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13. 변하지 않는 시청률 1
온갖 생각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유진이가 22화의 촬영분을 시작해야 일정이 삭제되는 건가?
그것도 아니면 또 출연을 못 하게 되는 건가?
일단 현재로는 정확한 이유를 알 방법이 없었다.
그러니 당분간 다이어리를 틈틈이 확인해 보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사이 오덕구 팀장은 유진이를 붙잡고 박은빈의 성격에 관해 알려주고 있었다.
“유진아. 박은빈하고는 어지간해서는 눈도 마주치지 말고 피해 다녀라. 걔 성격이 장난 아니다.”
“박은빈 선배님. TV에서 봤을 땐 귀엽고 깜찍하시던데요.”
오덕구 팀장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했다.
“하이고? 얘가 세상 모르는 순진한 소리를 하네? 은빈이 걔가 3년 전에 말이야······”
옆에서 들어 보니 반은 사실 반은 괴담 수준의 루머다.
인사 안 하고 지나가는 후배를 계단에서 밀었다는 거나 데뷔를 노리고 경쟁하던 연습생이 행방불명 되었다는 등등.
오덕구 팀장의 연이은 괴담 살포가 이어졌지만 유진이는 그저 옛날이야기라도 듣는 아이처럼 태연할 뿐이었다.
“하여간 조심하라고. 대본 분량이 고무줄이라는 건 배우라면 당연히 아는 거지만 누구나 쿨하게 수긍하는 건 아냐. 막상 당하면 열 받거든.”
“걱정하지 마세요. 팀장님. 제가 알바 할 때 겪은 일화들을 들으시면 그 정돈 아무 일도 아니다 싶으실 거예요.”
“도대체 무슨 일을 겪었길래?”
오덕구 팀장이 묻자 유진이는 그저 씨익 웃기만 했다.
그때였다.
주차장으로 대형 버스가 들어오는 게 보였다.
스태프들인가 싶어 인사하려 봤더니 버스 앞 유리창엔 [쁘띠엔젤 현장응원 차량]이란 표식이 붙어 있었다.
뒤로는 커피차까지 따라오고 있었고.
“쁘띠엔젤? 하 쟤들까지 오냐?”
오덕구 팀장이 혀를 내둘렀다.
쁘띠엔젤은 쁘띠모의 팬클럽 이름이다.
팬들이 현장으로 밥차와 커피차를 보내는 일이야 흔하다지만 이렇게 드라마 현장까지 직접 찾아오는 경우는 드물다.
응원전을 펼쳐야 하는 음방과는 달리 드라마 현장에서 응원은 배우의 집중을 방해할 뿐이니까.
버스의 문이 열리고 조르르 줄을 서서 내린 쁘띠엔젤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짐칸에서 온갖 비품들을 꺼내고 커피차에 플래카드를 붙이면서 말이다.
[오늘은 큐티은빈이 커피 쏘는 날!]
[대박 나라! 박은빈!]
[<아침이 간다> 스태프 여러분. 우리 은빈이 잘 부탁해요!]
마치 숙련공처럼 착착 플래카드를 내건 쁘띠엔젤들이 현장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우리 은빈님 연기를 직접 볼 수 있다니 완전 감격!”
“야. 오늘 조공 물품 잘 챙겨. 스태프들한테 줄 거 빼돌리다 걸리면 나한테 죽을 줄 알아.”
“알았어. 언니. 오늘 촬영 끝까지 보고 갈 거지?”
“당연한 걸 왜 물어? 입 아프게.”
“자. 운영진들 좀 더 서둘러. 응원봉 없는 사람은 운영진에게 따로 달라고 하고.”
촬영장에서 응원봉이라니 번지수 잘못 찾은 거 같은데.
하지만 현장 스태프 누구도 거기에 토를 다는 사람은 없었다.
박은빈 소속사인 TK 엔터가 이번 드라마의 제작 지원을 했기 때문이겠지.
갑자기 안 좋은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회사에 큰소리를 치고 왔는데 다이어리의 일정도 안 바뀌고 쁘띠엔젤 까지 나타나다니.
첩첩산중이다.
“오늘 좀 피곤하겠다.”
오덕구 팀장이 쁘띠엔젤들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쁘띠엔젤의 회장단이 온 순간 대처할 방법이 떠올랐다.
“쟤들이 하는 거라고 해 봤자 악플 다는 거밖에 더 있겠습니까?”
“요즘은 그게 제일 무섭지. 하여튼 흠 안 잡히게 조심하자고.”
“그럼 홍보팀에게 미리 연락해서 박은빈 팬클럽과 관련된 스타그램과 트윈터를 필터링하라고 부탁해 두겠습니다. 악플 달면 곧장 법무팀에게 넘기라고요.”
빠릿빠릿하게 말하자 오덕구 팀장이 놀란 표정을 짓는다.
갑자기 왜 이렇게 변했냐는 듯한 표정으로.
“가시죠. 이제 우리도 슬슬 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어 어. 그 그래. 그래야지.”
당황한 오덕구 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앞장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앞서가면서도 날 힐끔힐끔 쳐다보기 바빴다.
1년 차지만 어리바리하게 움직일 생각은 없다.
이미 김동수의 라인이 회사를 먹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거다.
그리고 지금.
김동수를 막을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까.
* * *
“자자. 다들 자기 자리로!”
고풍스러운 저택 세트장 여기저기에서 조명팀과 음향팀이 바쁘게 뛰어다녔다.
점검이 끝났단 싸인에 박두식 PD가 큰소리로 외쳤다.
“오늘 눈이 많이 오면 현장에서 철수할 테니까 조연출은 일기 예보 계속 체크하고.”
“예! 맡겨만 주십시오!”
“그리고 은빈이가 오면 곧바로 씬 272로 넘어갈 테니 그리 알고. 우선 씬 278부터 갑니다. 자 22화도 수정됐으니까 헷갈리지 말고 잘 보세요. 자 수정 대본 씬 278. 자 레디~ 악숀!”
박두식 PD의 독특한 외침과 함께 촬영이 시작되었다.
씬 278은 여주인공인 최은영이 그녀의 남자 친구와 다투는 장면이다.
악질적으로 주인공을 밀고 욕설을 퍼붓다 마침내 뺨을 때리려 손을 치켜드는 악역의 살기등등한 모습에 나도 모르게 손에 땀이 고였다.
그때 유진이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친구인 주인공을 돕기 위해 악착같이 악역에게 덤벼드는 친구가 유진이가 맡은 이설란이라는 캐릭터다.
유진이는 머리가 헝클어지고 옷이 뜯어지는데도 몸을 사리지 않았다.
누가 봐도 주연급인 두 배우에게 밀리지 않는 연기다.
“어쩐지 자신만만하더라니······ 저 정도면 네가 자신감을 보일 만하네.”
오덕구 팀장이 유진이의 연기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팀장님이 보시기에도 역시 그렇죠?”
단 한 씬.
유진이의 연기력을 평가하는 데는 한 씬으로 충분했다.
오덕구 팀장도 유진이의 연기를 본 뒤론 걱정을 거두고 현장에 집중했다.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웃음을 머금는 그 표정을 보니 괜히 내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얘가 미래의 천만 배웁니다!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내 손에 들린 다이어리를 확인한 순간 나도 모르게 침음이 흘러나왔다.
[에브리데이 V10]
[날짜 : 2019년 12월 24일]
-PM 10:00 <아침이 간다> 22화 모니터링. 시청률 19.5%
촬영이 시작되면 바뀔 줄 알았던 22화 시청률이 여전히 그대로다.
그렇다면 일어날 확률이 가장 높은 일은 유진이가 촬영한 수정 대본 22화 분량이 방송을 타지 못하는 사태였다.
이대로 있을 순 없었다.
자칫하면 이지연 작가에게 받은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게 될 수도 있으니까.
수많은 경험 덕에 온갖 시나리오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하나같이 유쾌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대비하기 위해 폰 카메라로 현장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동영상 촬영 모드 ON]
<아침이 간다> 현장 상황이 내 갤럭티카 노트10에 고스란히 담기기 시작했다.
* * *
“컷! 수고했어요 배우들은 화장 고치고 의상 손 좀 보세요.”
다행히 유진이는 한 번의 NG도 없이 촬영을 끝냈다.
컷을 외친 박두식 PD는 주변 스태프들을 보며 외쳤다.
“자자! 잠시 쉬고 갑시다. 20분간 휴식하고 각 파트 감독님들은 장비 체크하신 후에 다시 여기로 모여 주세요.”
“예! 감독님.”
박두식 PD가 모니터로 시선을 돌리자 배우며 스태프들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촬영을 끝낸 유진이는 한동안 여주인공인 최은영과 인사를 나누고 자리로 돌아왔다.
대기 의자에 앉은 유진이에게 커피를 내밀었다.
“수고했어. 자. 커피.”
“고마워요 오빠. 근데 나. 이제 오빠가 타 준 거 아니면 못 마실 거 같아요.”
컵의 삼 분의 일만 채워진 커피를 보곤 가득 채워 달라며 아부를 떠는 유진이다.
“너무 많이 마셔도 안 좋아. 나중에 또 줄 테니까 일단 조금만 마셔.”
“치. 알았어요.”
유진이는 아쉬운 표정으로 커피를 한 모금 홀짝하고 마셨다.
순간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박. 이거 뭐예요?”
“좋지? 이게 내 오리지널 스타일 커피인 정 커피. 앞으론 이렇게 타 줄게.”
“무조건이요! 오빠가 타 준 맥X도 맛있었는데 이건 비교가 안 되는데요?”
유진이는 내 커피가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는지 자기도 모르게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장비를 챙기러 주차장으로 가던 스태프들이 곁을 지나가며 저마다 칭찬을 해댔다.
“유진 씨. 연기가 아주 좋더라. 신인 티도 안 나고. 아주 제법이야?”
“최 FD님. 감사합니다.”
“유진 씨. 이러다 다음 작에서는 주연 자리 꿰차는 거 아냐? 눈에 확 띄던데?”
“아녜요. 정 AD님. 호호.”
별 반응이 없는 박두식 PD와는 달리 현장 스태프들은 하나같이 유진이의 연기에 호평 일색이었다.
아침만 해도 걱정이 가득하던 오덕구 팀장도 이젠 아무런 걱정이 없다며 아빠 미소를 숨기지 못했다.
“분위기 좋네. 나는 스태프들한테 약 좀 치고 올 테니까 유진이 옆 잘 지키고 있어라. 이대로만 하면 실장님한테 찍힐 걱정 안 해도 되겠다.”
신이 잔뜩 난 오덕구 팀장은 스태프들에게 달려가서 유진이를 PR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난 오덕구 팀장과 달리 긴장을 멈추지 못하고 있다.
재깍재깍.
시간이 흘러갈수록 초조함은 커져만 가고 있다.
아직 다이어리의 일정이 삭제되고 있지 않았으니까.
‘설마 유진이가 다치기라도 하나? 그래서 22화에 못 나오는 건가?’
그렇게 고민이 깊어지고 있을 때 쁘띠엔젤의 회원 한 명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은빈님이다!!”
주차장으로 새하얀 벤츠 스프린터가 들어오고 있었다.
순간 스태프들에게 커피와 간식을 전달하던 쁘띠엔젤들이 마치 미어캣처럼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어디? 어디?”
“주차장!”
“가자!”
우르르!
쁘띠엔젤들이 일제히 주차장 방향으로 달려갔다.
드르르륵.
벤츠 스프린터가 멈추고 옆면의 슬라이딩 도어가 열리자 키 162cm에 작고 동그란 얼굴을 가진 박은빈이 사뿐히 차에서 내렸다.
허리까지 오는 긴 생머리에 명품 롱 패딩과 체크 무늬 미니스커트를 입고 롱 부츠를 신고 있다.
포스만 보면 아이돌이라기보단 이미 여우주연상을 몇 번 정도 받은 거물 배우 뺨칠 정도다.
내 자체 평가로는 박은빈의 연기력은 별 0.5개.
하지만 쁘띠모가 워낙에 잘 나가다 보니 그녀에게 냉정하게 연기력이 구리다고 말해 줄 사람은 없을 거다.
그때였다.
벤츠 스프린터의 운전석에서 TK 엔터 소속의 매니저가 가방을 들고 내렸다.
TK 엔터의 마동팔 본부장.
‘저 인간이 여기 왜 와?’
아무리 박은빈이 TK 엔터의 대들보 중 하나라도 본부장급이 현장에 매니저로 오는 일은 극히 드물다.
거기다 저 마동팔은 건달 출신이라 무슨 일이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다 하는 스타일이다.
뒤처리 수완도 좋아 10년 뒤엔 TK 엔터의 NO. 2까지 올라가는 거물이고.
굳이 말하면 김동수 과에 가깝달까.
좀 더 주먹을 잘 쓰고 험악하게 생긴 걸 더해야겠지만.
‘설마 저 인간 때문인가?’
마동팔 본부장이 손을 쓴다면 유진이의 녹화분이 방송에 타지 못하는 게 현실이 될 수도 있었다.
대본이 수정되면서 박은빈의 분량을 가장 많이 빼앗았다.
그 탓에 마동팔 본부장은 언제든지 상황을 되돌리려고 벼르고 있을 테니까.
최악의 상황을 고려한 나는 유진이의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유진아. 박은빈 온다. 인사하자.”
“아 넵!”
유진이가 대본을 손에 쥔 채 대기 의자에서 일어났다.
“은빈 언니! 저희 왔어요.”
“꺄아아악. 언니!”
“호호. 얘들아. 와 줘서 고마워.”
쁘띠엔젤들이 요란스레 떠들자 박은빈은 팬들을 반기며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은빈 언니! 저희가 커피차 불렀어요!”
“조금만 있으면 스태프들에게 줄 도시락도 오니까요. 힘내세요!”
“어머! 고마워 얘들아. 내가 너희들 때문에 사는 거 알지?”
“저희도요~.”
팬들과의 인사를 끝낸 박은빈은 마동팔의 재촉을 받고 세트장 쪽으로 빠르게 걸어왔다.
아무래도 내가 예상했던 나쁜 경우가 틀리지 않은 것 같다.
지나가는 스태프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하면서도 박은빈과 그녀의 매니저 마동팔 본부장의 눈은 유진이에게 꽂혀 있었으니까.
코앞까지 다가온 박은빈을 본 우린 먼저 인사를 꾸벅 건넸다.
유진이가 첫 촬영을 했을 때는 현장에 박은빈이 없었기에 오늘이 첫 대면이었다.
“반갑습니다. 굴렁쇠 엔터의 정유진입니다.”
박은빈도 환히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우리만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배역 도둑질한 X이 감히 누구한테 말을 붙여?”
와.
저 싸가지 좀 보소.
신고식 한 번 거하게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