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1화
111. 봄이 오는 소리 2
골든로드도 음원 순위 조작에 가담했다는 건 약간은 충격적이었다.
강감찬 대표를 속이고 이런 짓까지 할 줄이야.
“어처구니가 없네.”
이대로 골든로드가 음원 조작에 가담했다는 걸 파볼까 싶었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함부로 뒤를 캐다간 오히려 역공을 당할 수 있었으니까.
서예종 라인이 가진 또 하나의 비리를 알아챈 나는 혹시 다른 정보도 알 수 있을까 싶어 다이어리를 뒤졌다.
그런데 페이지를 넘기다 보니 음악방송 1위에 관련된 내용 중 절반 이상이 삭제되어 있었다.
“뭐야. 사라진 일정이 왜 이리 많아?”
음원 순위 조작에 얽힌 그룹이 한둘이 아니었다.
“미친놈들. 이것들은 역풍이 무섭지도 않나? 증거가 없어도 소문만 나면 훅 가는 게 사재기인데?”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그때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 하나가 있었다.
“잠깐. 그럼 Hurry Up은 몇 주나 1위를 하게 되는 거지?”
음원 조작이 흔하게 행해지던 회귀 전에는 5주였다.
그런데 이번엔 경쟁자들이 알아서 자빠졌으니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이거 재미있게 돌아갈 것 같은데?”
순간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실룩대기 시작했다.
* * *
체리블라썸의 성공적인 컴백 후 가수 2실의 업무에서 일시적으로 손을 떼고 유진이를 챙기기 시작했다.
현재 <파란 하늘>의 최신화인 9화 시청률은 13.2%.
경쟁자인 <밤하늘의 달빛 내림>과 1.9% 차이로 치열한 싸움을 하는 중이었으니까.
‘한 끗 차이군.’
회사에서 업무 보고를 마치고 곧장 유진이의 집으로 향했다.
삐비빅.
도어락을 열고 들어가자 이어폰을 낀 유진이는 내가 온 줄도 모르고 대본에 푹 빠져 있었다.
미소는 바닥에 누워 발을 동동 굴리며 색연필로 그림 삼매경에 빠져 있었고.
힐끗 보니 미소의 그림이 나날이 발전하고 있는 것 같다.
미소가 그린 생명체는 몸은 하난데 얼굴이 2개 달린 사람이다.
일곱 살에 피카소의 입체파의 경지에 달해 있다니.
조만간 세계적인 화가가 될지도 모르겠다.
“어? 삼촌 왔다아!”
인기척을 느낀 미소가 벌떡 일어나 내게 달려왔다.
두 팔을 벌려 미소를 안자 배시시 웃는다.
“삼촌. 이제 바쁜 거 끝났어요?”
“응.”
“그럼 이제 가지 마세요!”
체리블라썸도 이태풍도 챙겨야 하지만 미소만 보면 일하기가 싫어진다.
“안 가 안 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더니 뒤늦게 고개를 든 유진이가 피식하고 웃는다.
“미소야. 삼촌 거짓말하는 거야. 또 휙 하고 갈 거야.”
유진이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미소가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유노 삼촌. 거짓말이야?”
슬픈 눈으로 쳐다보는 미소에게 고개를 저었다.
“아냐! 미소야.”
난 화들짝 놀라 몇 번이나 아니라고 이야기했다.
‘유진아. 장난치지 마!’
미소가 보지 못하게 어깨너머로 장난치지 말라고 입 모양으로 말했다.
유진이는 피식 웃으며 혀를 쏙 내민다.
‘메~롱.’
너도 시위냐?
미소를 겨우 달랜 뒤 도시락통과 반찬 통을 내려놓았다.
“점심 안 먹었지? 밥 먹자.”
“그건 뭐예요?”
“김치.”
“김치? 이게 다?”
좌식 테이블을 펼치자 미소가 조그마한 손으로 돕겠다며 직접 테이블에 올리기 시작했다.
“와~ 많다.”
미소는 놀라고 유진이도 놀랐다.
“김치볶음밥 김치찌개 김치찜 김치전 김치말이에······ 볶음김치까지. 헐~. 이게 다 뭐예요?”
“김치에 든 유산균이 헬리코박터균에 좋다고 하더라고.”
“의사 선생님이 그러셨어요?”
“아니? 아침 방송에 나오는 건강 아줌마가.”
회귀 전 내 사망원인은 위암.
올해 초 건강 검진 때 확인해 봤더니 이미 위염이나 궤양의 원인이 되는 헬리코박터균이 잔뜩 존재하고 있었다.
불규칙한 식사.
스트레스.
건강하지 못한 식단과 커피를 잔뜩 먹는 게 모조리 문제였다고 한다.
의사는 병원에서 주는 약을 잘 먹으면 금방 호전될 거라 했지만 약도 먹고 민간요법인 김치도 함께 먹으면 더 좋지 않을까 싶었다.
그때였다.
“난 김치 조아!”
미소가 수저와 젓가락을 튕기며 유치원에서 배운 김치 노래를 불렀다.
“김치~ 김치~ 먹으면 키가 쑥쑥! 쑥쑥!”
만물 김치설이 언뜻 떠올랐지만 뭐 어때?
미소가 즐거워하면 그만이지.
“엄마. 어서~. 먹자. 응?”
미소가 배고프다며 유진이의 팔을 흔들어댔다.
“하긴 몸에는 좋겠네요.”
한숨을 내쉰 유진이와 달리 미소는 싱글벙글이다.
“밥밥밥~!”
식사하던 도중 유진이가 미소 입가에 묻은 김치볶음밥을 떼어 주며 묻는다.
“근데 오늘은 촬영도 없는데 왜 연락도 없이 오셨어요?”
“아. 추가로 들어온 광고가 있는데 네 의사 확인 좀 받으려고.”
“광고가 또 들어온다고요?”
“어. 미소와 춤추는 동영상이 워낙 인기라서 미소도 함께 출연해 줬으면 하더라고.”
회사 측 입장으로 생각하면 광고는 많을수록 좋다.
하지만 배우의 입장은 다르다.
이미지 소모를 막아야 하니까.
“어딘데요?”
“오성 전자 김치 냉장고. 단 미소랑 같이 찍어야 해.”
귀를 쫑긋 세우고 듣던 미소가 내 팔을 잡아당겼다.
“삼촌 나 뭐 찍어요?”
“응. 우리 미소가 너무 이뻐서 엄마와 같이 광고 찍자고 하시더라고.”
“와아아아! 진짜?”
미소는 자기가 광고를 얻었다며 기분 좋은 표정으로 또 한 번 노래를 불러대기 시작했다.
“김치~ 김치~ 아이셔~ 아이셔~. 몸에 좋고 맛도 좋아 김치~.”
몸을 웅크렸던 미소는 노래가 끝남과 동시에 몸을 활짝 펴며 쌍 엄지를 치켜들었다.
“김치!”
“기······ 김치!”
쌍 엄지를 내밀어 대꾸하고서야 도돌이표로 이어지는 김치 송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피식 웃던 유진이가 미소에게 물컵을 건넸다.
꿀꺽꿀꺽.
한바탕 춤을 춘 뒤라 시원하게도 마신다.
“우리 미소. 엄마랑 같이 광고에 나갈래?”
“응! 근데 이번에도 버거 광고처럼 인형 모자 쓰면 좋겠어.”
활짝 웃는 미소의 대답에 유진이가 몸서리를 쳤다.
덕분에 유진이가 내게 물었다.
“이번에는 정상적인 광고 맞죠?”
“어.”
유진이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 체리블라썸 멤버들한테 선물 하나 더 해줘야겠네요. 걔들 덕분에 들어온 광고니까.”
“괜찮아. 걔들도 광고 많이 들어왔거든.”
봄날에 꽃이 피듯 체리블라썸에겐 진정한 봄이 찾아왔다.
그리고 유진이에게도.
* * *
TV를 틀자 음원 조작을 하다 걸린 테디 킴이 수갑을 차고 경찰청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테디 킴 씨! 대성 프로모션 대표 김홍원 씨와 함께 음원 조작에 가담한 게 사실입니까?”
“TK 측에서는 테디 킴 씨의 단독 범죄라고 주장하고 있는데요! 한마디 해 주시죠!”
기자들의 소란에 테디 킴이 머리에 점퍼를 뒤집어쓰고 대답했다.
“아 돈 노우~. 암~ 어메리칸~.”
유창한 한국말을 쓰는 테디 킴은 자신이 미국인이라 주장하며 경찰서로 들어가 버렸다.
달칵.
TK 엔터의 김태권 대표는 자신의 방에 있는 벽걸이 TV를 끄며 한숨을 내쉬었다.
전국구 조폭 출신이었던 김태권은 왼편에 앉은 마동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입은 잘 막았겠지?”
“예.”
“그런데 너 요즘 하는 일이 왜 전부 이따위냐?”
마동팔이 고개를 푹하고 숙였다.
“면목 없습니다. 대표님.”
“100억을 날리고도 면목이라······. 할 말이 그게 전부냐?”
마동팔이 이를 꽉 깨물었다.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김태권의 왼 주먹이 마동팔의 오른쪽 얼굴을 가격했다.
빠악!
강렬한 충격에 마동팔의 얼굴이 한쪽으로 돌아가며 쓰러졌다.
몸이 휘청대며 자세를 잃은 마동팔은 급히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잡았다.
주르륵.
소파에 앉아 있는 마동팔의 코에서 코피가 연신 흘러내렸다.
김태권 대표가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털었다.
“거참 내 왼손에 걸리면 황소도 쓰러졌는데. 내가 많이 늙었나 보다.”
“아 아닙니다. 대표님 주먹은 여전하십니다.”
“아니긴. 나이가 드니 힘이 없어. 맘 같지가 않네. 늙는 게 이렇게 서럽다.”
김태권은 사람을 때려놓고도 자기 주먹이 약해졌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김태권은 테이블에 놓인 크리스털 유리컵을 손에 쥐었다.
마동팔이 다시 한번 움찔하자 오른쪽에 앉은 천이상 이사가 김태권의 손을 붙잡았다.
“거 형님도 성격 하시고는. 나이 들면 힘 빠지는 게 당연한 거지 흉기는 쓰지 맙시다.”
“물 마시려고 한 거야. 인마.”
천이상 이사가 못 이기는 척 손을 놓았다.
“난 또 동팔이 입에다 컵 박아 넣고 턱주가리에 킥이라도 날릴 줄 알았지.”
천이상 이사의 농담에 마동팔은 부르르 떨었다.
김태권은 어처구니가 없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컵을 입에 넣고 차? 발상은 신선하네.”
김태권이 물을 찬찬히 마신 뒤 크리스털 컵을 내려놓았다.
“긴장 풀어 더 안 때릴 테니까.”
그제야 마동팔이 긴장을 풀었다.
“하여간 상황은 이리되었으니까 일단 쁘띠모는 국내 활동은 당분간 쉬게 해라. 그리고 한 달 뒤부터는 해외로 돌려. 중국이나 일본 공연 일정 위주로 잡고.”
“예.”
“그리고 체리블라썸한테 작업 들어갔다며?”
“이미 밑밥은 다 깔았습니다.”
“멍청한 짓 하지 말고 접어. 카메라가 저렇게 달라붙어 있는데 사고 치면 어떻게 되겠냐?”
김태권과 마동팔은 출신이 출신이다 보니 콘텐츠에 대해서는 문외한들이었다.
하지만 상황을 읽는 판단력만큼은 예사롭지 않았다.
한 번 실수하면 구속되거나 칼받이가 되는 세계에서 살던 이들이었으니까.
김태권은 소파 끝자락에 앉아 덜덜 떨고 있는 덩치 큰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강희동 실장은 왜 그리 떨고 있나? 혹시 내가 모르는 잘못이라도 한 건 아니겠지?”
김태권의 스산한 눈빛에 강희동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 아닙니다. 대 대표님.”
CNK 엔터의 에이스였던 강희동은 자신이 직접 런칭했던 걸그룹 플로렌이 학폭 사건으로 해체한 이후 실장 대우를 약속받고 경쟁사인 TK 엔터로 회사를 옮겼다.
연봉과 직책이 올라갔다고 좋아한 것은 잠시였다.
대표인 김태권의 성격이 거칠다 소문은 많이 들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당분간은 강 실장 자네가 우리 동팔이를 대신해서 가수 매니지먼트 전반을 이끌어 줘야겠어. 음반 사업팀에서 자네 실력이 괜찮다고들 하더군.”
“이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제가 어찌 감히······.”
강희동이 거절하는 순간 김태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왜? 일하기 싫어?”
살기등등한 태도에 강희동 실장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 아닙니다. 지 지시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김태권이 그제야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건 그렇게 하고. 내가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서 말이야.”
“하문하십시오.”
각을 잡고 앉은 강희동은 떨리는 목소리를 숨기려 애를 썼다.
“딴 건 아니고······ 이번 쁘띠모 5집에 돈을 100억이나 썼는데 결론적으로 체리블라썸에게 우리가 밀렸단 말이지. 동팔이가 직접 나서서 최고라는 놈들을 전부 갈아 넣은 건 자네도 알 거고 뮤비에도 거금을 들였는데 왜 그런 일이 벌어진 건가?”
꿀꺽.
마동팔이 피를 닦지도 않고 소파에 각을 잡고 앉아 있는 모습은 거칠게 살아온 강희동에게도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
강희동은 고민에 빠졌다.
의 중독성 있는 멜로디와 따라 하기 쉬운 재미있는 춤은 10년에 한 번 나오기 힘든 곡이었으니까.
설명도 상대가 알아먹을 때나 할 수 있는 법.
음악의 차이를 설명할 수 없으니 결국 남는 건 사람의 차이였다.
“곡의 완성도는 결국 프로듀서가 좌우합니다. 체리블라썸의 이번 곡을 담당한 프로듀서가 보통이 아니라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김태권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체리블라썸 프로듀서는 이동민 실장이라고 하던데?”
“대외적으로는 그렇게 알려졌지만 실제로 이번 곡 작업에 투입된 인력을 뽑은 건 다른 사람이라더군요.”
“누군데?”
“그 그건 저도 잘······”
그 순간 마동팔이 다급히 끼어들었다.
잘하면 용서를 받을 기회였다.
“정윤호란 놈입니다. 그놈이 체리블라썸의 이번 곡을 담당했습니다!”
“정윤호? 처음 듣는 이름인데? 누구야?”
“정유진의 매니저이기도 합니다.”
“정유진? 종혁이 상대역인 배우 정유진?”
“예.”
“배우 매니저가 어떻게 음악 프로듀서를 해?”
“그건 저도 잘은 모르겠습니다. 하여간 이번 곡의 작곡가 작사가 안무가는 전부 신인인데 다들 정윤호가 찾아낸 인재들이라고 들었습니다.”
마동팔은 정윤호에 관해 자신이 아는 것을 털어놓았다.
김태권은 컵에 담긴 물을 마시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정윤호란 말이지······.”
의미심장하게 웃던 김태권은 마동팔에게 카드 한 장을 내밀었다.
“동팔이 넌 병원부터 갔다가 가족들 데리고 하와이에 있는 내 별장 가서 한 2주만 쉬고 와라. 그리고 앞으론 배우만 맡고.”
“죄송합니다. 대표님.”
“됐어. 두 번 다시 실수 안 하면 되지. 어서 가봐. 강 실장도 나가서 일 보고.”
김태권의 말이 끝나자 천이상이 말을 보탰다.
“동팔아. 이왕 해외로 가는 김에 최고로 즐기고 와라. 태권이 형 카드 무제한이다.”
천이상의 실없는 농담에도 마동팔은 대꾸할 수 없었다.
입안이 다 터져 쓰라려 죽을 것 같았으니까.
마동팔은 고개를 푹 숙인 채 강희동 실장과 함께 대표실을 나섰다.
두 사람이 나가자 김태권이 천이상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이상아. 그놈 우리 회사로 데리고 오면 어떨 것 같냐?”
“정윤호요?”
“그래. 쓸만한 놈은 끌고 와야지.”
천이상이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제가 한번 좋은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