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6화
126. 충돌
반말로 대꾸하자 김동수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너 너 지금 뭐라고 했냐?”
“내 새끼들 건드리기 전에 당신이 먼저 죽는다고.”
씩씩하는 거친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
김동수의 눈에 선 핏발이 보인다.
와락!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한 김동수가 내 멱살을 붙들었다.
“이게 진짜 미쳤나! 감히 누구한테!”
김동수의 거친 태도에 심장이 미친 듯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팰까?’
딱 한 대.
그래.
딱 한 대만 때리자.
그 정도면 정당방위라고 우길 수도 있을 거다.
그런 생각으로 오른 주먹을 쥐었다.
코앞에서 고함치는 김동수의 턱을 목표로.
그런데 그 순간.
김동수의 차량 블랙박스에 푸른색 녹화 불빛이 깜빡이는 게 보였다.
순간 뜨겁게 달아올랐던 피가 빠르게 식어 내렸다.
주먹을 휘둘렀다간 저 블랙박스에 찍혀 옴팡지게 뒤집어쓸 수 있었으니까.
찰나의 고민 끝에 주먹의 힘을 풀었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멱살을 잡혀 있을 생각은 없었다.
탁!
두 손을 위로 들어 올려 멱살을 잡은 김동수의 두 손목을 후려쳤다.
“큭!”
김동수가 인상을 쓰며 손목을 어루만졌다.
“새X라고 부르는 것 좀 그만해. 듣는 새X. 기분 나쁘거든.”
빠드득.
김동수가 이를 악물고 으르렁거렸다.
“이 자식이 보자 보자 하니까. 내가 독한 마음을 먹으면 너 따위쯤은 날려버리는 게 일도 아닌 거 몰라?”
알아.
당신 힘 센 거.
김동수에 관한 거라면 나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다.
반면 놈은 날 모른다.
내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도.
날 잘라버리겠다 협박하는 김동수를 보며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3월 17일 예승 실업 김문성 상무. 4월 5일 진아 기획 유진혁 이사. 5월 12일 하노스 프로덕션 채인호 이사. 뭔지 알지?”
내 입에서 지난 일정들이 나오자 기세등등하던 김동수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지금 말한 건.
회귀 전 김동수의 운전기사 역할을 하며 알게 된 접대 리스트니까.
“너 너······.”
김동수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유진이를 들먹이고 협박을 하면 내가 무릎을 꿇을 줄 알았나 본데 천만의 말씀이다.
“경고하는데. 이건 시작일 뿐이야. 만약 내 새끼들이 다치면 배우 3실에 소속된 배우들이 저지른 짓까지 싹 모아서 터트릴 테니까.”
김동수는 씩씩대면서도 더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했다.
그 순간.
그렇게나 대단하다고 생각했던 김동수가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10년을 거슬러온 내 연륜과 다이어리 앞에선 김동수 정도로는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김동수를 바라보며 흐트러진 내 옷을 탁탁 털었다.
“더 할 말 있어?”
김동수는 말도 하지 못한 채 몸을 부르르 떨었다.
시한폭탄에 불을 붙인 듯했지만 후회는 없었다.
내가 아는 정보가 어디까지인지 모르는 한 놈의 행보에 브레이크가 걸리게 될 테니까.
깊은숨을 내쉬고 화내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가 차분히 말했다.
“그러면 저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실장님.”
꾸벅하고 인사한 뒤 지하주차장의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틈 사이로 넋 나간 사람처럼 지하주차장에 멍하니 서 있는 김동수가 보였다.
* * *
김동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조금 전 정윤호가 말한 건 특급 기밀인 기업인과 연예인 지망생의 만남을 주선하는 일이었으니까.
“어 어떻게 저 자식이 그걸 알고 있지?”
정윤호가 배우 3실에 대해 많은 것들을 파악하고 갔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은밀한 거래까지 알고 있을 줄은 알지 못했다.
어찌나 놀랐는지 등골이 오싹하고 솜털이 바싹 치솟았다.
하지만 놀란 건 놀란 거고 정윤호를 상대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김동수는 정윤호가 미팅 날짜를 알아낸 가능성을 두 가지로 축약했다.
하나는 도청.
다른 하나는 배신.
그중 첫 번째 가능성을 해결하기 위해 김동수는 뛰는 심장을 억누르며 전화를 들었다.
-호호. 왜요? 나 보고 싶어서 전화했어요?
전화기 너머 들려오는 콧소리에 김동수가 버럭 하고 짜증을 낸다.
“진소미! 지금 나 장난할 기분 아냐!”
-쳇. 알았어요. 왜? 무슨 일인데요?
“너. 도청 감지하는 애들 알지?”
-알죠. 근데 날새 그 사람도 할 수 있을 텐데? 급해요? 급하면 내가 아는 사람 불러드리고.
“날새가 도청 감지를 할 수 있다고?”
-네. 재주 많은 사람이잖아요. 도둑질도 잘하고 금고도 잘 따고.
“잘됐네. 그런데 그놈 언제 나온다고 했지?”
-이틀 후 새벽 5시에 나와요.
“알았어. 끊어.”
운 좋게 새로 사람을 구하지 않아도 되었다.
왜 전화했냐며 투덜대는 진소미와 통화를 끊고 곧장 주호성 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주 팀장. 지금 어디야?”
-지금 논현동 에이랩스에서 차 배우님 모시고 한잔하는 중입니다.
주호성은 오디션에 떨어진 차태훈을 달래느라 양주를 퍼마시는 중이라 보고했다.
“그러면 차 배우는 대리 불러서 태워 보내고 넌 당장 회사로 좀 들어와.”
-지금 당장이요? 이대로 들여보내면 차 배우가······.
“중요한 일이야!”
-알겠습니다. 실장님.
전화를 끊은 김동수가 담배를 꺼내 물었지만 오늘따라 구수한 담배 연기가 맵게만 느껴졌다.
“에잇! XX.”
괜히 치밀어오르는 짜증에 김동수는 피우던 담배를 바닥에 집어 던졌다.
푸른 우레탄 바닥에 튕긴 담뱃불이 빨간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담뱃불을 발로 밟아 끈 김동수는 정윤호를 밟을 방법을 떠올렸다.
“건방진 놈이 감히 내게 도전을 해?”
한 방 맞으면 열 배로 돌려주는 게 자신의 스타일.
상대가 만만치 않다고 포기하는 성격이었다면 이 자리까지 올라오지도 못했을 거다.
“그래. 누가 먼저 꼬꾸라지는지 어디 한번 해보자.”
놀랬던 심장이 가라앉자 김동수의 승부욕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 * *
본부장실로 올라가 이태풍이 <경계 너머로>의 주연을 따냈다는 것을 보고했다.
보고를 들은 강지영 본부장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혹시나 하고 기대는 했지만 차태훈 배우를 밀어낼 줄이야. 역시 정 대리네요.”
“제가 한 게 아닙니다. 일주일간 물과 소금만으로 버틴 태풍이 덕분에 가능했습니다.”
“그런 태풍 씨를 발탁한 건 정 대리고요?”
강지영 본부장이 윙크하며 어쨌건 내 덕이라고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본부장님.”
강지영 본부장에게 보고를 끝낸 난 곽무혁 법무팀장에게 계약 초안을 맡겼다.
그리고 조금 전 지하주차장에서 김동수에게 받은 협박을 털어놓았다.
강지영 본부장의 얼굴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김 실장이······ 그딴 소리를 했다고요?”
하지만 금세 정신을 차리고는 마치 맹수처럼 눈을 번뜩였다.
그 짧은 시간에 걱정보단 맞서 싸우기를 선택하다니.
역시나 강지영 본부장이다.
“그래서요?”
“협박하지 말라고 따끔(?)하게 경고했습니다.”
강지영 본부장에게는 김동수의 미래를 알고 있다는 이야기 따윈 하지 않았다.
일정은 있지만 증거가 없었으니까.
그리고 어쭙잖은 증거로는 김동수를 쫓아낼 수 없다.
이 회사는 기본적으로 서예종의 자본으로 설립된 회사니까.
곁에서 이야기를 듣던 구성철 실장이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본부장. 김 실장이 설치는 걸 보고만 있을 건가?”
씩씩대던 강지영 본부장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싸워야죠. 제 라인이 된 정 대리를 치겠다는 건 내 목을 조르겠다는 거잖아요.”
입술을 꾹 다문 그녀의 표정에선 결연한 의지마저 느껴졌다.
강지영 본부장은 곧장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정 대리는 김동수 실장의 움직임에 관한 거라면 뭐든 보고하세요.”
“예. 본부장님.”
“그리고 구 선배. 서예종 라인이 가수 1실과 배우 3실을 키워 우릴 밀어내려는 것은 선배도 알죠?”
“알지.”
“우리도 맞불을 놔야겠어요. 배우 2실과 가수 2실에 자금을 밀어드릴 테니까 이동민 실장님과 상의해서 올해에는 체급 좀 불려 보세요.”
“오케이.”
나 역시 인력 충원에 힘이 되겠다고 말하려 했지만 강지영 본부장이 먼저 선수를 쳤다.
“그리고 정 대리가 구 선배 좀 도와줘요. 이제까지 정 대리가 맡아서 실패한 사람은 없잖아. 배우든 가수든 괜찮은 사람 있으면 데리고 와요.”
“예. 본부장님.”
다행히 이맘때쯤 데리고 올 사람이 한 명 있었다.
강하나.
정실모 중 한 명인 그녀는 다음 달에 방송될 <글로벌 프로듀스 47>에 출연한다.
자작곡으로 경연을 펼치지만 독특한 음색 탓에 아이돌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며 경연과 동시에 떨어져 버린다.
하지만 6개월 뒤.
굴렁쇠 가수 1실과 계약을 맺은 뒤 직접 작사 작곡한 곡을 너튜브에 올려 파란을 일으킨다.
1년 만에 너튜브 조회수 1억.
데뷔와 동시에 대형 가수로 성장하게 되는 강하나를 이번 기회에 가수 2실로 데리고 올 생각이었다.
* * *
한남동 고급 주택가에 있는 이지연 작가의 빌라.
이지연 작가는 <신의 이름으로>에 새롭게 넣은 무당 ‘만신 월아’란 캐릭터가 유진이를 위해 만들어졌다는 진짜 의미를 말했다.
“1인 2역이요?”
커피를 마시던 유진이가 기함했다.
“그래. 유진. 너라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거야.”
이지연 작가의 말에는 거침이 없었다.
유진이라면 25살의 젊은 무녀 ‘청명’과 65살의 ‘만신 월아’를 동시에 맡아 1인 2역을 할 수 있을 거라며.
난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지연 작가에게 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무리가 아닐까요? 유진이가 본격적으로 연기를 시작한 게 이제 5개월 정도 조금 넘었습니다.”
곁에서 선물로 사 온 한과를 직접 까서 전해주며 아부했지만 이지연 작가는 단호했다.
“자기가 일 잘하는 건 아는데 그렇다고 배우를 보는 눈이 나만 할까?”
“하지만······.”
“자기 배우를 좀 더 믿어 봐. 유진은 자기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좋은 배우니까.”
1인 2역을 맡은 배우는 언제나 화제의 중심이 된다.
과거의 전설적인 일일 드라마 <아내의 미혹>에서 얼굴에 점을 찍고 1인 2역을 맡은 만년 조연배우가 탑스타가 된 경우도 있었고.
하지만 그것도 선이라는 게 있는 게 아닌가.
유진이에게 맡기려는 1인 2역 중 하나가 60대의 노인이라는 점이 계속해서 마음에 걸렸다.
곰곰이 듣고만 있던 유진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선생님. 저 자신 없는데요.”
“너무 걱정하지 마. 설마 내가 아무 생각도 없이 자기에게 맡길까 봐? 김수희 언니가 도와주기로 했어.”
“김수희 선생님이요?”
그러고 보니 젊은 여성이 노인의 역을 맡아 화제가 된 전례가 딱 한 번 있다.
40년 전.
김수희 선생님은 40%가 넘는 전설적인 시청률을 기록한 대 히트작 <전원생활>에서 삼룡 엄니라는 역할을 맡아 전 국민을 감쪽같이 속였다.
드라마를 본 시청자들 모두가 그녀를 진짜 노인으로 착각했을 정도로.
심지어 아들인 삼룡이 역을 맡았던 정은수 배우가 김수희 선생님의 2년 선배인데도 말이다.
“그래. 천하의 김수희 언니가 유진이의 노인 연기를 돕기로 했어. 그래도 못 해?”
김수희가 도와준다면 유진이가 1인 2역을 펼치는 게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 고민하던 나도 결국에는 이지연 작가의 말에 동의했다.
성공만 하면 대박인 계획이었으니까.
“유진아. 한번 해보자. 선생님이 이렇게 준비해 두셨는데.”
곰곰이 고민하던 유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한번 해볼게요.”
유진이가 1인 2역에 도전하겠다고 결심한 순간.
내 머릿속에 번뜩이는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다.
“작가님.”
“왜?”
“유진이가 1인 2역을 한다는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됩니까?”
“자기들이랑 PD랑 수희 언니밖에는 몰라. 아 솔잎이와 한잔하면서도 이야기했구나. 그런데 그건 왜?”
“그게 말입니다······”
잠시 후.
내 계획을 들은 이지연 작가는 재미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거 잘하면 대한민국이 발칵 뒤집힐 수도 있을 거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