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화
11. 새로운 시작
방으로 돌아가자 미소가 덮고 있던 이불이 살짝 뒤틀려 있었다.
이불을 다시 바로 덮어 주자 미소가 흐뭇한 표정으로 입을 오물거리기 시작했다.
귀엽다.
깜찍하고.
“오빠?”
“어. 어? 미 미안.”
“우리 미소 귀엽죠? 이쁘죠?”
“응.”
침대에서 몸부림치던 미소에게 이불을 덮어 준 유진이는 뒤늦게 자기 연기 평가를 부탁했다.
“아 맞다. 근데 아까 제 연기는 어땠어요? 아직 많이 부족하죠?”
말이 나온 김에 최현민 연기 트레이너부터 떨쳐 내야겠다.
“아니. 좋았어. 그것도 아주! 대신 이대로 혼자 연습하는 게 좋을 거 같아. 레슨은 받지 말고.”
“왜요?”
네가 그 레슨 선생보다 백배는 더 나으니까.
하지만 그 말을 내뱉었다간 괜한 의심만 살 것 같았다.
대신 최대한 유진이가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을 시작했다.
“최현민 트레이너님의 교수법이 너와는 안 어울리는 거 같아서. 이지연 작가님도 그런 말씀을 하신 거 기억 안 나?”
“아 그러고 보니 그런 말을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유진이가 손가락을 관자놀이에 대고 기억을 더듬었다.
정확히는 굴렁쇠의 레슨 수준이 떨어진다는 뜻이었지만 굳이 그 뜻을 해석해 줄 생각은 없었다.
순간 유진이가 걱정된다는 듯 말했다.
“근데 회사에서는 연기 레슨은 앞으로도 계속 받아야 한다고 하셨는데요? 한 3년은요?”
순간 버럭하고 화를 낼뻔했다.
재능을 깎아 똥으로 만드는 짓이었으니까.
“3년은 무슨. 정 안 되면 내가 따로 연기 지도해 줄 분을 모실 테니까 나만 믿어.”
구성철 실장을 설득하는 일이 좀 까다롭긴 하겠지만 생각해 둔 바가 없는 것도 아니다.
유진이가 눈을 찡긋하며 윙크했다.
“그럼 이제부터 걱정 안 하고 오빠가 하자는 대로 따르기만 하면 되는 거죠?”
“그 그래.”
갑작스러운 행동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내 기억과 영혼은 36살의 정윤호지만 내 몸은 26살의 정윤호라 그런지 가끔 이런 반응이 낯설었다.
그나저나 유진이의 성장 계획을 더 앞당겨야겠다.
이대로 멍하니 있다간 주영인과 김동수 탓에 피어도 못 보고 밟힐 수도 있었으니까.
“그럼 전 조용히 대본이나 읽을게요. 미소가 자고 있어서 연습은 더 못할 거 같아요.”
“그래.”
유진이가 말없이 대본을 읽는 사이 난 다이어리를 훑어보며 유진이의 차기작을 정했다.
‘그래. 이걸로 하자.’
[에브리데이 V10]
[날짜 : 2020년 6월 18일]
-PM 10:00 SBC <파란 하늘> 24화 모니터링. 최고 시청률 22.1%.
김솔잎 작가의 <파란 하늘>.
내년 4월 1일에 방송을 시작하는 <파란 하늘>은 모든 배역이 주목을 받는 데다 시청률도 22%를 넘는 대박 작품이다.
그 <파란 하늘>에 출연하게 되면 정유진이라는 이름을 각인시킬 수 있다.
상대 배역의 남자 배우들이 여자를 밝히기는 하지만 그 정도야 이 업계에서는 늘 있는 일.
그런 건 내가 막아내면 그만이고.
그리고 이 작품이라면.
같은 날 방영되는 이지연 작가의 차기작을 고사할 핑계로 완벽하다.
김솔잎 작가는 이지연 작가의 보조 작가 겸 제자였으니까.
유진이가 제자의 작품에 출연하겠다고 하면 아무리 괴팍한 이지연 선생님이라고 해도 한 번 정도는 양보하시겠지.
연이어 다이어리를 넘겨보며 유진이를 출연시킬 다른 프로들을 고르기 시작했다.
‘파란 하늘 다음에는 이걸로 하고······’
웃음을 머금으며 한동안 머릿속에 유진이의 성장 계획을 그리고 있을 때였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미소가 몸을 일으켰다.
“이모~.”
미소가 눈을 비비며 유진이를 찾았다.
그런데 얼마나 조심을 하고 지내는지 막 잠에서 깼는데도 유진이를 엄마가 아닌 이모라 부르고 있었다.
꼬마 홍길동이 따로 없다.
엄마를 엄마라 부르지 못하는 이 문제도 조만간 해결해야겠다.
미소가 눈을 뜨자 유진이가 생긋이 웃으며 대본을 덮었다.
“미소야. 깼어?”
“으······응. 나 배불러서 깜빡 잠들었어.”
미소가 팔을 쭉 뻗어 유진이에게 안겨 왔다.
“으차. 우리 미소. 잘 잤어?”
“응. 꿀잠 잤어!”
잠에서 깬 미소가 씩씩하게 답했다.
“근데 우리 미소 여기 침 흘렸다.”
“어디? 어디?”
미소가 놀란 눈을 하고 조막만 한 두 손으로 볼 주위를 닦았다.
“농담~이지롱~.”
“흥! 흥! 이모 미워!”
미소가 유진이의 장난에 삐진 듯 볼을 부풀렸다.
하지만 유진이는 그것마저 귀엽다며 미소를 품에 안고 겨드랑이를 간질거렸다.
“안 돼. 미소야. 이모 미워하지마아~.”
“꺄하하하. 간지러. 간지러. 하지 마. 꺄하하.”
미소가 까르르 웃으며 삐진 표정을 지웠다.
괜스레 웃음이 나오며 흐뭇해졌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집에 가자. 주인아주머니가 이젠 집에 와도 된다고 까톡 주셨더라.”
“네. 오빠.”
“네. 삼촌!”
유진이와 미소를 집으로 바래다준 그날 저녁.
가스 사고로 집을 잃을 뻔한 걸 막아 줬다며 몇 번이고 고개를 숙이는 유진이네 집주인 아주머니에게 거창한 저녁 식사를 얻어먹고 나서야 집으로 올 수 있었다.
양손 가득 과일 바구니도 안겨 주셨는데 두리안은 왜 끼어있는 건지 모르겠다.
* * *
집으로 돌아온 나는 다이어리 앱부터 열었다.
1년 차 시절.
워낙에 선배들에게 혼이 나던 때라 난 모든 걸 다이어리에 적어놓았었다.
일정 보고할 사항 회의 내용.
출연진 모니터링과 시청률 같은 것들까지.
다이어리는 마치 일기장처럼 온갖 내용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하. 미쳤었구나 나.”
미소가 죽은 다음 날에도 일정을 적어둔 걸 알아차린 까닭이다.
[에브리데이 V10]
[날짜 : 2019년 12월 13일]
[현재 시각 PM 07:43]
-PM 06:00 <일정 삭제>
(삭제된 일정 : 주영진 픽업.)
-PM 09:50 KBC 드라마 <최강 닥터 이팔자>. 긴급 속보로 인한 결방.
“습관이 무섭네 진짜.”
다이어리를 찬찬히 살펴보면서 이때를 떠올렸다.
당시 미소의 장례가 끝난 뒤 유진이를 볼 면목이 없어 소속을 옮겨달라 부탁했다.
그런데 얄궂게도 난 김동수의 배우 3실로 발령받게 되었었다.
그 이유로 내 다이어리에는 배우 3실에 관한 일정이 대부분 남아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아 이럴 때가 아니지······”
정신을 차린 난 시간을 들여 다이어리의 기능부터 확인하기 시작했다.
* * *
일단 확실한 건.
어떤 경우라도 V10에 새로운 일정은 생겨나지는 않는다는 거다.
혹시나 하고 현재 사용하는 V1에 일정을 적어도 봤지만 V10에는 새롭게 일정이 추가되거나 하는 건 없었다.
그 이후로는 어떤 방식으로 일정이 삭제되는지만 알아보기로 했다.
그 결과 일정 삭제에 세 가지 법칙이 있음을 알아낼 수 있었다.
[에브리데이 V10]
[일정에 관한 법칙 3가지]
1. 정확한 원인을 찾아서 바꿔야지 결과가 바뀐다.
2. 운명은 극도로 바꾸기 힘들다.
3. 다이어리에 적힌 일은 반드시 일어난다.
유진이를 만나고 미소를 구한 이후.
다이어리에 적혀 있던 유진이와 관련된 모든 일정이 모조리 삭제될 줄 알았다.
하지만 바뀐 거라곤 유진이가 출연하게 된 10일 뒤의 21화의 시청률뿐이다.
[에브리데이 V10]
[날짜 : 2019년 12월 23일]
-PM 10:00 <일정 삭제>
(삭제된 일정 : <아침이 간다> 21화 모니터링. 시청률 19.3%)
심지어 10년 치 일정을 다 뒤져 봐도 유진이에 관한 틈틈이 있는 기록은 그대로였다.
마치 운명의 신이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나게 하겠다는 의지를 보여 주듯 말이다.
지금 TV에서 나오는 뉴스처럼.
-긴급 속보를 알려드립니다. 오늘 서울에 눈이 잔뜩 내려 행사 중이던 체육관의 천장이 내려앉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현재 구조 인력들이······
9시 50분이 되자 KBC 박두수 기자가 다급한 목소리로 한성대학교 체육관 붕괴현장에서 특보를 내보내고 있었다.
간신히 버티고 있던 골조가 내려앉는 순간 구조 대원들이 황급히 피하며 고함을 질러댔다.
인기 드라마 <최강 닥터 이팔자>를 결방해야 할 만큼 긴급한 상황이었다.
순간 미래를 아는 것이 새삼 무겁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미리 알렸어야 했나······.”
TV로 보이는 사건을 막기 위해 ‘제보라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잠깐 스쳤다.
하지만 이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미소를 구하는 것 하나만 해도 극도로 힘들었었는데 사고 현장에 찾아가 봐야 뭘 할 수도 없으니까.
곧 여기가 무너진다고 떠든다?
미친놈이라는 소리나 안 들으면 다행이지.
아니면 경찰에 잡혀갈지도 모르고.
한참을 머리를 싸매고 끙끙거렸지만 결국 내가 내린 결론은 간단했다.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미래를 바꿔 가자는 것.
다른 일에 간섭했다간 어떤 여파가 나타날지 전혀 알 수가 없었으니까.
그나마 체육관 붕괴사고에서 사망자가 없다는 게 다행이라 생각하며 밤새도록 다이어리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 * *
12월 14일 새벽 6시.
배우 2실의 아침 회의를 위해 회사에 출근했다.
끼이이익.
지하주차장에 차를 대자 엘리베이터에서 4인조 걸그룹 ‘체리블라썸’이 나오고 있었다.
“어?”
작년 가을에 데뷔한 체리블라썸은 회사에서 밀고 있지만 한 방이 없어 걸그룹 2군과 3군 사이에서 위치한 안타까운 상황이다.
그리고 앞으로 3집을 내고 망하면서 소속사에서 방출당하게 되고.
바로 이 체리블라썸에 정실모의 멤버들이 있다.
6년 뒤 여자 연기 최우수상 단골 수상자인 ‘유은아’와 골든디스크 3회 연속 대상을 타는 ‘김세리’가 말이다.
반가워 손을 흔들고 싶었는데 애들 상태를 보니 그럴 수가 없었다.
“얘들아. 눈떠. 샵에 갔다가 바로 현장으로 내려갈 테니까 잠은 차에 앉아서 자.”
체리블라썸의 담당 매니저인 한명호 팀장이 자면서 걷는 애들을 인솔했다.
21살의 우연희가 제일 앞에 그 뒤로 20살의 양은비가 그 뒤를 따랐다.
19살의 유은아와 15살의 막내 김세리는 목에 분홍색 아파치 목베개를 감은 채 눈을 감고 언니들을 졸래졸래 따라가고 있었다.
어미를 따라가는 새끼 오리들처럼.
그 와중에 대답은 잘도 한다.
“네에.”
“넹~.”
“음냐음냐.”
“네······”
한참 자야 할 나이지만 지방 행사에 가려면 새벽부터 출발해야 얼추 시간이 맞을 테니 어쩔 수가 없다.
그때였다.
맨 끝에서 따라가던 막내 오리 세리가 열을 이탈했다.
왼쪽으로 코너를 돌아야 하는데 직진하고 있었다.
탁. 탁. 탁.
작은 키에 비해 다리가 길다 보니 생각보다 빠르게 앞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
여전히 눈을 감고 말이다.
“한 팀장님!”
내 외침에 한명호 팀장이 고개를 뒤로 돌렸다.
“어? 정 스타. 너도 오늘 스케줄 있냐?”
“아 아뇨. 저기 세리요! 세리!”
“어? 어! 세리야!”
“세리야! 정신 차려!”
인사를 하던 한명호 팀장이 화들짝 놀라 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달려가고 있었다.
나 역시 차에서 내려 빠르게 그 뒤를 쫓았다.
주차장 3F 벽을 향해 돌진하던 세리는 충돌 직전 한명호 팀장의 배에 막혔다.
“헉헉헉.”
심장이 터질 뻔하고 호흡이 가빠 왔다.
아침부터 수명이 좀 줄어든 거 같고.
길치에 방향치로 유명한 세리는 이렇게 여러 사람 심장을 오그라들게 하는 게 주특기다.
푹신한 잠만보 같은 한명호 팀장의 배에 얼굴을 묻은 세리가 반쯤 눈을 뜨고 물었다.
“으~으음. 여기 어디예요?”
“아직 주차장이야. 정신 좀 차려. 하마터면 여기 부딪힐 뻔했잖아.”
“헤에. 다 온 줄 알았네.”
반쯤 뜬 눈에 입가에 침 자국까지 보인다.
그런데 그사이 나머지 3명도 방향을 튼 한명호 팀장을 따라와 있었다.
한명호 팀장은 식은땀을 훔치고 졸졸 서 있는 아이들을 이끌었다.
“후아. 얘들아. 자더라도 차에 타고 자야지. 이쪽으로 따라와.”
엄마 오리가 몸을 움직이자 아기 오리들이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한명호 팀장이 내게 눈짓으로 인사를 했고 체리블라썸은 쫄래쫄래 그 뒤를 따랐다.
승합차의 문이 열리자 아이들은 눈을 감은 채 자기 자릴 찾아갔다.
그리곤 의자에 몸을 기댄 채 곧장 잠에 빠져들었다.
한명호 팀장은 체리블라썸의 안전벨트를 직접 확인한 후에야 운전대로 향하며 말했다.
“하이고. 죽겠네. 내가 매니저인지 유치원 선생님인지 모르겠다. 하여간 고맙다 정 스타. 나중에 보자.”
“예. 한 팀장님도 운전 조심하십시오.”
“어.”
체리블라썸의 차가 소음을 내며 지하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끼이익~
“조만간 보자. 얘들아.”
유진이도 제대로 키울 생각이지만 쟤들도 키워야지.
이왕이면 저 그룹이 그대로 유지된 채로.
10년 치 경험이 말하는데 쟤들 조금만 도와주면 뜰 수 있다.
아니 띄울 수 있다.
회사가 못 띄우면 나라도 나서서 띄울 생각이다.
정실모인 세리와 은아가 내가 죽기 전까지도 그룹이 해체된 걸 아쉬워하곤 했으니까.
그러니 그룹을 유지한 채로 미래에서 누렸던 영광을 맛보게 해줄 계획이다.
“이크. 회의에 늦겠다.”
상념에 빠지다 보니 시간을 지체해 버렸다.
* * *
띠링~.
-상어가 나타났다!
1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문을 닫으려는 순간 로비에서 누군가 달려오며 외쳤다.
“자 잠깐만~요.”
난 오픈 버튼을 누르고 사람이 오기를 기다렸다.
“헉헉. 감사합니······ 뭐야? 정윤호 아냐?”
부스스한 머리에 심술궂은 얼굴은 3실의 강명길 팀장이다.
가뜩이나 3실과는 불편한 관계인데 강명길 팀장을 보니 실수했단 생각이 들었다.
클로즈 버튼을 누를걸.
“안녕하십니까? 강 팀장님.”
강명길 팀장은 대답도 하지 않고 오픈 버튼을 누른 채 로비로 고개를 내밀었다.
강명길 팀장이 이렇게 허둥지둥 대며 기다릴 사람은 한 명밖에 없다.
또각또각.
또렷한 하이힐 소리와 함께.
회귀 전 아내였던 주영인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