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1화
121. 이태풍의 오디션 1
“설마 너······. 네 미래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생각 안 해둔 거야?”
유진이의 갈피 잃은 눈동자는 갈 곳을 찾지 못하고 있었고 그녀의 손가락은 꼼지락대고만 있었다.
유진이는 할 말이 없는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 그게 미소 잘 키우는 데 급급하다 보니까 내 일까지는 잘······. 솔직히 오빠 만나기 전에는 하루하루만 생각하고 살았거든요. ‘오늘 저녁은 뭐 먹나?’ ‘내일은 뭘 해 먹을까?’ 같은 거요.”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무리 어린 나이에 엄마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이제 고작 24살인데 인생 계획이 없다니.
“그 그래도 오빠 만나고 나서 목표는 생겼어요. 배우로 성공하기. 그러니까 하루하루 열심히 연기하고 최선을 다하자! 그런 건 저도 있거든요!”
다른 여자 연예인이라면 지금쯤 소속사의 눈을 피해 마음에 드는 남자와 연락할 궁리만 하고 있을 텐데.
하지만 너무 일찍 엄마가 되어버린 유진이는 미소를 위해 자신의 감정을 죽이는 데 익숙해져 버린 상태였다.
미소의 행복도 행복이지만 유진이 자신만의 인생도 찾아줘야 했다.
아직 어린 유진이를 엄마란 틀 안에서만 살도록 내버려 두는 건 매니저로서 할 짓이 아니니까.
하지만 당장 어떤 계획을 세우라고 하는 건 의미가 없었다.
하나씩 차근차근.
유진이가 스스로 인생을 찾도록 곁에서 도와줄 생각이었다.
난 애써 감정을 숨긴 채 미소를 지었다.
“알았어. 그건 다음에 또 이야기하자. 어서 들어가서 쉬어. 내일 또 촬영 가야지.”
“네. 오빠. 조심히 들어가세요.”
차에서 내린 유진이는 집에 들어가지 않고 어서 가 보라며 손을 흔들었다.
차를 몰고 골목길을 빠져나올 때까지.
백미러로 비친 유진이의 모습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 * *
SBC는 최지영 배우의 기자 회견이 있고 난 뒤 <말해봅시다>의 원본 풀 영상을 공개하며 조작이 되었음을 공개했다.
연이어 영상을 유출한 PD를 찾아내 문책하고 방송에 나온 현장 관계자를 찾아 퇴출하는 엄벌을 내렸고.
그리고 최종혁의 분량은 13화 이후로는 아예 배역에서 날려버렸다.
이제<파란 하늘>에서 큰 걱정은 없었다.
유진이 스캔들의 여파로 <파란 하늘>은 13화에는 15.2%까지 잠깐 떨어졌지만 14화에는 시청률 18.7%를 찍었다.
덕분에 시청률 12.2%의 <밤하늘의 달빛 내림>을 6.5% 차이로 눌러버린 상황이다.
김성운 PD가 손을 뗀 결과가 이렇게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었다.
휴가를 끝내고 출근하자 배우 2실에 있던 매니저들이 손뼉을 쳐댄다.
“이열~ 정 스타. 이번에도 한 건 했더라.”
“TK 엔터 자근자근 밟았다며? 이러다가 올해 안에 팀장 다는 거 아냐?”
연이은 인사에 고개를 숙였다.
이럴수록 시기 질투가 늘어날 수 있으니까.
“밥상은 실장님과 본부장님이 차리신 거고 전 그저 맛있게 떠먹었을 뿐입니다.”
“자식. 겸손 떨기는. 니가 그러면 우린 밥상을 차려줘도 못 먹는 신생아냐? 응애~응애?”
젖병을 빠는 듯한 모습을 흉내 내는 선배 덕분에 배우 2실에서는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그때였다.
주영훈 팀장이 곁으로 다가와 속삭이듯 말했다.
“정 대리. 조심해. 요즘 너 벼르고 있는 사람이 많더라.”
“예?”
“쉿!”
목소리를 낮춘 주영훈 팀장은 최근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알려왔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다.
주호성 팀장이 뻔질나게 배우 2실을 돌아다니면서 그 시기심에 더욱 기름을 붓고 있을 테니까.
“혹시 주 팀장님이랑 자주 만나는 분들을 아십니까?”
“박 팀장과 만나는 건 너도 알 거고. 요즘은 대리급들을 다 같이 만난다더라.”
박인기 팀장이 주호성 팀장을 만나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밑에 달린 식구들도 주호성 팀장과 어울린다고 한다.
너무 빠른 승진의 여파가 오고 있었다.
하지만 손을 놓고 있을 순 없었다.
안 그래도 매니저 수가 부족한데 배우 3실로 넘어가 버리면 타격이 이만저만이 아니니까.
아무래도 조만간 따로 만나야 할 것 같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때였다.
“정 대리. 잠깐 본부장님 방으로.”
구성철 실장이 입구에서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예. 실장님.”
주영훈 팀장과 인사를 나누고 본부장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서류에 파묻혀 있던 강지영 본부장이 고개를 들었다.
“잘 쉬고 왔어요?”
“예. 덕분에 편히 쉬었습니다.”
“덕분은 무슨. 정해진 휴가 쓰는 건데요 뭐.”
강지영은 기지개를 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밝은 표정으로 날 부른 이유를 말했다.
“두 사람은 알고 계셔야 할 거 같아요. 아빠. 수술 잘 끝났어요.”
“정말입니까?”
구성철 실장도 강감찬 대표가 수술하는 걸 아는 사람 중 하나.
누구보다 기쁜 표정을 짓는다.
“네. 그런데 복귀는 예상했던 것보다 더 늦춰질 것 같아요. 수술 자체는 깔끔하게 끝났는데 막상 열어보니까 종양이 생각보다 조금 더 커져 있더라고요. 충분한 요양이 필요하다네요.”
그래도 다행이다.
혹시라도 잘못되어 돌아오지 못하면 어쩔까 걱정했는데.
“천만다행입니다.”
“아니에요. 오히려 제가 더 고마워요. 정 대리. 덕분에 아빠가 살 수 있었어요. 제 말은 지독하게 안 듣던데······ 왜 정 대리 말은 들었는지 모르겠어요.”
하긴 그건 나도 궁금한 점이다.
다음에 만나면 물어봐야겠다.
왜 그랬는지.
“그리고 미소 양육권 문제를 제가 좀 알아봤는데 그게 조금 복잡하더라고요.”
강지영 본부장도 관련 보고를 받았다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미 입양을 마친 상황 아닙니까? 유언장이 그렇게 문제가 되나요?”
“친부 친모가 남긴 유언장의 효력을 무시하긴 힘들어요. 왜 이제 내밀었는지가 문제 될 수는 있지만 후견인으로 적혀 있었다면 그냥 넘어갈 수는 없을 거 같아요.”
결국 재판으로 가야 한다는 거군.
“그러면 회사에서 도움을 좀 주실 수 없습니까?”
강지영 본부장이 미안한 기색을 띠었다.
“그게 좀 어려운 게 소속된 연예인 말고는 회사에서 도움 줄 수 없게 내규가 바뀌었어요.”
강지영 본부장은 이기철 이사가 회사의 내규를 바꾸었다며 한숨을 쉬었다.
그동안은 연예인의 가족들도 법률적인 도움을 받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더는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나.
사실 그동안은 강감찬 대표의 배려로 가족들까지 보살폈을 뿐 이게 정상이긴 하다.
“대신 곽 팀장님이 좋은 변호사는 알아봐 주신대요.”
그 와중에 도와주겠다는 강지영 본부장 말에 번뜩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단순히 변호사만 구해서 유진이 큰아빠를 상대하려면 돈과 시간이 엄청나게 들 거다.
하지만 미소가 굴렁쇠 엔터의 연예인이 된다면?
본격적으로 법무팀의 도움을 받을 수가 있었다.
안타까운 표정의 강지영 본부장에게 물었다.
“본부장님. 혹시 미소를 우리 회사로 영입하면 안 됩니까?”
“미소를 연예인으로요?”
“예. 그러면 지원해 주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잖습니까.”
강지영 본부장의 얼굴이 밝아졌다.
미소 앞으로 들어오는 CF 개수만 해도 한둘이 아니다.
하지만 그간은 미소가 연예인이 아니었기에 가리고 가려서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게 제약이 풀린다면?
회사에서 엄청난 도움이 되니 적극적으로 나설 수가 있었다.
“유진이는 제가 설득해 보겠습니다. 대신 미소를 영입하더라도 미소 스케줄은 모두 제게 일임해 주십시오.”
강지영 본부장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유진 씨를 설득만 하면 뒤는 제가 알아서 하죠. 스케줄도 정 대리가 다 짤 수 있게 해드릴게요.”
“감사합니다.”
“감사는요. 지금 미소가 얼마나 핫한데요. 오히려 제가 감사하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데 강지영 본부장이 물었다.
“아 맞다. 이틀 후 이태풍 씨 오디션이 있죠?”
“예.”
“잘 되어가나요? 배우 3실에 차태훈 씨와 경쟁하려면 만만치 않을 텐데요. 카메라 울렁증 증상도 있으신데······.”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문제는 더는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난 강지영 본부장에게 자신 있게 말했다.
일주일 전 봤을 때. 난독증으로 발생하던 증상은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 * *
[에브리데이 V10]
[날짜 : 2020년 5월 15일]
-PM 03:00 <경계 너머로> 오디션 현장.
유진이와 <파란 하늘>의 현장 촬영을 마친 뒤.
다이어리에 적힌 시간에 맞춰 이태풍과 이대호가 기다리고 있는 경기도 파주의 ‘최성문 필름’으로 향했다.
최성문 필름은 지자체로부터 무려 30만 평에 달하는 넓은 평야를 지원받아 세트장을 세웠기에 어지간한 영화는 인 하우스로 만들 수 있는 대형 제작사였다.
끼이익.
주차장에 도착한 순간 눈앞에는 마치 시장통을 방불케 하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오디션을 보기 위해 모인 배우와 매니저 그리고 스타일리스트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장성훈 박인철에 최양섭······”
내 곁에 앉아 있던 정상봉이 배우 이름을 한 명씩 부르기 시작했다.
“완전 시상식 저리 가라네요. 정 대리님. 설마 이분들이 전부 주연 오디션을 노리고 온 건가요?”
“그럴 만도 하지. 천하의 최성문 감독님 작품이니까.”
최성문 감독은 천만 영화 세 편을 연달아 만들어 낸 흥행감독이자 거만한 배우들도 눈도장을 찍으려는 몇 안 되는 거장이다.
“이러면 태풍 씨는 힘든 거 아닌가요?”
하나같이 주연급 배우에 아시아권 전역에 수많은 팬을 둔 탑스타도 끼어 있자 정상봉이 불안해했다.
“쉽지는 않겠지. 그래도 태풍이 앞에서는 절대 긴장한 티 내지 마라. 매니저가 배우를 믿어 줘야지.”
“죄송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짝!
정상봉이 스스로의 뺨을 때리며 기합을 넣었다.
이태풍이 꼭 주연이 될 거라면서.
조금 전 정상봉이 말한 사람들도 만만치 않은 배우지만 최종적으로 낙점되는 건 차태훈.
그리고 차태훈이 되었을 때의 영화 관객 수가 내 다이어리에 적혀 있었다.
[에브리데이 V10]
[날짜 : 2020년 12월 31일]
-PM 10:00 (보고 사항) <경계 너머로> 박스 오피스 12시 집계 817만 5234명.
올해 11월 초 스크린에 걸려 두 달 동안 집계를 한 기록이다.
만약 이태풍이 주연이 된다면 이 다이어리의 일정이 사라지게 될 거다.
“상봉아. 가자. 우리 배우 만나러.”
“예. 정 대리님.”
최성문 필름의 메인 건물에의 로비에서 방문객 패찰을 받아 오디션장으로 향했다.
오디션장으로 향하는 복도의 왼편은 통유리로 되어 있다.
덕분에 넓게 펼쳐진 세트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어마어마하네.’
박격포 구덩이에 검게 그을린 야산과 타버린 나무들이 보인다.
그리고 서울 한복판을 옮겨 놓은 듯한 세트장에는 폐차장에서 가져온 차들이 잔뜩 놓여 있었다.
사전 촬영 준비를 착실히 해놓았다더니 시선이 닿는 모든 곳이 이번 영화의 세트장으로 꾸며져 있었다.
“와 진짜 대박이네요. 여기.”
난 세트장의 풍경을 보며 반드시 이태풍을 주연으로 만들겠다 생각했다.
이태풍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서.
잠시 후.
오디션장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대기실에 도착했다.
[<경계 너머로>]
[남자 주연 오디션 대기실]
오디션을 준비하는 배우들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주차장에서 봤던 배우들보다 배는 될 정도의 50명은 되어 보이는 배우들이 있었다.
<경계 너머로>라는 작품은 한국 국정원 내 최고의 블랙요원 ‘최성하’가 북한에 있는 핵물리학자 ‘단명한’의 식구를 구해 서울로 오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액션 로맨스물이다.
단둥과 베이징 그리고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땀내 나는 맨몸 액션과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총격전.
그리고 ‘단명한’의 딸 ‘단사랑’과의 로맨스를 동시에 소화할 수 있는 배우가 이 작품의 주연이 되는 조건이다.
그 탓에 준비하고 있던 배우들은 저마다 푸쉬업을 하며 근육을 펌핑하고 있었다.
“태풍이가 어디 있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이태풍을 찾았다.
대기실 맨 구석에 서 있는 거구의 이대호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바로 곁에 앉아 있는 이태풍의 모습을 본 순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뭐 뭐야? 저건.”
“저 정 대리님······. 이태풍 배우님이 왜 저런 모습으로 있는 거죠?”
일주일 만에 만난 이태풍은 깜짝 놀랄 정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