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화
14. 변하지 않는 시청률 2
박은빈뿐 아니라 마동팔 본부장도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전혀 딴판이다.
“니가 우리 은빈이 역할을 훔쳐 간 걔냐? 흐흐. 반반하게 생겼네.”
부창부수다.
아니 그 연예인에 그 매니저인가?
“본부장님도 참. 반반하긴 뭐가 반반하다고. 업계 짬이 몇 년인데 성형한 것도 못 알아봐요?”
성형 같은 소리 하네.
박은빈 너야말로 압구정 신의 손의 솜씨를 빌린 게 한두 군데가 아니면서.
어쨌건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중이었기에 근처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가벼운 인사를 나누는 것처럼 보일 거다.
그러니 여기서 발끈하면 오해를 살 수 있다.
유진이에게 위아래도 모르는 버릇없는 신인이라는 프레임을 뒤집어씌울 생각일지도 모르고.
두 사람의 험한 말에 얼이 나간 유진이의 어깨를 툭 하고 건드렸다.
‘유진아 웃어.’
활짝 웃는 내 얼굴을 본 유진이가 날 따라 미소를 머금었다.
그다음 우린 마동팔 본부장과 박은빈을 바라보며 큰소리로 다시 한번 인사를 건넸다.
“이쁘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신인 배우 정.유.진입니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거친 도발에도 유진이와 내가 전혀 흔들리지 않자 박은빈과 마동팔의 표정이 오히려 X 씹은 것같이 변했다.
“배우 멘탈이 좋네. 매니저도 깡이 있고. 그래.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인사나 하지?”
마동팔 본부장의 말에 손을 내밀었다.
악수라 생각했지만 마동팔 본부장이 유치한 짓을 해왔다.
두툼한 그의 오른손이 내 오른손을 꽉하고 붙잡았다.
우드득.
내 손가락 관절에서 요란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신음을 내지 않느라 참았더니 이마 위로 굵은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이 인간이······.’
나 역시 힘을 줘 그의 힘에 맞섰다.
그사이 박은빈은 유진이를 향해 말로 시비를 걸어댔다.
하지만 유진이는 생글대며 웃기만 할 뿐이었다.
마치 영혼 없이 진상 고객을 대하는 아르바이트생처럼.
결국 성질 급한 박은빈이 먼저 발끈하고야 말았다.
“야. 밀가루 반죽. 뭐가 좋다고 그리 실실 쪼개? 하여튼 두고 봐. 내 대본 뺏어 먹은 일은 반드시 몇 배로 돌려줄 테니까.”
하지만 두고 봐도 별일 없다.
어차피 박은빈은 앞으로 2년 뒤 커다란 스캔들 한 방으로 나락으로 떨어지니까.
“힘이 제법이군.”
쁘띠엔젤들이 웅성대자 마동팔 본부장이 슬그머니 내 손을 놓는다.
그리고 박은빈을 향해 재촉했다.
“은빈아. 시간 없다. 박 PD님에게 인사드리러 가야지.”
기 싸움을 마친 두 사람이 우리를 스쳐 지나치자 쁘띠엔젤도 줄줄이 그 뒤를 따랐다.
박은빈이 사라지는 뒷모습을 본 유진이가 황당하다며 혀를 내둘렀다.
“오빠. 연예계는 원래 이래요? 진상 손님도 깜빡이는 넣고 들어오는데 박은빈 쟤는 뭐가 이렇게 훅 들어오는지. 와 정유진. 성격 많이 죽었다 진짜!”
영업용 미소를 지운 유진이가 팔을 걷으며 뒤늦게 씩씩거렸다.
“이 정도는 그냥 인사 정도라 생각하면 돼. 저런 애가 한둘도 아니고.”
“헐~ 대박. 이게 인사라고요?”
“그래. 그리고 여긴 카메라 앞에선 참는 게 이기는 판이야. 그게 싫으면 인기를 얻어. 박은빈 정도는 감히 말도 못 붙일 정도가 되면 돼.”
“후우. 진짜. 내가 확 머리카락을 다 쥐어 뽑아······ 아니 그게 아니라 지금 여기 아무도 없죠?”
유진이가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좋은 태도야 정유진.
근처에 아무도 보이지 않자 안도하던 유진이는 내 손을 가리켰다.
“그런데 오빠 손이 왜 그래요?”
내 손 전체가 빨갛게 부어 있었는데 마동팔이 잡은 부위만 푸르딩딩하게 물들어 있었다.
“어디 잘못된 거 아니죠?”
“괘 괜찮아. 멀쩡해.”
피가 통하지 않아 감각이 없는 손을 황급히 뒤로 감췄다.
무대응이란 거 취소다.
내가 이건 꼭 갚아주고야 만다 마동팔.
주변을 정리한 나는 다시 한번 다이어리를 살폈다.
역시나 예상했던 것처럼 시청률이 변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박두식 PD에게 다가간 마동팔 본부장이 인사가 길어지고 있었다.
내 경험상 저건 단순한 대화가 아니다.
로비지.
결국 유진이의 촬영본이 방송에 나가지 못하는 건 마동팔 본부장이란 때문이란 걸 확신할 수 있었다.
* * *
씬 272는 박은빈과 최은영이 남친에 대한 복수를 두고 대화를 이어가는 씬이다.
유진이는 다음 씬에 등장할 예정이라 세트장 2층 저택으로 미리 올라가 대기 중이었고.
그런데 촬영이 시작되기 직전 쁘띠엔젤들이 모인 자리에서 술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박은빈이 연기를 시작하기를 기다리다 텐션이 너무 올라가 버린 탓이다.
박두식 PD가 인상을 찌푸리자 박은빈이 얼른 쁘띠엔젤들에게 다가갔다.
“얘들아. 쉿! 언니 눈치 보이잖니.”
박은빈이 직접 부탁하자 쁘띠엔젤 회원 중 제일 앞에 있는 폭탄 머리와 깻잎 머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언니. 얌전히 구경만 할 거니까요.”
“야. 너희 은빈 님 연기하시는데 입 벌리면 죽을 줄 알아?”
쁘띠엔젤의 회장인 폭탄 머리 김승애와 깻잎 머리 부회장 이진아가 뒤를 돌아보고 으르렁거렸다.
순간 쁘띠엔젤들은 일제히 입에 지퍼라도 채운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박은빈이 박두식 PD를 향해 싱긋 웃었다.
“시작하세요. 감독님.”
“은빈이 네 팬클럽이라 특별히 참관 허용한 거니까 앞으로도 계속 관리 좀 부탁하자. 큰소리 나오지 않게. 응?”
“네. 감독님.”
박두식 PD가 확성기를 잡고 씬 272 촬영을 외쳤다.
“자 카메라 준비됐으면 갑시다. 수정 대본 씬 272. 레디~ 악숀!”
박두식 PD의 신호가 떨어지자 촬영이 시작되었다.
여주인공인 최은영이 연기를 시작했다.
30살의 최은영은 원래 3년간 단역과 조연을 오가며 큰 빛을 보지 못했던 배우였다.
하지만 지금의 최은영은 21화까지 극을 끌고 온 저력을 뽐내기라도 하는 듯 여주인공다운 포스를 한껏 뿜어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연기를 모니터로 지켜보는 박두식 PD의 얼굴에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직전에 방영된 20화의 시청률은 무려 19.1%.
이제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20%였다.
이른바 대박을 치기 일보 직전이다.
케이블 방송과 종편이 출범한 이후 MBS 드라마가 죽을 쑨 지도 오래이니만큼 현장을 지켜보는 박두식 PD의 신경은 극도로 예민해져 있었다.
그런데 촬영이 진행되면 될수록 시청률을 잡아줄 감초 역할을 맡은 박은빈의 연기가 조금씩 엇나가고 있었다.
“박은빈 쟤 표정이 왜 저래? 우는 것도 아니고 웃는 것도 아니고.”
“아이돌과 발연기는 뗄 수 없는 한 쌍인가 보지 뭐.”
“그래도 좀 심하잖아 저거.”
현장 스태프들이 인상을 찌푸리며 작게 소곤거렸다.
박은빈이 학예회에 나온 유치원생 같은 형편없는 연기를 보여 주고 있었으니까.
배우 간의 케미가 필요한 상황에서 저런 발연기라니.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는지 박두식 PD가 급히 확성기를 들어 올렸다.
“커어~~엇뜨!”
박두식 PD가 곤란한 표정으로 박은빈을 불렀다.
“저기······ 은빈 씨. 잘했는데 어. 잘했어. 그런데 조금만 더 느낌을 살려서 가자. 수수하면서도 화사하게. 지문에 있는 그대로만 해 줘. 괜히 욕심내지 말고.”
“죄송해요. 감독님. 제가 너무 긴장했나 봐요.”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자자. 긴장 좀 풀고. 이번에 잘하면 되지. 그치?”
유진이를 대할 때와는 천지 차이다.
TK 엔터에서 제작 지원에 큰돈을 댔기에 대하는 태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은 이해한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박두식 PD의 격려에 박은빈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주연배우인 최은영에게도 사과했다.
뭐 여기까진 분위기가 괜찮았다.
문제는 그 뒤로 10번의 NG가 추가로 났을 때였지만.
* * *
“아 도저히 못 참겠네! 야 박은빈 너 제대로 연기 안 할래? 나 엿 먹이려고 일부러 이러니?”
주연 최은영의 날 선 목소리가 세트장을 울렸다.
스태프들이 깜짝 놀라 하던 일을 멈출 정도로 큰 소리였다.
박은빈의 연기가 워낙 어색하다 보니 주연 최은영이 드디어 참지 못하고 폭발해 버렸다.
세트장 2층에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던 유진이가 두더지처럼 창문으로 고개를 살짝 내밀었다.
두리번거리며 상황을 파악한 유진이는 내게 언제 연기를 시작하느냐고 묻는 포즈를 취했다.
이러다 잠들 거 같다며 두 손을 볼에다 가져다 대기도 했고.
검지 두 개를 X자로 만들어 보이자 유진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 촬영 못 할지도 몰라란 뜻이었는데 알아듣진 못한 거 같다.
2029년엔 현장에서 매니저와 배우가 무선 마이크와 인이어 이어폰으로 대화도 가능한데 여긴 아직 2019년.
기술의 발달이 느린 게 안타까울 뿐이다.
그런데 최은영의 짜증만으로 끝날 줄 알았던 상황이 급변했다.
박은빈이 짜증을 내며 선배에게 대든 탓이었다.
“제가 몇 번 실수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제대로 한 거 같은데요?”
박은빈의 대꾸에 갑자기 현장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비록 박은빈이 아이돌의 경력 5년 차지만 배우 판은 배우 경력만 인정한다.
그런데 고작 연기 경력 10개월 된 박은빈이 자기 인지도만 믿고 한참 연장자인 주연에게 맞서다니.
지금 촬영 중인 이 영상.
주간 스타 장문기에게 팔까 싶은 욕구가 물씬 솟아올랐다.
이거 대박인데.
-언니 나 싫어하죠?
딱 그 대사가 붙기 적합한 장면이다.
“은영 씨. 그만 해요.”
“거참. 보는 사람도 많은데. 정 AD 야 말려!”
“은빈 씨. 참아요. 팬들도 와 있는데······”
두 사람의 다툼에 스태프들이 말리려 했지만 최은영은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기가 막혀서. 어디서 잘했다고 고개를 뻣뻣이 들어? 그리고 이 대본이 그렇게 보여? 응?”
최은영이 대본을 흔들며 노려보자 박은빈이 그에 질세라 대본을 펴서 똑똑히 읽었다.
역시 독하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를 안 하고 자기 대사를 읊는 것 좀 봐.
“······봐요. 내 말이 맞잖아요.”
최은영이 경악하는 표정을 지었다.
“지 진짜. 네 눈에 그 지문이 그렇게 보여?”
“네. 그렇게 보이는데요?”
“어이가 없네. 못하면 겸손하기나 하든지. 그리고 어디서 따박따박 말대꾸야?”
두 사람의 다툼이 길어지자 더는 못 보겠는지 박두식 PD가 개입했다.
“은영 씨. 은빈 씨. 지금 뭐 해? 보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 순간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박은빈이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저것도 재능이다.
불리할 때 우는 거.
저런 연기는 되면서 왜 대본 소화는 못 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
저 연기력으로 맡은 연기나 잘하지.
“죄송해요. 감독님. 갑자기 대본이 바뀌어서 도저히 못 하겠어요. 어흐흑.”
박은빈의 눈에서 눈물이 폭포수처럼 떨어졌다.
화장이 지워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이다.
박두식 PD는 당황하고 최은영은 인상 쓰고 쁘띠엔젤이 뒤에서 떠들고 아주 난장판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돌아왔네.
돌아왔어.
이 난장판을 보니 연예계로 다시 돌아온 게 느껴진다.
미래 다이어리의 일정이 바뀌지 않는 문제만 아니면 팝콘 하나 튀겨놓고 보면 꿀잼인 장면인데.
두 사람 사이에 스태프들이 끼어들자 최은영은 잠깐 쉬고 오겠다며 현장에서 이탈해 버렸다.
그사이.
마동팔은 눈물범벅이 된 박은빈을 달래는 게 아니라 박두식 PD에게 다가가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다이어리가 바뀌지 않은 이유가 분명하게 드러났다.
대본 되돌리기.
마동팔은 박두식 PD에게 원래 대본으로 돌리자는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게 틀림없다.
박은빈이 대본이 바뀌어서 못하겠다고 한 말은 원래 대본으로 바꿔 달라는 억지였으니까.
결국 이거였어?
이지연 작가가 마지막 화 대본을 모두 넘겨 버린 탓에 현장에서 쿠데타가 일어나고 있었다.
대화가 이어질수록 두 사람의 표정이 점점 밝아지고 있었다.
누가 보면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죽마고우라고 착각할 정도다.
하지만 대본을 원래대로 되돌린다 해도 겁먹을 이유는 없었다.
이미 이 모든 상황이 녹화된 영상을 까톡으로 전송한 상태니까.
마동팔.
박은빈.
세상이 너희들 뜻대로 될 거 같냐?
“고생 좀 해 봐. 마동팔. 박은빈. 그리고 박두식 PD. 당신도.”
* * *
“그러니까 부탁 좀 하자고 박 PD. 약속했던 보상은 세 배로 줄 테니까.”
박은빈을 출연시키며 받기로 했던 뒷돈을 세 배로 올리겠다는 마동팔의 제안에 박두식 PD의 눈이 큼지막해졌다.
세 배면 어떤 위험도 충분히 감수할 만한 금액이다.
“그래도 이지연 작가와 맞서는 건 힘든데······.”
“거참. 이 작가는 우리가 알아서 한대도 그러네? 천하의 박두식 PD가 왜 이리 겁이 많아졌어?”
마동팔 본부장의 말에 박두식 PD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지연 작가가 다른 누군가에게 좌지우지될 사람인가.
하지만 PD 자존심이 있었기에 입 밖으로 그 사실을 시인할 순 없었다.
“거 말을 해도······.”
“미안해. 어쨌건 이지연 작가가 보내 준 새 대본은 취소하고 원래 대본대로 돌리자고. 은빈이 연기력 알잖아. 쟤 연기력. 새로 바뀐 대본 절대로 소화 못 할 게 뻔한데 이대로 가자고? 우리 죽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
“그러게 진즉에 연기 연습이나 제대로 시켜서 현장에 내보내지 어디서 저딴······ 아니다 말을 말자.”
마동팔 본부장의 인상이 찌푸려지는 걸 보자 박두식 PD가 입을 닫아 버렸다.
“알았어 마 본부장.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가 봐.”
“진짜 고마워. 그리고 오늘 밤······ 로즈블랑에서 한잔하자고. 풀코스로 준비해 둘 테니까.”
“아니 꼭 그럴 필요는 없지만 준비해 준다면야 뭐. 사양은 안 할게.”
상위 1%의 룸살롱인 로즈블랑에서 질펀하게 놀자는 제안을 받은 박두식의 얼굴이 환해졌다.
조금 뒤 닥쳐올 일은 전혀 상상하지도 못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