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9화
139. 계약 2
“미소야. 엄마가 잘못 알고 있는 거야. 아저씨가 이 회사에 모든 계약을 담당하는 사람이거든. 그러니까 아저씨 말 들으면 돼. 우리 미소가 여기다 사인해 줄래?”
곽무혁 팀장이 계약서의 빈 곳을 가리키자 미소가 활짝 미소를 지었다.
“진짜요?”
“그러~엄! 자. 여기 사인해 줘. 큼지막하게. 그래야 미소가 우리 회사의 연예인이 되는 거야.”
“네!”
구성철 실장 말고도 딸 바보가 여기 또 하나 있었다.
곽무혁 법무팀장이 계약서 보호자 칸 아래의 커다란 공란을 가리키며 말했다.
“눈에 띄게 써줄래 미소야?”
“네!”
미소가 캐릭터 펜을 들고 또박또박 자신의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정~. 미~. 소~. 됐다!”
뭐가 그리 힘든지 큼지막하게 이름을 쓴 미소가 이마를 쓱 하고 닦으며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였다.
곽무혁 팀장은 그 모습이 귀여운지 계약서 2장을 더 내밀었다.
하나는 회사 보관용 계약서 그리고 다른 하나는 공증용 계약서를 말이다.
“미소야. 2장 더 해야지. 여기랑 여기.”
“2장이나 더 해요?”
“그럼 사인은 원래 이렇게 총 3장을 하거든.”
“더 이쁘게 쓸래요!”
미소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한번 캐릭터 펜으로 큼직큼직하게 자기 이름을 쓴다.
그리고 난 그 모든 과정을 동영상으로 촬영했다.
역사적인 미소의 연예인 데뷔 순간이니까.
사인을 마친 미소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나 이제 연예인이에요?”
“암. 우리 미소는 이제 연예인이란다. 우리 회사에서 유일한 아역 연예인!”
“신난다!”
두 손을 번쩍 든 미소는 유진이에게 연신 자랑을 해댔다.
“엄마. 나 사진 찍어 줘! 우리 반 친구들한테 보여 줄 거야!”
“알았어. 잠깐만?”
유진이가 폰을 꺼내자 미소가 오른손으로 V자를 그리고 귀 옆에 가져다 댄다.
깜찍하게 눈웃음을 짓는 그 모습에 강지영 본부장을 비롯해 모두가 웃음을 머금었다.
찰칵.
사진을 찍은 미소는 계약서를 잃어버리지 않게 꼭 액자에 넣어달라 요청했다.
“그러면 미소는 태권 매니저님 따라서 회사 구경 좀 하고 있을래?”
“네!”
의기양양해진 미소가 본부장실을 나갔다.
그제야 강지영 본부장이 웃음을 지우고 미소 양육권 재판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 * *
곽무혁 법무팀장이 그동안 정학제에 대해 조사한 게 있다며 테이블에 서류를 펼쳤다.
계약한 뒤에야 알아볼 수 있다고 하더니 다 블러핑이었나 보다.
“유진이 큰아빠. 아니. 정학제 이 사람. 벌써 변호사를 선임했더군요.”
“어딘데요?”
“법무법인 정성입니다.”
정성이라면 대표 변호사인 정영석과 성문상이 있는 로펌이다.
다들 능력도 좋고 전관들도 여럿 모여 있는 곳이고.
아무래도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 같다.
“그리고 일주일 전에는 기획사도 만들었습니다. 미소 기획이라고 하더군요.”
본부장실에 있던 모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유진이는 잔뜩 긴장한 탓인지 곁에 앉은 내 정장 상의 끝자락을 꼭 쥐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절대 미소 양육권을 넘길 일은 없을 테니까.”
유진이의 손을 도닥여 주자 깜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아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유진이는 정장을 구겨 잡았다는 걸 깨닫고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죄송은 무슨. 이거 링클 프리야. 주름 하나도 안 져.”
“아 링클 프리.”
마법과도 같은 소재 산업의 결과물을 자랑하며 유진이를 안심시켰다.
아무튼 나는 회귀 전에도 아역 배우의 양육권 소송을 해본 일이 있다.
당연히 승리했고.
“본부장님. 양육권 소송 때 가사조사관이 나오는 건 아시죠?”
“그래요?”
강지영 본부장이 처음 듣는 말이라며 어깨를 으쓱이자 곽무혁 팀장이 대신 대답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걸 다 알지 정 대리?”
“미리 공부 좀 했습니다. 아무튼 조사를 대비해서 유진이네 집주인 아주머니에게 임금을 지급하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양육권 소송의 승패는 아이가 머무는 생활 환경이 상당히 영향을 미친다.
안정적인 상황에서 아이가 자라날 수 있는지.
또 양육권자의 경제 상황은 어떠한지 등등 같은 것들을 체크한다.
그리고 그걸 판단하는 이는 법원에서 정한 가사조사관들이고.
강지영 본부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임금이라면 그분을 직원으로 고용하자는 이야긴가요?”
“예. 짬짬이 돕는 것과 정식으로 계약을 맺은 건 경우가 다르니까요. 어차피 미소를 돌보는 분이시니 이런 기회에 고용하면 일거양득이 아닙니까? 법적인 서류도 준비하고 경비 처리도 받고요. 비용은 유진이 앞으로 하면 될 것 같은데요?”
곽무혁 법무팀장이 일리가 있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정 대리 말이 맞습니다. 그렇게 되면 재판에 꽤 유리하게 적용될 겁니다.”
강지영 본부장이 씨익 웃는다.
“하여간 우리 정 대리가 배우 챙기는 건 못 따라간다니까.”
난 머리를 긁적거리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약간은 무리한 부탁을 덧붙였다.
“그리고 본부장님. 유진이 올해 정산을 조금 앞당겨 주시면 안 됩니까? 1차 정산 금액은 들어왔지만 통장 잔고가 클수록 소송을 유리하게 진행할 수 있으니까요.”
강지영 본부장이 어처구니가 없다며 웃음을 지었다.
“와. 진짜. 장난 아니다. 정 대리. 그냥 나도 정 대리가 내 매니저 해주면 안 돼요? 정 대리에게 맡겨두면 만사가 다 해결될 것 같은데?”
곽무혁 팀장도 두 손을 들었다.
“하하하. 제가 아니라 이 친구가 재판 준비의 적임자 같습니다. 본부장님.”
난 골려대는 두 사람의 장난에 진땀을 흘려야 했다.
강지영 본부장의 결단을 끝으로 우린 마지막 계획을 점검하고 각오를 다졌다.
* * *
[(단독) 굴렁쇠 엔터 신인 아역 정미소 전격 발탁.]
-굴렁쇠 엔터는 소속 배우 정유진에 이어 그녀의 딸 정미소 양과 3년 계약을 맺었다. 수많은 CF의 동반 출연 의뢰를 고사하던 정미소 양은 이번 계약으로 새로운 광고계의 블루칩으로 떠오르며······.
“이 이게 갑자기 뭔 소리야!”
기사를 본 배우 1실의 주호성 팀장은 급히 2실의 박인기 팀장과 약속을 잡았다.
미소의 양육권을 큰아버지인 정학제에게 넘기고 최종적으로 정유진까지 빼 오려는 계획에 큰 차질이 생겼으니까.
그렇게 되면 양육권 소송에서 이겨도 다시 길고 지루한 계약 무효 소송을 벌여야 할지도 모른다.
“박 팀장 이 인간은 왜 이런 중요한 이야기는 빼먹고 쓸데없는 정보만 넘겨?”
그동안 먹인 술값이 얼만데.
회사 앞 포차에서 기다리던 주호성 팀장은 연신 기사를 훑었다.
10분가량이 지났을 무렵.
포차의 빨간 천막 입구를 들어 올리며 박인기가 나타났다.
표정을 고친 주호성이 손을 들어 박인기 팀장을 불렀다.
“여깁니다. 박 팀장님.”
“어.”
인사를 받은 박인기 팀장이 굳은 표정으로 맞은편에 앉았다.
주호성은 마음이 급한 탓에 안부를 나누는 것도 잊고서 곧바로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된 겁니까? 배우 2실에서 미소를 영입했다면서요?”
“어. 그런데?”
“이런 정보가 있으면 저한테 먼저 말씀해 주시기로 한 거 잊으셨어요? 설마 제 술 얻어먹고 입만 싹 닦으시려는 건······.”
박인기 팀장이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좋은 제의가 있다고 해서 급히 왔더니 그게 본론인가 보군. 지금 따지려고 부른 건가?”
주호성도 인상을 찌푸렸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어야죠.”
“미친놈. 내가 약속이라도 했냐?”
“예?”
“술자리에서 한 호언이 무슨 계약이라도 되냐!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야! 내가 니 프락치야?”
갑작스레 변한 박인기의 태도에 주호성은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잔을 나누며 의기투합했었는데.
“팀장님. 일단 진정 좀 하시고······.”
하지만 주호성의 말이 끝나기도 전 박인기 팀장이 호통쳤다.
“내가 질투 때문에 잠시 미쳤었나 보다. 주 팀장. 앞으로는 더는 밖에서 보지 말자.”
박인기 팀장이 술 한잔도 마시지 않고 돌아가려 하자 주호성이 급히 박인기의 팔을 붙잡았다.
이대로 박인기가 사라지면 배우 2실에 관한 정보를 들을 방법이 사라지니까.
지금은 뭐든 던져야 했다.
“박 팀장님! 제가 김인정 씨를 SBC 대표 예능에 출연시켜 보려고 얼마나 고생을 하는지나 아십니까?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출연 확정입니다.”
김인정은 박인기 팀장과 3년을 함께 해 온 중견 배우.
연예인답지 않은 소탈한 성격으로 박인기 팀장과는 가족과도 다름없는 사이였다.
그런 김인정의 캐스팅을 무기 삼았으니 최소한 자리에 앉힐 수는 있을 터.
하지만 그 생각마저 착각이었다.
박인기 팀장의 태도는 여전히 얼음장처럼 냉랭했다.
“꽂은 것도 아니고 꽂기 일보 직전? 내가 미쳤지. 정 대리를 외면하고 이딴 놈과 붙어먹으려 했다니······.”
정윤호의 이름이 나온 순간 주호성의 웃는 얼굴이 싸늘하게 변했다.
하지만 박인기 팀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할 말만을 내뱉었다.
“정 대리는 너처럼 애간장만 태우는 게 아니라 KBC랑 MBS 예능 2개에 그냥 꽂아주더라. 앞으로 너한테 손 벌릴 일 없으니까 나 찾지 마라. 정 대리보다 실력이 떨어지면 염치라도 있던가!”
박인기는 그 말을 마치고는 그대로 포차를 나가 버렸다.
순간 주호성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XX! 이놈이고 저놈이고 정윤호라고? 이것들이 아주 입을 맞춘 거야 뭐야?”
굴렁쇠 엔터로 오고 나서 유독 정윤호와 비교당한 탓에 주호성의 스트레스는 극에 달해 버렸다.
주호성은 테이블에 놓인 소주병을 붙잡았다.
콸콸대는 소주를 병째 원샷 했지만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그 순간 김동수 실장의 전화가 걸려왔다.
-야! 주호성! 2실에 쓸 만한 프락치를 심어놨다고 하더니 이게 뭐야! 내가 오늘 이사님 앞에서 얼마나 망신을 당한 줄이나 알아? 또 정윤호한테 당하면 어떻게 해? 당장 대책부터 찾아!
한동안 정윤호랑 비교한 질책이 이어졌다.
덕분에 다시 한번 주호성의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김동수의 타박을 들은 주호성은 전화를 끊고 이를 뿌드득 갈았다.
“정윤호. 니가 그렇게 잘났다 이거지? 그래. 어디 한번 두고 보자 이 자식.”
지독한 질투심에 취하기라도 한 걸까.
연신 술잔을 비우는 주호성의 눈이 독기로 번뜩이고 있었다.
* * *
미소의 데뷔 기사가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며 <파란 하늘> 19화에서 시청률은 무려 21.1%까지 올랐다.
덕분에 이지연 작가의 신작 <신의 이름으로>도 거기에 편승에 실검 순위에 올랐다.
화제를 모으고 있는 유진이가 ‘청명’ 역에 확정되었고 여주인공에 다시 주영인이 캐스팅될지도 모른다는 기사도 뜬 덕분이다.
하지만 유진이는 언제나 그렇듯 외부에 관심을 끊고 연기 연습에만 매진하는 중이다.
1인 2역.
20대의 ‘청명’과 60대의 ‘만신 월아’ 역을 동시에 맡았기에 캐릭터 분석만으로도 전에 없이 어려운 도전이었으니까.
특히 ‘만신 월아’는 드라마가 방영되고 일정 시점이 지날 때까지 정체를 숨겨야 했다.
덕분에 유진이가 느끼고 있는 압박감은 평소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힘들게 연습하며 하루하루 지내던 중.
이지연 작가로부터의 호출이 왔다.
-수희 언니와는 이야기가 잘 됐으니까 곧바로 우리 집으로 와.
난 곧장 유진이를 픽업해 한남동에 있는 이지연 작가의 고급 빌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전설적인 명 배우 김수희가 다리를 꼬고 앉아 이지연 작가와 커피를 마시고 있다.
TV에서는 재미있는 캐릭터로 나오지만 실상 그녀는 엄청나게 엄격하고 깐깐하다.
천하의 주영인도 김수희의 호통에는 눈물을 쏙 뺐을 정도니까.
“저희 왔습니다.”
이지연 작가가 먼저 우릴 반겼다.
“연습은 충분히 했어?”
김수희도 테이블에 커피잔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테스트부터 해보자.”
“잠시만 차 한잔하고 인사도 나눠야지.”
“나 바빠. 빨리 보고 가봐야 해.”
이지연 작가가 당황해 대꾸했다.
“레슨 해주겠다고 했으면 제대로 해야지. 이게 뭐야? 언니.”
이지연 작가의 성화에 김수희가 날카로운 인상으로 답했다.
“지연아 말은 똑바로 해야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안 될 것 같으면 안 한다고 했지? 늙어서 살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시간 낭비하기 싫어. 테스트해서 안 되면 너도 그냥 포기해.”
김수희에게 배우면 된다는 이지연 작가의 말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노인 연기를 위한 도움을 받으러 왔는데 첫날부터 테스트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