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2화
112. 봄 다음엔 겨울? 1
4월 30일.
체리블라썸의 이번 앨범을 성공시킨 공로를 높이 사 가수 2실 직원들 모두에게 특별 상여금이 나왔다.
물론 나 역시 상여금 지급대상으로 선정됐고.
그런데 생각보다 금액이 꽤 크게 들어왔다.
[상여금 입금 : 30000000원]
[정윤호 님의 계좌 총 잔액 : 57382320원]
“뭐야? 동그라미가 하나 둘 셋······.”
단숨에 통장의 잔고가 2배 이상 늘었다.
그런데 세후 3천만 원이라는 거액에 나는 결국 전화를 들었다.
앞선 몇 번의 상여금보다 몇 배는 많은 금액이었으니까.
“본부장님. 금액이 좀 과하게 들어온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세금도 제하지 않으셨는데요?”
-아뇨. 제대로 입금된 것 맞아요. 세금도 선 처리하라고 대표님이 따로 지시하셨어요.
강지영 본부장은 모든 게 강감찬 대표의 지시였다고 한다.
매니저를 하다 보면 뒷돈을 먹이거나 술을 마시거나 불법과 편법을 오가는 일을 하게 될 때가 있다.
편법 정도야 법인 카드로 처리하거나 업무 추진비로 경비 처리를 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선이 애매할 때라는 거다.
보통 그때는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현금을 사용하곤 했었다.
강감찬 대표는 그때 쓰라며 체리블라썸을 프로듀싱하고 성공시켰다는 명목으로 넉넉한 상여금을 주라고 했단다.
-그리고 앞으로도 성과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법인 카드로 쓸 수 없는 일이 있어도 아끼지 말고 쓰세요. 부족하시면 제게 따로 연락하고.
아주 팍팍 밀어줄 분위기다.
순간 이제야 라인을 탔다는 실감이 들었다.
“감사합니다. 본부장님.”
-어쨌거나 이번 체리블라썸이 1위를 한 건 모두가 정 대리 덕분이에요. 아 그리고 아빠가 장하다고 전하라고 하셨어요.
강지영 본부장의 연이은 칭찬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동시에 가슴 한편이 뿌듯해졌다.
“그보다 대표님 상태는 어떠십니까? 혹시 전화 드려도 되나요?”
-벌써 출국하셨어요.
강감찬 대표는 미국 쪽 최고의 뇌 전문의에게 수술을 받기 위해 지금 태평양을 날아가고 있었다.
“그럼 수술 잘 되기를 빌겠습니다.”
-고마워요. 정 대리.
전화를 끊고 나니 이미 밤 10시가 다 되었다.
퇴근을 위해 사무실에 있는 짐을 정리하며 생각을 가다듬었다.
강감찬 대표라는 큰 방파제가 사라졌으니 이젠 서울예술종합대학 쪽 인사들이 더욱 거세게 몰아치게 될 테니까.
그런데 10분도 지나기 전.
배우 3실의 주호성 팀장이 2실로 찾아왔다.
스포츠머리에 후드 티셔츠를 입고 나타난 주호성 팀장은 특유의 선한 웃음으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살갑게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아이고! 밤늦게 수고들 많으십니다.”
주호성 팀장은 야근하는 직원들에게 마카롱 세트와 1리터 커피를 돌렸다.
“잘 먹겠습니다.”
“어머! 치즈 마카롱이네? 주 팀장님. 센스 짱이시다!”
야근에 지친 사람들은 달콤한 간식이 반가운지 주호성 팀장을 열렬히 환영했다.
“하하하. 뭐 이런 걸 가지고 그래? 다음에도 자주 사 올 테니까 앞으로 나 좀 잘 봐줘.”
주호성의 착하게 생긴 얼굴 아래에 악마 같은 심성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오직 나 하나뿐이다.
소시오패스.
두 얼굴의 사나이.
그런 주호성의 회귀 전 별명은 ‘만사호통’이었다.
호통을 친다는 호통이 아니라 모든 일이 호성이를 통하면 술술 풀린다는 뜻의 호통.
그만큼 일도 처세에도 유능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주호성 팀장은 한 명씩 인사를 나눈 뒤 내 자리로 찾아왔다.
주호성 팀장이 생글대는 표정을 지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정 대리가 배우 2실 에이스라면서? 우리 실장님이 정 대리한테는 배울 게 많을 거라 하시던데. 인사나 하지. 저번에 대표이사실에선 제대로 인사도 못 했지 우리?”
난 꾹 참으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에이스는 무슨요. 저야말로 앞으로 많은 지도편달 부탁드리겠습니다. 주 팀장님.”
주호성 팀장이 씨익 웃는다.
“직급은 내가 높지만 여기서야 정 대리가 선밴데 뭘. 아무튼 앞으로 잘 지내보자고.”
나와 악수를 한 주호성 팀장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우리 구 실장님은 어디 계실~까아~. 아 저기가 실장실인가?”
여기가 제집인가.
마냥 흥얼대긴.
주호성 팀장이 실장실로 들어간 뒤 이내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는 모르지만 확실히 저 인간은 경계 대상 1호다.
사람들과 쉽게 날을 세우는 김동수와 달리 금세 호감을 얻어내고 친해지는 인간이라 어떤 의미로는 훨씬 더 까다로운 상대였으니까.
회귀 전 업계 1위의 탑 엔터테인먼트의 부사장 자리를 두고 끝없이 경쟁했던 상대이기도 하고.
블라인드가 내려진 실장실을 보며 난 속으로 되뇌었다.
‘내가 있는 이상 호락호락하진 않을 거야. 주호성.’
주호성 팀장의 본 모습을 만천하에 드러낼 생각을 하자 심장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 * *
MBS의 <밤하늘의 달빛 내림>의 원작자인 최성은 작가는 현재 드라마국을 발칵 뒤집어엎는 중이다.
한국 최고의 로펌인 KJ 로펌의 이문영 변호사까지 함께 데리고 와서.
“됐어! 아랫사람들과는 더 할 말 없으니까 빨리 CP 불러오라니까?”
“작가님! 말이 심하십니다!”
“뭐가 심해! 진짜 심한 게 어떤 건지 내가 오늘 한 번 보여줘?”
최성은 작가는 연출자인 김성운 PD를 갈아달라는 요구를 하고 있었다.
급히 달려온 김명학 CP가 최성은 작가를 달래기 시작했다.
“최 작가. 또 뭐가 불만이야? 드라마는 한창 잘 되고 있잖아!”
“잘 돼요? 내 작품이 경쟁작에 밀리고 있는데 뭐가 잘 돼요!”
“드라마 일을 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어. 이러다 또 금방 뒤집고 역전도 하고 그러는 거야.”
최성은 작가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소설이든 드라마든 1등이 아니면 안 한다고 했던 내 말 기억나세요? 이대로 김 PD님한테 연출을 맡겨두면 더 벌어질 게 틀림없다니까요!”
수목 드라마 1위를 유지하던 <밤하늘의 달빛 내림>은 10화에 이르러 0.2%의 차이로 2위로 떨어진 상태였다.
최성은 작가와 동행한 이문영 변호사가 의뢰인의 요구를 다시금 알렸다.
“여기 계약서를 보시면 원작에 대한 훼손이 있을 시 원작자는 연출자의 교체를 요구할 수 있다고 분명히 명시되어 있습니다. 이건 관련 서류 사본이고 원본은 법무팀으로 팩스 보내뒀습니다.”
애초에 콧대 높은 최성은 작가를 잡기 위해 무리한 조항을 삽입했지만 그걸 실제로 써먹을 줄 몰랐다.
이문영 변호사는 A4 사이즈의 서류 두 장을 김명학에게 내밀었다.
김명학은 서류는 쳐다도 보지 않고 인상만 찌푸렸다.
연출자인 김성운 PD의 능력은 드라마국의 모든 구성원이 인정할 정도로 출중했다.
까다로운 작가와 빡빡한 제작 현장 사이에서 줄타기도 잘 해왔고.
그러나 일단은 작가를 달래는 게 우선이었다.
“최 작가. 내가 김 PD한테 잘 말해서 우리 최 작가를 더 신경 쓰라고 할 테니까······”
최성은 작가가 짜증을 버럭 내며 김명학의 말을 끊었다.
“처음부터 말씀드렸죠? 김 PD님은 제 소설을 드라마로 만들 능력이 안 된다고! 남주와 여주의 감정을 그냥 겉핥기로 대충 넘어가 버리는 게 연출가랍시고 어깨에 힘주는 꼴은 제가 더 이상 못 봐요!”
김명학도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
“최 작가! 소설은 그쪽이 잘 알지만 시청률은 우리가 전문이야! 심리 묘사가 늘어지면 재미가 없다는 건 이 판의 상식이라고!”
“재미요? 재미는 누구보다 제가 더 잘 알아요! 나 까메오에서 백만 찍은 작가예요!”
최성은 작가는 그 말을 끝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아 짜증나 정말. 그냥 법대로 해요!”
팔짱을 낀 그녀는 더는 듣지 않겠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김명학 CP님. 계약대로 이행해 주십시오. 불이행 시 손해 배상을 요구하겠습니다.”
김명학 CP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MBS 측 변호사인 박영식 변호사도 고개를 저었다.
분명한 단서 조항이 있어 이길 도리가 없다는 거다.
그때였다.
덜컥.
회의실의 문이 열리고 김성운 PD가 들어왔다.
편집실에서 밤을 새우고 편집에 몰두하던 김성운 PD는 드라마국에서 난리가 났다는 말을 듣고 서둘러 달려왔다.
제대로 씻지도 못했는지 머리는 까치집처럼 엉망이 되어 있고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와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최성은 작가는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
“당신처럼 형편없는 연출가와는 일하기 싫어서 PD 교체를 요구하는 중이에요.”
김성운 PD는 어처구니가 없어 넋이 나가버렸다.
원작의 재미를 최대한 살리기 위해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갑질을 일삼는 최성은 작가와 더는 못 하겠다는 보조작가들을 달랜 것도 모두가 김성운 PD의 노력이었다.
고맙다는 칭찬은 바라지도 않았지만 갑자기 PD를 교체해달라니?
사정을 듣고 다시 한번 간곡히 설득했지만 최성은 작가의 태도에는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내 대본에 줄 찍찍 긋고 멋대로 연출을 바꾸는 꼴을 내가 끝까지 참고 봐줄 거로 생각했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김명학 CP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아무리 작가가 갑이라지만 초보 작가가 이런 갑질을 해대는 건 처음 겪는 일이니까.
김명학 CP가 크게 일갈하려는 순간 김성운 PD가 김명학 CP를 붙잡았다.
본인도 화가 났지만 시청률 15%를 오가는 드라마의 파행을 막는 게 우선이다.
여기서 작가와 다투다 방송이 펑크라도 나면 결국엔 방송국이 욕을 먹으니까.
김성운 PD가 더듬대며 말을 이었다.
“제가······ 관두죠.”
“김 PD!”
“그럼 최 작가님이 바라는 분을 골라 마무리나 잘 지어주십시오.”
김성운은 김명학 CP와 최성은 작가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속에선 울분이 터져 올랐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김성운은 최성은 작가를 뒤로하고 그대로 회의실을 나섰다.
“김 PD! 거기 서 보라니까!”
등 뒤에서 김명학 CP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김성운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복도에 있던 드라마국의 AD와 직원들도 화가 잔뜩 난 얼굴을 짓고 있었다.
아무리 드라마가 작가 놀음이라지만 15%대 시청률로 순항 중인 드라마의 연출가를 자르는 것은 그들로서도 처음 겪는 일이다.
김성운은 괜찮다며 애써 웃으며 터벅터벅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칙칙!
쓰린 속을 달래며 가스가 다 떨어져 가는 라이터로 간신히 불을 붙여 담배 한 대를 입에 물었다.
“후우.”
새하얀 담배 연기가 뭉글뭉글 흩어져 나갔다.
찬 바람이 몰아쳐 담배 연기를 쓸어가 버리자 괜한 허망함이 찾아왔다.
입봉작에서 잘릴 줄이야.
“X 같네.”
김성운은 처량한 자기 신세를 한탄하며 죄 없는 밤하늘을 향해 욕을 퍼부었다.
그리곤 때마침 떠오른 생각에 폰을 꺼내 들었다.
달칵.
상대편에선 언제나 그렇듯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PD님?
“예. 정 대리. 저번에 뵙자고 한 약속 기억하시죠? 혹시 오늘 뵐 수 있을까요?”
이내 정윤호 대리는 흔쾌히 좋다는 대답을 해왔다.
* * *
김성운 PD의 연락을 받은 난 정상봉에게 유진이를 맡기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MBS의 근처에 있는 막걸리 주점에 들어서자 김성운 PD가 혼자 자작을 하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막걸리와 해물파전 그리고 육전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간단한 인사 뒤.
김성운 PD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자기 현황을 늘어놓았다.
“저 잘렸습니다.”
“예? 갑자기 그게 무슨 뜬금없는 말씀이세요?”
김성운 PD는 작가와의 충돌로 <밤하늘의 달빛 내림>에서 잘렸다며 막걸리 한 사발을 원샷으로 들이켰다.
“민망하긴 한데 속은 시원하네요. 최성은 작가 정말 지긋지긋한 사람이더군요.”
하긴 그 지랄맞은 성격과 제 멋대로인 작가주의적 발상을 가진 최성은 작가와 이제까지 함께한 게 용하지.
“몇 화까지 편집하셨습니까?”
“10화까지요. 뒤는 드라마국에서 알아서 하겠죠.”
그렇다면 11화부터는 우리 <파란 하늘>이 압도적으로 나갈 거란 확신이 생겼다.
최성은 작가가 주도하는 드라마라면 당연히 엉망진창의 결과물이 나올 게 뻔하니까.
술이 한 잔 두 잔 돌고 나자 김성운 PD가 보자고 한 이유를 털어놓았다.
“7월 편성 작인 <신의 이름으로> 아시죠?”
“예. 유진이 차기작 아닙니까? 잠깐······ 설마?”
“예. 조금 전에 메인 PD로 최종 낙점받았습니다. 정 대리님을 기다리며 한잔하고 있는데 회사에서 연락이 왔더군요.”
김성운 PD가 유진이의 차기작인 <신의 이름으로>의 메인 PD로 임명되었다고?
또다시 미래가 바뀌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