대표. 그 스케줄 중 하나가 내 건데 계속 그렇게 짜증나게 할 거야?”
이상식 대표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제가 사정을 몰라서 실수했군요. 죄송합니다. VIP 손님이 워낙 유진 씨를 좋아하신다기에······.”
“흥! 좋아하면 드라마나 실컷 돌려 보라고 그래!”
이상식은 애써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하하하. 안 그래도 많이 돌려 보십니다. 그리고 작가님 팬이기도 한데 언제 식사 자리 다 같이 한번 만들겠습니다.”
이지연 작가는 긴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없는지 매정하게 고개를 돌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주차장으로 내려오자 이지연 작가가 씩씩대며 말한다.
“이번에도 유노 말이 맞았네. 그놈. 돈 없어.”
얼마나 화가 났는지 이지연 작가는 이상식 대표를 그놈이라 표현했다.
이지연 작가가 제작사 변경을 마음먹었다는 걸 확인한 순간 쐐기를 박기 위해 물었다.
“작가님. 그러시면 제작사를 교체하실 생각입니까?”
“그래야지. 지난번에 편성이 엎어지고 나서 다시 계약할 때 혹시나 해서 계약 해지가 쉽도록 조항을 넣어뒀거든.”
지난번 최준우의 의혹이 터졌을 때.
붉은달은 한동안 이지연 작가의 말을 듣지 않고 계속 최준우를 쓰겠노라며 버틴 적이 있었다.
덕분에 큰 곤란을 겪을 뻔한 이지연 작가는 약간의 위약금만 지불하면 즉각 계약을 파기할 수 있는 조항을 넣어 재계약을 했다고 한다.
이지연 작가는 곧장 자신의 개인 변호사에게 지시를 내렸다.
“응. 김 변. 우리 집으로 계약서 좀 들고 와. 붉은달이랑 계약 해지할 거니까 준비 제대로 해서 오고.”
전화를 마친 이지연 작가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유진이가 듣지 못하게 낮은 목소리로 경고를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