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화
12. 안 됩니다
모델을 연상하게 하는 훤칠한 키.
허리까지 내려오는 반짝이는 생머리.
샤넬 블랙 트위드 벨트 원피스에 수천만 원이나 하는 헤르메스 백을 든 미녀가 기다리는 사람은 생각지도 않고 느릿한 걸음걸이로 걸어오고 있었다.
도도한 표정으로 엘리베이터로 들어온 주영인은 내가 있는 걸 보고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6층.”
강명길 팀장이 나에게 층 버튼을 누르라고 지시했다.
“예.”
버튼을 누른 난 곁으로 살짝 물러나 시선을 돌렸다.
죽음을 앞두고 날 떠난 여자다.
그래도 참아야 했다.
현재로는 그녀와 김동수에 관련된 모든 건 나 혼자만 알고 있는 미래니까.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자 강명길 팀장이 마치 큰 선심이라도 쓰는 것처럼 빈정댔다.
“윤호. 너 인마. 이번엔 그냥 넘어갔지만 다음번엔 우리 영인이부터 챙겨라. 영인이 스케줄 펑크 때문에 회사 손실이 얼만 줄 알아?”
강명길 팀장은 내게 말하면서도 시선은 주영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양주에 있는 주영인을 데리러 가지 않은 매니저가 나라는 걸 일러 주는 건가?
그러자 주영인이 날 찬찬히 위아래로 훑어보기 시작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쌀쌀맞게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내 아내였던 여자지만 확실히 재수가······ 없다.
그런데 그때 고개를 돌린 주영인이 대뜸 강명길 팀장을 갉아대기 시작했다.
“팀장님. 요즘 회사 기강이 왜 이리 엉망이죠? 평사원이 실장급 지시를 무시하질 않나 팀장님이 충고하시는데 대꾸도 없고.”
주영인의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강명길 팀장의 인상이 팍 구겨졌다.
“그 그거야 이 자식이 위아래를 몰라서 그렇지.”
“그래요? 그런데 가만히 두시는 거 보니 우리 팀장님. 참 성격 좋으시다.”
주영인이 비꼬듯 말하자 강명길 팀장이 부들대며 몸을 홱 하고 돌렸다.
“야. 정윤호. 어서 우리 영인이 챙기겠다고 대답 안 하고 뭐 하냐? 내가 만만해 보여?”
강명길을 바라보는 주영인의 얼굴엔 나만이 아는 미소가 깃들고 있었다.
‘여전하네. 주영인.’
회귀 전 아무래도 난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남을 이용해 자기 분풀이를 시키는 이런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다니 말이다.
아니지.
생각해 보니 프러포즈도 그녀가 했었다.
내가 탑 엔터테인먼트의 이사가 된 직후였었지 아마?
생각해 보니.
주영인에게 남자란 자신에게 이용가치가 있는지가 가장 중요한 게 아닐까 싶다.
하긴 그러니까 죽어가는 날 그렇게 두고 떠나간 거겠지.
그때였다.
강명길 팀장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엘리베이터에 울려 퍼졌다.
“야! 대답 안 해?”
콧김을 뿜어내며 씩씩대는 강명길 팀장이 조금은 안타까웠다.
주영인이 의도한 대로 움직이는 인형같이 보였으니까.
회귀하지 않았더라면
죽음의 오 단계를 거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주영인을 몰랐더라면
나조차 꼼짝없이 지금 이 상황에 휘말렸을 것 같다.
그랬으면 아마 정신도 못 차리고 굽신거리고 있었겠지.
어떻게 대응할까 하다 그냥 피하기로 마음먹었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니까.
“네. 다음부터는 신경 쓰겠습니다.”
“이것 봐라? 또 건성으로 넘어가려고 하지! 똑바로 대답 안 해!”
덤덤한 말투로 말했지만 강명길 팀장은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도대체 어쩌라고?
영혼을 담아서 사과라도 하라고?
아니면 배라도 갈라서 심장이라도 보여줘야 해?
참으려고 했는데 나도 슬슬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엘리베이터가 4층에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띠링!
-4층~. 상어가 다 잡아먹었다!
4층에 도착했단 알림과 함께 엘리베이터 내부가 번쩍였다.
난 참을 인을 열세 번 정도 그린 뒤 무표정하게 주영인에게 말했다.
“오해가 있는 거 같은데 다른 급한 일 때문에 픽업을 못 간 거지 저도 주영인 씨를 그곳에 내버려 둘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럼 전 회의에 참석해야 해서 이만.”
인사를 꾸벅하고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섰다.
그런데 그때 등 뒤에서 강명길이 거친 소리를 내뱉으며 손을 뻗었다.
“어디서 1년 차 새X가 말도 안 끝났는데 먼저 등을 돌려?”
순간 반사적으로 몸을 틀어 그의 손을 잡았다.
덥석.
어린 시절 누구보다 빠른 눈과 몸놀림을 가진 내 별명은 번개였었다.
권투로 프로 선수가 되려 했던 적도 있었고.
하지만 직장인이 되고서는 단 한 번도 사람에게 손을 쓴 적이 없었다.
바로 어제까지는.
하지만 주영인에 대한 짜증 때문에 하마터면 강 팀장의 면상에 주먹을 날릴 뻔했다.
“뭐 뭐야? 이거!”
손을 내게 붙잡힌 강명길 팀장이 적잖이 당황했다.
얼굴이 점점 붉어지는 강명길 팀장의 손을 붙잡은 채 주영인에게 경고했다.
“주영인 씨. 필요하신 일이 있으시면 3실 쪽 매니저 선배님들에게 말씀해 주시길 바랍니다. 2실 소속인 저와 달리 3실엔 능력 있는 분들이 많으시니까요.”
말을 마친 순간 강명길 팀장의 손을 살짝 튕겼다.
강명길 팀장이 균형을 잃고선 휘청거리며 엘리베이터 안으로 돌아갔다.
그와 동시에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는 걸 보고서 몸을 돌려 회의실로 향했다.
그런데 닫히던 문이 다시금 열렸다.
이내 강명길 팀장의 악다구니가 들려왔다.
“이익! 야! 너 거기 서! 안 서?”
징하다 진짜.
결국 한바탕 해야 하나 싶은 순간 구세주가 나타났다.
복도 끝 회의실에서 나온 구성철 실장이 머리를 긁적이며 외쳤다.
“뭐하길래 아침 댓바람부터 이리 시끄러워!”
구성철 실장의 호통이 터져 나오자 강명길 팀장과 주영인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아 아닙니다. 실장님.”
“그래? 그럼 어서 가 봐야지. 니들 오늘 KBC 특집 행사로 바쁘다고 안 했냐?”
두 사람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그러면서도 나를 째려보는 저 시선은 뭔지.
하지만 그들과 난 다른 2실의 소속이다.
굴렁쇠 엔터가 망하지 않는 이상 두 사람의 말을 들을 이유는 없었다.
두 사람은 몸을 팽하고 돌리더니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구성철 실장이 씨익 웃었다.
“우리 정 스타. 인기 많아졌네?”
“그러게 말입니다. 아침부터 어찌나 군기를 잡으시는지 제가 3실 소속인 줄 알았다니까요?”
너스레를 떨자 구성철 실장이 히죽 웃었다.
“회의 들어가자. 애들 전부 다 네 커피 기다리고 있다.”
“예?”
“지각했으니까 팀원들한테 커피 한 잔씩 돌리는 거 룰인 거 모르냐? 1분 늦었다.”
주영인 때문에 1분 지각으로 아침부터 믹스 커피를 타게 생겼다.
“아······ 알겠습니다.”
반드시 이 빚은 주영인에게 받아내야겠다.
* * *
“오우. 커피 맛있네?”
“혹시 바리스타 할 생각 없냐?”
“야. 매니저 때려치우고 나랑 같이 카페나 동업하자!”
회의실의 긴 테이블에는 2실 소속의 오덕구 팀장 주영훈 팀장 그리고 박인기 팀장이 내가 건넨 커피를 마시며 웃음을 짓고 있었다.
대리급 이하는 다 스케줄에 갔는지 말단 직원은 나 혼자뿐이었다.
기분이 좀 싱숭생숭했지만 회의가 진행되자 점점 익숙해졌다.
주영훈 팀장과 박인기 팀장의 보고 뒤에 오덕구 팀장의 보고가 이어졌다.
“······그래서 23화랑 24화 말고도 오늘 촬영할 22화까지 추가 분량을 받은 상태입니다.”
“수정 대본이 총 3화야? 23화랑 24화만 바뀌었다고 안 했어?”
“그랬었는데 오늘 아침에 추가로 22화 수정본도 받았습니다.”
이지연 작가는 엔딩까지 유진이를 쓰기 위해 결국엔 22화마저 대본을 수정해 버렸다.
덕분에 유진이는 새벽같이 일어나 연기 연습을 하는 중이었다.
“캬. 이지연 작가가 유진이한테 단단히 꽂혔나 보다.”
“예. 윤호가 현장에서 고생한 덕에 이지연 작가가 유진이를 잘 봐 준 거 같습니다.”
구성철 실장이 얼굴에 미소를 띄고 말한다.
“그래. 요즘 윤호가 일 잘한다던데. 어때? 처음으로 전담 맡아 보니까 할 만하냐?”
“예. 실장님.”
“잘 해 봐 지금처럼만 하면 아예 유진이만 맡겨 줄 수도 있으니까.”
2년 차까지는 담당 연예인의 스케줄이 비면 다른 스케줄도 따라가야 했다.
하지만 유진이만 맡을 수 있다면?
앞으로 만나게 될 정실모를 도울 시간도 늘어나게 된다.
물론 지금처럼 잘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붙겠지만.
“감사합니다. 실장님.”
“그래. 그런데 유진이가 분량 받으면서 반대로 가장 많은 분량이 빠진 사람이 누구지?”
“박은빈입니다.”
“쁘띠모 박은빈? 그 싸가지?”
박은빈.
정유진에게 출연 분량을 뺏긴 박은빈은 데뷔 5년 차 최상위 인기 걸그룹 ‘쁘띠모’의 리더다.
업계 2위인 TK 엔터에서 전폭적으로 밀고 있는데 올해 들어 연기를 겸업하고 있었다.
하지만 ‘발 연기란 무엇인가?’를 온몸으로 보여 주고 있었다.
한숨을 내쉰 구성철 실장은 오덕구 팀장에게 경고했다.
“오 팀장. 그 싸가지랑 현장에서 안 부딪히게 조심해. TK 엔터 쪽은 특별히 신경 쓰고.”
“예.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래. 둘 다 수고 좀 하고. 아 그리고 윤호는 유진이 현장에서 다른 배우들한테 텃세 안 겪게 신경 쓰고.”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회의가 끝날 무렵 구성철 실장이 생각지도 못한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유진이는 레슨 시간을 좀 늘려보자. 이지연 작가가 그 정도로 관심을 가졌다면 우리 쪽에서도 더 신경을 써야지.”
최현민 배우는 2실 소속인 주영훈 팀장이 관리하는 12년 차 조연 배우 겸 트레이너다.
그런데 다들 유진이가 연기력이 늘었단 평가를 받는 게 모두 최현민의 공이라고 말하고들 있다.
원래 유진이의 연기 레슨 스케줄을 빼는 건 조금 눈치를 보다 실행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욕을 먹더라도 지금이 나설 타이밍이다.
“윤호야. 너도 내일부터는 유진이 일정 없을 때는 회사로 들어와서 레슨을······”
“안 됩니다.”
단호한 말투로 구성철 실장의 말을 끊자 사무실에 있는 직원들의 눈이 내게로 꽂혔다.
구성철 실장이 인상을 찌푸렸다.
“안 돼? 뭐가?”
“유진이는 레슨을 받는 것보다 혼자 연습하는 게 낫습니다.”
오덕구 팀장이 내 정장 소맷자락을 살짝 끌어당겼다.
괜히 대서지 말라는 거다.
“너 왜 그래?”
구성철 실장이 아무리 평소엔 호인이라도 화가 나면 말릴 수 없다는 건 나도 잘 안다.
하지만 막 꽃을 피워낸 유진이가 싹을 밟히게 둘 수는 없다.
특히나 지금 같은 시기에 쓰레기 트레이너 최현민을 붙이는 건 독이나 마찬가지다.
맞은 편에 앉아 있던 성격 좋은 주영훈 팀장의 얼굴 역시 딱딱하게 굳었다.
“너 아침부터 뭘 잘못 먹었냐? 갑자기 왜 그래?”
그때부터 난 회의실 모두의 굳은 시선을 마주한 채 유진이의 연기가 레슨을 받을 수준을 넘었다는 것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 * *
회의를 마치고 유진이를 데리러 가는 동안 차 안에선 오덕구 팀장의 잔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너······ 제정신이냐?”
“예. 제정신입니다.”
“미치겠네. 너 갑자기 왜 이렇게 변했어?”
조금 전 회의에서 유진이에겐 레슨이 더는 필요 없다고 말한 탓에 분위기가 흉흉해졌었다.
그러자 구성철 실장이 타협안을 꺼내 들었다.
전담을 맡아서 적극적으로 나서는 건 좋은 태도다.
하지만 아무런 결과도 없이 그런 의견을 받아들일 순 없다.
최현민 트레이너의 체면도 있으니까 그가 손을 떼게 하려면 그에 걸맞은 실적을 가지고 오라고.
최소한 현장에서 연기 잘한다는 소리가 회사에 들리게 하라는 거다.
그리고 만에 하나.
연기를 못 한다는 소리가 나오기라도 하면?
그날부로 난 유진이에게서 전담 해지시키고 다른 곳으로 보내 버린다는 선고가 떨어졌다.
구성철 실장은 한 번 내뱉은 말은 지키기로 유명하니 그 말은 현실이 될 거였고.
난 조수석에 앉은 오덕구 팀장에게 입을 다물어 달라고 몇 번이고 부탁했다.
“팀장님. 유진이한테는 아무 말도 하지 말아 주십시오. 유진이가 알면 괜한 걱정으로 연기를 망칠 수도 있습니다.”
오덕구 팀장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젓는다.
“하아. 난 모르겠다. 네가 유진이의 뭘 보고 그러는지······ 이제 막 연기에 눈뜬 애가 잘해 봤자 얼마나 잘하려고······. 에잇! 몰라 맘대로 해!”
“현장에서 직접 보시면 알 겁니다.”
“그래. 그래. 네 목을 니가 건다는데 내가 뭐라고 말리겠냐?”
퉁명스럽게 말하지만 표정엔 걱정이 가득했다.
하여간 이 선배도 사람 하나는 좋다니까.
* * *
“22화 씬 269. 레디~ 악숀!”
현장에 도착하자 박 PD의 확성기 소리가 들려왔다.
스태프들이 수정된 22화 대본을 기반으로 작성된 큐시트에 따라 촬영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가 생겼다.
22화 촬영이 시작되었는데도 24일에 방영되는 <아침이 간다> 22화의 시청률이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었다.
[에브리데이 V10]
[날짜 : 2019년 12월 24일]
-PM 10:00 <아침이 간다> 22화 모니터링. 시청률 19.5%
이지연 작가가 유진이를 마음에 들어 한 탓에 23화와 24화뿐 아니라 22화까지 수정 대본이 나왔다.
덕분에 유진이의 출연하는 분량이 대폭 늘어났는데 시청률은 단 0.1%의 변화도 없었다.
다이어리의 일정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건 미래가 바뀌지 않는다는 뜻.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심지어 구성철 실장 앞에서 당당히 목을 건 상황인데 말이다.
‘아니 왜 일정이 안 사라지는 거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