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8화
138. 계약 1
둠칫! 둠두둠 칫!
지하 녹음실에 내려가자 늘 그렇듯 방선우의 곡이 복도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건 댄스곡이네요?”
“아 예. 지금 방선우 작곡가가 작업 중이거든요.”
“방선우면 설마 체리블라썸의 Hurry Up!을 만드신 그분요?”
김종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네. 또 종훈 씨에게 제의한 곡 다섯 곡 중에 네 곡을 작곡한 친구고요.”
자신에게 음악적 영감을 준 미상의 곡들이 현재 가장 핫한 작곡가 방선우가 만든 곡이라는 걸 알게 된 김종훈이 들뜬 표정을 짓는다.
“어쩐지······. 그러고 보니 Hurry Up!도 플로우가 굉장히 독특하더라고요.”
김종훈과 복도 벤치에 앉아 잠깐의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1번 룸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끝났다.
“들어가 보시죠.”
김종훈이 녹음실로 들어가자 방선우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기 김종훈? 블릿의 김종훈? 리얼리?”
방선우의 경악은 뒤따라온 날 보고야 그쳤다.
“왜 그렇게 놀래? 김종훈 씨와 함께 널 보러 오겠다고 까톡 남겼잖아. 안 봤어?”
“그 그래요? 일한다고 못 봤어요.”
방선우가 녹음실 한쪽에 엎어놓은 폰을 가리켰다.
김종훈은 놀라게 해서 죄송하다며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마음이 급해서 그만 무례를 범했습니다.”
“아 아뇨! 괜찮아요! 어서 고개 드세요! 와~ 대박!”
들떠 있던 방선우가 겨우 진정하고서야 김종훈이 질문을 시작했다.
오랫동안 풀리지 않은 갑갑함을 토로하듯 말이다.
“차 안에서 방 작곡가님의 곡을 듣는데 머릿속에 번개가 치는 것 같더라고요. 그런데 진짜 대박 곡이 따로 있었네요. 방금 그 댄스곡요.”
“가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곡을 만드셨는지. 이런 질문이 실례인 건 알지만 워낙에 독특한 플로우라.”
이게 무슨 상황인지 눈치를 살피던 방선우가 내 신호를 보고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데······. 그냥 작업하는 걸 보실래요?”
“예!”
방선우가 들뜬 표정으로 아이패드를 들어 올렸다.
스크린을 터치하는 방선우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냥 이렇게 생각나는 대로 찍고 찍은 후에는 허밍으로 불러 보고······. 허밍이 듣기 싫으면 수정하고요. 아 그리고 후반 작업은 제가 한 게 아니라 이동민 실장님이 하세요.”
저 말을 하는 사이 순식간에 곡 하나가 뚝딱하고 만들어졌다.
“이건 오늘 김종훈 씨와 만난 기념으로 만든 곡이니까 제목을 ‘만남’이라고 할까요?”
천연덕스러운 방선우의 질문에 김종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어떤 이들은 곡 하나를 만들기 위해 수년을 갈등하며 괴로워한다.
하지만 방선우가 순간적으로 떠오른 악상을 단숨에 찍어내자 자신과 방선우 사이에 얼마큼 큰 재능의 격차가 있는지를 확인한 탓이다.
“······저 같은 보통 사람은 배울 수는 없는 방법이네요.”
김종훈의 힘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자신이 바라는 이상향을 만났지만 막상 만난 순간 자신은 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을 테니까.
재능의 격차는 때로는 너무도 가혹하다.
하지만 사람은 자신에게 부족한 점을 인정하는 것도 필요했다.
그래야 다음 단계로 나갈 수가 있으니까.
다른 이와 협력하는 단계로 말이다.
방선우는 뭘 잘못했다 싶은지 힐끔힐끔 내 눈치를 살폈다.
김종훈의 얼굴이 워낙에 굳어 있는 까닭이다.
“종훈 씨.”
내 부름에 김종훈이 천천히 날 돌아봤다.
“종훈 씨는 외모 댄스 가창력 그리고 진정성 있는 작사까지 다 가지셨잖아요.”
“그래도 그게.”
“욕심을 비우고 하나쯤은 다른 이에게 기대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뭔가 변명을 하려던 김종훈의 눈가로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욕심이라······.”
내 말에 김종훈이 잠깐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한참 동안 중얼대더니 천천히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김종훈은 자신이 부족한 걸 인정하고 다른 이의 도움을 받겠다며 말이다.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다 잘하려는 게 제 욕심이었나 봅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김종훈의 얼굴이 조금은 밝아져 있었다.
짙은 구름 속에 가려졌던 달이 천천히 얼굴을 드러내듯 말이다.
* * *
숙소를 꾸미느라 바쁜 강하나와 장예빈까지 녹음실로 불렀다.
편한 복장으로 온 두 사람이 김종훈을 보고 한바탕 소란을 일으켰다.
두 사람 모두 김종훈의 팬이기도 했으니까.
겨우 두 사람을 진정시킨 다음 강하나에게 노래를 부탁했다.
녹음실 부스 안으로 들어간 강하나는 진지한 태도로 노래를 시작했다.
녹음실 스피커로 강하나의 목소리가 나온 순간 김종훈은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어떻게 하나 씨 같은 보컬이 아직도 데뷔를 못 한 겁니까?”
“업계 전문가라고 거들먹거리던 사람들 식견이 겨우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걸 어쩌겠습니까?”
김종훈은 이건 범죄나 다름없다며 신나게 아이스톤에 뒷담화를 해댔다.
어찌나 신랄한 표현을 쓰는지 곁에 있던 방선우가 당혹스러워 몸을 움찔댈 정도였다.
노래를 끝낸 강하나가 녹음실 부스를 나오자 김종훈이 기립 박수로 환호했다.
“최곱니다. 하나 씨.”
김종훈의 칭찬에 강하나의 얼굴이 발개졌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감사는요. 감사는 오히려 제가 해야죠. 하나 씨가 제 콘서트의 게스트라니. 생각만 해도 설레는데요?”
김종훈의 들뜬 반응에 강하나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제가 게스트요?”
“모르셨습니까?”
순간 모두의 시선이 내게 몰려들었다.
“하나야. 너 올해 말에 있는 종훈 씨 콘서트에서 데뷔할 거야.”
“예에?”
강하나가 커다란 눈을 끔뻑거리며 두 손을 바들바들 흔들어댔다.
그 모습에 장예빈이 키득대며 웃음을 터트렸다.
“하나 언니. 웬 날갯짓이야? 기분 좋아서 하늘을 날 거 같아?”
“아 아니. 그 그게. 내 내가 데뷔라니······. 그 그것도 김종훈 콘서트에서······. 어 어떻게 하지?”
얌전한 성격의 강하나는 진짜로 당황하면 말을 더듬으며 날갯짓을 한다.
두 손을 가슴팍 앞에 흔들어대면서.
강하나의 의외의 모습에 한참이나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이 친구가 Hurry Up!의 작사가인 장예빈입니다. 까메오 페이지에서는 안타까운 성적을 기록 중이지만 작사가로서는 최고죠.”
“윤호 오빠. 소개가 왜 그래요? 안타까운 성적이라뇨! 까메오 페이지에서 내 글에 꼬박꼬박 댓글 다는 열성 팬이 들으면 오빤 끝장이거든요!”
장예빈이 어처구니가 없는 듯 오른 엄지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한다.
“열성 팬이 몇 명인데?”
장예빈이 입술을 삐쭉 내민다.
“팬이 몇 명인지가 뭐가 중요해요?”
“중요하지. 그러니까 우리 작가님. 최신화 댓글은 몇 명이시죠?”
“한 명이긴 하지만 우리 백곰 님이 얼마나 열성인데!”
장예빈의 외침에 곁에 있던 방선우가 살포시 손을 들었다.
“미안. 누나. 사실은 그거 나야.”
장예빈이 당황해 외쳤다.
“뭐라고? 그러면 백곰 아이디가 네 거였어?”
“어. 그게. 누나 소설에 아무도 댓글을 안 달아서······. 나라도 달자 싶어서.”
“야! 죽을래? 누가 댓글 달래?”
“아악. 왜? 열성 팬이라서 좋다며? 행복하다며? 아아악. 때리지 마! 왜 때려?”
장예빈은 믿음을 배신당했다며 방선우의 등을 두드려댔다.
남매 같은 싸움을 벌인 장예빈은 앞으로 절필하고 작사만 하겠노라 선언했다.
좋은 선택이다.
미래에도 장예빈은 글로는 결코 성공하지 못하니까.
한바탕의 소란이 지나간 후 장예빈과 김종훈이 곡에 가사를 붙이기 시작했다.
작사에 관해서는 김종훈도 일가견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채 5분도 되지 않아 김종훈이 깜짝 놀란 반응을 보였다.
“예빈 씨는 작사가를 하신 게 천만다행이네요.”
장예빈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실은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음악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친구가 생긴 김종훈은 더는 외로워 보이지 않았다.
* * *
몇 시간이나 지나서야 김종훈을 데리고 이동민 실장의 방으로 갈 수가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애가 타는 얼굴로 기다리던 이서준 회장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종훈아. 이야기 다 했으면 병원부터 가자!”
김종훈이 웃음 가득한 표정을 짓는다.
씩씩하다 못해 나보다 더 활기찬 표정이다.
“회장님. 저 이제 괜찮아요.”
“아 아니. 그게 무슨 말이야?”
“진짜로요. 걱정되시면 상용 형 붙여 두셔도 돼요.”
갑자기 180도로 달라진 김종훈의 태도에 이서준 회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김종훈은 녹음실에서 있었던 일을 말했다.
“여기 진짜로 대박이에요. 그리고 하나 씨는 오히려 제가 콘서트에 함께 서달라고 해야 할 정도던 데요?”
김종훈이 상기된 표정으로 빠르게 말하자 이서준 회장이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다.
“그 정도라고?”
“예. 직접 들어봤는데 데뷔하면 대한민국이 발칵 뒤집힐 겁니다.”
김종훈은 녹음실에서 환상적인 경험을 했다며 아이처럼 떠들어댔다.
그제야 이서준 회장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회장님.”
“어 말해. 종훈아.”
“저 한동안 여기서 지내면 안 되나요? 윤호한테도 도움 좀 받고요.”
김종훈이 내 곁에 다가와 싱글대며 웃는다.
아니 잠깐만.
언제 우리가 말을 편하게 하는 사이가 된 거지?
나이가 같아 주민등록상으로는 친구라도 해도 내 실제 나이는 36살에 회귀해 1년을 더 먹었으니 37살인데.
이서준 회장과 이동민 실장이 싱긋이 웃음을 지었다.
“그럼 동민아. 우리 종훈이 좀 잘 부탁한다.”
“그 정도야 내가 도와줄 수 있죠 형님.”
아니.
누구 맘대로 허락이야!
이서준 회장은 김종훈을 붙여서 내게서 받은 곡 이상을 받아내고 싶은 듯했다.
그리고 이동민 실장은 김종훈과의 관계를 돈독히 만들어 강하나를 더욱 띄울 생각이고.
서로가 윈윈하는 계획이었기에 나도 모른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난.
회귀 후.
새로운 친구 하나를 얻을 수가 있었다.
* * *
2020년 6월 9일.
오늘은 굴렁쇠 엔터와 미소가 정식 계약을 맺는 날이다.
유진이네 큰 아빠와 양육권 전쟁을 펼치려면 미소가 우리 회사와 정식 계약을 맺는 게 훨씬 유리하니까.
회사 입구에서 잠시 기다리고 있으려니 정상봉이 미소와 유진이를 데리고 나타났다.
“우리 미소 멀미 안 했어?”
“안 했어요!”
힘차게 대답한 미소는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회사 벽에 붙은 연예인들의 전신사진과 사인이 신기해 보이는 것 같았다.
“삼촌. 삼촌. 저거 뭐예요?”
“아. 저거? 감사패.”
“저거는요?”
“아 저거? 추석특집 연예인 전국체전에서 딴 깃발.”
미소가 눈을 댕그랗게 뜬다.
“우와! 연예인이 되면 운동회도 해요?”
“당연하지!”
“신난다! 난 달리기할래요!”
미소는 연예인이 되면 자기도 운동회에 나갈 수 있다며 꿈에 부풀고 있었다.
뭐 운동회 비슷한 거긴 하니까 거짓말하는 건 아니다.
그런데 막상 미소가 연예인 전국체전에 참가한다면 어떤 종목에 출전시킬지 모르겠다.
달리기?
아냐.
달리다 넘어지면 아프니까 그건 안 되고.
줄넘기?
줄에 걸리기라도 하면 피부에 빨간 줄이 생기니 그것도 패스.
활쏘기?
활 당기다가 다치면 어떻게 해?
그냥 응원이나 시켜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멀찍이서 미소를 구경하던 직원들이 슬금슬금 다가와 있었다.
“호호. 미소야. 언니가 네 팬이야.”
늘 점잖게 굴던 홍보팀 김미혜 대리는 우리 층까지 내려와 오두방정을 떨기 시작했다.
미소는 그 모습을 보곤 배시시 웃으며 허리를 굽혔다.
“감사합니다. 아줌마.”
“아줌마가 아니라 언니지만.”
김미혜 대리는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다며 미소를 꼭 껴안고 사진을 찍어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직원들이 우르르 몰려와 사진을 찍었다.
와서 사탕을 주고 과자도 주고.
이태풍이 왔을 때보다 더한 환영 분위기다.
굴렁쇠 엔터에 아역은 없었으니까.
그때였다.
“어허. 이 사람들이. 일 안 하고 뭣들 하는 거야!”
배우 2실의 구성철 실장이 나타나 호통을 치자 화들짝 놀란 직원들이 저마다 자기 자리로 향했다.
직원들이 뿔뿔이 흩어지자 구성철 실장이 조심스레 다가와 헛기침을 했다.
“말로만 듣던 미소를 이렇게 직접 보는구나. 반갑다. 이 아저씨가. 여기서 가장 높은 사람이란다.”
순간 피식 웃는 소리가 칸막이를 타고 넘어왔다.
그 이야기가 하고 싶어서 우리는 일하러 가라고 했냐며 투덜대는 소리도 들려왔고.
미소는 그 말을 듣자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리라 유치원 햇님반. 정미소입니다!”
구성철 실장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래그래. 씩씩하네. 그런데 미소야. 사진 한 장 찍어도 되겠니? 우리 딸이 미소 팬인데.”
“네!”
미소가 도도도 달려가 구성철 실장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브이 자를 하고 왼손으로는 ‘이쁜 짓’ ‘귀여운 짓’이라 부르는 포즈를 취했다.
딸 바보 구성철 실장도 미소의 동작을 따라 하고 있었다.
“자. 찍는다. 하나 둘 셋!”
사진을 찍은 후에야 구성철 실장은 본부장님이 기다리고 있다며 위층으로 우릴 이끌었다.
본부장실에 도착하자 강지영 본부장과 곽무혁 법무팀장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오느라 수고 많았어요.”
미소는 다시 한번 깍듯한 인사를 건넸고 덕분에 분위기가 한결 밝아졌다.
계약서를 펼쳐놓고 간단한 설명이 끝나자 미소가 내가 사준 파워터프걸 분홍 가방에서 캐릭터 펜을 꺼내 들었다.
캐릭터 펜 끝에는 자기 주먹만 한 캐릭터가 있는데 무겁지도 않은지 꼭 쥐고서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어디에 사인하면 돼?”
캐릭터 펜을 꼭 쥔 미소가 잔뜩 들뜬 표정을 짓는다.
자신이 계약서에 직접 사인할 기세였다.
유진이가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달랬다.
“미소야. 사인은 엄마만 하면 돼.”
“그럼 난 안 해?”
“응. 우리 미소는 아직 어려서 엄마가 대신해 줘야 해.”
“그렇구나······. 알았어 엄마.”
캐릭터 펜을 만지작대는 미소가 살짝 풀이 죽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늘 무뚝뚝한 곽무혁 팀장이 이제까지 본 적 없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