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1화
131. 강하나 영입 1
박인기 팀장이 왼손으로 티슈를 잡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장준혁을 준다는 게 고맙긴 한데 이미 배 떠난 것 같다. 너도 본부장님 성격 알잖아? 우리 팀은 완전히 쪼개지고 뿔뿔이 흩어질 거다. 어쩌면 난······ 잘릴지도 모르고.”
난 고개를 저었다.
“박 팀장님이랑 밑에 분들. 진심으로 사과하고 시말서 쓰시면 1개월 감봉 정도로 용서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정도면 보너스 받아서 채우시면 되잖아요.”
박인기 팀장이 눈을 크게 뜬다.
“지 진짜? 본부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예.”
말없이 한참을 있던 박인기 팀장이 빈 글라스에 소주 반병을 콸콸 들이부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한껏 욕을 해댔다.
“하아. XX. 이게 무슨 개망신이냐!”
박인기 팀장이 단숨에 글라스에 담긴 소주를 원샷 하더니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크으~. 진짜 쓰다.”
박인기 팀장이 긴 한숨을 내쉰 뒤 내게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고······ 고맙다. 정 대리.”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고개 드십시오.”
박인기 팀장을 고개를 들자 그의 눈에는 눈물이 살짝 고여 있었다.
“네가 부탁했지?”
난 입을 닫고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정 대리. 아니 윤호야. 이런 말을 내 입으로 하긴 좀 부끄러운데 왜 나한테 이렇게 잘 해주냐? 나 때문에 이태풍 계약도 엎어질 뻔했다면서? 그런데 그게 용서가 돼?”
“안 될 건 뭐가 있습니까? 그리고······.”
“그리고?”
박인기 팀장의 비어 있는 소주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혼자 가기 싫어서요.”
“응?”
난 씁쓸한 표정으로 비어 있는 내 소주잔에도 소주를 따랐다.
그리고 나 역시 소주를 탁 털어 마셨다.
차갑고 들큼한 소주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니 뱃속으로부터 확 하고 열기가 치솟아 올랐다.
“전 우리 배우 2실을 최고로 만들고 싶습니다. 그런데 혼자서는 못 합니다. 서예종 식구들이 똘똘 뭉치는데 우리도 뭉쳐야죠.”
“나 같은 게 도움이 되겠냐?”
자조적인 박인기 팀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박 팀장님이 어때서요?”
선배들 눈치를 보고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 살아서는 김동수를 막을 수가 없을 것 같아 회귀 후 이제까지 거침없이 나갔었다.
그 탓에 박인기 팀에게 무력감을 느끼게 했지만 사실 그의 팀도 그렇게 무능하진 않았다.
“제가 더 잘하겠습니다. 팀장님. 그러니 같이 갑시다.”
날 물끄러미 쳐다보는 박인기 팀장의 시선이 느껴졌다.
주변 포차의 시끌벅적한 분위기와는 달리 우리 테이블에는 적막감이 맴돌았다.
박인기 팀장의 입이 열리길 기다리며 다시금 내 소주잔을 채웠다.
쪼르륵.
그런데 소주잔이 절반쯤 찼을 무렵.
내 손에 들린 소주병을 박인기 팀장이 가로챘다.
“자작하지 마라. 복 나간다더라.”
박인기 팀장의 목소리가 먹먹하게 젖어 들었다.
술잔을 따르며 가늘게 떨리는 손이 그의 심경을 말해주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박 팀장님.”
“고맙긴? 내가 더 고맙지.”
난 분위기가 가라앉는 게 싫어 일부러 호들갑을 떨었다.
“에이~ 우리 팀장님! 술 많이 드셨네. 벌써 손을 떠시면 어떻게 합니까?”
내 잔을 가득 따라준 박인기 팀장이 자신의 잔을 들어 올렸다.
“윤호야.”
“예.”
“못난 선배라 내가 미안하다. 앞으로 잘 좀 부탁하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하다 보니 내가 잠깐 딴마음을 먹었는데 이제부터는 그런 일 없을 거다. 본부장님한테도 사과하고 실장님께도 진심으로 사과드리도록 하마.”
“지나간 일이 무슨 상관입니까. 종종 이렇게 술잔을 기울이다 보면 다 잘 풀릴 겁니다.”
박인기 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내민다.
쨍하는 소리와 함께 잔을 맞대고 소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렇게 소주 한잔으로 지나간 일을 흘려보냈다.
그 뒤 박인기 팀장은 자신의 팀원들과 배우들을 모조리 2차 자리에 불렀다.
거기서 다시 한번 난 배우 2실 멤버 누구도 빠지지 않고 챙기겠노라 거듭 뜻을 밝혔다.
술을 많이 마셔 조금은 괴로웠지만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박인기 팀장이 앞장서서 뭉치자고 분위기를 조성해 준 덕분에 말빨이 잘 먹히기도 했고.
역시 주연은 조연이 없이는 결코 존재할 수 없다.
이번 생은 내가 주연이 된다고 해도 주변의 모든 조연과 함께 걸어갈 생각이다.
두 번째 삶은 그러기 위해서 사는 삶이나 마찬가지니까.
* * *
KNET 방송국.
오늘은 한 일 합작 오디션 프로젝트인 <글로벌 프로듀스 47>의 첫 번째 녹화 날.
<글로벌 프로듀스 47>은 일본의 초대형 걸그룹 AKC47의 멤버 41명과 한국 쪽 기획사 연습생 58명이 합쳐 총 99명이 예선을 치러 글로벌 아이돌 11명을 뽑는 방송이다.
여기서 오늘의 내 목표 강하나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아이스톤 엔터테인먼트의 연습생 3인방 중 한 명.
최종 성적은 1차전 탈락.
하지만 그 이후 굴렁쇠로 회사를 옮긴 강하나는 스스로가 작사 작곡한 곡을 부르며 너튜브를 이용해 대성공을 거둔다.
보이스 깡패.
너튜브 가수 대장.
음원 마피아.
그런 별명을 갖게 되는 미래의 탑스타지만 현재로서는 진흙 속에 숨겨진 진주나 마찬가지였다.
이동민 실장과 함께 온 덕분에 관계자 패찰을 받고 현장에서 방송 촬영 준비를 구경했다.
“윤호야. 연습생 하나 영입하는 건 너 혼자서 해도 충분하지 않나?”
이동민 실장이 내가 타준 커피를 홀짝이며 물었다.
“에이. 저 혼자서는 관계자 패찰도 못 받잖아요.”
“그러게 인마. 체리블라썸을 축하 무대에 세워달라고 부탁해 왔을 때 들어주지. 괜히 자존심을 세워서는.”
현재 체리블라썸은 5주간 1위를 달성 중이다.
모든 방송국의 PD들이 체리블라썸의 출연에 애가 달아 있어 출연만 시켜주면 관계자 패찰을 쉽게 받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글로벌 프로듀스 47>의 PD인 안준희와 거래는 절대 사양이다.
안준희 PD는 과감한 기획력과 자극적인 편집으로 방송을 성공시킨 능력자지만 치명적인 결함이 있는 사람이니까.
[에브리데이 V10]
[날짜 : 2020년 12월 10일]
-PM 04:00 가수 1실 대책 회의. 2F 회의실. (보고 사항) <글로벌 프로듀스 47> 안준희 PD 긴급 구속 시청자 투표 전면 조작.
몇 개월 뒤.
소속사와 안준희 PD와 일부 제작진이 짜고 오디션 순위를 마음대로 조작한 것이 들통나 다수의 제작진이 구속된다.
잠깐의 고민 끝에 이동민 실장에게 은근슬쩍 그 사실을 흘렸다.
“안 그래도 그 말씀을 드리려고 했는데 실장님. 앞으로는 안 PD와 엮이시면 안 됩니다.”
커피를 호로록 마시던 이동민 실장이 왜냐며 물어왔다.
“안 PD가 까탈스럽긴 해도 상종 못 할 정도의 쓰레기는 아닌데. 왜?”
PD 중에 간단한 접대를 받지 않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돈과 술 접대는 기본 패시브로 깔고 들어가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인면수심의 요구를 하는 PD들도 드물지 않고.
이동민 실장이 그런 실태를 모를 리는 없다.
다만 안준희 PD가 대외 이미지 관리에 철저한 타입이라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안 PD님이 작년 오디션에서 대형 기획사의 돈을 받고 순위를 조작했다는 소문이 돌더라고요.”
이동민 실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어디서 그런 소릴 들었어?”
“KNET 조연출들 회식에서요.”
“누가 말했는데?”
“같은 테이블에 있는 조연출들은 다 알던데요?”
누가 말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자 이동민 실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안준희 PD 밑으로 조연출의 수만 3명이고 KNET 전체 조연출의 수를 더하면 거의 100명에 육박하니까.
이동민 실장이 고민에 빠졌다.
“이번 방송은 일본 쪽 파트너도 있는데 그런 무리수를 또 둘까?”
“하고도 남죠. 일본은 우리보다 더 심하다던데요.”
그때였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안준희 PD가 나타났다.
“이야! 이거 이 실장이잖아! 이게 얼마 만이야? 얼굴 좀 보고 살자!”
안준희 PD가 나타나자 이동민 실장은 급히 안색을 바꾸며 답했다.
“에이. 요즘 체리블라썸 활동 때문에 정신없이 바쁜 거 알면서.”
“역시 천하의 이동민이야. 한물간 걸그룹을 그렇게 멋지게 부활시킬 줄 누가 알았겠어? 그나저나 둘러보니 어때?”
“띄워줘도 되돌아가는 거 없어. 근데 무대에 공을 많이 들였네. 제작비가 장난 아니겠는데?”
가로로 40m 높이로는 12m 정도 되는 제단 같은 단상의 웅장함은 쉽게 비교할 게 없었다.
특히나 가로로 벌어지는 이동형 다이아몬드 무대는 얼마가 들어갔을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엄청 많이 들었지. 그런데 혹시 객원 심사위원으로 출연해 줄 생각은 없어?”
“거참! 바쁘다니까 또 그런다.”
그때 이동민 실장과 대화를 끝낸 안준희 PD와 내 눈이 마주쳤다.
“이쪽은 누구?”
“아. 인사해. 우리 정 대리. 사실상 체리블라썸을 프로듀싱한 에이스.”
이동민 실장이 날 과하게 소개했다.
“아! 소문으로 듣던 굴렁쇠 엔터의 비밀 무기?”
비밀 무기?
“뭐야? 본인은 모르나 본데?”
이동민 실장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원래 자기 소문은 본인이 모르는 법이잖아.”
“그래?”
안준희 PD의 눈빛이 반짝이며 날 위아래로 훑었다.
“생긴 것도 꽤 괜찮고······.”
하지만 이동민 실장이 절대 뺏길 생각이 없다는 듯 내 어깨를 감쌌다.
“어허! 눈독 들이지 마. 절대로 안 넘기니까. 우리 대표님이 얼마나 아끼는 녀석인데.”
대기업 계열사인 KNET은 밑으로 여러 개의 엔터테인먼트 회사를 갖추고 있다.
그중 제법 큰 규모의 매니지먼트사도 2개나 있고.
하지만 군침을 삼키던 안준희 PD는 두 손을 들었다.
“강 대표님이 아끼는 친구라면 포기해야겠네. 그나저나 4회 축하 무대에 체리블라썸을 세우고 싶은데. 어떻게 안 될까?”
이동민 실장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진 핑계를 댄다.
“정부 쪽 스케줄이 잡혀 있어서. 표창장까지 주는데 안 가면 재미없는 거 알잖아. 밉게 보였다가 세무조사라도 받을 수도 있으니까 사정 좀 봐줘.”
“하여간 공무원 놈들은 도움이 안 돼요.”
누가 누구를 욕하는지 모르겠다.
“일단 스케줄은 최대한 맞춰볼게. 정 안되면 1실과 상의해서 골든로드라도 보내줄 수도 있고.”
안준희 PD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 안되면 그렇게라도 부탁 좀 하자.”
“오케이.”
안준희 PD가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이동민 실장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우리는 저기 앉아서 구경이나 하자. 일단 무대는 끝나야 강하나든 강두리든 볼 수 있을 거 아냐?”
“예. 실장님.”
이동민 실장과 나는 관계자 지정석에 앉아 방송 녹화 시작을 기다렸다.
잠시 후 촬영이 시작되었다.
스튜디오 촬영은 보통 7대 정도로 촬영하는데 이곳에는 무려 20대의 카메라가 동원되어 있었다.
“1번. 최지민 연습생 입장하세요.”
MC의 호출에 첫 번째 아이돌 연습생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연이어 에이틴 플레디 예화 SJ 엔터 빅스타 엔터 심지어 에이스 엔터까지.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엔터 회사 출신의 연습생들이 나와 준비한 무대를 펼쳤다.
“3번 괜찮지 않아? 예화에서 괜찮은 애가 나왔네. 예능감도 있고 웃는 모습도 보기 좋고. 쟨 뜨겠다.”
“난 12번. 프로필을 보니까 연습생 생활만 5년째라더라. 그래서 그런지 기본기부터 차원이 다르잖아. 난 노력파가 좋더라고.”
스태프들도 각자 자신만의 베스트 멤버를 꼽아보고 있었다.
차후 연예계에서 살아남는 자가 누구고 도태되는 이는 누군지 뻔히 알고 있는 나로서는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계약 기간만 아니라면 당장이라도 계약하고 싶은 재능들이 여럿 있었으니까.
그리고 드디어 강하나의 차례가 되었다.
무대 위로 평균 키 169cm에 이르는 장신 멤버 3명이 마이크를 잡고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아이스톤 뮤직의 박예슬! 최소영! 강하나! 입니다.”
16살의 박예슬 17살의 최소영 그리고 26살의 강하나였다.
그런데 자신감 넘치는 박예슬과 최소영에 비해 강하나의 얼굴은 왠지 의기소침해 보였다.
함께 나온 두 사람보다 월등히 나이가 많은 탓이었다.
하지만 불과 몇 달도 가기 전 이 셋의 운명은 180도로 바뀐다.
데뷔 조 11명에 들게 된 박예슬과 최소영은 폭망하고 강하나는 음원 강자로 화려하게 성공하면서.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 사실을 아는 건 이 세상에 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