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3화
113. 봄 다음엔 겨울? 2
<신의 이름으로>는 형사과의 에이스였다가 상사의 비리를 들춘 대가로 생활 안전 경찰로 좌천된 젊은 열혈 경찰과 천재적인 두뇌의 신참 여검사가 힘을 합쳐 귀신이 들린 범죄자들을 잡는 이야기다.
유진이가 맡을 젊은 무당역인 ‘청명’은 두 주인공을 도와주는 핵심적인 조연이고.
귀신 들린 범죄자를 처리하는 스토리라 유진이가 맡을 ‘청명’ 역이 이야기의 중요한 축을 맡는다.
입꼬리가 실룩대기 시작했다.
시청률 귀신이라 불리게 되는 김성운 PD에다 흥행 보장 수표인 이지연 작가의 대본 여기에 유진이를 더하면?
그야말로 드림팀의 탄생이다.
“축하드립니다!”
“축하는요. 좀 쉴까 했더니 회사에서 나 쉬는 꼴을 못 보겠다고 일을 떠넘긴 건데.”
“에이 이번 작품 잘하셨으니까 맡기신 거겠죠. 높으신 분들이라고 김 PD의 실력을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김성운 PD가 피식하고 웃음을 흘렸다.
“뭐 그런 거면 좋겠네요. 원래는 MBS 특집 명성왕후 2021에 차기 PD가 될 기미가 있어서 정 대리를 보자고 한 거였는데 이거 상황이 이상하게 변했네요.”
순간 먹고 있던 해물파전의 오징어 빨판이 목구멍에 턱 하고 달라붙는 것 같았다.
동시에 막걸리의 취기가 날아가고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하마터면 투자자와 작가에게 큰 문제가 있어 폭망하는 희대의 망작인 <명성왕후 2021>의 제안을 받을 뻔하다니.
“며 명성왕후 2021이요?”
“예 제가 ‘신의 이름으로’를 하겠다고 결정을 내렸으니 이제 그 작품은 다른 PD님이 맡을걸요.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요?”
“아 오징어가 목에 걸려서요.”
PD의 작품 출연 제안을 거절하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어진 터라 목에 걸렸던 해물파전의 오징어가 스르륵 목구멍을 내려갔다.
“아 그런데 여기 오면서 수정 대본을 봤는데요. 유진 씨가 맡기로 한 청명이라는 무당 말고 무당 역할이 한 명 더 늘었더라고요. 만신 월아라고. 수정본 보셨어요?”
또 다른 무당이라고?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분명 유진이를 주연 이상으로 주목받는 조연으로 만들어 준다고 약속을 받았는데?
‘무당’이라는 독특한 아이덴티티를 가진 캐릭터가 둘이 되면 배역 지분이 줄어들 수도 있다.
“전 처음··· 듣는 말인데요.”
“이거 내가 말실수를 했네. 방금은 못들은 걸로 합시다.”
김성운 PD가 입을 닫아 버렸다.
궁금했지만 묻는다고 말해줄 것 같지가 않았다.
아무래도 최대한 빨리 이지연 작가의 대본부터 봐야 할 것 같았다.
술이 몇 잔 더 돌고 나자 김성운 PD는 술이 거나하게 취해 <밤하늘의 달빛 내림>의 시청률이 더 떨어질 거란 예상을 해댔다.
“시청률 엄청······ 떨어질 겁니다. 정 대리. 흐흐흐. 그거 드라마로 바꾸는데 죽는 줄 알았거든요. 소설을 드라마로 그대로 바꾸면 엄청 재미없을걸요? 으흐흐.”
김성운 PD의 얼굴에 웃음이 짙어졌다.
아무래도 최성은 작가가 엄청난 갑질을 한 모양이다.
자기가 맡았던 드라마가 망하라고 고사를 지내는 걸 보면.
덕분에 난 약간의 부담감을 벗어던지고 말할 수가 있었다.
“김 PD님이 손 뗐으니까 이제 시청률 쭉쭉 빠지겠네요.”
“그쵸? 역시 우리 정 대리님. 보는 눈이 있다니까?”
김성운 PD가 키득대며 술을 건넨다.
아무래도 오늘도 맨정신으로 집에 가긴 글렀나보다.
그렇게 다사다난한 매니저의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 * *
김성운 PD의 예상이 맞았다.
김성운 PD가 연출하지 않은 <밤하늘의 달빛 내림>가 방송을 타자 실망한 시청자들이 대거 이탈해 버렸다.
덕분에 <파란 하늘>의 시청률이 수직으로 상승하기 시작했다.
11화에서 15.9%.
그리고 12화에 이르러서는 16.9%의 시청률을 달성했다.
덕분에 배우 2실의 분위기는 마치 축제 전야를 연상케 할 정도로 들뜬 상태였다.
이러다 20%를 넘기는 거 아니냐면서.
덕분에 유진이에게 CF 제의가 물밀 듯이 들어오고 있었다.
“정 대리. 스포츠 메이커 로코스에서 골프채 광고를 찍자고 직접 찾아왔는데?”
“거기 광고주 아들이 미친개랍니다. 모델들에게 접대 요구를 하는 거로도 유명하고요.”
“오케이. 접수. 내가 잘 다독여서 돌려보낼게.”
강감찬 대표가 떠나기 전.
유진이에 관한 모든 결정은 내 의견을 최대한 반영하라고 지시한 덕에 어떤 광고를 맡을지는 내가 최종 조율을 하는 상황이다.
덕분에 회귀 전 기억과 다이어리의 정보는 유용하게 써먹고 있다.
그때 구성철 실장이 자신이 개인적으로 물어온 광고가 하나 있다고 말했다.
“윤호야. 코카리스웨트 여름 광고는 어때? 거기 홍보실장이 내 친구인데 꼭 좀 성사시켜달라고 신신당부를 하더라.”
“코카리스웨트요?”
코카리스웨트 여름 광고는 한해를 통틀어 가장 핫한 여성 스타만을 모델을 쓰는 거로 유명했다.
광고비 자체는 높지 않지만 노출도가 워낙 높다 보니 욕심을 내는 사람은 그야말로 부지기수.
원래대로라면 올여름 코카리스웨트 광고를 주영인이 맡았었지 아마?
“잠시만요. 실장님.”
난 기사를 찾는 척하고 다이어리를 살폈다.
[에브리데이 V10]
[날짜 : 2020년 5월 29일]
-PM 08:00 주영인. 코카리스웨트 CF 미팅. (강남역 한울 한정식).
여전히 주영인이 맡았던 계약 사전 미팅 일정이 그대로 다이어리에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 쪽에서 받지 않는다면 주영인에게 돌아가는 걸까?
같은 회사라면 한 번쯤 고민했겠지만 이제 에이스 엔터로 간 그녀에게 미련은 없었다.
다이어리를 덮은 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코카리스웨트라면 유진이도 좋아할 겁니다.”
“오케이. 그런데 여름 광고라서 수영복은 필수인데. 유진이 노출은 어때? 괜찮겠어?”
“희대의 발명품. 래시가드가 있지 않습니까?”
유진이는 미소가 볼 수 있으니 노출이 심한 광고나 작품은 피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래시가드라면 노출도 큰 문제가 없다.
“오케이. 그럼 진행하도록 하지.”
구성철 실장의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아. 그리고 한 가지 조건을 붙일 수 있을까요?”
“조건?”
“글로벌 광고 전환 시에는 계약금 협상을 다시 하는 조항을 하나 넣으시죠.”
이번 코카리스웨트 여름 광고는 한국에서 만들어진 광고지만 뛰어난 퀄리티로 화제가 되면서 글로벌 광고로 전환되었으니까.
[에브리데이 V10]
[날짜 : 2020년 12월 25일]
-PM 07:00 코카리스웨트 광고 일본 중국 동남아시아 글로벌 광고 통보.
구성철 실장이 흐뭇한 표정으로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혹시 뭐 들은 거라도 있어?”
“네. 믿을 만한 정보가 있거든요.”
구성철 실장은 들뜬 표정으로 코카리스웨트 사의 홍보실장과 통화를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5월 29일 자 일정이 사라지고 있었다.
주영인의 코카리스웨트 광고가 유진이의 것이 되었다.
더불어 올 한해의 최고 핫한 여배우가 유진이로 바뀌는 순간이다.
* * *
차기작 대본 문제로 이지연 작가와 만날 약속을 잡았다.
-그럼 김 작가네 집에서 내일 봐. 커피 4리터만 타 오고. 자기 커피가 없으면 이제 작업이 안 되더라.
“그럴 게 아니라 아예 일주일에 4병씩 작업실로 보내드리겠습니다.”
-호호. 그럼 고맙고.
이지연 작가와 전화를 끊은 순간 갑자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예. 굴렁쇠 엔터 배우 2실 정윤호 대립니다.”
-나 TK 엔터의 천이상이라고 합니다.
회귀 전.
탑 엔터테인먼트의 배우들을 뒤로 빼돌리고 내 약점을 공격해대며 나와 가장 치열하게 다퉜던 사람 중 한 명이다.
“무슨 일로 전화하셨습니까?”
-전화로 말하기는 좀 그렇고. 굴렁쇠 인근에 돌무덤이라는 카페가 있는데. 거기서 만나서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예전 같으면 일단은 피했을 상대.
하지만 이번에는 무슨 생각으로 만나자고 한 건지 알고 싶었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 했으니까.
“십분 뒤에 뵙죠.”
-기다리겠습니다.
급하게 밀린 업무를 처리하고 회사 밖으로 나왔다.
2분 거리에 떨어진 카페 ‘돌무덤’으로 가자 아르마니 스트라이프 정장을 입은 샤프한 중년 남자가 에스프레소 콤파냐를 마시며 날 기다리고 있었다.
포마드 머리에 금색 안경테를 쓴 모습은 연예계 인사라기보다는 금융 쪽 사람처럼 보였다.
“여깁니다.”
천이상 이사가 손을 들었다.
맞은편에 앉아 명함을 주고받으며 인사를 나눴다.
“그런데 왜 절 보자고 하셨습니까? 쁘띠모의 일을 사과하려고 오신 건 아닌 거 같은데요?”
천이상 이사가 씨익 하고 웃는다.
“우리 마동팔 본부장이 곤란해하던 이유를 알겠네요. 초면에 이렇게 거침이 없으시다니. 그건 테디 킴의 개인적인 일탈이라는 거 못 들으셨습니까?”
“믿을 수가 없어서요.”
“허허. 그렇게 의심이 많으면 세상 힘들어서 못 삽니다.”
커피잔을 만지작대는 그의 얼굴에 웃음이 짙어졌다.
“돌려서 말하는 건 체질이 아니니까 바로 이야기하죠. 정 대리를 우리 회사로 영입하려 찾아왔습니다.”
영입?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다.
“저와 같이 일하고 싶으시다고요? 죽여도 속이 시원하지 않을 것 같으신 게 아니고요?”
“허허. 원래 일이라는 게 하다 보면 싸우기도 하고 화해하기도 하고 그런 거 아닙니까.”
회귀 전 그와 여러 번을 다퉜지만 절대 화해로 끝난 적이 없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날 자기 뜻대로 흔들 수 있는 어린 상대로 보는 게 확실했다.
천이상 이사가 맛있는 먹잇감을 바라보듯 눈을 번뜩였다.
“정 대리가 우리 회사로 오면 지금 당장 팀장직을 드리겠습니다. 연봉은 실장급으로 맞춰 드리고 상여금은 별도로 추가해 드리겠습니다. 그간의 정 대리의 실적을 인정한 결과입니다. 어떻습니까? 이쪽 조건이?”
TK 엔터의 실장급 연봉이면 약 8천만 원.
거기에 상여금도 더한다면 1억 이상을 받게 될 게 틀림없다.
현재 대리로 승진한 내가 받는 연봉은 약 3천 7백만 원이니 현재의 두 배도 넘는다.
하지만.
TK 엔터 같은 조폭 회사로 옮길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조건은 나쁘지 않습니다만 마동팔 본부장이나 박은빈 씨랑 잘 지낼 자신이 없네요.”
내 거절에 천이상 이사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이봐요 정 대리. 원래 회사라는 곳이 꼴 보기 싫은 상사와 밉살스러운 후임들을 참아가면서 일하는 곳 아닙니까? 돈을 벌기 위해서 성공하기 위해서. 나는 우리 정 대리가 그런 기본을 모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모르진 않습니다. 제게는 조건보다는 구성원이 누구냐가 더 중요할 뿐입니다. 그 정도 기본은 아실 텐데요?”
천이상이 말을 살짝 비틀어 대꾸하자 얼굴이 험악하게 변했다.
“젊은 친구. 다시 생각해. 후회하기 싫으면.”
나지막한 목소리로 경고하는 그의 얼굴 위로 얼음보다 차가운 냉기가 흐르고 있었다.
결국 이런 식이다.
회유 다음에는 협박.
변호사인 그는 도덕군자 같은 헛헛한 웃음을 흘리고 다니며 어지간해선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본질은 김태권과는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이다.
전국구 조폭이었던 김태권과 어울릴 수 있었던 건 쿵짝이 맞으니까 가능한 거다.
나는 녹음하고 있던 폰을 꺼내놓았다.
“지금 협박하시는 겁니까?”
폰을 힐끗 보던 천이상 이사가 피식하고 웃는다.
“이 친구가 생각보다 귀여운 데가 있군. 어이. 정 대리. 너 내가 변호사인 거 몰라?”
“압니다.”
“그런데 녹음이라. 당사자끼리의 녹음이 문제없다고 해도 이렇게 하면 문제 생기는 거 알지?”
순간 천이상 이사가 곁을 지나가는 아르바이트생에게 말을 걸었다.
날 향하던 차가운 목소리와는 달리 부드러운 어투로.
“저기요 학생. 제가 몰라서 그러는데 여기 추천할만한 디저트나 샌드위치가 있습니까?”
천이상 이사의 다정한 말에 아르바이트생이 친절히 답했다.
“아. 저희 가게 샌드위치 괜찮아요. 하나 가져다드릴까요?”
“그러면 여기 두 개 주시고. 맞다. 여기 카드 드릴 테니까 가게 알바생들도 전부 다 같이 샌드위치 하나씩 결제해서 드세요. 제가 낼게요.”
천이상 이사가 블랙 카드를 내밀었다.
웃으며 주문을 받던 아르바이트생이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요. 손님.”
“하하. 열심히 일하는 게 보기 좋아서 그래요. 팁이라고 생각하세요. 자요. 어서.”
카드를 건네주자 아르바이트생이 어쩔 줄을 몰라 하다 고개를 꾸벅하고 숙였다.
“가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아르바이트생이 카드를 들고 데스크로 향했다.
잠시 후 가게에 있던 아르바이트생 세 명이 다 같이 조로로 다가와 감사 인사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잘 먹을 게요.”
“하하. 다들 열심히 사는 게 보기 좋네요. 힘내요!”
천이상 이사가 능청맞게 두 손을 쥐며 파이팅을 외친다.
이 상황을 이렇게 넘어갈 줄은 몰랐다.
대화에 녹음된 사람의 목소리는 나와 천이상 이사를 제외하고 이제 세 명.
당사자끼리의 녹음에 제삼자의 목소리가 녹음된 순간 함부로 증거로 사용할 수 없는 걸 알고서 한 짓이다.
천이상 이사는 아르마니 양복을 여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 대리. 우리 회사로 들어오라는 제안. 잘 생각해 봐. 내일까지 답이 없다면 반드시 눈물 흘릴 일이 있을 거라는 사실은 알아두고.”
날 쳐다보는 천이상 이사의 표정은 다시금 냉혹하게 변해 있었다.
말을 마친 천이상 이사는 샌드위치도 놓아두고 나가버렸다.
딸랑~.
카페 돌무덤의 입구 벨이 날카롭게 울렸다.
분명 따사로운 봄날인데 차가운 바람이 느껴지고 있었다.
“내일까지라······. 대체 뭘 하려는 거야? 천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