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8화
118. 봄 다음엔 겨울? 7
과거 이혼에 관한 숨겨진 진실을 밝혀달라는 요구에 최지영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최지영 씨의 이혼에 최종혁 씨가 관계되었다는 걸 압니다. 그러니까······.”
“잠깐만요.”
최지영은 기분 좋게 마시던 커피도 내려놓고선 날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조금 전 부드러운 분위기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마치 살얼음을 걷는 듯한 긴장이 흘렀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짓던 최지영이 한 손을 들어 문 쪽을 가리켰다.
“이런 줄 알았으면 문 열어주지 말걸. 이대로 그냥 나가보세요. 그리고 선물 받은 커피랑 반건시는 잘 먹을게요.”
최지영에게서 한창때의 포스가 흘러나오고 있다.
하지만 난 굴하지 않고 그녀의 시선을 마주했다.
“최 배우님. 그럼 이대로 당하고만 사실 생각입니까?”
최지영이 어처구니가 없다며 코웃음을 친다.
“설령 그쪽 말대로 밝힌다고 쳐요. 세상 사람들이 날 25살짜리한테 농락당한 아줌마라고 볼 텐데. 그럴 바에는 혀를 깨물고 말죠!”
최지영의 말에 자조하는 어투가 묻어 나왔다.
그녀도 이런 걱정으로 자신의 심경을 뒤늦게야 밝혔었다.
하지만 미래는 그녀의 생각과는 전혀 달리 흘러갔다.
최지영을 아끼는 시청자들은 생각보다 많았으니까.
어쩔 수가 없다.
최지영이 숨기고 싶었던 이야기까지 할 수밖에.
“하지만 그때 전 남편분이 최종혁을 사주한 범인이라는 건 말씀 안 하셨잖습니까? 증거도 가지고 계시면서 숨기신 거로 아는데요?”
순간 최지영이 경악하는 표정으로 말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어 어떻게 그런 것까지 알······아요?”
어떻게 알긴.
당신이 직접 2년 뒤의 아침 방송에서 꺼내든 이야기를 들었으니 아는 거지.
최지영의 어깨가 푹하고 처졌다.
그 모습을 보는 나 역시 마음이 편하진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날 순 없었다.
배우로서 착실하게 성장하는 유진이를 구해야 했으니까.
그리고 이게 눈앞의 최지영을 재기하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고.
“최지영 배우님. 그날 이후 전 남편분에게 연락받으신 적 없으시죠? 미련도 가질 상대에게나 가지셔야 합니다. 장지철 씨는 이미 사귀는 분도 있고······.”
“그건 저도 알아요······.”
“그러면 절 믿어 보십시오. 제 플랜대로라면 분명 여론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힘들긴 하겠지만 회귀 전에도 있었던 일이었기에 난 자신감 있게 말했다.
“그냥 도와달라는 건 아닙니다. 도와주시면 배우로서 재기할 수 있게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재기요?”
최지영의 눈에 희망이 언뜻 비친다.
갈 곳 잃은 동공이 목표를 찾았고.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천천히 되물었다.
“설마······. 굴렁쇠 엔터에서 받아 주실 건가요?”
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오해하지 않게 바로 답했다.
“전 매니저이던 박우민 매니저 기억하시죠?”
“네······.”
“현재 알토란에서 이사로 계십니다. 그분이 최지영 배우님의 복귀를 간절히 기다리고 계십니다.”
장지철과 이혼할 당시 최지영을 담당하던 매니저가 바로 박우민이다.
친남매 이상으로 가까이 지내면서 최지영을 스타의 자리로 올린 장본인이기도 했고.
최지영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말도 안 돼. 나 이혼할 무렵에 우민 오빠와 얼마나 심하게 싸우고 헤어졌는데요.”
절대 그럴 리가 없다며 손사래를 친다.
하지만 박우민이야말로 진심으로 최지영을 아끼는 매니저였다.
회귀 전에도 그녀를 재기시키고 새로운 반려가 되기도 했었으니까.
못 믿겠다던 최지영은 내 계속되는 설득에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우민 오빠가 날 받아 줄까요?”
“받아 주실 겁니다.”
“어떻게 확신하죠? 내가 얼마나 그 오빠한테 상처를 줬는지 모르시잖아요.”
최지영의 성토에 조금 전 받은 까톡 하나를 내밀었다.
여기 오기 전 강지영 본부장에게 부탁했던 일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상황이니까.
[강지영 본부장 : 박우민 이사와 만났어요. 최지영 씨가 재기할 마음만 있다면 언제든지 두 팔 걷고 나서시겠다고 하시던데요?]
최지영이 까톡 메시지를 보고 손을 부르르 떨었다.
“지 진짜예요? 이거?”
“제가 왜 거짓말하겠습니까? 직접 전화 한번 해 보시겠습니까?”
“그 그래······요.”
난 알토란 기획의 이사인 박우민 매니저의 전화번호를 건넸다.
“잠깐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천천히 말씀 나누시고 연락 주십시오.”
최지영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문을 닫고 나온 난 심호흡을 위해 빌라 밖으로 나왔다.
차가운 공기가 가슴속 폐부를 찌릿찌릿 찌른다.
반짝이는 수없이 많은 별들.
그리고 밤하늘에 그 별들보다 훨씬 더 많은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어둠이 있었다.
마치 연예계를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내 운명은 궤도를 이탈한 별들을 제 위치로 이끌어 주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길게 심호흡을 마치고 고개를 내리자 정상봉이 날 묘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얘가 왜 이래?’
정상봉이 내 시선을 마주하며 말했다.
“정 대리님 밑으로 발령받은 게 천만다행 같습니다!”
날 바라보는 정상봉의 표정은 처음 내가 회사에 입사할 때 하늘 같은 선배를 보던 동경 같았다.
난 언제 저기까지 갈까.
저 사람은 몸이 몇 개인데 쉬지도 않나.
그 일을 그렇게 처리하는구나 하는 감탄이 담긴 듯 말이다.
난 헛기침을 하며 모른 척 정상봉의 말을 이어받았다.
“왜 그런 생각을 한 건데?”
“솔직히 최지영 배우 만나면 뭔가 쓸만한 정보를 얻기 위해 협박이라도 할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오히려 살길을 열어주셨잖아요.”
“인마. 내가 깡패냐? 바닥까지 떨어져 있는 여배우를 왜 협박해? 상생 몰라 상생?”
“그게 말이야 쉽죠. 실제로 그런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다들 자기 앞가림하기도 바쁜 세상인데······”
“나도 똑같아. 그래도 뭐 능력이 되는 한 서로에게 좋은 길을 찾아봐야지. 안 그래?”
정상봉이 무안한 듯 머리를 긁적거렸다.
20분 정도 지났을 무렵.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달칵.
전화를 받아보니 최지영의 목소리다.
-이제 들어오셔도 돼요.
전화를 끊은 난 다이어리를 확인했다.
[에브리데이 V10]
[날짜 : 2022년 3월 15일]
-AM 10:00 <일정 삭제> (삭제된 일정 : MBS <오늘 아침엔> 최지영 편. 시청률 18.5%. 모니터링.)
일정이 사라진 걸 보니 내 이야기를 듣기로 생각한 것 같다.
‘다시금 연예계로 돌아갑시다. 지영 씨.’
빛을 잃고 꺼질 듯 말 듯 연명하는 별이 다시금 파릇파릇 밝아지려 하고 있었다.
“이야기 끝나셨나 보다. 들어가 보자.”
최지영의 집으로 돌아가자 그녀는 활동하기에 편한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배우님? 옷은 왜?”
“제가 바닥까지 떨어졌다는 걸 다 알고 오셨는데 허세를 부리는 게 더 부끄러워서요. 그보다 이제 난 뭘 하면 되나요?”
“일단 가지고 계신 까톡 내용 전 남편과의 까톡 내용은 제게 넘겨주실 수 없습니까?”
“기자한테 터트릴 거죠?”
“예. 대신에 그 내용은 직접 발표해 주십시오.”
최지영이 멈칫거렸다.
“직접 기자 회견을 하라고요?”
“저희가 기사 발표하는 것보다 최지영 배우님께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시는 게 복귀에도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잠깐 고민하던 최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메이크업이랑 의상은 그쪽에서 준비해 주실 수 있죠?”
돈이 없다는 최지영의 부끄러운 고백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 소리’에서 상 받았던 그날처럼 제대로 스포트라이트 받게 해드리겠습니다.”
그제야 최지영이 안심했단 표정을 짓는다.
“알겠어요. 그럼 알토란으로 가기 전까지만 잘 부탁해요. 정 대리님.”
최지영이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맞잡은 손에서 잔잔한 떨림이 느껴졌다.
수락은 했지만 막상 그날의 일을 밝히려니 겁이 나는 거다.
난 그녀와 맞잡은 손에 힘을 주며 안심시켰다.
“괜찮을 겁니다. 그럼 모레 아침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최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로 돌아온 나는 혹시 몰라 까톡 하나를 보냈다.
[정윤호 매니저 : 반건시 봉투 안에 선물 하나 더 넣어뒀습니다. 배우님.]
10초도 되지 않아 최지영의 답변이 돌아왔다.
[최지영 : 윤호 씨. 이 은혜 안 잊을게요. 꼭 재기해서 나중에 몇십 배로 갚을게요.]
그녀의 반건시 봉투에 2백만 원을 넣어뒀다.
형편이 어려워질수록 그 어떤 선물보다 현금이 반가우니까.
이건 회귀 전 그녀가 나왔던 드라마를 보며 울고 웃었던 것에 대한 보답이랄까?
그녀의 까톡에다 힘내라는 이모티콘 하나를 남기곤 다음 일을 시작했다.
* * *
최종혁과 정유진의 열애설을 터진 지 이틀이 지났다.
그리고 그 열애설을 터트린 당사자인 천이상 이사는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약속했던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지만 항복선언을 했던 정윤호에게 아무런 연락이 없는 탓이다.
“설마 정윤호 그놈 딴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
분명 정윤호가 오늘까지 시간을 달라고 했다.
천이상은 폰을 만지작대다 내려놓았다.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어쩔 수 없지.”
2탄 3탄에 이어지는 일을 준비해 뒀기에 걱정 따윈 없었다.
지이잉.
“그럼 그렇지. 이제까지 내 손을 벗어난 놈이 없는데.”
그런데 전화를 걸어온 상대는 정윤호가 아닌 김태권 대표였다.
-내 방으로 올라와.
“아 예. 형님.”
김태권의 호출에 천이상은 대표이사실로 향했다.
“일은? 잘 되고 있어?”
“예. 아무리 굴렁쇠에서 조작이라도 말해도 사람들이 안 믿는 분위깁니다.”
“하긴 누가 믿겠냐? 나라도 안 믿겠다. 크크.”
김태권은 소파에 몸을 기대며 다시 물었다.
“그런데 정윤호 그놈은 어때? 이렇게 해서 데리고 와 봐야 말을 듣겠냐?”
천이상이 능청맞은 얼굴로 히죽 웃는다.
“그래 봤자 직장인이죠. 일단 데리고 온 후에는 잘 달래볼 생각입니다. 여자든 돈이든 섭섭한 마음 달래는 방법은 많이 있으니까요.”
“그래. 어떻게든 데려온 후에 생각해 보자.”
그런데 그때 대표이사실의 인터폰이 울렸다.
띠리링.
김태권이 인터폰을 들었다.
“어. 왜 홍보팀장?”
-대표님. 큰일 났습니다!
다급한 홍보팀장의 목소리에 김태권이 인상을 썼다.
“뭐가 큰일 나?”
-최지영이 자신의 이혼에 관한 비화를 발표한다며 기자들을 불러 모았답니다!
“뭐? 최지영이? 갑자기 왜?”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 이혼에 최종혁이 얽혀 있다고 말했다는데요?
최지영의 전 남편인 장지철은 TK 엔터 소속의 탑스타였다.
그 탓에 김태권이 다급히 외쳤다.
“막아!! 무조건! 얼마를 써서라도!”
갑작스레 튀어나온 악재에 김태권의 얼굴이 섬뜩하게 일그러졌다.
전화를 끊은 김태권은 얼른 최종혁을 불러들였다.
갑자기 대표이사실에 불려 들어온 최종혁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대표님. 왜 부르셨어요?”
“너 인마. 최지영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지철이가 이혼한 일에 네가 끼어 있다면서?”
놀란 최종혁이 머뭇거렸다.
최지영의 이혼에 얽힌 비화는 장지철과 자신밖에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맞은편에 앉은 천이상도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최종혁을 닦달했다.
“종혁이 너 인마! 저번에 말한 여자들이 다라고 했잖아! 이게 무슨 X 소리야? 어?”
천이상의 말에 최종혁이 목을 쏙 집어넣었다.
최종혁은 눈치를 힐끔힐끔 살피며 장지철과 자신 그리고 최지영만 아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 그게요. 실은 지철이 형님이······.”
이야기를 다 들은 순간 김태권은 손목에 찬 시계를 풀었다.
달칵.
두터운 롤렉스 시계가 테이블에 놓이는 순간 김태권이 온 힘을 담아 주먹을 날렸다.
빡!
“으아악.”
“이 새X들이! 회사를 말아먹으려고 작정을 했나! 약까지 써?”
퍽퍽퍽!
김태권의 주먹은 최종혁의 얼굴과 배를 가리지 않았다.
매니저와 달리 배우들은 얼굴만큼은 때리지 않던 김태권이지만 지금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최종혁을 마구 밟아대었다.
“으아아악! 대 대표님. 그 그게 아니라······. 끄으윽! 거 거긴!”
“야! 무슨 짓을 하든지 간에 회사에다가 이야기는 하랬잖아! 엉? 그래야 막아줄 수 있다고!”
몸을 웅크린 최종혁의 비명이 대표실을 울렸다.
그 사이 천이상은 조용히 일어나 대표실을 나섰다.
정윤호를 무너뜨리려는 자신의 계획이 모두 물거품이 될 상황이다.
쁘띠모에 이어 연달아 장지철과 최종혁까지.
TK 엔터가 범죄자 집단이라는 인식을 심어줄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천이상은 침을 꼴딱 삼켰다.
이젠 정유진의 스캔들이 문제가 아니었다.
TK 엔터가 관여하지 않았다는 걸 증명해야 회사가 살아남을 수 있는 상황이다.
“정윤호. 이 자식이······. 감히? 내게 엿을 먹여?”
천이상은 뒤처리를 위해 뛰어가며 정윤호의 이름을 반복해서 뇌까렸다.
앞으로 이 이름이 TK 엔터 앞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거란 생각을 하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