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7화
117. 봄 다음엔 겨울? 6
합성사진.
3년 뒤 양명석이라는 35살의 A급 배우가 겁도 없이 천이상 이사의 애인이던 여배우 이은진에게 집적대다 걸린 일이 있었다.
천이상 이사는 담대하게 용서해주는 척했지만 그로부터 한 달 뒤.
양명석은 다른 여자와 누드로 누워있는 합성사진이 공개되어 버렸다.
어떤 의미로는 이제까지보다 훨씬 더 위험한 수법이다.
눈에 보이는 걸 더 잘 믿는 대중들에게 사진은 녹음 파일 이상의 폭탄이니까.
만약 황색 언론 몇 군데서 가짜 사진을 돌리기 시작하면 상황이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흘러갈 수 있다.
시간을 끌어야 했다.
맞불 작전을 펼치려면 적어도 이틀은 걸릴 테니까.
나는 못 이기는 척 약한 소리를 흘렸다.
“제가 어떻게 하면 여기서 멈춰주시겠습니까?”
천이상 이사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말했잖아. 나한테 오라고. 그러면 여기서 멈추지.
잠깐 침묵의 시간을 가졌다.
곧장 대답하면 의심부터 할 인간이니까.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속으로 열을 센 뒤 답했다.
“생각할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생각 좋지. 난 신중한 사람을 좋아하거든. 그래 얼마나 주면 되겠나?
천이상 이사가 여유를 부리기 시작했다.
모든 언론이 유진이의 열애설을 헤드 타이틀로 올리고 있었기에 내가 두 손을 들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3일만 주십시오.
“길어.”
그럴 줄 알았다.
-그러면 이틀만이라도 주십시오. 저도 정리해야 할 게 있습니다!
천이상 이사의 웃음이 터져 나왔다.
-덮을 게 있나 보지? 그간 해 먹은 거라도 있나?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하지만 덕분에 좋은 핑계를 댈 수 있었다.
“알아서 판단하십시오.”
-하하하. 좋아. 그렇다면 이틀 주지. 이틀 안에 마음 정리 주변 정리 깔끔하게 끝내고 연락해. 그러면 그때 이 일은 다 덮어줄 테니까.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정유진도 데리고 와. 내가 책임지고 이미지 원상회복 시켜줄 테니까. 으하하하.
달칵.
웃음소리와 함께 전화가 그대로 끊겨 버렸다.
순간 곁에 있던 정상봉이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정 대리님. 호 혹시 진짜로 TK로 가실 건 아니죠?”
“내가 집 놔두고 어딜 가? 시간만 끈 거야. 자자. 어서 가자! 오늘 진짜 바쁠 거다.”
“예. 정 대리님.”
그제야 정상봉의 얼굴이 다시 밝아졌다.
천이상과 전화하느라 잠깐 시간이 지체되었다.
하지만 덕분에 ‘폭탄’을 터트릴 시간을 벌 수 있었다.
* * *
초인종을 누르자 김솔잎 작가가 문을 열고 나왔다.
부스스한 머리를 고무줄로 대충 묶고 있는 걸 보면 기사가 뜬 걸 보고 걱정했던 모양이다.
“방금 방송국에서 전화 받았어요. 그런데 그 녹음 파일이 조작이라고요?”
“예. 키스씬을 촬영할 때나 녹음 파일이 녹음된 현장 모두 제가 있었습니다. 유진이는 키스한 적도 최종혁을 좋아한다는 말을 한 적도 없습니다.”
김솔잎 작가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긴 유진 씨가 종혁 씨를 좋아할 리가 없죠. 나도 들은 게 있는데.”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유진이한테 대체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하지만 김솔잎 작가의 질문에 생각이 더 이어지질 못했다.
“아 아뇨. 아무튼 이제 어떻게 하실 건가요?”
“아 그 전에 들어보셔야 할 게 있습니다.”
난 지난번 천이상 이사와의 만남 때 녹음한 파일과 조금 전 통화하며 자동 녹음된 파일을 차례대로 틀었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김솔잎 작가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이 이거······ 협박 같은데? 고소해야 하는 거 아녜요?”
음성 파일 재생을 끄곤 고개를 저었다.
“직접적인 언급이 없으니 법적으로는 힘들 겁니다. 또 고소 정도로는 콧방귀도 안 뀔 인간입니다. 변호사니까요.”
그리고 난 지금 펼치는 작전을 덤덤히 늘어놓았다.
계획을 들은 김솔잎 작가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렇게 되면 최종혁 씨는 제 작품에서 빠지······ 아니 아예 은퇴를 시킬 생각이세요?”
“그 수밖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게 아니면 유진이를 지켜낼 방법이 없으니까요.”
이야기를 듣던 김솔잎 작가는 인상을 찌푸린 채 노트북의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톡톡톡.
화면도 보지 않고 키보드를 두드린 터라 빈 파일에 자음과 모음이 낱낱이 분리되어 적혀가고 있었다.
이렇게 바쁜 와중에 작가부터 찾아온 건 이 사태가 마무리되고 난 후를 위해서였다.
최종혁이 날아가면 대본도 수정해야 할 뿐 아니라 찍어놓은 분량을 날려야 하니까.
“작가님?”
“아. 네. 네.”
정신을 차린 김솔잎 작가가 그제야 타이핑을 멈췄다.
“휴우. 일이 그렇게 되면 나도 힘들게 쓴 대본을 절반이나 덜어내야 하겠죠?”
김솔잎 작가가 퉁명스러운 말투를 내뱉으며 날 흘겨본다.
“죄송합니다. 작가님.”
“아녜요. 이게 뭐 정 대리 탓인가? 괜히 투정 부려본 거니 괘념치 말아요.”
그때였다.
띠디딕!
도어락이 열리더니 이지연 작가가 나타났다.
회색 투피스 정장을 입은 이지연 작가는 하이힐을 아무렇게나 벗어던지고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테이블 앞에 앉은 이지연 작가가 대뜸 날 보고 물었다.
“유노~. 지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이지연 작가와는 <신의 이름으로>에 무당 역할이 새롭게 추가된 이유를 듣기 위해 보자고 약속했었다.
하지만 상황이 우습게 되었다.
유진이가 처한 현재 사정을 설명하자 이지연 작가의 인상이 와락 일그러졌다.
“천이상? 그 족제비 같은 인간이 내 새끼들을 건드려?”
내 새끼?
아 유진이랑 김솔잎 작가를 말하는 거군.
이지연 사단이라는 말이 흔하게 쓰일 정도로 이지연 작가는 한 번 인연을 맺은 배우들을 중심으로 작품을 만든다.
나도 모르는 사이 유진이도 이지연 작가의 인사이드에 들어간 모양이다.
이지연 작가는 씩씩대더니 TK 엔터에 전화를 하겠다고 폰을 꺼내 들었다.
“작가님. 잠시만 참으세요.”
“솔잎! 참으라니? 이대로 있으면 천이상 그 인간 때문에 우리 솔잎이랑 유진이가 여러모로 우습게 되는 아니지! 내 체면이 똥이 되는······.”
“정 대리님에게 계획이 다 있대요. 그런데 지금 TK 엔터에 전화하면 작가님이 다 망치시는 거예요!”
“내가 뭘 망쳐?”
“하여간! 일단 커피나 드시고 진정하세요!”
김솔잎 작가가 내가 타 온 커피를 이지연 작가에게 내밀었다.
이지연 작가가 멈칫거린다.
“근데 이 커피 정 커피야?”
“네.”
“좋아. 일단 들어나 보고 마음에 안 들면 알지?”
이지연 작가는 내가 가져온 커피를 홀짝이며 계획을 들었다.
“강공이네?”
“예. 그러니 비밀 보안 부탁드리겠습니다.”
“오케이. 그리고 내 도움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하고.”
상황이 진정되자 그제야 김솔잎 작가는 내 곁에 있는 정상봉을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이 분은 어디서 많이 뵌 분인 것 같은데······.”
“태권도 금메달리스트 정상봉입니다.”
“아 맞다! 뚝배기 장인! 아 죄 죄송해요. 저 진짜 팬이에요!”
“흠흠. 감사합니다.”
뚝배기 장인.
뒤돌려 차기로 상대 선수의 헤드기어를 벗기며 KO 시킨 정상봉의 별명이었다.
정규방송이 끝나고 애국가가 나올 때마다 정상봉이 발차기로 화끈한 KO를 따내는 장면이 나오니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를 수가 없다.
이지연 작가도 호기심이 동했는지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런데 어떻게 메달리스트가 매니저 일을 다 하신대? 이건 완전 드라마 소재인데?”
“그게 그러니까······”
이지연 작가는 정상봉과 대화에 푹 빠졌고 김솔잎 작가는 테이블에 놓인 커피를 다시 한번 마시며 입맛을 다셨다.
“아~ 오늘따라 커피가 좀 쓰다.”
입술을 핥는 김솔잎 작가의 얼굴에 씁쓸함이 보인다.
“내가 우리 작가님 따라다니면서 연예계에 적응 좀 했다 싶었더니 아직 멀었나 봐요.”
이지연 작가가 피식 웃는다.
“얘가 벌써 나랑 맞먹으려 하네? 그러려면 30% 다섯 개는 찍고 와!”
하지만 타박을 하는 이지연 작가도 뿌듯한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자신의 제자가 입봉 작품으로 20%를 노리는 중이었으니까.
“하여간 정 대리님 뜻대로 하세요. 그것 말고는 해결책이 없겠네요.”
“알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정상봉을 데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현관문을 나서려는데 이지연 작가가 나를 붙잡았다.
“아 참. 정대리. 이번에 대본을 수정하면서 무당 역할을 하나 더 넣었거든. 유진이를 위해서 넣은 거니까 대본 보고 놀라지나 말라고 해.”
김성운 PD가 말했던 또 하나의 무당 역인 ‘만신 월아’가 유진이를 위해 만든 거란다.
이게 무슨 소리지?
무당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 되면 당연히 비중이 떨어지지 않나?
하지만 더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없었다.
오늘 밤은 길고 긴 하루가 될 테니까.
“예. 알겠습니다. 이번 사태 끝나는 대로 대본 확인하고 찾아뵙겠습니다.”
“그래. 이 일이 더 우선이니까 수고하고.”
* * *
끼이익.
청담동 HS 연립 빌라 앞에 차를 멈춰 세웠다.
준비해 온 선물을 챙겨 엘리베이터도 없는 초라한 빌라 4층으로 향했다.
뒤를 따르던 정상봉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정 대리님. 여기는 왜 온 겁니까?”
“너 최지영이라고 알지? 한 3년 전에 꽤 날리던 스타였는데.”
“알죠. 바람 소리 여주인공.”
“그분이 여기 살거든.”
“예? 그런 탑스타가 이런 허름한 건물에 산다고요?”
최지영은 남편인 배우 장지철과 이혼하며 지금은 빈털터리가 된 상태다.
천상 연예인이라 돈 관리도 모르고 연기만 하다 보니 모아둔 재산을 위자료로 모두 날렸다.
이처럼 어릴 때부터 매니저가 모든 일을 처리해 준 스타들은 간단한 계약조차 못 한다.
은행 앱을 사용하는 것마저 어려워하거나 대중교통을 타지 못해 쩔쩔맬 정도니까.
최지영 또한 그런 스타였다.
그 탓에 지금은 모든 걸 잃고 이렇게 쓸쓸하게 연립 빌라에 살며 케이블에서 가끔 들어오는 일을 뛰며 살아가는 중이었고.
“원래 연예인들은 망하면 바닥이 없어. 고시원에 사는 한물간 배우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면 너도 깜짝 놀랄 거다.”
말을 나누는 사이 최지영의 집에 도착했다.
402호 빌라의 초인종을 눌렀다.
띵동.
잠깐의 침묵 뒤에 목소리가 들렸다.
-월세는 다음 달에 한 번에 밀린 것까지 다 모아서 드린다니까요? 저 최지영이에요. 모르세요?
그녀의 맑은 음색이 잔잔히 떨리고 있었다.
잘 찾아왔네.
난 인터폰에다 입을 대고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굴렁쇠 엔터에서 찾아왔습니다. 최지영 배우님.”
-굴렁쇠 엔터?
“예.”
-자 잠깐만 기다려요!
순간 인터폰이 내려갔다.
그리곤 1분이 지났을 때까지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정상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시 벨 눌러 볼까요?”
“느긋하게 기다려. 화장하고 나오실 테니까.”
정확히 10분이 지났을 때였다.
달칵.
문이 열리자 화장을 마친 여배우 최지영이 화사한 이브닝 드레스 차림으로 우릴 맞았다.
“호호호. 어서 오세요. 제가 바빠서 한동안 집에 못 들어오다 보니 좀 어수선해요.”
“예. 배우님. 이해합니다.”
난 태연하게 그녀의 말에 대꾸하고는 집 안으로 향했다.
테이블은 깔끔했지만 방문은 닫혀 있었다.
잡동사니는 전부 저 방 안으로 치운 모양이다.
최지영이 손부채질을 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지만 모른 척하고서 거실에 앉았다.
“음료수라도 내와야 하는데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집을 좀 비워서요.”
배우 자존심에 돈이 없어서 음료수도 없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할까.
나도 적당히 그녀의 장단을 맞췄다.
“괜찮습니다. 저희가 선물 가지고 왔는데 그걸 드시면 되겠네요.”
자리에 앉은 난 준비한 선물부터 내밀었다.
“어머? 반건시네. 이거 내가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아셨어요?”
반만 말린 홍시.
그녀가 그토록 좋아하던 걸 밝힌 것도 회귀 전 그 아침프로에서였다.
오물오물.
반건시를 한입 베어 문 최지영의 얼굴이 환하게 빛이 난다.
“입에 맞으시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상봉아. 그리고 커피도 꺼내야지.”
“아. 예.”
이번에는 정 커피가 아니라 근처 스타벅스에서 사 온 돌체 라떼를 텀블러에 담아 내밀었다.
최지영이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와. 돌체 라떼네. 요즘 이게 잘 나가더라고요. 그쵸?”
“사실 전 비싸서 못 먹어봤습니다. 하하하.”
최지영이 입을 감추며 웃는다.
자기도 못 마셔봤다고 말할 뻔한 걸 감추려고 한 거 같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절 찾아오셨나요?”
최지영이 약간은 기대 어린 표정으로 묻는다.
하지만 내가 이야기를 꺼낸 순간 최지영의 목소리가 까칠하게 변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