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2화
122. 이태풍의 오디션 2
이태풍은 허름한 인민군복을 입은 채 일주일은 굶은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눈은 푹 파여 있었고 볼은 홀쭉해져 살짝 주름마저 보였다.
쩍쩍 갈라진 입술과 반쯤 벌어진 입은 헐떡대며 헉헉대고 있었고.
그 때문인지.
이태풍의 눈빛에는 갈증과 광기가 어려 있어 쉽게 말을 붙이기 힘들 정도였다.
아무리 내가 시켰다고 했다지만 말이다.
최성문 감독은 평상시에도 역에 흠뻑 빠져 있는 배우를 높이 생각한다.
그래서 난 지난번 이태풍을 만나러 갔을 때 일상에서도 주인공처럼 행동하라 일렀다.
이태풍은 그 조언대로 주연인 ‘최성하’가 북한군 인민 특수작전대대에 ‘최인솔 소좌’로 신분을 위조했을 때의 상황을 연기하고 있었다.
‘얼마나 몰입을 한 거냐?’
이태풍의 곁으로 가는데 다른 배우들이 경계하는 말이 들렸다.
“눈빛 봐라. 새X.”
“사람 하나 잡아먹겠네.”
“오디션 보러 온 거야? 아님 사람 하나 잡으러 온 거야?”
심지어 연기 대상을 받은 적이 있는 에이스 엔터의 최양섭도 험한 소리를 입에 담고 있었다.
“연기도 못 하는 새X가 인상은. 그냥 CF나 찍지.”
워낙 잘생긴 이태풍이 엄청난 존재감을 뿜어내자 다들 신경이 쓰이는 것 같았다.
결국엔 이태풍이 연기를 못한다며 노골적인 모욕을 퍼붓기까지 했고.
하지만 다행히 이태풍은 그 말을 콧등으로도 신경 쓰지 않았다.
‘기다려 봐. 깜짝 놀라게 될 테니까.’
나는 이태풍의 앞에 도착해 이름을 불렀다.
“태풍아.”
이태풍이 고개를 살포시 들어 올렸다.
그런데 날 바라보는 눈빛에서는 적의가 보였다.
마치 굶주린 투견이 싸움하기 직전의 상태인 것처럼.
곁에 있던 이대호 매니저가 불안한 표정으로 대신 답했다.
“정 대리님. 태풍이는 오디션이 끝날 때까지 주인공 이름으로 부르지 않으면 대답을 안 하겠답니다. 그리고······”
이대호가 왠지 말을 망설였다.
“편히 말씀하세요.”
“얘 일주일간 물과 소금만 먹었습니다.”
이태풍은 내가 조언한 데서 그치지 않고 스스로가 한 발 더 나가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이태풍이 얼마나 이 배역을 절실히 원하는지 알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부터는 제가 맡겠습니다.”
“예. 정 대리님.”
이대호가 옆으로 비켜선 뒤 난 무릎을 낮춰 이태풍과 눈을 맞췄다.
“태풍아. 누가 오든. 누가 말을 걸든 지금 상태를 유지해. 대화는 내가 맡을 테니까. 알겠지?”
이태풍이 가만히 날 노려보다 고개를 끄덕인다.
현실과 캐릭터를 오가는 이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게 해 주려면 이 정도는 해줘야 했다.
다시금 이태풍이 고개를 숙이고 중얼대기 시작했다.
그사이 곁에선 여전히 무시하는 말이 들려오고 있었다.
“미친놈. 쇼를 하네 쇼를 해.”
“아직 오디션도 시작 안 했는데 무슨 짓이냐? 어이. 이태풍. 너 선배에게 인사도 안 해?”
난 정상봉과 이대호를 시켜 이태풍에게 접근하는 모든 이들을 차단했다.
어차피 이곳에 있는 수많은 배우 모두가 경쟁자.
물론 진짜 경쟁자는 손에 꼽을 정도였지만.
그때였다.
가장 신경 쓰이는 배우가 대기실에 나타났다.
3실의 주호성 팀장과 함께 나타난 사람은 바로 차태훈.
원래 <경계 너머로>의 주연이자 굴렁쇠 엔터 배우 3실이 관리하는 탑스타가 말이다.
술렁대는 소리가 일기 시작했다.
차태훈은 작년 남우 주연상을 받은 연기력과 티켓파워를 동시에 갖춘 인정받는 배우였으니까.
“······태훈이 형도 왔어?”
“아 XX. 저 인간까지 오면 완전 나가린데······.”
이태풍을 경계하던 모습과는 차원이 다른 반응이다.
“아! 정 대리!”
주호성 팀장이 우릴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오셨습니까. 주 팀장님.”
“어때? 태풍 씨는 연습 많이 했고?”
“예.”
차태훈 배우가 키득대며 말을 걸었다.
“정 대리. 오랜만. 배우 2실에 가니까 따분하지 않냐? 다시 우리 3실로 오는 건 어때?”
“저야 좋지만 실장님이 질색하시더라고요.”
“하하. 김 실장 기분 좀 맞춰주지 그랬어?”
반갑게 인사를 마친 차태훈은 이태풍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런데 저 새X는 선배가 왔는데 왜 인사도 안 해?”
“죄송합니다. 차 배우님과 달리 태풍이는 몰입에 시간이 걸리더라고요. 오디션 끝나고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공손히 말했건만 차태훈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배역 몰입? 야 쓸데없는 소리 말고 쟤 좀 데리고 와 봐. 짜식이 버릇없게.”
“안 됩니다.”
“안 돼?”
차태훈도 NO를 용납 못 하는 성격으로 유명한 한 성깔 하는 배우다.
혹시 중요한 오디션 전 사고라도 칠까 싶었는지 주호성 팀장이 급히 나섰다.
“정 대리. 장난하지 말고 인사시키자. 오디션 전에 괜한 소란 일으키지 말고.”
사람 좋은 얼굴로 날 달래는 주호성 팀장에게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주 팀장님. 그리고 차 배우님. 이해해주십시오. 태풍이가 배역 몰입에 시간이 걸리는 편이라 이렇게밖에는 못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투는 모습을 보더니 에이스 엔터의 최양섭 배우가 속을 긁어댔다.
“크크크. 태훈아. 너희 회사에서는 인성 교육은 안 하냐? 새파란 후배가 하늘 같으신 선배를 씹네.”
차태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 같은 양아치가 어디서 인성 타령이야! 너나 잘해 인마!”
차태훈이 벌컥 화를 내자 최양섭이 능글맞게 성질을 긁었다.
“한강에서 뺨 맞고 종로에서 화풀이 한다더니. 딱 너네.”
평소 앙숙으로 유명한 차태훈과 최양섭이다.
지랄 맞은 성격의 최양섭도 3년 전 남우 주연상을 받은 터라 실력도 엇비슷하다.
한때는 친한 친구였다던데 정인수란 여배우를 놓고 다투다가 원수가 되었고.
이러다가 주먹다짐이라도 날 것 같아 주호성 팀장이 급히 둘 사이를 말렸다.
차태훈은 씩씩대며 나와 이태풍을 잠시 쏘아보다 대기실을 나가버렸다.
한숨을 내쉬던 주호성 팀장이 혀를 쯧쯧 찬다.
“아무리 배역을 경쟁하는 자리지만 그래도 인사 정도는 해줄 것이지. 그렇게 애써도 되지도 않을 일을······.”
주호성 팀장이 머리를 긁적이며 차태훈을 따라나섰다.
애써도 안 된다고?
그건 두고 봐야 알지.
곁에서 얼어 있던 정상봉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성격 좋은 주 팀장님이 계셔서 다행이네요.”
그래.
겉으로 보기엔 그래 보이지.
현재 주호성 팀장은 회사 내에서 언제나 웃고 다녀 별명이 ‘골든 리트리버’란다.
하지만 저렇게 신뢰를 산 뒤 예상치 못했을 때 때리는 뒤통수가 얼마나 얼얼한지는 당해봐야 안다.
“상봉아.”
“예?”
“보이는 대로 믿지 마라. 큰코다친다.”
“예?”
“그런 게 있어. 하여간 내 말 명심해. 이 업계에서는 특히나······”
정상봉이 고개를 갸웃했지만 지금 당장으로선 여기까지 말할 수밖에.
주호성 팀장이 실수하지 않는 한 저 인간이 악당이라는 걸 아무도 믿지 않을 테니까.
다행히 이태풍은 여전히 배역에 깊이 몰입한 상태였다.
집중력이 내 생각보다 대단했다.
그때였다.
덜컥.
대기실의 문이 열렸다.
“차태훈 이태풍 최양섭 씨부터 오디션 보겠습니다. 세 사람 입장해 주세요.”
최성문 필름의 제작 실장 가은수가 나타나 소리를 질렀다.
순간 술렁이는 소리가 대기실을 울려 퍼졌다.
“뭐야? 죽음의 조냐?”
“딱 봐도 차태훈이랑 최양섭 둘 중에 한 명을 주연 찍어놓고 고르는 거네.”
“그럼 이태풍은 뭐야?”
“뭐긴 뭐야. 깍두기지.”
회귀 전에도 가장 치열하게 주연을 놓고 다퉜던 두 배우 사이에서 이태풍이 경쟁하게 되다니.
“태풍아. 우리도 가자.”
그런데 말을 들은 이태풍이 움직이질 않는다.
“극 중 이름이 아니라 대답도 안 하냐?”
너무도 고지식할 정도의 이태풍을 보니 가슴이 먹먹했다.
일주일간 식사도 거른 채 온 힘을 다해 내 조언을 따라주고 있었으니까.
‘그래. 태풍아. 널 어떻게든 이 영화에 주연으로 만들어 줄게.’
속으로 그렇게 다짐하고 이태풍을 노려보며 말했다.
“최인솔 소좌. 이 박격훈이를 따라오라.”
대본상 이태풍이 연기하고 있는 최인솔 소좌의 부대의 상관인 박격훈 대좌의 이름을 꺼냈다.
이태풍이 벌떡 일어나 발뒤꿈치를 붙였다.
군화가 아닌데도 착하고 소리가 난다.
“알았습네다. 대좌 동지.”
이태풍이 걸걸한 목소리를 내며 손가락을 까닥대기 시작했다.
저 손에 단검이라도 들렸다면 내 목을 긋고도 남았을 것 같은 예기가 느껴졌다.
주변에 있던 배우들이 술렁대기 시작했다.
“뭐야. 저 새X.”
“뭘 벌써 연기하고 그래?”
“그런데 이태풍 저 자식. 연기가 되네? 얼굴 팔아먹고 사는 놈인 줄 알았더니.”
“설마 이제까지 연기 실력을 감춘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러다 말아먹은 작품이 몇 갠데?”
이태풍의 발성은 난독증 때문에 문제가 있었던 과거와는 확연히 달라졌다.
발성이 안정되자 연기에도 자신이 붙었고.
거기다 캐릭터 몰입까지.
물론 일주일 동안 굶은 탓에 훨씬 남자다워진 외모도 무시할 수 없었다.
마치 군인처럼 절도있게 걷는 이태풍의 모습에 배우들과 매니저들의 시선이 꽂히고 있었다.
이제 시작이다.
난 들뜬 가슴을 억누르며 옆 방의 오디션장으로 향했다.
먼저 들어와 있는 최양섭 배우와 차태훈 배우는 편안한 표정으로 심사위원석 맞은편 의자에 앉아 있었다.
심사위원석이 있는 테이블에는 다섯 명의 심사위원이 앉아 있다.
최성문 감독과 가은수 제작 실장 표은미 기획실장을 중심으로 양옆에 영화의 메인 투자자인 KM 파트너스의 대표 김문동과 배급사 LT 엔터테인먼트 대표 신종기가 정장을 입고 앉아 있었다.
난 이태풍을 향해 비어 있는 자리를 가리켰다.
“소좌. 저기 앉으라우.”
“예. 대좌 동지.”
이태풍이 성큼성큼 걸어가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형형한 눈빛을 쏘아대는 이태풍을 본 심사석의 네 사람이 흥미로운 눈빛을 보였다.
안 그래도 잘생긴 이태풍이다.
그런데 들어오자마자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 탓이다.
뿔테 안경을 머리 위로 걸친 최성문 감독이 흥미롭게 쳐다본다.
“자네 지금 뭐 하나?”
최성문 감독의 첫 마디에 이태풍이 노려본다.
“동무는 뉘기요?”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최성문 감독이 큰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 이거 내가 잘못했군. 용서하게 최인솔 소좌. 나 강운구 상장일세.”
최성문 감독이 배역 중 한 명의 이름을 대자 이태풍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인사한다.
“만나 뵈어서 영광입네다! 상장 동지!”
칼 같은 경례 각도에 최성문 감독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회귀 전에도 최성문 감독은 늘 하던 소리가 있었다.
-내 배우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간단하다. 배역 그 자체가 되면 그만이니까. 기본만 제대로 하란 말이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배역에 몰입해 있어야지 자신의 영화에 출연할 자격이 있다고 했었지.
그런 성향 탓에.
배우들이 촬영 도중에 다른 작품을 하거나 예능에 출연하는 것도 극도로 꺼렸다.
어찌 보면 현재 어떤 스케줄도 없는 이태풍에게는 최고의 상황이다.
“기래. 일단 쉬고 있으라.”
그제야 이태풍이 자리에 앉았다.
심사관 모두가 킥킥거리며 즐거워했지만 그런데 다른 네 심사관 중 딱 한 명.
가은수 제작 실장만이 불편한 표정이다.
‘가은수도 서예종 라인이니 차태훈의 손을 들 게 뻔하지.’
그래서 난 처음부터 감독만 노리는 중이었다.
캐스팅 실권은 돈 대는 제작자가 쥐는 경우도 흔하지만 최성문 감독 정도 되면 이야기가 다르다.
현역으로 뛰는 유일한 3연속 천만 감독이 뽑은 배우를 거절할 미친 인간은 이 업계에선 없으니까.
“자자. 그럼 오디션을 시작해 볼까? 먼저 차태훈 자네부터 시작하지. 씬 17. 최인솔이 북한군 대좌를 죽이는 장면부터 가 보지.”
“예. 감독님.”
본래 이 영화의 주연인 차태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태훈은 눈을 감은 채 마치 해녀들이 숨을 고르기 위해 내는 휘파람 소리를 내며 배역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휘이이~.
낮은 휘파람 소리가 오디션장을 울리자 자연스레 시선이 그에게로 옮겨갔다.
그리고 휘파람 소리가 멈췄을 때.
차태훈이 눈을 번쩍 뜨고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오디션 장의 모든 이들의 시선이 차태훈에게로 몰려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