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4화
114. 봄 다음엔 겨울? 3
토요일 SBC의 인기 예능 <말해봅시다>의 스튜디오에 <파란 하늘>의 모든 출연진이 모였다.
<말해봅시다>는 일반적으로는 듣지 못하는 촬영 현장의 뒷사정에 관한 이야기들을 털어놓는 토크쇼로 평균 시청률이 무려 17%에 달하는 인기 방송이다.
“윤호야. 오늘 신경 좀 쓰자. 자칫하면 돌발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겠다.”
대본을 살피던 오덕구 팀장이 인상을 찌푸렸다.
언제나 그렇듯 예능 대본은 시청률을 끌어올리기 위한 자극적인 질문들로 가득 차 있다.
여배우들에게 성형에 대한 질문하는 것 정도는 기본이고 배우들 간의 러브 라인을 만들려는 수작까지.
“질문 수위가 좀 높은데요?”
“그러니까. 아무래도 PD를 만나서 이야기를 좀 더 해 봐야겠는데.”
드라마보다 더 시청률에 목숨을 거는 곳이 예능국이라 현장에서 대본이 바뀌는 경우는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대본대로 방송을 찍었다간 유진이와 최종혁의 열애설이 다시금 불이 붙을 수 있었다.
오덕구 팀장이 EFP 카메라 옆에 앉아 큐시트를 체크하던 PD에게 찾아가 고충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런데 최윤철 PD가 귀찮은 듯 인상을 쓰더니 손만 휘휘 저었다.
되돌아온 오덕구 팀장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일단 알았다고 하긴 하는데 반응이 영 심상치 않네. 그렇다고 독단적으로 유진이를 빼긴 곤란하고.”
“일단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결정하시죠.”
“그래.”
그때 최윤철 PD가 촬영 시작을 알렸다.
“자! 메이크업팀 내려가고 조명 스탠바이 되면 바로 갑시다.”
무대에 있던 메이크업 팀들이 모두 내려가자 큐 사인이 떨어졌다.
MC 장인홍이 출연진 중 가장 고참인 이사랑에게 첫 번째 질문을 시작했다.
<파란 하늘>의 상승세가 놀랍다는 것을 서두로 복고풍 패션의 붐이 분다는 이야기들이 나왔다.
이사랑을 비롯해 그 시절을 살았던 배우들의 소회가 연달아 이어졌다.
왁자지껄한 그때 그 시절의 에피소드에 현장 분위기가 들뜨기 시작했다.
그런데 유진이 차례가 된 순간 MC 장인홍이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을 던져왔다.
“정유진 씨. 혹시 코 한번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저 성형 안 했어요. 보실래요?”
유진이가 해맑은 표정으로 코를 잡고 양옆으로 흔들었다.
위로는 들지 마.
옳지 잘했어.
혹시나 굴욕 사진이라도 찍힐까 봐 조마조마하다.
“그 콧날이 진짜 자연산이었다니 놀랍네요. 여기 각도기 좀 가져와 봐요. 한번 재 봅시다.”
스태프들이 진짜 각도기를 들고 와 유진이의 콧대 각도를 잰다.
오버가 넘쳐나는 현장이다.
이어 곁에 있던 SBC 기상 캐스터 출신의 MC 이지영이 물었다.
“유진 씨. 혹시 여기 계신 분 중에 좋아하시는 분이 있으신가요? 재미있는 소문이 돌던데요?”
출연진들이 술렁대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니라고 단답형으로 대답할 줄 알았던 유진이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동시에 유진이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유진이가 즉답을 못 하자 이지영 MC가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어머 어머! 좋아하시는 분이 있어요? 잠깐. 꺄악! 설마 그러면 혹시 최종······.”
하지만 이지영 MC의 말도 끝나기 전 유진이가 조금 전과는 달리 빠르게 답했다.
“아뇨! 최종혁 선배는 제 취향 아니거든요?”
발끈한 유진이가 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했어.
뒤늦게라도 말했으면 된 거야.
하지만 이지영 MC가 묘한 표정으로 상황을 꼬기 시작했다.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던데. 종혁 씨랑은 저번에도 링크가 뜨지 않았나요?”
MC들은 오히려 그칠 기미가 없었다.
“그렇지.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는 법이 있나요? 연기도 탈 거리가 있어야 나니까.”
장인홍 MC가 최종혁을 바라보며 동의를 구했다.
최종혁이 장난스레 웃음을 지었다.
“전 노코멘트 하겠습니다.”
SBC <말해봅시다>의 녹화 현장은 갑작스러운 러브 라인으로 후끈 달아올랐다.
가슴속에서 욱하는 감정이 치솟아 오른다.
반면에 최윤철 PD의 웃음이 짙어지고 있었다.
‘한번 해 보자는 거지?’
스크립터와의 사전 인터뷰에서 민감한 질문은 일절 배제해달라고 이야기를 전했고 현장에서도 PD를 찾아가 부탁까지 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러브 라인을 만드는 건 우리 굴렁쇠 엔터를 호구로 봤다는 거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냥 있을 수 없다.
난 곁에 있는 오덕구 팀장의 팔을 살짝 잡아끌었다.
“팀장님. 윗선에 알려야 할 것 같습니다.”
오덕구 팀장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이거 아무래도 실장님이 오시는 게 낫겠다. 난 전화 좀 하고 올 테니까 잘 지켜보고 있어.”
오덕구 팀장은 구성철 실장을 당장 부르겠다며 스튜디오 밖으로 나섰다.
그사이 장인홍 MC와 이지영 MC의 ‘유진이 러브 라인 분량 뽑기’에 관한 질문이 계속 이어졌다.
“지영 씨. 그러다 유진 씨 팬들이 게시판에 몰려와서 진행자 바꾸라고 난리라도 치면 어쩌려고 이래?”
“에이~. 젊은 미혼 남녀가 사귈 수도 있죠. 연예인들은 어디 사람 아닌가요? 안 그래요?”
보자 보자 하니까 이것들이 선을 아주 자유자재로 넘네.
그나저나 언제 두 사람이 사귀는 단계로 넘어간 건데?
이어지는 날조와 선동에 유진이가 답답한 듯 가슴을 친다.
“아니에요. 진짜. 저희는 그냥 동료일 뿐이라고요. 최 선배! 빨리 아니라고 말해요!”
“내가 뭘?”
“와! 진짜 너무 하신다! 왜 모른 척하는 건데요?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하면 되잖아요!”
유진이의 타박이 이어지자 최종혁이 능청맞은 얼굴로 한 걸음 물러섰다.
“예. 여기 유진 씨 말이 맞습니다. 저흰 그냥 동료입니다. 친한 동료죠.”
“호호. 일단은 그 정도로 알고 있을게요.”
난 다시 해명하려는 유진이를 보며 손으로 X자를 그렸다.
더는 말려들지 말라고.
흥분해서 폭발하기 일보 직전의 유진이가 내 손짓을 확인하고 정신을 차렸다.
‘진정해!’
유진이가 울분을 억누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겨우 한고비를 넘겼나 싶을 때였다.
뭔가 상황이 심상치 않은 걸 눈치챈 주영인과 박진희가 이지영 MC의 발언에 기름을 부었다.
“유진 씨랑 최종혁 선배가 케미가 좋은 건 사실이니까.”
“그쵸? 두 사람을 보면 질투 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라니까요?”
주영인과 박진희가 주거니 받거니 하며 현장에서 있었던 일을 교묘하게 비꼰다.
그 덕에 최윤철 PD의 얼굴이 더욱 환히 밝아졌다.
동시에 큐 카드를 빙빙 돌렸다.
갈 때까지 가 보자는 거다.
예능 PD면 시청률에 목을 매는 게 당연한 일이지만 정작 당하는 배우는 어떻게 하라고.
PD를 현장에서 들이 받아버릴까 고민하던 때였다.
급히 연락을 마치고 온 오덕구 팀장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됐다. 실장님이랑 본부장님도 근처라서 직접 오신댄다. 두 분 완전히 뚜껑 열렸어.”
“잘됐네요.”
“그래도 편집본 나오기 전까지는 안심 못 하니까 이따가 쉬는 타임에 PD한테 또 가 볼게.”
“예. 팀장님.”
* * *
얼마 지나지 않아 강지영 본부장이 현장으로 들어왔다.
열이 잔뜩 받은 그녀는 구성철 실장과 함께 또 한 사람을 대동하고 있었다.
SBC 드라마국의 차기 국장이자 현 <파란 하늘>의 CP인 정삼룡과 함께.
“야! 최 PD!”
갑작스러운 정삼룡 CP의 외침에 최윤철 PD가 벌컥 화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누구야! 촬영하는데?”
씩씩대며 몸을 돌린 최윤철 PD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8년 선배에 차기 드라마국장으로 내정된 정삼룡 CP가 외친 소리란 걸 알았으니까.
“아 CP님. 촬영하는데 소리치시면 어떻게 합니까? 오디오 다 물렸네.”
정삼룡 CP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혀를 찼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뭐하긴요? 촬영하잖습니까?”
“왜 대본에도 없는 러브 라인을 만드냐고! 그러다 스캔들 터지면 책임질 거야?”
배우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최윤철 PD도 이대로는 촬영이 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손을 휘저었다.
“잠깐 쉬고 갑시다.”
배우들이 휴식을 위해 스튜디오에서 빠져나왔다.
최윤철 PD가 인상을 찌푸리고 정삼룡 CP에게 덤볐다.
“정 CP님. 아무리 선배님이라도 예능국 일에 참견하시는 건 월권 아닙니까?”
“월권? 이게 예능국 드라마국 따질 일이야?”
한바탕 실랑이가 벌어졌다.
예능국과 드라마국이 힘 싸움을 시작하자 AD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순간 주조정실에 있던 <말해봅시다>의 이영근 CP가 내려왔다.
하지만 작심하고 내려온 정삼룡 CP를 말릴 수는 없었다.
“영근이 넌 빠져라. 내려오기 전에 최 이사님에게 오더 받고 온 거니까. 촬영 끝나면 가편집본 제일 먼저 이사님 책상에 올려놓으라고 하시더라.”
MBS 최운식 이사는 예능국 출신에 김갑수 대표의 오른팔이다.
그가 직접 정유진의 러브 라인 배제 지시를 내렸다는 건 대표 선에서 지시가 있었다는 소리다.
이영근 CP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 PD. 시키는 대로 해. 지금까지 찍은 건 편집하고.”
“알았습······니다.”
들릴 듯 말 듯 궁시렁대며 돌아간 최윤철 PD가 스태프들에게 몇 가지를 지시하기 시작했다.
으르렁대는 분위기가 끝나자 강지영 본부장이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당분간 유진 씨에 관한 문제가 터지면 저한테 바로 연락 주세요.”
천이상 이사가 나와 유진이를 노린다는 걸 알고 있기에 강지영 본부장도 두 팔을 걷어붙인 상태다.
강지영 본부장은 짤막한 인사 뒤 정삼룡 CP를 따라나섰다.
오늘 또 이사진들과 대작해줘야 한다며 투덜대며 말이다.
그 사이 유진이가 대기 의자로 돌아와 엄지를 들어 올렸다.
“응? 웬 엄지?”
“든든해서요.”
하긴 배우가 곤란을 겪는다고 본부장까지 뛰어와 현장을 뒤집어엎는 경우는 거의 없지.
토크쇼 첫 출연부터 호된 신고식을 한 유진이가 혀를 내둘렀다.
“그런데 대본에 없는 질문이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어요. 얼마나 진땀을 흘렸는지······. 원래 이런 거예요?”
“그만큼이나 네가 인기가 많다는 거지. 그래도 긴장 안 하고 잘했어.”
아직 촬영이 남았기에 최대한 잘했다는 말로 멘탈을 진정시켰다.
“근데 유진아.”
커피를 마시던 유진이가 고개를 돌렸다.
“네?”
“아까 질문에 왜 말문이 막혔어? 바로 아니라고 했어야지?”
“콜록.”
눈을 동그랗게 뜨던 유진이가 갑작스레 사레가 걸려 버렸다.
“그 그게요. 켁.”
마시던 커피가 목에 걸려 괴로워하는 바람에 손수건을 건네며 등을 토닥거렸다.
“괜찮아?”
유진이가 눈물이 글썽대며 고개를 끄덕인다.
덕분에 아까 왜 그랬는지 더는 물을 수가 없었다.
* * *
TK 엔터의 천이상 이사는 걸려온 전화를 받고 인상을 찌푸렸다.
-형님. 제 사정도 좀 봐 주세요. 방금 윗선에서 내려와서 발칵 뒤집어엎고 갔어요. 잘나가는 드라마에 초를 친다고.
정유진과 최종혁의 스캔들을 만들려던 천이상의 계획이 시작도 못한 채 물거품으로 돌아갈 판이다.
“설마 촬영도 못 했어?”
-아뇨. 처음부터 좀 진하게 나갔죠. 그런데 편집에서 다 덜어내라고 윗선에서 지시가 내려오는 바람에 다 텄어요.
“잠깐. 그럼 그 촬영분이라도 나한테 좀 넘길 수 있을까?”
-아 그걸 어떻게 줍니까? 형님도 참······.
“윤철아. 내 실력 모르냐? 방송국 3번 편집실에 테이프만 가져다 놔. 우리 쪽에서 알아서 챙겨갈게.”
-······.
잠시 정적이 흘렀다.
위험을 뒤집어쓰는 만큼 보상도 크게 해 주는 게 천이상의 스타일이라는 것을 잘 아는 탓이다.
-어디 보자. 3번 편집실이 밤 10시 정도면 빌 것 같은데······.
“알았어. 넌 그때 맞춰서 잠깐만 자리를 비워. 뒤는 내가 알아서 잘 처리할 테니까.”
천이상이 직접 사람을 써 편집본을 빼돌리겠다고 하자 그제야 최윤철은 알겠다고 답했다.
-하여간 전 모르는 일입니다?
“그래. 그래. 제수씨한테는 오늘 밤 아파트 지하주차장 A4번으로 내려오라고 하고.”
일에 대한 대가로 현금을 주겠다는 말에 최윤철 PD는 시시덕거리며 전화를 끊었다.
천이상은 다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어. 난데 일 하나 해줘야겠다. 요즘도 일하지?”
-예. 이사님.
“그래. SBC 3번 편집실 10시. 파일 통째로 카피하고 다시 연락 줘.”
전화를 끊은 천이상 이사가 음험한 미소를 지었다.
“정 대리. 내가 말했지? 후회하게 될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