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9화
119. 가족이란? 1
삼성동 스타인터컨티넬탈 호텔 1층 연회장.
웅성웅성.
기자 회견을 기다리던 최지영이 초조한 표정으로 내 옷자락을 붙잡았다.
“나 괜찮아 보여요? 너무 수수한 것 같은데.”
최지영은 검은 투피스 정장을 입은 채 화장기가 거의 없는 수수한 모습으로 반듯이 서 있었다.
“괜찮습니다. 이런 자리에는 너무 화려한 의상보다는 차분한 느낌으로 가 주시는 게 좋습니다.”
최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심호흡을 크게 한번 해 보십시오. 그러면 좀 나아지실 겁니다.”
몇 번 심호흡해 보던 최지영이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조금은 안정된 것 같다면서.
“그나저나 오늘 하루 동안 내 매니저 역할 한다고 수고 많았어요.”
“아닙니다.”
“아니긴. 새벽부터 도와줘서 얼마나 편했는데. 그리고 그날 봉투에 넣어둔 돈 진짜 잘 썼어요. 밀린 월세도 내고 오래간만에 제대로 된 식사도 하고. 하여간 우울증 때문에 나 죽기 일보 직전이었거든요.”
쑥스러움에 코끝을 간질이던 그녀가 방향을 돌렸다.
“저기······ 무대 위까지 에스코트를 부탁하고 싶은데 안 되겠죠?”
“이제부터는 저분하고 가셔야죠.”
나는 연회장 문 앞에서 기다리는 알토란 기획의 박우민 이사를 가리켰다.
최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기까지만이라도 부탁해요.”
“예. 알겠습니다.”
난 그녀의 곁에 서서 오른팔을 내밀었다.
“잡으시죠.”
최지영이 자신의 왼손을 내 오른팔에 끼웠다.
그런데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덜덜 떨리는 게 선명하게 느껴졌다.
발걸음도 떼지 못하고 심호흡을 하는 그녀의 왼손을 살포시 감쌌다.
“괜찮을 겁니다. 오늘이 최지영 배우님이 재기하는 첫날일 테니까요.”
내 목소리에 그녀의 떨림이 조금은 잦아들었다.
“호호호. 이거 진짜 떨리네. 나 진짜 새 신부가 된 거 같은데요?”
“이제 새 출발 하게 되실 거니까 틀린 말도 아니죠.”
“치. 말 너무 잘하는 거 아녜요? 꼭 바람둥이 같은데요?”
“바빠서 바람을 피울 시간도 없습니다. 아니 애당초 누구 사귈 시간도 없는데 무슨 바람입니까?”
“하여간 말은 잘해. 알았어요. 이제 가요.”
그제야 최지영의 걸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선 굵은 외모를 가진 박우민 이사에게 최지영을 넘겼다.
최지영의 손을 건네받은 박우민 이사가 내게 악수를 권해왔다.
“정윤호 대리님이라고 하셨죠? 오늘 이 자리를 만들어 주신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박 이사님.”
정중한 인사를 마친 박우민은 최지영을 쳐다보며 함께 호흡을 달랬다.
두 사람이 걸어가자 문 옆에 대기하고 있던 직원들이 문을 열어준다.
끼이이익.
연회장의 문이 열림과 동시에 기자석에서 연신 플래시가 터지기 시작했다.
탑스타 최지영이 복귀하는 순간이다.
* * *
[톱스타 최지영 눈물의 기자 회견. “전 남편과 최종혁에게 당했다.”]
[“최종혁은 믿을 수 없는 인간. 나 말고도 당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최종혁. 연락 두절!]
[TK 엔터의 장지철. 전처는 사기꾼. 허위사실 공표에 맞고소 예정!]
[정유진과 최종혁의 열애설은 모두 조작!]
기자 회견장에서 눈물로 호소한 최지영 덕분에 여론이 바뀌기 시작했다.
최종혁과 장지철이 어떤 인간인지.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피해를 받았는지 호소했고 자신의 어리석음과 과거의 일화들을 털어놓았다.
남편의 잦은 외도에 괴로워하던 그녀에게 최종혁이 접근했고 술에 강한 그녀가 아차 하는 사이 의식을 잃었던 일.
그리고 그 뒤에 벌어진 기억하기 싫은 밤에 관한 이야기까지.
특히 변호사를 대동한 채 현장을 급습한 남편과 합의를 위해 조건 없이 전 재산을 넘긴 부분에 이르자 기자들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회견장에 모인 TK가 뿌린 돈을 받고 영혼 없는 기사를 양산해가며 그녀의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공범들이니까.
하지만 최지영은 기자들을 적으로 돌리지 않았다.
적은 주범 장지철과 최종혁으로 한정했다.
그러자 몰락한 톱스타 최지영은 순식간에 비련의 여주인공 그 자체가 되었다.
그 뒤론 내가 생각한 대로 상황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기자들의 미안한 마음을 자극하고 대중의 동정표를 얻자 비난은 최종혁과 장지철을 넘어 TK 엔터에게로 쏟아졌다.
장지철은 절대 그런 일을 벌인 적이 없다고 우겨댔지만 여론의 채찍은 무서울 정도로 두 사람을 몰아쳤다.
덕분에 유진이의 열애설 기사는 완전히 가라앉아 버렸다.
그리고 다시 한번 유진이의 앞날엔 봄이 찾아오고 있었다.
팬들의 사과와 함께 ‘파란 하늘 다시 보기’ 운동이 일어났으니까.
난 상황이 안정된 걸 확인하고서 휴가를 내었다.
나도 좀 쉬고 지난 며칠간 시달린 유진이와 미소에게 바람을 쐬게 해주려고 말이다.
미소가 ‘이쁘니’라고 이름 붙인 벤츠 E 클래스를 꺼내 유진이의 집으로 향했다.
지난번처럼 주인아줌마와 함께 다 같이 경기도 G 리조트로 가기 위해서.
“김치~ 김치~ 몸에 좋고 맛도 좋은 김치~.”
미소가 요즘 부르는 김치송을 따라 부르며 핸들을 두드렸다.
덩덕덕쿵덕쿵.
휘모리장단을 타다 보니 어느새 유진이의 집 앞에 도착했다.
그런데.
집 앞에 검은 벤츠 S 클래스 한 대가 서 있었다.
“누구지? 올 사람이 있나?”
벤츠 S 클래스인 걸 보니 기자는 아니다.
적어도 광고주나 사장급이 온 것 같은데 누가 온 건지 가늠이 가질 않았다.
차를 세우고 급히 2층으로 향했다.
그런데 열린 문으로 집안에서 처음 듣는 중년 남자와 중년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 행실을 어떻게 하고 다니는데 이따위 소리가 계속 들리는 거야?”
“우리가 너 때문에 낯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이딴 소문이 계속 나는 데서 미소를 키울 순 없고 미소는 우리가 키울 테니 넌 활동에나 전념하거라.”
친척?
그런데 도대체 누구길래 유진이를 향해 이딴 소리를 하는 거지?
“큰아빠 큰엄마 두 사람 다 우리 미소를 모른 척해놓고서 갑자기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이세요?”
큰아빠와 큰엄마군.
난 스마트워치의 녹음 기능을 키고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유진이는 큰아빠 부부를 노려보고 있었다.
겁에 질린 미소는 귀를 막고선 유진이의 등 뒤에 딱 달라붙어 있고.
유진이의 왼손이 등 뒤의 미소를 감싸 안고 있었다.
그런데 유진이의 눈가에 눈물이 고인 게 보인다.
순간 나도 모르게 큰소리를 내질렀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유진이를 닦달하던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유진이의 눈에 안도가 어리는 게 보였다.
“오빠!”
“괜찮아?”
순간 큰아빠 부부가 날 노려보며 코웃음을 친다.
“넌 또 뭐야? 기둥서방이냐?”
“아냐. 여보. 방송에 나오던 그 매니저잖아.”
큰엄마가 내 쪽으로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키가 150cm가 채 안 되는 날카로운 인상의 여인이 내 앞에 다가와 찢어지는 목소리로 외쳤다.
“아니 그쪽 회사는 애 관리를 어떻게 하길래 이딴 소문이 나? 집안이 이따위 소문에 휘둘리는 환경에서 미소가 잘 크겠어?”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고막이 아파 왔다.
하지만 난 그녀를 무시하고 지나쳐 유진이를 향했다.
“당신 사람 말이 말 같지 않아? 야! 거기 안 서?”
사람이라야 말을 듣지.
미소를 보육원에 맡기려고 한 친척들 그중 핵심이 백부 백모 부부라는 걸 안 순간부터 두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있었다.
“진짜 괜찮은 거 맞지?”
유진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미소는?”
“조금 놀랐는데 괜찮아요.”
안심이다.
난 유진이의 앞을 막아서고 유진이 큰아빠를 노려봤다.
“제 배우한테 하실 말씀 있으면 제게 하십시오.”
유진이 큰아빠가 날 보며 인상을 쓰기 시작했다.
“넌 빠져 인마. 가족들끼리 이야기하는 중인데 왜 끼어들어?”
그사이 자신의 남편 곁으로 다가온 유진이 큰엄마가 빽빽 소리를 질렀다.
“이딴 매니저가 있으니깐 유진이 쟤가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거지! 미소 너! 이리 안 와?”
유진이가 한 손으로 내 정장 상의를 꼭 붙든다.
“괜찮아. 어떤 상황인지 알겠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있어.”
딱 봐도 상황이 이해가 간다.
미소의 양육권을 뺏고 돈 나오는 화수분이 된 유진이를 쥐고 흔들어 볼 생각이겠지.
유진이 큰아빠가 날 쏘아본다.
“당신은 이만 꺼져! 유진이는 오늘부터 다른 매니저 알아볼 테니까 그리 알고!”
“그래요. 여보. 이참에 유진이 매니저도 바꾸라고 하고 미소를 우리가 키우는 것도 확실히 해둬요!”
유진이 큰엄마의 눈빛에서 탐욕이 이글대고 있었다.
“미소를 왜 큰아빠랑 큰엄마가 키워요? 미소는 내 딸이에요.”
유진이가 발끈하는 걸 진정시키며 경고했다.
“지금 당장 나가지 않는다면 가택 침입으로 즉시 신고하겠습니다.”
폰을 꺼내자 유진이 큰아빠가 큰소리를 친다.
“이 친구가 겁도 없네?”
“요즘 것들은 경찰이 무슨 마법사라도 되는 줄 아나? 야. 천호동 경찰서장이 내 친구 남편이야!”
큰엄마라는 사람의 말이 가관이다.
천호동 경찰서장이 친구 남편이라고?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그딴 걸로 협박이라니.
녹음 파일이 공개되면 그 친구 남편이라는 사람이 먼저 손절 할 텐데 말이다.
“야! 정유진. 너 진짜 이럴 거야? 가족도 아닌 이딴 놈이 시키는 대로 할 거냐고! 진짜 큰아빠랑 큰엄마 경찰에 신고 할 거야? 어?”
유진이 큰아빠의 고함에 유진이가 내 곁으로 나왔다.
두 사람을 바라보는 유진이의 얼굴에는 단호함이 어려 있었다.
“내게 가족은··· 미소뿐이에요.”
유진이 큰아빠와 큰엄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 지금 뭐라 했어? 이 이 X이?”
“야! 너한테 우리가 해준 건 생각도 안 한다 이거야? 이런 배은망덕한 것!”
유진이는 더는 듣지 않고 내게 부탁했다.
“오빠. 이분들 당장 신고해주세요. 미소가 많이 놀랐어요.”
“뭐? 이분들? 정유진. 너 말 다 했어?”
난 고개를 끄덕인 뒤 경찰서에 전화하려 했다.
순간 유진이 큰아빠가 내 폰을 뺏으려고 손을 휙 뻗었다.
가볍게 손을 흔들어 그의 손을 피했다.
“지금 절 치시려고 한 겁니까?”
“이 이 자식. 뭐가 이리 빨라?”
당황한 유진이 큰아빠가 다시 손을 뻗으려 했다.
하지만 다음 말에 멈춰 섰다.
“그 손 다시 들어서 닿으면 폭행으로도 신고하겠습니다.”
“너 지금 나 협박하는 거냐?”
“아뇨. 사실을 말하는 겁니다.”
이미 녹음은 되고 있었기에 난 증거자료로 삼을 수 있는 모든 상황을 ‘녹음 파일’에 담고 있었다.
“집으로 가실 겁니까? 아니면 경찰서로 가시겠습니까? 원한다면 친구 남편분이 계시는 천호동 경찰서로 갈까요? 아니 그냥 지금 여기로 부를까요?”
유진이 큰아빠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유진이 큰엄마가 큰아빠의 팔을 잡아 이끈다.
“여보. 일단 가자. 갔다 다시 와.”
유진이 큰아빠가 날 쏘아보다 몸을 홱 하고 돌렸다.
두 사람은 쫓기듯 유진이의 현관문으로 향했다.
그런데 문을 닫기 직전 큰엄마가 유진이를 쏘아보며 경고했다.
“유진이 너! 큰엄마가 다시 올 거니까 그때까지 정리 다 해둬. 미소는 우리가 키울 테니까.”
“아직도 안 갔어요 아줌마?”
순간 큰엄마란 사람이 얼굴을 붉히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내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닫혔다.
동시에 유진이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뚝뚝뚝.
볼을 타고 내린 눈물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겁을 먹은 표정은 아니었다.
분을 이기지 못해서 흘리는 눈물이었다.
사정을 듣고 싶었지만 일단은 미소가 우선이었다.
유진이가 몸을 돌려 쪼그려 앉았다.
귀를 막은 미소의 두 손을 떼자 미소가 눈을 크게 뜬다.
“미소야. 됐어. 큰아빠랑 큰엄마 갔어.”
“갔어?”
“응.”
“우리 미소. 많이 놀랐지? 엄마가 미안해?”
미소가 고개를 젓는다.
“아니. 나 괜찮아. 하나도 안 놀랐어!”
밝은 미소의 답변에 웃음이 살짝 나왔다.
엄마 앞에서 괜히 센 척하면서 배를 내밀고 있었으니까.
그때였다.
“어? 유노 삼촌이다! 언제 왔어요?”
미소가 날 발견하고 내게로 달려왔다.
“막 왔어 미소야.”
내 품에 풀썩 안긴 미소의 몸이 떨리고 있었다.
난 미소의 등을 토닥이며 진정시켰다.
“우리 미소. 엄청 용감하게 잘 참았네?”
“응! 나 용감해!”
미소가 내가 선물한 파워터프걸 시계를 위로 치켜 올렸다.
“그러게. 그러면 상을 줘야겠는데? 으차.”
미소를 껴안고 일어났더니 재미있다며 꺌꺌 웃기 시작했다.
그제야 유진이도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유진아. 주인아줌마는 어디 가셨어?”
“장 보러 가셨어요. 리조트 음식이 비싸서 돈 아깝다고요.”
어쩐지.
집에 있었다면 당장이라도 뛰어와서 유진이 앞을 막아섰을 아줌마가 없더라니.
미소를 품에 안은 채 유진이에게 물었다.
“그런데 미소를 데려간단 소리는 뭐야?”
“아······ 그거요? 저도 몰랐는데 돌아가신 형부가 남긴 유언장이 있대요. 혹시나 무슨 일이 있을 때 미소를 맡긴다고 했다던데요.”
응?
미소 아빠가 남긴 유언장?
“그게 무슨 소리야? 이제까지 뭐 하고 갑자기 유언장이라니?”
그 순간 유진이는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힘들게 털어놓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