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0화
130. 마지막 촬영 3
“······ 그러니까 윤호 오빠가 이지연 작가님한테 말씀이나 좀 잘해주세요. 그리고 우리 앞으로 좀 친하게 지내요 예전에 제가 실수를 좀 했지만 계속 이런 불편한 관계로 지내는 것도 별로잖아요. 안 그래요?”
주영인이 방실방실 웃는다.
그녀의 부탁을 들어줄 마음은 없지만 괜한 충돌을 일으키기라도 할까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진이와 내가 이지연 작가와 가깝게 지낸다는 건 다 아는 사실이니까.
주영인의 입장에서는 주변인들과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전부일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회귀 전 부부의 연을 맺고 한집에 살면서도 그녀의 본심을 제대로 알지 못했으니까.
난 말 없이 바싹바싹 마르는 입술을 차가운 사이다로 적셨다.
“······.”
주영인이 내 앞에 놓인 빈 술잔에 술을 따라준다.
쪼르륵.
유진이와 있을 때는 절대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매번 이런다.
“아 참. 그리고 이번에도 윤호 오빠 선구안 신세 좀 질게요.”
내가 작품 보는 눈이 남다르다는 믿음을 가진 그녀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겠지.
그렇다고 해도 이쯤에서 미리 선을 그어둘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아시겠지만 저희라고 언제까지 조연만 할 건 아닙니다.”
지금까지는 주연 자리를 경쟁하지 않았으니 공존할 수 있었다.
차기작 <신의 이름으로>에서도 유진이가 맡은 배역도 조연이었으니 가능한 일이고.
하지만 앞으로는 다르다.
주연의 자리는 오직 하나.
앞으로는 절대 주연을 양보하지 않겠노라 말하자 주영인이 피식 웃는다.
“알아요. 때가 되면 경쟁을 해야겠죠. 하지만 내일 일은 내일이 되어야 아는 거니까. 걱정은 그때 가서 하죠. 뭐.”
주영인의 능청스러운 모습에 유진이가 코웃음을 친다.
“그러면 그때까지는 계속 이렇게 묻어갈 생각인 거야?”
“빙고. 그러니까 야박하게 굴지 말고 술이나 한잔 따라 줘.”
“아 진짜. 자! 빨리 먹고 가!”
유진이는 어서 가라는 듯 빠르게 주영인의 술잔을 채웠다.
찰랑대는 소주잔을 든 주영인은 굳이 내 앞에 놓인 소주잔에 부딪히고서야 원샷을 했다.
“그럼 먼저 일어날게요. 아직 PD님에게 인사도 못 드렸거든요.”
내게 인사한 주영인이 유진이를 보며 말한다.
“다음에 보자. 정유진.”
유진이가 고개를 저었다.
“안 보면 안 돼? 난 그쪽 불편해.”
“싫은데? 우리 이제 친구잖아.”
주영인은 피식하고 웃더니 제작자들이 모여 있는 테이블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런데 이상했다.
아무리 유진이가 주영인과 악감정이 있다지만 이렇게 대놓고 감정을 표현한 적은 없었으니까.
“왜. 무슨 일 있었어?”
“아뇨. 아무것도······요?”
“속일 사람을 속여. 말해 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 나도 대처를 할 거 아냐?”
내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자 잠시 머뭇거리던 유진이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쟤가 나한테 선전포고를 하더라고요. 연기나 남자나 누가 이기나 끝까지 해보자고요.”
또다시 술잔을 채우려는 유진이의 손에서 소주잔을 가로챘다.
잔을 뺏긴 유진이가 입술을 삐죽인다.
“그런데 왜 갑자기 친구 하기로 한 거야? 너한테 심한 짓을 한 상대잖아.”
“쟨 죽도록 경쟁하는 사이가 진정한 친구라고 하던데요?”
머리가 지끈거린다.
친구 먹은 게 아니라 라이벌 선포를 하고 간 거구나.
그것도 인생의 라이벌로.
하여간 자기 멋대로다.
“그래서? 넌 뭐라고 했는데?”
“친구 같은 건 모르겠지만 한번 해보자고 했죠. 제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긴 좀 뭣한데 사실 제가 학창시절에는 공부랑 싸움 말고는 다 잘했거든요. 어디 해볼 테면 해보라죠!”
술잔을 뺏긴 유진이는 안주로 나온 땅콩 버터 오징어를 우걱우걱 씹어댔다.
그런데 잠깐.
공부랑 싸움 말고?
“그러면······ 다 못했네?”
“아니! 지금 잘하고 못 하는 게 뭐가 중요해요!”
그건 그렇지만.
새초롬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유진이를 달래며 주영인이 한 말을 곱씹었다.
‘연기나 남자나?’
주영인을 다시 보지 않으려고 했지만 운명의 끈은 생각보다 질긴 듯했다.
그렇게 사람 속을 심란하게 만드는 회식이 밤이 늦도록 이어졌다.
* * *
다음 날 아침.
강지영 본부장의 호출에 본부장실로 올라갔더니 대뜸 팀장을 맡으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연차는 안 되지만 실적으로만 보면 충분히 팀장 달고도 남아요. 다음 주 정도에 인사 회의를 열고 이기철 이사님한테 결재 서류 올릴 테니까 정 대리는 그렇게 알고 있어요.”
새파란 신인인 유진이를 시청률 20%를 돌파한 <파란 하늘>의 중요 배역에 꽂았다.
내가 주도해서 영입한 이태풍은 최성문 감독의 차기작 주연으로 만들었고.
거기다 체리블라썸의 은 5주 연속 1위로 순항을 거듭하는 중이었다.
다른 매니저들이 몇 년을 걸쳐도 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성과를 낸 덕분에 강지영 본부장의 태도는 단호했다.
팀장 업무를 맡아도 잘 해낼 자신이 있다.
하지만 회사에는 날 시기하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조금 더 천천히 가기로 마음먹었다.
회귀 전에는 내 삶만 챙기느라 주변을 살피지 못했으니까.
출세 일직선.
그렇게 직진만 하다 혼자 죽고 회귀까지 했으니 이번 삶은 달라져야 했다.
“본부장님. 감사하지만 아직은 이른 거 같습니다. 지금 팀장으로 발령되면 오히려 이기철 이사와 김동수 실장 측으로 기우는 직원이 급격히 늘어날 겁니다.”
강지영 본부장이 의자에 몸을 기대며 기분 좋게 웃었다.
“저도 그건 알아요. 하지만 정 대리가 놓치고 있는 부분도 있어요.”
“그게······ 뭡니까?”
“실기(失機).”
실기라면 좋은 시기를 놓친다?
문득 이맘때 김동수 실장은 배우와 가수들을 대거 영입했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A급만 4명에 가수는 2팀 정도.
“혹시 서예종 라인이 움직이고 있습니까?”
“하여간 눈치는 빠르다니까.”
강지영 본부장은 현재 이기철 이사의 움직임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현재까지 서예종 라인이 A급 배우만 8명 가수만 5팀을 데리고 왔어요.”
회귀 전 내 기억과 달리 영입의 속도가 배는 빨랐다.
마치 뭔가에 쫓기듯 말이다.
덕분에 강지영 본부장의 경계가 잔뜩 높아져 있었다.
“그러니까 정 대리가 팀장을 맡아서 사람들 좀 끌어와 줬으면 해요. 아무래도 사람을 영입하려면 팀장급은 되어야 할 테니까요. 내부 불만은 제가 다스릴게요.”
카리스마 있는 강지영 본부장의 말에 잠깐 고민의 시간을 가졌다.
‘어떻게 한다? 아 맞다.’
조만간 데리고 올 강하나가 어지간한 배우 10명 몫의 수익을 벌어준다지만 그건 나만이 아는 미래.
강지영 본부장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선 다른 연예인의 이름을 대야 했다.
“본부장님. 박은성 배우 아시죠?”
“에이 박은성 모르면 대한민국 사람이 아니죠. 근데 그분 이름이 여기서 왜 나오는 거죠?”
박은성은 <아침이 간다>에서 남자 주인공을 맡았던 30대 남자 배우 중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탑스타.
그런 박은성을 우리 회사로 영입하겠노라고 대답했다.
강지영 본부장이 들뜬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만 되면 걱정이 없죠. 이 이사님이 데리고 온 애들 다 모아도 그만큼은 못하니까. 그런데 블루 엔터가 놓아주겠어요? 거기는 박은성 씨가 빠지면 문을 닫아야 하잖아요.”
“방법이 있습니다.”
확신에 찬 내 대답에 강지영 본부장이 잠시 고민에 빠졌다.
“자신 있어요?”
“예. 반드시 데려오겠습니다.”
강지영 본부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알겠어요. 인사 발령은 없는 거로 하죠. 대신 영입 못 하면 제가 시키는 대로 하세요?”
“물론입니다. 본부장님.”
인사를 마치고 사무실로 내려가려는데 강지영 본부장이 날 붙들었다.
“아 참. 정 대리. 박 팀장 징계에 대해서 할 말이라도 있어요?”
이태풍에게 카메라 울렁증이 있다는 이야기를 3실에 흘린 사람이 누구인지는 내부조사를 통해 이미 밝혀졌다.
예상했던 대로 범인은 배우 2실의 박인기 팀장.
강지영 본부장은 정이 많은 성격이다.
하지만 공과 사가 분명해 이대로는 넘어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회귀 전이라면 나 역시 그녀의 의견에 동의했을 거다.
하지만 이번 생에는 다른 선택을 하고 싶었다.
죽는 순간.
정실모를 제외하고 아무도 없던 그 외로움을 다시 겪기 싫었으니까.
그리고 서예종 라인에 맞서 싸울 아군도 늘려야 하니까.
“본부장님. 제게 박 팀장님을 설득할 기회를 한번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간곡한 부탁에 강지영 본부장이 가만히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의도는 알겠는데 일은 분명하게 하죠. 확실히 사과를 받아내고 재발을 막을 것. 그게 아니면 그냥은 안 넘어갑니다. 아셨죠?”
“알겠습니다. 본부장님.”
강지영 본부장의 방을 나온 난 박인기 팀장에게 곧장 전화를 걸었다.
* * *
회사 근처의 실내 포차.
내 연락을 받은 박인기 팀장이 못 이기는 척 나왔다.
테이블에는 족발 중짜에 따라 나온 서비스 어묵탕이 몽글몽글 뜨거운 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팀장님. 제 술 한잔 받으십시오.”
박인기 팀장은 징계를 받는다는 말을 들었는지 묵묵히 내 잔을 받았다.
주호성 팀장과 어울리면서 불만이 많아졌고 귀도 얇지만 천성이 나쁜 사람은 아니다.
1년 차도 안 된 신입이 대리를 달자마자 팀장 직위를 위협하니 불만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을 거다.
내가 연일 대박을 내자 더 초조하고 불안했을 거고.
그러니 주호성 팀장에게 홀라당 낚였겠지.
“팀장님.”
“왜 인마?”
“저 너무 미워하지 마십시오. 제 손에 닿는 배우들 어떻게든 살려보려다 이렇게 된 거지 절대 선배님들을 무시해서 치고 나가려고 한 건 아닙니다.”
박인기 팀장이 인상을 찌푸린 채 족발을 한입에 왕창 집어넣었다.
박인기 팀장은 입안에 든 것들을 우걱우걱 씹어 넘기고는 술내를 풍기며 말했다.
“그러길래 네 담당만 챙기지 말고 2실 배우들을 조금만 신경 써 줬으면 좋았잖아. 2실의 배우들이 너와 다른 매니저들을 비교하며 불만을 터트리는 통에 다들 얼마나 힘들었는지나 아냐? 나 혼자면 견뎠겠지만 내 밑에 김 대리랑 최 대리는 아주 죄인처럼 지냈다고.”
속내를 털어놓은 박인기 팀장의 설움이 찬찬히 쏟아졌다.
“하아. 쪽팔리게 내가 뭔 소리를 하는 건지. 됐다. 그만하자 이미 끝난 일인데.”
가만히 듣고 있던 난 조심스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간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를 털어놓았다.
유진이와 체리블라썸 그리고 이태풍에게 일어난 일들을.
덕분에 너무 바빠 미카엘라 수녀님이 있는 광주에 있는 보육원에도 못 가봤다는 내 고백을 말이다.
가만히 내 이야기를 듣던 박인기 팀장이 쭈뼛대기 시작했다.
“야! 인마. 됐어. 그만해. 그런 사정이 있으면 진즉에 이야기나 좀 하지. 젠장! 난 그런 줄도 모르고······.”
박인기 팀장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리고는 자기 앞에 놓인 술잔을 탁하고 입에 털어 넣었다.
“크~. 쓰다.”
독한 소주 때문에 박인기 팀장의 인상은 한껏 찌푸려졌다.
하지만 내게 보인 적의는 이미 많이 수그러들어 있었다.
난 이때다 하고 그를 달랠 제안을 내밀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제가 팀장님께 한 가지 제안할 게 있습니다.”
“무슨 제안?”
지금 박인기 팀장을 설득한다고 해도 막상 바뀌는 게 없다면 불만은 다시금 터져 나온다.
그리고 그 불만을 이용해 주호성 팀장이 파고들 거고.
다툼의 원인을 없애기 위해서는 파이를 나눠 먹는 수밖에 없었다.
“조만간 장준혁 씨가 활동을 시작할 겁니다. 준혁 씨가 오시면 박 팀장님네 식구들이 챙겨주시면 안 될까요?”
박인기 팀장이 어묵탕을 먹던 숟가락을 멈춘 채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장준혁 배우를 우리 팀에 넘긴다고?”
대하 사극부터 코미디 로맨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주연을 맡아왔고 최근에는 예능으로 영역을 넓혀서 큰 활약을 하는 배우가 바로 장준혁이다.
박인기 팀장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예. 박 팀장님이 일정 관리만 잘하면 데리고 계신 다른 배우분들을 끼워 넣어도 될 겁니다. 장준혁 배우님이 은근히 베푸는 걸 좋아하시는 데다 까탈스러운 성격도 아니니까요.”
애당초 박인기 팀장의 불만은 인기 없는 배우들을 관리하는 데서 나왔다.
담당하는 배우가 인기가 없으면 회사 내의 모든 스케줄에서 우선순위가 뒤로 밀리니까.
차량부터 메이크업 순서 방송국 스케줄까지.
그렇게 배우가 겪은 설움은 내리 갈굼으로 매니저에게 향한다.
그 결과 매니저는 2배 3배 이상으로 스트레스를 받는다.
배우한테 치이고 방송국 스태프에 치이고 회사 상사들에게도 치이니까.
그래서 매니저에게는 담당하는 배우의 인기가 곧 자신의 권력이나 마찬가지였다.
내 제안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박인기 팀장이 쇠숟가락을 놓쳤다.
첨벙.
뜨거운 국물이 박인기 팀장의 손을 덮쳤다.
박인기 팀장은 뜨거운 것도 느껴지지 않는지 멀뚱히 날 쳐다만 보고 있었다.
쌍욕을 퍼부어도 모자랄 상황에 오히려 매니저로서의 가장 큰 힘을 나눠주겠노라 말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