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3화
123. 이태풍의 오디션 3
연기를 시작한 차태훈은 단번에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괜히 작년 남우 주연상을 받은 게 아니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말이다.
“동무. 미안하지만 여기까지요.”
차태훈이 갑작스레 살기 어린 눈으로 빠르게 양손을 들어 올렸다.
눈앞에 자신이 죽여야 하는 박격훈 대좌가 있는 것처럼 노려보면서.
휘릭!
양손에 미리 준비해 온 전깃줄을 감고 꽉 쥐었다.
씬 17에서 최인솔이 박격훈 대좌의 목을 조르는 장면이다.
얼마나 힘을 줬는지 차태훈의 양손은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섬뜩한 표정에 붉게 충혈된 눈까지.
무릎을 꿇은 차태훈이 이를 꽉 깨물더니 천천히 두 손을 풀었다.
상대의 숨을 끊어버리는 걸 확인이라도 한 듯.
“씨X. 기분 더럽구만.”
쾅!
구둣발로 바닥을 거칠게 밟은 차태훈은 침을 뱉은 뒤 바닥에 대짜로 뻗어버렸다.
차태훈의 연기에 심사위원석에 앉은 다섯 명의 눈에는 ‘역시 차태훈’이라는 감정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오케이!”
최성문 감독의 오케이 사인에 차태훈이 몸을 툭툭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뒤로 몇 번의 새로운 연기를 보여달라는 요구가 있었지만 차태훈은 아무런 무리 없이 최성문 감독의 요구사항을 착실하게 이행했다.
과연 남우 주연상 수상자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훌륭해. 더 볼 것도 없군.”
최성문 감독이 오디션 종료를 알렸다.
이마에 땀을 닦은 차태훈이 긴 호흡을 마치며 허리를 굽혔다.
“감사합니다.”
투자자인 김문동 대표가 손뼉을 치다 아직 오디션을 기다리는 최양섭과 이태풍을 보고 정신을 차렸다.
“허허. 이거 죄송합니다. 제가 결례를 했네요.”
김문동 대표가 사과하자 최양섭은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투자자 앞에서 감정을 표출할 정도로 어리숙하진 않았다.
반면 이태풍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여전히 배역에 몰입 중이었다.
놀라울 정도의 집중력이다.
차태훈이 자기 자리로 돌아온 뒤에야 최양섭이 앞으로 나섰다.
“최양섭 씨는 다른 장면을 해 봅시다. 씬 19. 경비병 제거 씬으로 부탁드립니다.”
“예. 감독님.”
날카로운 인상의 최양섭은 차태훈과는 다른 최인솔 소좌를 연기하기 시작했다.
뱀 같은 표정을 지으며 경비병의 목을 인정사정없이 칼로 긋는 듯 단숨에 오른손을 휘둘렀다.
차태훈의 박진감이 넘치는 연기와 달리 최양섭은 끈적하고 섬뜩한 기분이 들게 하는 살인자의 연기를 잘 살려냈다.
최양섭의 눈과 마주친 순간 심사위원석의 다섯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역시나 최양섭도 만만치 않은 실력자라는 걸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3개 정도의 씬을 더 요구받은 최양섭도 오디션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었다.
“역시 양섭이 연기에는 깊이가 있네.”
최성문 감독의 칭찬에 최양섭의 얼굴이 밝아졌다.
“아직 부족합니다. 하지만 이번 기회에 감독님에게 제대로 지도받고 싶어서 왔습니다.”
끝까지 자신을 어필한 최양섭의 차례가 끝나자 마지막은 이태풍이다.
“자. 태풍 씨. 씬 24. 탈출 장면을 한번 연기해봅시다. 얼마나 준비했는지 궁금하군요.”
최성문 감독이 두 손에 깍지를 끼고 턱을 괴었다.
이태풍을 바라보는 그의 눈엔 흥미진진한 표정이 담겨 있었다.
심지어 곁에 있는 심사위원들도.
일주일을 굶어 깡마른 이태풍은 현재 분위기 깡패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였으니까.
최성문 감독의 말에 이태풍이 따분한 표정으로 일어나 앞으로 나섰다.
마치 지겨운 군 생활을 하는 군인의 일상 같은 모습으로.
터벅터벅.
이태풍은 대본상 죽여야 하는 경비병을 앞에 두고도 인기척을 죽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기지개와 하품을 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알렸다.
‘왜 저러지?’
모두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상대를 죽여야 하는데 너무도 태연했으니까.
발걸음을 멈춘 이태풍이 가슴팍의 호주머니에서 미리 준비한 담뱃갑을 꺼냈다.
“동무. 혹시 불 있소?”
담뱃갑을 툭툭 치며 묻는 연기의 모습이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마치 이태풍의 눈앞에 또 한 명이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만약 내가 이태풍의 앞에 서 있었다면 불을 꺼내 주느라 주머니를 뒤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때였다.
이태풍의 오른손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허리춤에 숨기고 있던 단도 소품을 꺼내 밑에서 위로 찔러 올렸다.
앞에 선 사람의 목을 찌른 자세로.
푸욱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비싼 담배 다 태우지도 못하고 보냈구만. 미안하오. 동무.”
이태풍이 단도를 겨드랑이 사이에 끼웠다가 쭉 하고 뽑아냈다.
이태풍의 연기는 앞선 두 사람과는 달랐다.
임무를 위해 사람을 죽여야 하는 안타까운 심정이 표정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으니까.
자연스러운 행동과 귀에 쏙쏙 들어오는 안정된 딕션.
거기다 능숙한 살인 기계가 의외의 연민과 애환의 감정을 담은 연기를 보여주자 심사위원석의 사람들은 얼이 나가 버렸다.
“허허허. 애틋한 살인자라. 이건 이것대로 좋군.”
김문동 대표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 혼잣말이 흘러나오자 나머지 심사위원들도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자네 언제 이렇게 연기력이 늘었나?”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뱉은 최성문 감독이다.
“그러게 말입니다. 하하.”
심사위원석에 앉은 사람들도 차태훈과 최양섭이 있는데도 웃음을 터트렸다.
차태훈과 최양섭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흠흠. 잠깐. 그런데 이 한 장면만 보면 아쉽지. 씬 29번 한번 해봐. 어서.”
그 뒤로 몇 번이나 오디션이 이어졌다.
세 번.
네 번.
각기 다른 씬을 시켜도 이태풍은 훌륭하게 소화해내고 있었다.
다른 두 사람보다 조금 더 긴 오디션이 끝났다.
자리로 돌아가려는 최성문 감독이 이태풍을 불러 세웠다.
“태풍 씨. 상의 한번 벗어볼 수 있나?”
이태풍은 대뜸 인민군 상의를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심사위원석에서는 다시 한번 감탄이 터져 나왔다.
“와~ 씨······.”
“허허허. 이거 얼마나 몸을 갈고 닦아서 나온 거야······.”
어깨와 가슴 복부로 잔잔한 근육이 갈라져 또렷하게 보였다.
구릿빛 피부에 선명한 식스팩이 마치 하나의 조각을 보는 것 같았다.
상업성을 고려해야 하는 대중 영화는 주연 배우의 연기력만큼이나 외모와 몸매도 중요했다.
이태풍은 그 모든 걸 갖추고 있음을 증명했고 최성문 감독에게서 만족스러운 반응을 끌어냈다.
“좋았어! 수고했으니 들어가 보세요.”
이태풍이 자리로 온 순간 난 들뜬 마음을 감추고 다이어리를 확인했다.
[에브리데이 V10]
[날짜 : 2020년 12월 11일]
-PM 10:00 (보고 사항) <경계 너머로> 박스 오피스 12시 집계 817만 5234명.
‘아직은 아니다 이거지?’
그 순간.
가은수 제작 실장이 우리 조의 오디션 종료를 알렸다.
“결과는 나중에 회사로 연락드리겠습니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차태훈과 최양섭이 먼저 오디션장을 나섰다.
난 이태풍을 데리고 나가며 이제부터 내가 할 일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배우가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모조리 다 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매니저인 내가 움직일 차례였으니까.
주연 배우라는 건.
반드시 연기력으로만 쟁취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 * *
오디션을 본 1조가 나선 뒤.
가은수 제작 실장이 다음 조를 불러오려 할 때였다.
“이태풍 저 친구 말이야. 잘생긴 건 알았지만 연기력도 아주 출중하구만. 업계 소문이 거짓말이었나?”
최성문 감독의 말에 배급사 대표 신종기가 대꾸했다.
“아닙니다. 원래는 발음도 약간 어눌하고 연기가 평범해서 좀 꺼려졌는데 지금 보니까 완전 달라졌네요. 소속사 옮기면서 칼을 갈았나 봅니다.”
표은미 기획실장마저 고개를 끄덕이자 가은수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리베이트를 받기로 한 차태훈이 아니라 이태풍이 주연에 될 것 같았으니까.
대기실로 가려던 가은수가 발걸음을 멈추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감독님. 이태풍 씨도 나쁘진 않지만 만약 배역이 확정된 이후 예전 모습이 나오기라도 하면 상황이 힘들어질 겁니다.”
과거의 연기력이 기억나지 않냐는 가은수 실장의 질문에 투자자인 김문동 대표가 움찔거렸다.
만약 섣불리 주연을 뽑았다가 사달이라도 나면 감당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 주연은 검증된 이들의 자리인 거고.
김문동 대표가 가은수 실장의 말에 동의했다.
“감독님. 생각해 보니 가 실장 말도 틀린 게 아닌 거 같습니다. 이왕이면 검증된 사람을 쓰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는다고······.”
배급사 대표 신종기도 돈 이야기가 나오자 입장을 바꿨다.
“하긴 저도 이태풍 씨가 끌리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태풍 씨의 전작이 망한 일들을 생각하면······”
신종기 대표마저 이태풍이 망한 작품을 열거하며 고개를 저었다.
조금 전 연기력에 잠깐 그 사실을 잊었다면서.
최성문 감독이 인상을 찌푸렸다.
삽시간에 태도를 뒤집은 투자자와 배급사 대표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은 탓이다.
“표 실장. 표 실장도 같은 생각이야?”
최성문 감독과 20년 동안이나 같이 영화를 찍은 표은미가 의자에 기대며 말을 이었다.
“솔직히 안정적인 기대 수익은 차태훈 씨가 낫죠. 감독님이 직접 쓰신 대본에 차태훈 씨 주연이라면 700만 정도는 가뿐히 넘을 테니까요.”
“흠. 700만이라······.”
관객 수 집계기라고 불리는 표은미 기획실장의 말에 최성문 감독이 입맛을 다셨다.
“그러면 이태풍을 선택하면 얼마나 나올 거 같아?”
“이태풍 씨를 선택하시면 백만에서 천만 사이를 오가겠네요.”
“표 실장. 백만에서 천만은 갭이 너무 하잖아. 그게 무슨 소리야?”
표은미 실장은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동료들이 답답한지 인상을 찌푸렸다.
“우리 앞에서 보인 연기력이 전부였고 다시 과거의 그 끔찍한 연기가 나오면 백만 언더. 아마 역대급으로 망하겠죠. 하지만 우리 앞에서 보여준 연기가 진짜라면 제 손목을 걸고 천만도 보장할 수 있어요.”
상대가 없는 오디션 현장을 씹어먹는 오디션 여포들은 의외로 많다.
하지만 상대 배우가 있고 실제 촬영에 들어가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해 봐야 알 수 있다.
다만 현장에서 워낙 안 좋은 소문이 많았던 이태풍이라 선뜻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백만과 천만 사이라.”
심사위원들이 저마다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표은미 실장은 단 한마디로 기대와 우려를 단번에 심어줬다.
최성문 감독의 고민이 깊어지는 사이 가은수 실장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오디션이 끝난 뒤 가질 저녁 식사 자리에 김동수 실장을 불러 차태훈을 남자 주인공으로 굳히기 위해서.
“가 실장. 뭐 하나? 다음 조 안 불러오고?”
“아 예. 감독님. 바로 데리고 오겠습니다.”
오디션장을 나간 가은수 실장은 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김동수 실장? 어. 나야. 큰일 났어!”
* * *
오디션을 마친 이태풍은 복도로 나오자마자 손발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일주일간 거의 식사를 하지 않은 탓에 몸이 한계에 달해 있었다.
“으이구 이 화상아. 누가 이렇게 미련하게 굶으래?”
잔소리를 하자 이태풍이 씨익 하고 웃는다.
“소문을 들어보니 경쟁자들이 너무 쟁쟁하더라고요. 이렇게라도 안 하면 눈에 띌 방법이 없을 것 같아서요······”
“그러다 탈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하려고?”
이태풍이 머리를 긁적이며 사과했다.
“죄송해요.”
이제는 ‘최인솔 소좌’의 모습을 벗어던진 상태였다.
나는 거친 모포 같은 질감의 인민군 상의를 만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하여간 고생했다. 태풍아. 연기 좋았어.”
“아니에요. 연기는 형이 도와준 덕분에 쉽게 했어요.”
이태풍은 난독증이 좋아진 게 모두 내 덕분이라며 공을 내게 돌렸다.
가슴 속에 뭉클한 게 차올랐다.
그런데 씨익 웃는 이태풍을 본 순간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떠올랐다.
‘하여간 잘 생겼다니까.’
일주일간 단식을 한 탓에 얼굴선이 선명히 도드라져 보였다.
지나가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은 뒤돌아볼 만한 얼굴에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나왔다.
뼈 자체가 잘생겼다.
심지어 꿀렁이는 성대도 잘생긴 것처럼 보인다.
신은 불공평하다.
그래.
그 생각밖에는 들지 않을 정도의 잘생긴 외모였다.
“정 대리님? 왜 그러세요?”
이태풍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아냐. 뭐 좀 생각하느라고.”
난 이태풍에게 차로 돌아가자 말했다.
“태풍이는 일단 차로 돌아가서 조금 쉬고. 상봉아. 넌 가서 이온 음료랑 요거트 좀 사 와.”
“차에서 쉬다뇨? 회사로 바로 안 가세요?”
“아니. 갈 데가 있어.”
회귀 전.
차태훈의 오디션이 끝난 뒤 최성문 감독과 식사 자리를 가지는 일정이 내 다이어리에 남아 있다.
[에브리데이 V10]
[날짜 : 2020년 5월 15일]
-PM 07:30 파주 구우구우 10인석 예약. 최성문 감독님 일행.
그 식사 자리에서 차태훈이 오디션 주연을 약속받았었다.
그러니 이번에는 그 자리에서 이태풍을 주연으로 낙점받아볼 생각이다.
현재 시각은 오후 4시.
아직은 3시간 반 정도 여유가 있다.
차에서 조금 기다려야겠지만 이태풍의 배역을 위해서라면 그 정도 기다리는 건 아무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주차장에 도착한 순간.
차태훈이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