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7화
127. 에이스의 유혹
이지연 작가에게 내가 한 제안은 적당한 때가 올 때까지 ‘만신 월아’를 맡은 배우의 정체를 숨기자는 것.
이지연 작가가 깔깔거리며 웃는다.
“호호. 하여간 유노는 발상이 참 기발해. 오래간만에 재미있겠네. 그런 거라면 대본을 조금 더 수정해야겠지만.”
당연히 이지연 작가는 두 손을 들고 찬성.
다만 유진이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이다.
“오빠. 그런데 연기야 김수희 선생님이 도와주신다고 해도 제 얼굴을 노인처럼 보이게 할 수 있을까요?”
난 피식 웃으며 답했다.
“양소리 대리한테 맡기면 돼.”
“소리 언니요?”
현재 배우 2실의 메이크업 아티스트인 양소리 대리는 조만간 굴렁쇠 엔터를 퇴사하고 영화사 분장팀에서 일하게 된다.
멀쩡한 사람을 외계인으로도 보이게 하는데 노인으로 분장하는 것 정도야.
김수희의 레슨과 양소리의 특수 분장으로 유진이를 ‘만신 월아’로 완벽히 바꾸고 나면 남은 건 보안 유지뿐.
그리고 그건 내 전문 분야고.
내 설명이 이어지자 유진이의 얼굴에도 약간의 기대가 어렸다.
“그러면······.”
“유진아 해보자. 응?”
“그래. 유진~. 재미있을 거야.”
유진이는 이지연 작가와 날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았어요! 까짓것. 모 아니면 도죠!”
그렇게 우리는 ‘만신 월아’의 정체를 숨기기 위한 작전을 시작했다.
* * *
<파란 하늘>의 현장에서 한창 촬영 도중 에이스 엔터의 임성학 대표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지난번 영인이를 통해서 만나자고 했었는데 기억하나? 오늘 시간 어떤가? 같이 저녁이나 하지.
마침 저녁에 스케줄이 없었기에 저녁 7시에 보기로 약속을 잡았다.
촬영을 끝내고 약속 시각보다 10분 일찍 강남역 한솔 한정식에 도착했다.
들어가자마자 전담 안내 직원이 나왔다.
“저 임성학 대표님께서 예약해 두셨다고 들었는데요.”
“아 정윤호 님? 이쪽으로. 절 따라오시면 됩니다.”
데스크 옆으로 난 길을 따라가자 바닥에 동글동글한 자갈이 잔뜩 깔린 길이 나왔다.
길 양쪽으로는 왕 대나무들이 곧게 서 있었는데 입구에서 들어오는 바람에 잎들이 부대끼며 차라락하는 소리를 울려대고 있었다.
운치 있는 길을 따라 20m 정도 갔을 때 ‘VVIP 룸’이라 적힌 방이 나왔다.
“들어가시죠.”
방으로 들어가자 식전 차와 함께 디저트가 준비되어 있었다.
“임 대표님이 오시면 그때 식사 내겠습니다. 그리고 혹시 전채가 부족하시면 말씀 주십시오. 저희 가게 부각이 아주 괜찮습니다.”
“아. 괜찮습니다.”
난 임성학 대표를 기다리며 폰을 열어 기사 면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기사에는 지난 며칠 동안의 일이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속보) 톱스타 장지철 전격 구속]
[(속보) 논란의 중심에 섰던 최종혁. 1차 조사 후 미국 도피 시도 중 인천공항에서 긴급 체포!]
[(단독) 슬픈 이혼사를 고백한 최지영. TBC 아침 드라마에 전격적으로 발탁!]
[(단독) 최성문 감독의 차기작 <경계 너머로>의 의외의 선택. 주연엔 이태풍!]
기분 좋은 소식이 가득했지만 아쉽게도 TK 엔터 천이상을 고꾸라트릴 순 없었다.
천이상 이사는 바지사장으로 이사 하나를 감옥에 보내고는 자신은 유유히 빠져나가 버렸으니까.
“하여간 이것들은 운영하는 방식부터 조폭과 똑같다니까.”
사고는 윗선이 치고 감빵은 피라미를 보내고.
가능한 한 안 얽히는 게 좋은 상대였다.
그때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까톡이 도착했다.
[상여금 입금 : 10000000원]
[총 잔액 : 66384382원]
이태풍을 주연으로 만든 보너스로 세후 천만 원이 들어왔다.
점점 불어나는 돈이지만 지분 전쟁에 끼어들기 위해서는 아직 많이 부족하다.
부동산이야 앞으로 하락만 할 테니 엔터나 화장품 그리고 의류에 관련 주식에 투자해 돈을 불려야겠다 싶었다.
동종 업계 중에서는 어떤 기업이 상승세를 타는지 알고 있으니까.
그때였다.
드르륵.
미닫이문이 열리며 건장한 체구의 남자가 번쩍이는 금빛 롤렉스 시계를 확인하며 들어섰다.
“미안하군. 내가 좀 늦었어.”
“아닙니다. 대표님.”
그런데 그 뒤로 교복 차림의 주영인이 총총걸음으로 들어왔다.
“어? 영인 씨는 왜?”
“촬영 마치고 이동하는데 대표님이 함께 가자고 하셔서 왔어요.”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더니 주영인이 새초롬한 눈으로 날 노려본다.
“왜요? 제가 같이 나온 게 마음에 안 들어요? 저 나갈까요?”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영인아.”
“아 알았어요. 반가워서 장난 좀 쳤어요.”
임성학 대표의 경고에 주영인이 입을 다물었다.
“자네 술은 좀 하나?”
초면에 웬 술?
배우 가수 매니저까지 주당이 넘쳐나는 이 업계 사람답지 않게 난 예전부터 술이 약했다.
“자주 먹진 않습니다.”
“그래? 그럼 적게 마시는 대신 좋은 거로 한잔하지.”
임성학 대표는 한 병에 20만 원이 넘어가는 안동 소주를 주문했다.
도자기 잔에 따라진 소주를 한 입 넘기자 입안 가득 은은한 향과 함께 달콤한 맛이 느껴졌다.
독하면서도 술술 넘어가는 게 자연스레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제법 괜찮지?”
“아 예.”
“안주도 들게. 입에는 달지만 독한 술이니까.”
들깨 기름에 무친 비름나물로 입가심을 하는 사이 임성학 대표는 두 번째 잔을 채워주며 본론을 꺼내 들었다.
“내가 오늘은 제안을 하나 하려고 만나자고 했네.”
“말씀하십시오.”
임성학 대표는 남은 잔을 탁하고 입안에 털어 넣었다.
“자네에게 독립 회사를 설립해 주지. 자본금은 20억. 경영권은 자네가 가지되 지분과 수익 배분은 5:5. 유통은 전적으로 에이스 엔터에서 책임지도록 하고. 회사나 연예인 인사 선발권도 모두 자네에게 다 맡기지. 자네는 이 자회사의 책임자로 내 곁에 남아주면 되네.”
어떤 제안이 오더라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고작 팀장급 지위로는 성에 차지 않으니까.
하지만 내 생각이 틀렸다.
이렇게 후한 제안은 이제껏 받은 적도 없고 앞으로 받을 수도 없는 조건이다.
몸에 들어간 알코올이 흥분으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절대 이 제안에 함정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표정이 그리 좋지만은 않군. 그래도 내 제안이 그리 야박하지는 않을 텐데?”
임성학 대표의 말에 난 지끈대는 머리를 만지작대며 말했다.
“야박한 게 아니라 오히려 너무 대단한 조건이라 생각을 좀 정리해야겠습니다. 죄송한데 잠시 화장실 좀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임성학 대표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쉽게 허락했다.
마치 체크메이트를 불러놓고 내가 기권을 하기만을 바라는 것처럼.
“천천히 다녀오게.”
문을 열고 나가니 번쩍이는 VVIP 전용 화장실이 보였다.
문을 열고 들어간 나는 한숨을 쉬며 다이어리를 펼쳤다.
“저 인간이 뭘 믿고 이런 제안을 하는 거지······?”
제안은 당연히 거절할 생각이다.
하지만 현재 업계 1위의 대표라는 사람이 왜 이런 제안을 한 건지 알아야만 했다.
내 선택이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몰랐으니까.
다이어리를 빠르게 넘겨보며 임성학 대표와 에이스 엔터에 얽힌 일정을 체크했다.
다행히 한 가지 쓸만한 정보를 찾을 수가 있었다.
[에브리데이 V10]
[날짜 : 2022년 12월 24일]
-PM 10:00 에이스 엔터 대책 회의 5F 회의실 (보고 사항 : 에이스 엔터의 장성민 부사장 PMK 대표이사 박민구 – 검찰 조사. 자회사 PMK 횡령 분식 회계 관련 의혹)
일명 PMK 횡령 사건.
임성학 대표가 운영하는 에이스 엔터의 자회사 중 하나가 소속 배우들의 비용을 과다 정산해서 빼돌린 사건이다.
그 결과 PMK 대표가 구속되고 결국엔 임성학마저 구속되어 버린다.
‘그렇다면······.’
임성학 대표의 제안은 경영권은 내게 줘놓고 재무이사를 내려보내 돈을 뒤로 빼돌리려는 술책일 터.
연예계만 알고 경영 업무를 모르는 매니저들이 당하기 딱 좋은 제안이었다.
“쯧. 물린 놈이 한둘이 아니겠는데?”
에이스 엔터에 자회사의 개수가 왜 많은 건지 이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나조차 아찔할 정도로 대단한 제안이었는데 사정을 모르는 보통 매니저들이었다면 결코 이 함정을 벗어나지 못했을 거다.
임성학 대표는 이런 통 큰 제안들로 ‘업계 큰 형님’이란 소리를 들으며 1위로써 승승장구하고 있던 거고.
“업계 큰 형님은 개뿔. 업계의 큰 사기꾼이구만.”
난 심호흡을 가다듬고 얼굴에 찬물을 끼얹었다.
최근 들어 연속적으로 성공을 한 탓에 약간은 나태해진 모양이다.
“오히려 고마워해야겠네. 임성학 대표.”
난 상쾌해진 기분으로 다시금 자리로 돌아갔다.
홀로 반주를 하고 있던 임성학 대표가 기분 좋은 표정으로 묻는다.
“결정은 했나?”
“예.”
자신만만한 내 태도에 임성학 대표가 지레짐작하며 갈색 에르메스 서류 가방에서 종이를 꺼내려 한다.
“서류는 미리 준비······.”
난 임성학 대표가 서류를 다 꺼내기도 전에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제안은 감사합니다만 못 들은 거로 하겠습니다.”
임성학 대표가 멈칫거렸다.
“혹시 내 조건에 문제가 있나?”
“아뇨. 없습니다. 하지만 전 그보다 좋은 조건을 건다고 해도 갈 생각이 없습니다.”
순간 곁에 있던 주영인이 빽하고 외쳤다.
“정 대리님! 지금 제정신이에요? 독립해서 당신이 좋아하는 유진이 데리고 오고 다른 사람들도 다 데리고 오면 되잖아요! 사장이 될 기횐데!”
임성학 대표가 손을 치켜들어 주영인을 말렸다.
“영인이 넌 잠시 나가 있어라.”
“대표님!”
“어허.”
임성학 대표가 낮게 말하자 주영인이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벌떡 일어나 나갔다.
드르륵.
쾅!
미닫이문이 거칠게 열렸다 닫혔다.
임성학 대표가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기 시작했다.
“설마 나와 밀당이라도 하려는 건가?”
“아닙니다.”
“그럼 진짜 이유가 뭐야?”
하지만 난 임성학 대표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말없이 마주 보는 시간이 길어지자 결국 포기한 건 임성학 대표다.
“쯧. 내가 지금 뭘 하자는 건지. 영인이가 자네와 일하고 싶다기에 특별히 제안했더니. 다들 오냐오냐하니까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것 같군. 내가 사람을 잘못 봤어.”
불쾌한 듯 인상을 찌푸린 임성학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값은 미리 다 지불했으니 저녁이나 먹고 가게. 난 영 속이 불편해서 먼저 가야겠네.”
임성학 대표가 몸을 홱 돌려 미닫이문을 닫고 나갔다.
난 나간 문을 보며 피식하고 웃었다.
“돈이 썩어나네. 이런 비싼 집에서 밥을 시켜놓고 그냥 나가다니······.”
예전 같으면 자존심 상해서 안 먹는다고 했겠지만 회귀까지 하고 나니 넉살이 좋아졌다.
“유진이랑 미소랑 같이 먹어야지~.”
남은 음식을 싸 달라고 하기 위해 테이블에 위에 있는 벨을 눌렀다.
10초도 되기 전 미닫이문이 열렸다.
그런데 종업원이 아닌 주영인이 서 있었다.
미간을 찌푸린 채 날 째려보면서.
“왜 다시 왔습니까?”
“지금 제정신이에요?”
주영인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려 퍼졌다.
“제정신이라뇨?”
“대체 왜 임 대표님의 제안을 뿌리친 거죠? 이런 조건 다른 데서 절대 못 받는 거 몰라요? 당신 정말 바보야?”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을 짓자 주영인이 쉼 없이 날 몰아세웠다.
회귀 전 내 아내가 눈앞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이 들 만큼.
“그동안 임성학 대표한테 얼마나 좋게 말했는데! 아니 그 좋은 조건을 내칠 정도로 나랑 일하기가 싫어요?”
이제껏 늘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아온 그녀였기에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내가 화를 불러일으킨 듯하다.
“지금이라도 연락해서 사과부터 하세요!”
주영인이 자신의 폰을 코앞으로 내민다.
“안 합니다.”
“안 하긴 뭘 안 해! 해요! 임 대표님 제안을 받아들이면 당신이 원하는 배우나 가수를 마음껏 키울 수 있잖아요!”
따따부따 쏘아대는 그녀의 말은 한동안 끊이지가 않았다.
씩씩대는 그녀의 얼굴이 점점 더 발갛게 달아올랐다.
회귀 전 내 아내였던 시절.
주영인은 화가 났을 땐 자신의 분이 풀릴 때까지 이렇게 언성을 높이며 화를 냈었다.
아무리 그녀를 모르는 척하려 해도 이런 익숙함이 날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이럴 때마다 그녀와의 거리가 급속도로 줄어드는 것만 같았으니까.
난 그녀의 눈을 피하며 기억 속의 그녀를 지우려 애썼다.
지금의 주영인은.
더는 내 아내가 아니라 나와 유진이를 괴롭히고 흔들어대는 사람일 뿐이니까.
눈을 꾹 감고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결국엔 주영인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그때였다.
“윤호 오빠.”
예상치 못한 호칭에 깜짝 놀라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만 해도 씩씩대며 날 몰아세우던 주영인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