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4화
124. 주연 쟁취 1
“아 선배님 조금 전에는 죄송합니다. 감히 선배님을 무시한 게 아니라······”
이태풍이 급히 차태훈에게 사과했다.
차태훈은 고개를 숙인 이태풍을 말없이 바라보다 비웃음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
“자식. 연습 많이 했더라?”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그런데 태풍아. 너무 애쓰지 마라.”
“예?”
“그런다고 주연 너한테 안 간다고.”
차태훈이 말을 이어 주호성 팀장도 주연이 이미 내정되었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정 대리. 이런 이야기는 좀 당혹스러울지 모르겠지만 이미 높은 분들끼리는 다 이야기 끝난 상황이거든. 우리 차 배우가 이 영화 주연으로 내정됐으니까 괜히 얼굴 붉히지 말자고.”
이태풍이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봤다.
그 모습에 차태훈이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인마 그런 표정 하지 마라. 괜한 기대 하고 있을까 해서 온 거니까. 대신 내가 최 감독한테 좋은 배역으로 하나 챙겨주라고 할게.”
그 말을 마친 차태훈이 이태풍의 어깨를 토닥대며 자신의 밴으로 향했다.
홀로 남은 주호성 팀장이 내게 귀띔한다.
“태풍 씨도 연기는 많이 좋아진 것 같으니까 내가 특별히 강일록 역으로 밀어 볼게. 걱정하지 마.”
핵물리학자를 빼돌린 주인공 차성하를 뒤쫓는 역할을 하는 북한 특수작전대대 강일록 대좌역은 조연이긴 해도 극 중의 핵심 배역이다.
하지만 난 이태풍에게는 꼭 주연을 맡게 해 주고 싶었다.
오랫동안 연못 다비드라고 불렸던 이태풍의 이미지를 단번에 바꾸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연이 필요했으니까.
주호성 팀장은 그런 내 속내도 모른 채 차태훈을 따라나섰다.
두 사람이 사라지자 이태풍이 풀 죽은 목소리를 냈다.
“형. 정말인가요? 오늘 오디션 처음부터 결과가 정해져 있다는 게······”
이태풍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난 씨익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냐? 나만 믿어.”
네가 없었다면 그 말은 사실이 되었겠지.
그리고 내가 없었어도 그 말은 사실이 되었을 거고.
하지만 조금 전 성공적으로 치른 오디션 때문에 그 미래는 지금부터 바뀌게 될 거다.
물론 그냥은 안 되지만.
“일단은 우리. 밥이나 먹으러 가자.”
“밥이요?”
“그래. 오늘 소고기 먹자.”
정상봉과 이대호가 내 곁에서 걱정스러운 눈빛을 한다.
“정 대리님. 태풍이가 단식해서 고기를 먹기는 좀 힘들 거 같은데요.”
“우린 고기 먹고 태풍이는 소고기 잣죽 먹일 거예요. 하여간 다들 따라오세요.”
회귀 전 최성문 감독은 약속된 시간보다 20분이나 일찍 와서 기다리고 있었던 사실을 안다.
그 20분이.
내가 최성문 감독을 만나서 이태풍을 주연으로 만드는 데 주어진 시간이다.
* * *
검은 기와로 치장이 된 최고급 한우집 ‘구우구우’로 들어가자 로비에서부터 잘 관리된 소나무 분재가 우릴 반기고 있었다.
으리으리한 가게에 들어온 탓에 정상봉이 불안한 기색으로 물었다.
“정 대리님. 여기 엄청 비싸 보이는데요?”
“괘 괜찮아. 어떻게든 되겠지.”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렸다.
이런 식당에 오는 건 법인 카드를 사용할 수 없었다.
그러니 온전히 내 개인 돈으로 내야 했다.
1인분 120g에 무려 6만 5천 원이다.
오늘 고깃값이 얼마나 나올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이태풍이 조심스레 내 눈치를 살폈다.
“형. 제가 낼까요?”
“됐어. 이럴 때 쓸 돈 있어.”
강감찬 대표가 넉넉히 보너스를 챙겨줬기에 그 돈을 쓸 생각이다.
예약한 4번 방에서 5인분의 한우 생갈비와 단식을 한 이태풍에게 먹일 소고기 잣죽을 시켰다.
밑반찬이 깔리는 걸 보며 난 룸 밖으로 나섰다.
현재 시각 7시 9분.
이제 곧 최성문 감독이 도착할 시간이다.
미닫이문을 닫고 나온 난 다이어리를 확인했다.
‘일정은 그대로군.’
아니나 다를까 1분 정도 기다리자 오디션을 마친 최성문 감독의 일행이 들어오고 있었다.
“우리가 좀 빨리 온 거 아닌가?”
“한 20분 정도 빠르긴 한데 김 실장이 방을 예약해 뒀습니다. 5번 방이라고 하던데······.”
최성문 감독과 가은수 실장이 제일 앞장서고 있었고 그 뒤로 표은미 실장과 김문동 대표 신종기 대표가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그때였다.
나와 눈이 마주친 최성문 감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뭐야? 이태풍씨 매니저가 왜 여기 있어?”
“아. 여기 소고기 잣죽이 좋다고 해서 태풍이 몸보신 좀 시키러 왔습니다.”
최성문 감독이 반갑다며 웃는다.
“하하. 그래. 여기 소고기 잣죽이 끝내주지. 나도 가끔은 고기보다 그게 더 좋을 때가 있더라고. 그래. 자네들은 몇 번 방인가?”
“저흰 4번 방입니다.”
“오. 그래? 바로 옆이군.”
최성문 감독이 잘 되었다며 껄껄 웃자 가은수 실장이 빠져나가려고 대화를 끊었다.
“정 대리도 식사 잘해. 우린 약속이 있어서 이만.”
그때 최성문 감독이 나섰다.
“뭘 그리 서둘러? 난 태풍이랑 잠깐 이야기 좀 해 봤으면 하는데 어때? 시간 괜찮나?”
그럼 그렇지.
그 정도 연기를 보여줬는데 이대로 넘어가면 천하의 최성문이 아니지.
생각보다 일이 쉽게 흘러가고 있었다.
“감독님이 내려면 없는 시간도 내야죠. 시간 많습니다!”
“허! 그 친구 너스레는.”
물론 이런 상황이 반갑지 않은 사람도 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가은수 실장이 최성문 감독에게 급히 다가가 귓속말을 속삭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최성문 감독이 인상을 찌푸렸다.
“자네 오늘 좀 이상하군. 내가 태풍이를 만나면 안 될 이유라도 있나?”
최성문 감독이 노려보자 가은수 실장이 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 그런 건 아닙니다. 감독님.”
최성문 감독이 시간도 남았으니 우리 방으로 가자며 나를 재촉했다.
어차피 4번 방과 5번 방은 미닫이로 여닫을 수 있기에 어디로 가든 상관이 없었다.
4번 방의 문을 열자 막 고기를 구우려고 하고 있던 일행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 감독님!”
“허허허. 내가 옆방이더라고. 앉아. 앉아.”
구우구우의 직원들이 들어와 4번 방과 연결된 미닫이를 열었다.
순간 4번 방과 5번 방이 탁 트여 기다란 룸이 되었다.
간단한 인사 뒤.
식전 차를 마시던 최성문 감독이 이태풍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태풍이 자네. 완전히 달라졌더군.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렇게 변한 건가?”
이태풍이 정자세를 하고 답한다.
“노력했습니다.”
“허허허. 노력으로 그런 연기가 나오면 대한민국 사람들이 전부 배우가 되게? 뭔가 남모를 계기가 있었겠지.”
너털웃음을 짓던 최성문 감독은 그동안의 연기에 대한 물음을 쉼 없이 던지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대로 최성문 감독은 이태풍에게 깊은 관심이 있었다.
그 순간 가은수 실장이 최성문을 말리고 나섰다.
“감독님. 잠시 따로 이야기 좀······.”
가은수 실장의 이상한 태도에 최성문 감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냥 여기서 해.”
“다른 사람이 듣는 데서 말하기가 곤란한 내용입니다.”
인상을 쓰던 최성문 감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 참. 오늘따라 귀찮게 하는구만. 알았어. 어차피 화장실도 가야 하니 가면서 듣지.”
가은수 실장이 최성문 감독을 데리고 나가자 표은미 실장이 대화를 이끌어 나갔다.
나머지 심사위원들도 틈틈이 이태풍에게 궁금한 걸 물었고.
역시나 아까 보인 연기가 꽤 인상 깊은 것 같았다.
3분 정도 지났을 무렵.
미닫이문이 열리고 최성문 감독이 다시 들어왔다.
그런데 최성문 감독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흘러나왔다.
“태풍이. 미안한데. 자네들은 자리를 좀 옮겨주게. 이대로 옆방에서 식사하는 건 서로 불편할 것 같아서.”
명백한 축객령이다.
삽시간에 바뀌어 버린 감독의 표정에 기다리던 사람들 모두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긴장한 공기가 팽팽히 흘렀다.
연이어 가은수 실장이 호기롭게 외쳤다.
“어서 안 나가고 뭐 해?”
하지만 나는 가은수 실장의 말을 무시하고 그대로 버텼다.
한 번 아니다 싶은 사람은 두 번 다시 쳐다보지 않은 최성문 감독의 성격상 이대로 물러나면 기회는 없을 테니까.
난 최성문 감독에게 이유를 물었다.
“저희가 실수한 게 있다면 직접 꾸짖어 주십시오. 고치겠습니다.”
“그걸 말로 해야 하나?”
최성문 감독이 불편한 표정을 짓자 곁에 있던 가은수 실장이 말을 끊었다.
“아 진짜 끈질기네. 진짜 몰라서 물어?”
“예. 몰라서 여쭙니다. 갑자기 왜 이러시는 겁니까?”
가은수 실장이 큰소리를 질렀다.
“이태풍이 저거! 카메라 울렁증이라며! 그걸 속이고 오디션을 봐? 본 촬영 들어가서 밝혀지면 어쩌려고!”
잠깐.
카메라 울렁증을 안다고?
그 사실을 아는 건 배우 2실의 식구들뿐인데?
‘누가 흘렸구나!’
하지만 누가 그 사실을 흘린 걸 알아내기 전에 이 상황부터 해결해야 했다.
그런 오해라면 쉽게 풀 방법이 있었으니까.
“누가 그럽니까? 우리 태풍이가 울렁증이라고?”
“어허! 이 친구가? 그걸 꼭 말로 해야 해!”
“예. 그런 거짓말에 오해를 산다면 억울하지 않습니까?”
최성문 감독이 헛기침을 내뱉는다.
“커흠흠.”
가은수 실장이 최성문 감독의 눈치를 보다 성질을 버럭 내었다.
“어디 그뿐이야? 대천그룹에서 스폰도 받고 있다던데. 설마 이것도 헛소문이라고 말해보지 그래?”
이것도 배우 2실에서만 알고 있던 이야기다.
이 일이 끝나면 누가 이 사실을 흘렸는지부터 찾아야 할 것 같았다.
최성문 감독뿐 아니라 곁에 있던 표은미 실장 그리고 투자자와 배급사 대표들도 인상을 찌푸린다.
스폰 받는 배우는 시한폭탄과도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
“그런 일이 있었군······. 어쩐지 가 실장이 꺼리더니.”
상황이 나빠진다.
이태풍이 해명하려 했지만 난 손을 들어 말렸다.
그건 내가 해야 할 일이니까.
난 가은수 실장을 노려보며 말했다.
“김 실장님이 그리 말씀하시던가요?”
“누 누가 말했든 간에 그게 뭐가 중요해?”
“중요하죠. 김동수 실장님 쪽으로부터 이미 주연을 내정했으니 들이대지 말라는 경고도 들었습니다. 그러니 지금 그 이야기를 누구한테 들었는지 전 알아야겠습니다. 가 실장님!”
난 대놓고 가은수 실장을 들이받았다.
비록 가은수 제작 실장이 10년 이상 최성문 감독과 인연인 걸 알았지만 지금으로선 어떻게 해서든 해명해야 했다.
그래야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붙잡을 수 있으니까.
다행히 최성문 감독이 내가 생각한 반응을 보였다.
“잠깐 내정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감독인 내가 아직 고민 중인데 누가 주연을 정해?”
최성문 감독이 투자자와 배급자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노려보자 두 사람이 급히 손을 저었다.
자기들은 아니라며.
그러자 최성문 감독이 이번엔 날 노려본다.
“정대리.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되돌릴 수 없는 거. 알지?”
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감독님. 주연은 못 해도 오해는 반드시 풀어야겠습니다. 이대로는 너무 억울합니다! 우리 태풍이가 얼마나 노력했는데요!”
내 거센 항의에 뭔가 이상하다 싶었는지 표은미 실장이 넌지시 말을 꺼냈다.
“사정이나 들어보죠.”
“표 실장님!”
가은수의 거친 반박에도 표은미 실장은 태연하기만 했다.
“설마 해명도 못 듣게 하시려고요? 가 실장님. 오늘 좀 이상한데요?”
나이스 어시스트다.
깐깐하기로 유명한 표은미 실장이 이렇게 나를 도울 줄이야.
최성문 감독이 자리에 앉더니 차가운 동치미를 벌컥 들이마셨다.
이태풍에게 마음이 있었는데 상황이 이리되니 속이 탄 것 같다.
“그래. 그쪽도 억울한 사정이 있을지도 모르니 일단 한번 들어나 보자.”
“일단 대천그룹 김애자 부회장님의 스폰을 말하는 거라면 태풍이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제안하러 온 걸 제가 직접 물리쳤으니까요.”
“그걸 어떻게 믿어?”
“대천그룹 부회장님 스타일 모르십니까? 스폰하는 배우에게는 바로 광고부터 꽂아주는 거. 저희 태풍이한테 김애자 부회장님이 찾아온 건 4월. 지금은 벌써 5월 중순입니다.”
“그 정도는 증거가 안 돼.”
녹음된 파일을 내밀려다 생각을 접었다.
그 파일이 있다는 걸 알면 김애자 부회장 그 미친 여자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까.
“그러면 말을 바꾸죠. 주연을 하게 되었을 경우 대천그룹의 광고를 받거나 김애자 부회장의 스폰을 받는다면! 그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피해에 대한 변상금을 물도록 계약서에 사인을 하겠습니다. ”
대천그룹과는 일절 얽히지도 않았고 앞으로도 얽히지 않겠다고 하자 최성문 감독이 가만히 날 노려본다.
“그 말 책임질 수 있나?”
“뭣하면 저희 본부장님에게 확인해 보십시오.”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다 흘러간다 싶었는지 가은수 실장이 급히 끼어들었다.
“그 그러면 카메라 울렁증은! 그걸 숨기고 오디션장에 온 것부터가 사기야! 혹여 본 촬영이라도 들어갔다가 덜덜 떨면서 예전처럼 돌아가면 어떻게 해?”
난 다시금 기세등등해진 가은수 실장의 얼굴을 보며 분노를 애써 달랬다.
이걸 해명하려면 이태풍의 증상을 말해야 했으니까.
고개를 돌려보니 이태풍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사실을 밝혀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난 심호흡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가은수 실장을 노려보며 날이 선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 당신이 당할 차례야 가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