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0화
140. 영원한 1등은 없다 1
연기 테스트를 하겠다는 김수희의 말에도 유진이는 전혀 기가 죽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투쟁심마저 드러낸다.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김수희가 싸늘하게 웃는다.
“열심히 해서 이쁜 건 학생 때고 프로는 잘해야지.”
마치 시베리아 한 벌판에 선 듯한 냉기가 풀풀 풍겼다.
“그럼 잘하겠습니다!”
“기세 하나는 좋네. 그럼 2층으로 가. 지연이가 레슨 룸을 준비해 놨으니까.”
우린 테스트를 위해 이지연 작가의 비어 있는 2층 방으로 향했다.
이지연 작가의 2층 빈방은 벽면 전체가 전신 거울로 되어 있고 바닥은 요가 매트가 깔려 있었다.
가로와 세로의 길이가 8m는 되어 보일 정도의 큰 방 한가운데 유진이가 자리했다.
“대본 필요해?”
김수희의 질문에 유진이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다 외웠습니다.”
“싹수는 있구나. 그럼 씬 23. 만신 월아가 굿하는 씬. 알지? 그것부터 보자.”
<신의 이름으로>의 씬 23은 대한민국 최고의 무당 만신 월아가 사주팔자가 꼬인 의뢰자의 팔자를 바꿔주는 굿을 펼치는 장면이다.
유진이가 천천히 심호흡하며 자세를 가다듬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몇 초.
유진이의 어깨가 들썩거리더니 천천히 몸을 앞으로 굽히기 시작했다.
조금씩 조금씩 허리가 굽었다.
마치 순식간에 50년을 늙어가듯.
만신 월아는 워낙 천기누설을 많이 한 탓에 65세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겉으로는 80대로 보인다는 설정이다.
바로 지금 유진이의 모습처럼.
등을 돌리고 있어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허리가 굽고 어깨가 쪼그라든 그녀의 뒷모습은 그야말로 고생한 노인과 같아 보였다.
지난 몇 주간 유진이가 만신 월아에 대해 수없이 고민하고 또 고민한 결과가 이곳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곁에 있는 이지연 작가도 나만큼 놀랐는지 연신 감탄을 터트렸다.
“언제 저렇게까지 준비했대?”
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고 대답하려는 순간.
유진이의 연기가 시작됐다.
『네 이년! 이 늙은이가 그 간악한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고자 그리 애를 썼거늘! 결국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갔구나!』
유진이의 입에서 높은 고음과 낮은음이 넘나들며 히스테릭한 노인의 목소리가 나온다.
허공에 대고 한바탕 욕을 해대던 유진이가 왼손을 들어 올렸다.
동시에 감고 있던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런데.
유진이의 눈은 검은 동자가 보이지 않고 새하얀 흰자위만 보였다.
‘뭐야 이거?’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를 뻔했다.
새하얀 눈을 뜬 유진이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김수희와 이지연 작가가 유진이의 연기에 흠뻑 빠져 있었기에 가까스로 입을 막고 유진이의 연기를 살폈다.
새하얀 흰자위를 가득 채운 유진이가 어깨를 들썩이며 춤을 추기 시작한다.
덩실덩실.
발뒤꿈치를 들어 올린 유진이가 빠른 걸음으로 원을 그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존님아. 천존님아~ 내 말 좀 들어주소~ 천관부~ 지관부~ ······ 내 말 좀 들어주소~.』
종종걸음을 걷는 유진이의 걸음이 빨라질수록.
경을 외는 속도와 맞닿은 손을 비비는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옥추경의 송경 소리에 이명이 생길 정도였다.
그렇게 한참이나 씬 23의 연기를 펼친 유진이는 접신을 마무리 지으며 휘파람 소리를 내었다.
휘이~.
살짝 벌어진 유진이의 입술에서 거친 숨소리가 흘러나오며 씬 23이 마무리되었다.
“허억. 허억.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난 급히 다가가 휘청이는 유진이를 부축했다.
“괜찮아? 일어나 봐.”
“잠깐만요. 오빠. 허 허리가······ 아파서.”
유진이가 인상을 찌푸리며 앓는 소리를 했다.
“일단 내 손 잡고 천천히 허리 펴 봐.”
“네.”
유진이가 천천히 허리를 펴기 시작하자 한동안 구부리고 있었던 탓에 뼈에서 뚝뚝하는 소리가 났다.
우두둑!
“아야! 살살 좀!”
“엄살은.”
“엄살 아니거든요!”
유진이의 죽는소리가 그치지 않기에 오른손을 내밀었다.
“내 팔 잡아 봐.”
유진이가 두 팔을 뻗어 내 오른손을 잡는다.
그 틈에 난 왼손으로는 그녀의 등에 가져다 댔다.
버티고 일어날 수 있도록.
“어? 편하다.”
그제야 유진이가 수월하게 허리를 폈다.
“벽에 몸을 붙이고 그대로 서 있어 봐. 내가 허리를 좀 눌러 줄 테니까.”
손바닥을 쫙 펴서 조금씩 허리를 눌러주자 당황하던 유진이의 얼굴이 금방 밝아졌다.
“으으으. 와~ 진짜 시원하다.”
유진이의 입에서 감탄사가 튀어나온다.
“오빠. 마사지 배웠어요?”
“어. 배웠어.”
“그럼 앞으로도 종종 좀 해주세요. 와 살 거 같다.”
“그럴게.”
장거리 운전을 하다 보면 매니저도 연예인도 근육이 뭉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회귀 전에 전문적으로 배웠었다.
‘주영인도 내가 마사지해 주는 걸 참 좋아했었는데······. 아냐 지금. 뭘 생각하는 거냐 정윤호. 정신 차려!’
난 머리를 흔들어 잡생각을 떨치고는 김수희에게 시선을 돌렸다.
합격이냐 실패냐의 대답이 나오는 순간.
김수희는 가만히 유진이를 보다 쏘아대듯 물었다.
“너 대체 뭐니?”
“예?”
“아니 어떻게 이런 연기를 해?”
곁에 있던 이지연 작가는 불안한 표정을 보이던 처음과 달리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어때 언니. 가르칠 만해 보여? 테스트라며?”
김수희가 인상을 찌푸렸다.
“너 지금 장난하니? 내가 가르칠 게 마땅히 없는 것 같은데?”
천하의 김수희에게 이런 극찬을 받다니.
유진이가 내 배우라고 동네방네 외치며 뛰어다니고 싶었다.
연기 연습에 도움이 될까 싶어 무속 관련 다큐멘터리 녹화본과 영화와 드라마에서 경전을 읽는 자료들을 모아 줬더니 그것만으로 이런 연기를 해낼 줄이야.
김수희는 이지연 작가와 한동안 속닥이며 이야기를 하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지연아. 단 거 좀 내와. 젊고 이쁜 게 연기까지 잘하니 배가 아파 못 살겠어. 질투가 나서 그런지 단 게 확 당기네.”
이지연 작가가 날 힐끗 쳐다보며 외쳤다.
“정 대리. 커피 두 잔. 찐~하고 달게!”
* * *
호록!
커피를 마시며 이지연 작가가 김수희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왜!”
“그래서 합격?”
김수희가 기가 막힌다는 듯 혀를 찼다.
“야. 너 언니가 뻔한 질문 싫어하는 거 알지?”
“연기한 시간보다 햄버거 패티 구운 시간이 더 많은 신인이 천하의 김수희를 단번에 홀렸네~.”
자꾸 눈을 맞추며 자신을 놀리는 이지연 작가가 보기 싫은 듯 김수희는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홀리긴 누가 홀렸다고!”
“하여간 앞으로 유진이는 언니가 잘 좀 챙겨줘. 그래도 부족한 데가 있기는 할 거 아냐? 응? 내가 아끼는 애란 말이야.”
계속되는 재촉에 결국 김수희도 못 이기겠다며 두 손을 들었다.
“어휴. 끈질기긴. 알았어. 안 그래도 내가 짚어 줄 게 몇 개는 보이니까 도와줄게.”
김수희야말로 유진이에게 부족한 연륜을 채워줄 가장 좋은 선생님이 되어 줄 거다.
거기다 지금도 계속 연락하는 이사랑에 이어 대 여배우라 불리는 김수희까지.
유진이는 연일 선배들의 인정을 받으며 성장해가고 있었다.
이지연 작가와 대화를 마친 김수희가 유진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근데 혹시 따로 연기를 배우고 있어? 있으면 그 선생한테 계속 배우는 게 나아.”
유진이가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니에요. 작년에 잠깐 회사에서 레슨 받기는 했는데 이후로는 윤호 오빠가 시키는 대로 혼자 연습하고 있어요. 저희 회사 선생님과 저는 연기하는 타입이 다르다고 하더라고요.”
“그래?”
김수희가 날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
“왜 그랬어?”
“유진이는 눈으로 관찰하고 연기를 훔치는 타입인데 회사에서 붙인 선생님은 이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이라서요.”
“그 선생이라는 작자는 이름이 뭐야?”
“최현민 교수님입니다.”
“서예종 최현민 교수?”
“네.”
사실은 유진이에게 적대적인 사람을 떼 냈을 뿐이다.
하지만 그럴싸한 설명을 덧붙이자 나를 보는 김수희의 눈에 이채가 반짝였다.
“그쪽이 정확하게 봤어. 유진이 같은 타입은 정식 레슨을 받는다고 꼭 연기가 좋아지거나 하지는 않거든. 그쪽 혹시 연극 영화과 출신인가? 아니면 대학로?”
“아닙니다. 선생님. 그냥 매니저입니다.”
“그냥 매니저? 그럴 리가? 그냥 매니저가 그런 걸 알아?”
사실은 그냥 매니저가 아니라 회귀한 매니저지만.
이상하다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김수희는 다시 유진이에게 집중했다.
“뭐 그건 그렇다 치자고. 그보다 유진아. 넌 다 잘하는데 한 가지 빠진 게 있는 거 같더라.”
“빠진 거요?”
“연기 표정 목소리 다 좋은데 힘이 넘쳐. 만신 월아는 노인이야. 몰라?”
“아. 접신(接神)을 하면 몸에서 힘이 넘친다고 다큐에서 본 기억이 있어서요.”
접신은 무당이 굿을 하면서 신을 몸에 받아들이는 현상을 말한다.
“생각은 맞았는데 너무 과해. 직접 굿하는 현장을 찾아가 보는 것도 좋을 거야. 노인의 동작과 젊은 사람의 동작에는 큰 차이가 있으니까.”
“명심할게요 선생님.”
“아 맞다. 혹시 너희 집 근처에 노인정 있니?”
“노인정이요?”
김수희의 눈이 장난스럽게 반짝였다.
“좋아. 첫 번째 과제를 내줄게. 복지회관이나 노인정에서 딱 2주만 봉사활동을 해봐. 너처럼 눈썰미가 좋다면 충분하고도 넘칠 만큼 훔쳐낼 수 있을 테니까.”
경험만큼 좋은 스승이 없다.
꽤 와닿는 말이었다.
“추가 질문 없어? 궁금한 거든 뭐든. 이 김수희가 모처럼 선생을 해보기로 했으니까 질문 정도는 받아줘야지.”
유진이가 힐끔힐끔 눈치를 본다.
연기할 때 보였던 씩씩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약간은 주저하는 모습이다.
난 슬쩍 유진의 어깨를 건드렸다.
평소대로 하라고.
유진이가 한숨을 쉬더니 천천히 김수희에게 입을 열었다.
“······불안해요. 선생님.”
김수희는 그 질문은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되물었다.
“불안?”
“네. 선생님. 가끔 혼자서 연기하다 보면 이렇게 연기해도 되는 건지. 제가 하는 게 맞는 건지 두려움이 막 밀려와요.”
김수희 뭐 그런 걸 가지고 끙끙대냐며 나무랐다.
“그러면 난? 난 안 불안한 줄 아니?”
“선생님도 불안하시다고요?”
깜짝 놀라는 유진이의 모습에 김수희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이것아. 나뿐만 아니라 수십 년을 연기한 원로들도 똑같아. 방송에서야 마치 뭐가 된 것인 양 속 좋아 보여도 그게 다 허풍이야. MBS에 이성재 오빠 알지? 그분도 촬영 전날이면 아직 밤잠을 잘 못 주무셔.”
경력이 60년이 다 된 한국 최고의 원로 배우 이성재도 연기는 늘 불안하고 겁이 난다고 말할 정도라니.
“그러니까 불안에 지지 말고 그걸 원동력으로 삼아 봐. 성재 오빠도 그 불안감이 오히려 자신에게는 좋은 자극제가 된다 하시더라. 덕분에 매일매일 나태해지지 않는다고.”
“아······.”
한 마디 한 마디를 무심한 듯 시크하게 말하는 김수희의 조언은 금과옥조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유진이는 그 조언을 빠짐없이 머릿속에 새기고 있었다.
* * *
김수희와는 일주일에 한 번 레슨을 받기로 약속했다.
“과제 까먹지 말고.”
“네. 선생님.”
김수희의 스케줄이 워낙에 많다 보니 아쉽지만 오늘은 여기서 작별이다.
김수희를 배웅하고 나자 이지연 작가가 우릴 주차장으로 이끌었다.
“두 사람은 나랑 밥이나 같이 먹자. 식당 예약해 뒀어.”
“아 저희가 사겠습니다.”
“됐어. 우리 집에 온 손님인데 왜 너희가 사. 화룡이라고 근처에 맛있게 하는 집 있거든. 유명한 곳인데 이름은 들어봤나 모르겠네.”
알다마다.
화룡은 최저 10만 원인 코스요리만 파는 한남동 최고급 중식 레스토랑.
코스요리에 포함된 소롱포와 멘보샤 그리고 베이징 덕이 일품인데 주영인과 자주 가던 곳이다.
때마침 잘 됐다 싶다.
이지연 작가와 상의해야 할 일이 하나 더 남아 있었으니까.
“가시죠. 작가님. 운전은 제가 하겠습니다.”
“어머. 그래? 그래 주면 나야 고맙지. 나 운전은 젬병이거든.”
난 이지연 작가에게 차 키를 받은 뒤 운전석으로 올랐다.
시동을 걸기 전.
난 이지연 작가와 상의할 일을 확인하기 위해 다시금 다이어리 앱을 확인했다.
그런데 앞으로 두 달 후.
<신의 이름으로>를 제작하는 업계 1위 드라마제작사 ‘붉은달’이 부도가 난다는 일정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