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0화
120. 가족이란? 2
미소의 아빠인 이성한은 자신과 아내에게 무슨 일이 생길 때를 대비해 유언장을 남겼다고 한다.
유언장의 첫 번째 항목은 미소의 후견인을 장인과 장모로 한다는 거였단다.
그런데 꼼꼼한 성격의 두 사람은 두 번째 항목까지 작성해 뒀단다.
하지만 유진이는 그 유언장의 존재를 오늘 처음 알았다고 한다.
“두 번째 후견인으로 아까 본 그 사람들을 지정해 놓았다고?”
“예. 형부가 큰 아빠네 공장에서 일했었거든요. 그리고 그때까지만 해도 큰아빠가······. 아니 정학제 씨가 잘 해줬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정학제 씨가 돈이 많기도 하고요.”
유진이의 큰아빠인 정학제는 한솔 문구라는 학용품을 제조하는 중소기업을 운영해 꽤 부유한 편이라고 한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런 유언장이 있는데도 미소를 보육원으로 보내려고 했다고?
가슴에서 천불이 올라오는 것 같다.
“아니 그렇게 잘 사는 집안이 조카가 대학도 포기하고 알바로 어린 애를 키우는 걸 보고만 있어? 그러다 이제 와 유언장을 들고 나타났다고?”
“네. 제가 스캔들에 휘말려서 불안하다고 미소는 자기들이 키우겠다고요.”
미소가 내 품에 안긴 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 엄마랑 살 거야!”
“그럼. 당연하지. 엄마도 우리 미소랑 살 거야.”
유진이가 두 팔을 뻗자 미소가 유진이의 품으로 건너갔다.
“엄마. 나 안 무거워?”
“괜찮아. 엄마가 얼마나 힘이 센데?”
미소가 유진이의 품에 볼을 묻고 부비적거린다.
미소도 이제 7살이 되었지만 두 사람이 있을 땐 마치 세 살배기 아기 같다.
그나저나 유언장이 있었을 줄이야.
소송이 걸리면 어떤 일이 생길지 예측하기가 힘든데······.
난 마음을 다잡고 유진이에게 말했다.
“유진아. 저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집에 들이지 마. 알았지?”
“그럼 밀고 들어오면 어떻게 해요?”
“걱정하지 말고. 일단 예전부터 친척들한테 받은 까톡 있지? 그거 나한테 보내 줘.”
“전부 다요?”
“그래야 접근금지 신청을 할 수 있으니까.”
유진이가 잠깐 고민하다 알겠다며 대화 목록을 백업하기 시작했다.
난 그사이 법무팀장에게 걸어 사정을 말했다.
-보내준 자료를 보니 심각하긴 하네. 이 정도로 귀찮게 했다면 접근금지 명령 정도는 충분히 나올 것 같다. 그런데 유언장 문제는 좀 더 알아보고 이야기하자고. 그건 좀 골치 아프니까.
“예. 늘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게 우리 일인데 뭘.
전화를 끊자 유진이가 조심스레 말한다.
“오빠. 고마워요.”
밝아진 유진이의 얼굴이 조금 더 물들었다.
“내가 네 매니저인데. 이쯤이야 당연하지.”
그때 시장을 보러 갔던 주인아줌마도 돌아왔다.
양손에 커다란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서.
“미소야. 너 좋아하는 고등어랑 꽁치에 가자미까지 사 왔다. 콘도에 가서 할머니랑 맛있게 구워 먹자~.”
손질된 생선을 단단히 밀봉해 가지고 온 아줌마를 보자 미소가 눈을 껌뻑이며 군침을 흘리기 시작했다.
“할머니 최고!”
“호호. 정 대리도 왔네. 걱정하지 마. 내가 정 대리 좋아하는 돈가스 거리도 챙겨왔으니까.”
“안 그러셔도 되는데요.”
“안 그래도 되긴? 사람이 먹고 싶은 걸 먹어야지. 그런데 이게 뭐야? 미소 눈가가 붉고 얼굴이 부은 걸 보니 운 것 같은데? 뭐야? 왜 이래?”
유진이와 미소의 눈물 자국을 보고 주인아줌마가 발끈한다.
씩씩대는 아줌마에게 사정을 말했다.
그러자 당장이라도 찾아가자며 나를 재촉했다.
“그것들은 인간도 아냐! 금수만도 못한 것들! 내가 아주 그것들을······.”
“아줌마. 참으세요.”
“어떻게 참아? 가족이라는 인간들이 쌀 한 톨도 도움 준 거 없으면서 누구 맘대로 우리 미소를 데려가?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어림도 없지 암!”
주인아줌마는 나보다 더 화를 내고 있었다.
유진이가 곁으로 다가가 주인아줌마의 손을 꼭 잡았다.
“절대 미소 못 데리고 가게 할 거예요. 그리고 그 사람들이 뭐라든 저 신경 안 써요. 제 가족은 여기 있잖아요.”
주인아줌마의 눈에서 눈물이 괴기 시작했다.
“유진아······.”
“힛. 말하고 나니 좀 부끄럽다. 자자. 우리 빨리 리조트 가요. 미소가 아침부터 목이 빠지게 기다렸잖아요.”
“그 그래. 암. 그래야지. 자자 어서 가자.”
주인아줌마가 눈물을 닦으며 1층으로 향했다.
그사이 난 유진이와 미소가 싸 놓은 캐리어를 챙겼다.
그런데 문을 나서기 전.
유진이가 내게도 고백을 해왔다.
“오빠도 제 가족이에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다.
가족이라는 말은 내게 아무런 의미도 없던 단어였다.
그런데 유진이에게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치 고장 난 로봇처럼 멈춰선 채 계단을 내려가는 미소의 등 뒤만 바라보고 있었다.
“김치~ 김치~ 먹으면 키가 쑥쑥~.”
“쑥쑥!”
오늘따라 김치송이 푸근하고 익숙한 기분이 들게 했다.
마치 직접 담근 잘 익은 김치처럼.
* * *
굴렁쇠 엔터의 주호성 팀장이 폰을 붙들고 있었다.
-거 유진이 걔가 어릴 적부터 그리 모질더니 커서도 말을 잘 안 들어.
“허허. 사장님도 참. 그 난리를 겪을 때도 포기 안 한 미소를 그리 쉽게 내놓겠습니까? 처음부터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하여간 내가 소송을 걸어서 미소만 데리고 오면 뒤처리는 그쪽이 알아서 한다 이거지?
“물론이죠. 미소가 사장님 호적으로 다시 입양되게 되면 모든 게 다 잘 풀릴 겁니다. 결국 정유진도 사장님이 만드실 기획사로 같이 넘어올 거고요. 원래 새끼를 데려오면 어미는 따라오는 거 아니겠습니까?”
-흐흐. 그래. 내 곧 기획사인지 뭔지 하는 걸 만들 테니까 수익에 3할은 내 통장으로 별도로 꽂아주는 거 잊지 말고.
“여부가 있겠습니다. 아예 소속사 설립까지 저희가 도와드릴 테니까 설립하는 대로 도장 찍으시면 됩니다.”
-약속 반드시 지켜. 아니면 알지?
“거 선금도 받으셨으면서 뭘 그렇게 의심이 많습니까? 사장님이나 약속 어기지 마십시오.”
-쩝. 나야 연예계 일을 아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도 그저 자네 시키는 대로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게. 그럼 끊자고.
달칵.
전화가 끊기자 주호성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바라는 건 오X게 많네. 돼지 같은 놈.”
투덜대는 주호성에게 김동수가 물었다.
“잘 안 됐어?”
“진척은 있습니다.”
혹시나 하고 정유진의 큰아빠와 접촉했던 주호성은 생각지도 못한 유언장이 있다는 소식에 환호성을 질렀다.
아무리 미소가 정유진의 딸로 입양된 상태라고 하지만 후견인이 적시된 친아빠 유언장이라면 입양 자체를 무효로 돌릴 수 있을 가능성이 있으니까.
거기다 불안정한 정유진의 위치에 비해 꽤 유리했다.
정유진의 백부 정학제는 꽤 건실한 기업을 운영 중에다 외견상으로는 금실 좋은 부부였으니까.
“변호사는 제대로 된 인간을 붙여 준다고 전해. 그 쫌생이들한테 변호사를 고용하라고 하면 한 푼도 안 쓸 게 뻔하니까.”
“제대로 된 변호사라뇨?”
“진소미가 발 벗고 나서서 동부지검장 출신으로 한 명 구했어. 조만간에 인사할 거니까 너도 미리 준비해. 어린애들 좋아한다니까 연습생들 몇몇 추려두고.”
“하하. 여부가 있겠습니까?”
주호성이 고개를 끄덕이자 김동수가 한 가지 지시를 더 내렸다.
“그리고 다음 주에 날새가 나온다. 가서 좀 데리고 와.”
“날새요? 그 도촬범 새X가 벌써 나온다고요?”
주호성이 인상을 찌푸리자 김동수가 피식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인상 펴. 그 자식은 앞으로 우리 사람이 될 테니까 네가 그놈 사고 안 치게 관리 좀 하고.”
“쓸 데가 있을까요? 도촬 하는 거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을 건데?”
“이제까지 딱 한 번 걸렸지만 발도 빠르고 눈치도 빨라. 능청스러워서 정보 캐오긴 딱이지.”
잠시 생각을 더듬어 보던 주호성도 결국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적재적소라고 했죠. 사람 쓰는 법 하나는 역시 실장님 따를 자가 없는 것 같습니다.”
“짜식. 아부는.”
김동수가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다 인상을 찌푸렸다.
“정 대리 그놈이 커피 하나는 기가 막히게 타는데 레시피 좀 못 빼 오려나. 아 그보다 아까 하던 이야기는 계속해야지. 배우 2실에 누가 우리한테 붙었다고?”
주호성이 자리를 잡자마자 처음으로 시도한 것은 배우 2실의 매니저들을 포섭하는 일이다.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도 짙어진다고 했던가.
정윤호가 평판이 올라갈수록 그를 시기 질투하는 사람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 * *
리조트에는 놀 거리가 넘쳐났다.
하지만 봄이다 보니 겨울과는 달리 얼굴을 꽁꽁 싸맬 수가 없었다.
그 탓에 유진이는 방에서 쉬고 미소만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생각보다 미소를 알아보는 사람이 많았다.
미소는 사진을 찍자고 몰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잠시 놀랬지만 이내 카메라 앞에서 귀요미 포즈를 잡기 시작했다.
마치 타고난 연예인인 것처럼 카메라 앞을 전혀 어색해하지 않은 채.
생각지도 못하게 20분 정도의 포토타임을 가진 미소를 데리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룸으로 돌아온 나는 사람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즐길 프로그램을 찾았다.
유진이는 아주머니와 함께 사우나로 갔고 나는 시무룩해진 미소를 데리고 말타기 코스를 찾았다.
풀이 죽었던 미소는 허리 높이의 망아지를 본 순간 눈에 하트가 그려졌다.
그 뒤로는 포니 밥 먹이기 포니 털 빗기 포니랑 사진찍기 등등.
포니와 떨어지지 않고 온종일 놀던 미소는 결국엔 포니를 사달라고 조르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다만 한 마리 가격이 1500만 원에 매월 유지비가 어마어마하게 든다는 사실을 듣고 포기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다시 또 놀러 오자는 말은 잊지 않았다.
심지어 ‘점박이’라는 이름까지 지어두고서.
그렇게 신나게 놀고서 리조트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유진이의 집 앞에 차를 대자 뒷좌석에서 낮은 코골이 소리가 선명히 들려왔다.
“고로로롱~ 피우~~.”
곯아떨어진 미소가 내는 소리였다.
다행스레 아줌마가 눈을 먼저 떠 잘 놀았다며 잠든 미소를 껴안고 집으로 먼저 들어갔다.
“오빠. 오늘 고마워요.”
“고맙긴. 이게 내가 할 일인데.”
“아녜요. 제가 물어봤는데 다른 매니저들은 휴가는 칼같이 챙겨간다고 하던데요?”
“흠. 나도 미소랑 노는 게 좋아서 그래. 어차피 집에 가도 혼자고 할 것도 없는데 뭐.”
말을 돌리자 유진이가 주저주저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말인데요···.”
“왜? 할 말 있으면 해.”
“개인 매니저라는 게 있다면서요?”
개인 매니저를 하면 유진이만 담당해야 했다.
그렇게 되면 며칠 내로 오디션을 봐야 하는 이태풍이나 아직 만나지 않은 정실모 멤버들을 케어할 수 없었다.
어떻게 말해야 유진이가 마음 상하지 않을까 하고 고민하는 동안 유진이의 말이 이어졌다.
“아 오해하지 마세요. 오빠가 체리블라썸이랑 이태풍 씨도 챙기고 있는 거 아니까요. 다만 개인 매니저로 회사에 등록해두면 수익 배분도 가능하다고 하길래요.”
아 그것 때문이었어?
“이번 일도 그렇고. 솔직히 오빠가 저한테 해준 걸 생각하면 뭐라도 해드리고 싶어서요. 그래서 말인데 제 수익의 10% 정도를 오빠한테 드리면 안 될까요?”
“10%?”
놀라서 말했건만 유진이가 오해해 버렸다.
“죄송해요. 좀 적죠? 앞으로 미소에게 들어갈 돈이 많아서···.”
유진이는 미소 앞으로 아파트 하나 사 주고 대학원까지 공부시키고 결혼 자금은 마련해 줘야 한다며 해야 할 것들을 손가락을 꼽으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미소 40살까지는 걱정 없이 살아도 될 인생 계획이 유진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유진이 수익의 10%만 해도 어마어마한 돈이다.
유진이가 조만간 정산받을 돈이 3억 5천을 넘는데 지금 페이스라면 올해가 가기 전에 10억을 넘게 벌 테니까.
그리고 이건 시작일 뿐.
앞으로 유진이는 한국 최고의 여배우로 올라가는 것은 물론 아시아권에서의 절대적인 인기를 등에 업고 할리우드의 메이저 빅 5도 탐내는 대배우가 될 거다.
그 경우 받을 수 있는 돈의 수익은 엄청나게 커진다.
하지만 그런 돈보다 그런 마음 씀씀이 자체가 너무도 고마웠다.
“괜찮아. 우리 회사는 팀장 달기 전까지는 수익 배분은 안 돼. 대신에 회사에서 보너스를 잘 챙겨주니까 넌 걱정 안 해도 돼.”
내 설명을 들은 유진이가 혼자서 중얼대기 시작했다.
“그럼 팀장 되면 수익 배분 가능해요?”
“그 그렇긴 하지.”
팀장이라는 말을 여러 번 되뇌던 유진이가 활짝 미소를 짓는다.
“오빠. 그러면 빨리 팀장 달면 되겠다. 그쵸?”
“어. 어.”
결론이 좀 이상하게 나버렸다.
하지만 그보다 더 먼저 묻고 싶은 게 있었다.
“그런데 유진아.”
“네.”
“미소 계획도 좋은데 그럼 네 인생은? 네 인생 계획은 있어? 네 인생 계획 세우려면 나한테 돈을 줄 게 아니라 더 모아야지.”
당연히 계획 있을 거라는 대답이 나올 줄 알았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하게 유진이가 입을 닫아 버렸다.
마치 자기 스스로에 대한 계획은 세운 적이 없다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