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2화
102. 바뀌는 미래 2
4월 15일.
체리블라썸의 뮤직비디오를 공개하는 날이 밝았다.
이날이 오기를 얼마나 목이 빠질 정도로 기다렸는지.
삼촌 뮤직을 일망타진하며 강력한 경쟁자가 될 신인 걸그룹 걸프렌즈7의 데뷔를 무산시켰고 체리블라썸을 성공으로 이끌 작사가 작곡가 그리고 안무가를 모았다.
비운의 천재 작곡가 방선우.
웹소설 작가 출신의 괴짜 작사가 장예빈.
세계적인 안무가로 성장하게 될 박선녀.
이 멤버가 만든 곡으로 1위를 못 하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만만치 않은 상대가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쁘띠모.
TK엔터의 원탑 걸그룹은 체리블라썸과 모든 일정을 동일하게 잡았다.
오늘 뮤직비디오를 공개하고 내일은 음원 차트 그리고 4월 25일 자로 컴백하는 음악방송 스케줄까지.
이건 대놓고 우릴 밟아버리겠다는 선전포고였다.
[걸그룹 쁘띠모 미니 5집 앨범 <가면무도회>로 컴백]
[4월 15일 너튜브 공식 채널에서 쁘띠모의 새로운 뮤직비디오 공개!]
[쁘띠모 이번에도 음원 줄 세우기에 도전!]
[걸그룹 체리블라썸 새로운 뮤직비디오 공개]
기사가 올라올수록 회의실 분위기가 엉망진창이다.
이동민 실장이 안색을 굳히고 홍보팀장에게 물었다.
“성 팀장. 홍보비 좀 더 쓸 수 없어? 이래서야 우리 애들 뮤비가 나오는지 누가 알겠냐고.”
“홍보비는 쓸 만큼 썼는데 상대가 쁘띠모라서 티가 안 나는 겁니다.”
“그럼 이대로 보고만 있을 거야?”
성민석 팀장이 흥분한 이동민 실장을 달랬다.
“그럴 리가 있나요. 홍보팀 애들이 안면 있는 기자들 만나서 담판을 하는 중이니까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겁니다.”
“체리블라썸 애들이 그간 고생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너도 잘 알잖아. 이번에는 제대로 한번 띄워 보자. 응?”
이동민 실장이 두 손을 모아 부탁했다.
“알겠습니다. 저도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이동민 실장은 그래도 안심이 안 되는 듯 날 쳐다본다.
“정 대리. 공식 팬카페는 만들어졌지?”
“예. 만들었습니다.”
“운영진들에게도 힘 좀 써 달라고 부탁할 수는 없냐?”
“안 그래도 부탁하려던 참입니다.”
성민석 팀장의 말에 체리블라썸의 공식 팬카페 ‘벚꽃패밀리’의 운영진 단톡방에 메시지를 남겼다.
[단체 채팅방 : 공식카페. 벚꽃패밀리 운영진]
[정윤호 대리 : 얘들아. 있니?]
[한꽃님 : 쌤! 카페 꾸미기 끝났어요. 구경 오세연~. (링크 : 네이브 ‘벚꽃패밀리’ – 체리블라썸 공식 팬카페)]
[박한별 : 야 꽃등심! 어디서 귀여운 척이야!]
[한꽃님 : 야! 투뿔! 왜 내 별명 불러? 쌤. 한별이 별명은 투뿔이에요. 투뿔!]
[박한별 : 너 내일 학교에서 봐! 아주 주거써!]
[한꽃님 : ㅋㅋㅋ 난 낼 학교 안 가지롱.]
[양지우 : 꽃님이랑 나랑 내일 축제 행사 요원으로 봉사활동 갈 거니까 찾지 마셈.]
작년 횡성 현장에서 우연히 인연을 맺은 횡성여고의 4인방은 내 부탁을 듣고 흔쾌히 공식 팬카페의 운영진을 받아들였다.
팬덤의 이름은 ‘벚꽃패밀리’.
현재 고3인 횡성여고 4인방이 졸업하는 내년에는 네 사람을 회장단으로 하는 공식 팬클럽으로 승격시킬 예정이었다.
그 횡성여고 4인방이 날 부르는 호칭은 현재 ‘쌤’이다.
대리라는 직책으로 부르는 건 어색하고 거리감이 느껴져 싫다 하고 삼촌이라 하기에는 좀 어린 거 같고 오빠는 닭살 돋아서 싫다나?
그래서 가장 익숙한 ‘쌤’이라는 호칭이 달라붙었다.
[정윤호 대리 : 지방방송은 그쯤하고. 쁘띠모가 같은 날 컴백 하는데 화력 지원 좀 해줄 수 있을까?]
[성지연 : ㅋㅋ 당연하죠. 안 그래도 여러 커뮤니티에 홍보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정윤호 대리 : 생큐. 그럼 그렇게 준비 좀 해주고 4월 25일 오후 5시에 MBS 정문에서 보자. 올 때 조심하고 도착하면 입구에서 전화해.]
[한꽃님 : 넹.]
[박한별 : 오키도키!]
[양지우 :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애들 잘 데리고 갈게요.]
활기찬 ‘벚꽃패밀리’와 대화가 끝난 뒤 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워낙에 텐션이 높은 애들이라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식은땀이 난다.
분당 500타는 될 법한 빠르기의 메시지에 일일이 대답하느라 손가락이 터지는 것도 같고.
“그런데 상봉아. 앞으로 네가 얘들을 다 관리해야 할 건데 미리 인사나 해 두지 그랬냐?”
같은 단톡방에 있으면서도 한마디도 하지 않던 정상봉이 머리를 긁적였다.
“저기 제가 여자애들이랑은 대화를 나눠본 적이 별로 없어서요.”
“이제부턴 많이 해 봐. 하다 보면 늘어.”
여자에게 면역이 없다는 정상봉이 죽을상을 하고 한숨을 쉰다.
하지만 앞으로 3개월이 지난 뒤.
정상봉에게는 팬클럽이 생긴다.
이름은 ‘골든 보이’.
30대 이상의 누님들이 주축이 된 팬클럽인데 정상봉은 그 팬클럽이 시달리다 결국엔 여자를 거의 돌같이 보게 된다.
골든 보이의 극성스러움은 쁘띠엔젤을 뛰어넘어 버리니까.
그 미래를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럼 실장님. 저흰 체리블라썸 애들한테 바로 가 보겠습니다.”
“그래. 수고!”
정신없는 이동민 실장을 둔 채 정상봉과 함께 체리블라썸의 숙소로 향했다.
* * *
체리블라썸의 숙소로 가자 다들 저녁 식사를 위해 모여 있었다.
세리는 소파에 축 늘어져 있었고 은아는 정자세로 단정하게 앉아 TV를 보고 있다.
우연희는 막 샤워를 했는지 머리를 말리는 중이고 양은비는 태블릿을 펼치고 뭔가를 보고 있었고.
그런데 다들 이번 컴백을 위해 고된 연습을 한 탓인지 얼굴이 반쪽이 된 상태였다.
“오빠. 오셨어요?”
우연희가 반갑게 우릴 맞이했다.
인사를 마치자마자 곧장 네 사람에게 체리블라썸의 공식 팬카페가 생겼음을 알렸다.
“저희한테도 공식 팬카페가 생겼다고요?”
체리블라썸은 2집을 냈는데도 공식 팬카페가 없었다.
어찌나 놀랐는지 우연희가 머리를 털던 그 모습 그대로 멈춰서 버렸다.
덕분에 젖어있던 머리에서 물이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져 내렸다.
순간 태블릿을 보던 양은비가 속사포 같은 질문을 쏟아낸다.
“저희도 모르게 언제 팬카페를 만들었어요? 아니 그보다 운영진은 누구예요?”
“그때 횡성에서 만난 애들.”
소파에 축 늘어져 있던 세리가 벌떡 일어났다.
“진짜요? 대~박!”
세리는 횡성여고 4인방이라면 일당백이라며 기쁨의 막춤을 추기 시작했다.
주먹을 쥔 두 손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엉덩이를 씰룩대는데 마치 관광버스 막춤을 보는 것 같다.
‘세리야? 이번 곡 댄스는 연습 잘하고 있는 거 맞지?’
은아가 비글처럼 움직이는 세리를 겨우 진정시켰다.
“일단 너희들은 홍보팀에서 계정 하나씩 따로 줄 테니까 개인 아이디로는 가입하지 마. 혹여 안 좋은 글들이 올라올 수도 있으니까.”
체리블라썸 멤버들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 그리고 상봉이랑은 이번에 처음 보지?”
입구에 멀뚱히 서 있던 정상봉을 불렀다.
정상봉이 다가와 아이돌처럼 허리를 숙였다.
“아 안녕하십니까! 신입사원 정상봉이라고 합니다!”
정상봉의 얼굴을 본 체리블라썸 멤버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분 어디선가 본 거 같은데······.”
“올림픽 리플레이 화면이나 정규 방송 끝나고 애국가 나올 때 봤을걸?”
내 말에 세리가 손뼉을 짝하고 치며 답했다.
“아 애국가에서 돌려차기하는 그 태권도 아저씨다!”
“어머? 정말?”
“어디 어디? 아저씨 손 좀 치워 보세요. 어 진짠데?”
소녀들이 몰려들자 정상봉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런데 아저씨라니?
정상봉이 남성적인 외모라 자기 나이보다는 조금 더 들어 보이지만 올해 고작 24살이면 아저씨라는 말을 들을 나이는 아닌데.
“세리야. 아저씨라고 하면 어떻게 해. 상봉이가 나보다 세 살은 더 어린데.”
세리가 이크 하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태권 매니저님!”
“괘 괜찮아요.”
세리의 사과에 양은비가 킥킥대며 물었다.
“하긴 두 분 성씨가 같으니까 앞으로 정상봉 매니저님은 태권 매니저님이라 불러도 돼요?”
“그 그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그렇게 정상봉의 호칭은 여기서도 태권 매니저가 되었다.
“자자. 다들 와서 밥 먹자. 정 대리하고 신입도 와서 한 술씩 해.”
집안일을 도와주시는 이미자 이모님과 함께 저녁 준비를 하던 이주영 대리가 우릴 식탁으로 불렀다.
오늘도 레슨이 있기에 저녁을 든든히 먹이는 건 필수였다.
식탁에 둘러앉은 체리블라썸의 얼굴이 만개한 꽃처럼 피어났다.
컴백 무대를 위해 식사량을 조절하지만 저녁은 하루 중 유일하게 제대로 된 식사를 하니까.
테이블 한가운데는 간장 소스에 버무린 불고기 요리가 메인으로 올라와 있었다.
그마저 야채가 절반은 넘지만 아이돌 식단에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진수성찬이다.
“고기다! 이모! 누구 생일이에요?”
푸근한 인상의 이미자 이모님이 반찬을 하나둘 내려놓으며 답했다.
“오늘 우리 애기들 뮤직비디오 나온다며? 먹고 힘내라고 마련해 봤어. 자자. 어서들 먹자.”
“와 감동. 역시 우리 이모가 최고야!”
세리가 이미자 이모님을 뒤에서 껴안았다.
이미자 이모님이 세리의 작은 머리통을 살포시 어루만지자 세리가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었다.
“그동안 고생 많이 했으니까 이번에야말로 꽃 한번 피워보자.”
“네!”
나와 정상봉도 의자를 빼고 앉아 젓가락을 들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손 머리 위로! Hurry~ Up!』
미리 녹음해 둔 체리블라썸의 신곡인 이 경쾌한 벨 소리로 흘러나왔다.
전화를 받자 이동민 실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8시에 너튜브랑 네이브에 우리 뮤비가 올라갈 거야. 애들 댓글 보고 멘탈 흔들리지 않게 관리 잘하고.
“예. 실장님.”
그 뒤로 몇 가지 지시를 받은 뒤에야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날 쳐다보는 체리블라썸 멤버들의 눈빛이 초롱거렸다.
“부담되게 왜 그렇게 쳐다봐?”
우연희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벌써 우리 곡으로 벨 소리 설정하셨어요?”
“어.”
“흑! 나 감동해서 눈물 나려고 그래.”
세리가 나오지도 않는 눈물을 찍어내려 하고 있었다.
“감동은 무슨? 이 정도야 기본이지. 그리고 세리는 오버 금지.”
“오버 아닌데 히잉!”
세리가 장난스레 토라진 표정을 지었다.
이제 중3으로 올라가는데 여전히 애다 애.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거실 테이블에 앉아 노트북을 펼쳤다.
그리고 초조하게 회사 공식 너튜브 채널에 영상이 업로드되기를 기다렸다.
10분 정도 지났을 무렵.
“오빠. 아직 업로드 안 됐어요?”
댄스 레슨에 갈 복장 차림을 한 양은비와 세리가 내 곁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 뒤로 우연희와 은아도 내 곁으로 다가왔다.
레슨을 가기 전 뮤직비디오가 너튜브에 올라오는 건 눈으로 꼭 확인할 거라며.
“아직. 이제 59분이니까 곧 업로드될 거야. 조금만 기다려.”
난 네 사람을 달래며 노트북 F5키 위에 손가락을 살포시 올려놓았다.
“잘 되겠죠?”
우연희의 말투에는 두려움과 긴장감이 어려 있었다.
“당연하지. 곡 좋고 가사 좋고 거기에 안무까지. 회사에서도 마케팅에 신경을 쓰고 있고. 하나도 빠지는 게 없으니 걱정하지 마.”
“쁘띠모가 있어도요?”
“있어도.”
우연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우연희가 조심스레 내 오른쪽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오빠. 잠깐만 이렇게 있을게요.”
내 어깨에 올라간 우연희의 손이 잔잔히 떨리고 있었다.
양은비도 그걸 보고 따라서 내 왼쪽 어깨에 손을 올렸다.
“저도요.”
막내 세리는 내 등에 업히듯 달라붙었고.
“난 여기.”
찰싹.
내 등에 업힌 세리는 뒤편에 떨어진 은아에게도 손짓했다.
“은아 언니. 언니도 빨리 와.”
결국 은아도 내게 다가와 내 양복 상의 끝자락을 쥐었다.
‘그래 그렇게 해서라도 니들 마음이 편하면 좋을 대로 해라.’
날 붙잡은 4인의 소녀들의 손끝 모두에서 떨림이 느껴졌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이어진 이기철 이사의 방해와 가수 1실의 방해.
심지어 트레이너 때문에 연습실도 제대로 쓰지 못해 지하 공연장을 무대 삼아 연습했던 순간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이젠 그런 설움은 안녕이다.
이 1위를 하게 되면 체리블라썸의 대우가 극명하게 달라질 테니까.
난 걱정하는 체리블라썸을 향해 자신 있게 말했다.
“괜찮아. 우리 잘 될 거야.”
비록 업계 1위인 쁘띠모와 같은 날 같은 시각에 맞붙게 되어버렸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내 토닥임에 네 사람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동안 자기들도 열심히 노력했다면서.
“잘 될 거야. 잘 될 거야.”
마법과도 같은 주문을 네 사람과 함께 외다 보니 어느덧 8시가 되었다.
“오빠. 눌러요!”
“응.”
F5를 눌러 회사 너튜브 채널 창을 새로 고침 했다.
체리블라썸의 신곡 이 회사 너튜브 채널 제일 상단에 올라와 있었다.
“떴다!”
그런데.
뮤직비디오 조회수의 증가 속도가 내 생각과는 다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