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1화
101. 바뀌는 미래 1
강감찬 대표는 서예종 라인에 맞서기 위한 자신만의 계획을 털어놓았다.
“내가 왜 이 나이에 그토록 바쁘게 중국과 일본 심지어 미국까지 돌아다녔겠냐? 우리 애들 콘서트와 행사 때문에란 핑계긴 했지만 그거야 눈가리개고.”
굴렁쇠 엔터는 빠르면 2년 늦어도 3년 안에는 상장할 예정.
강감찬 대표는 그 시기에 맞춰 해외 엔터 업계의 파트너를 우호 세력으로 끌어들이려고 하고 있었다.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기회다.’
서예종 라인과 강감찬 대표의 라인이 맞부딪힐 때 내가 끼어들 수 있다면?
균형추를 기울여 김동수와 서예종 라인을 이 회사에서 몰아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주식 상장 때 끼어든다는 건 지분 싸움을 해 보겠다는 뜻이니까.
‘나도 돈을 좀 넣으면 좋을 텐데. 그 전에 무슨 수로 돈을 모은다?’
현재 내 통장에 있는 돈은 2천만 원뿐.
예뜨랑 상장도 앞으로도 몇 년은 더 지나야 하니 제외.
난 회귀 전 기억을 되살리느라 잠시 깊은 생각에 빠졌다.
몇 가지 방법을 떠올렸을 무렵 갑자기 몰아닥치는 적막감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고개를 들자 강감찬 대표가 날 흐뭇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한 거냐?”
잠깐 고민하던 난 솔직히 답하기로 생각했다.
강감찬 대표가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았으니 나 역시 어느 정도는 털어놓는 게 예의였으니까.
“······저도 한몫 벌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으하하하! 하여튼 이놈 이거 배짱 좋은 거 좀 봐라.”
강감찬 대표의 너털웃음이 사무실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하지만 그는 지분 싸움에 끼어들려는 내 진짜 뜻을 알아챈 듯했다.
강감찬 대표는 웃음을 그치고 내 손을 덥석 붙잡았다.
“그래. 어디 마음껏 벌어 봐라.”
두툼한 그의 손에서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 * *
대표 이사에게 인사를 마친 김동수는 자기 사무실로 주호성을 데려갔다.
“어때? 네가 상대할 놈을 만나본 소감이?”
“뭐 소감이랄 것까지야 있습니까? 얼굴 잠깐 본 게 끝인데요.”
하지만 주호성 팀장의 자신만만한 태도는 정윤호를 만나기 전과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하더니만 왜 인상을 찌푸리고 그래?”
주호성이 안색을 고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아닙니다. 그놈. 1년 차 아니 이제 2년 차라고 하셨죠. 맞습니까?”
“그게 뭐가 문제야?”
“코앞에 실장 이사 대표. 사실상 이 회사를 이끌어가는 핵심 경영진이 있는데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있는 말단 사원이라니. 뭔가 이상해서요.”
“이상해?”
“예. 제 놈이 무슨 정체를 숨긴 재벌 2세도 아니고.”
그제야 김동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호성이 단순히 궁금해한다는 걸 깨달은 탓이다.
“정윤호 그놈 원래는 안 그랬는데 갑작스레 변했어.”
“갑작스럽게 변해요?”
김동수가 곰곰이 기억을 더듬었다.
“작년 연말 정도였나? 영인이······. 아후. 생각만 해도 열 받네. 하여간 영인이 걔 스케줄이 펑크 난 날 이후로 갑자기 사람이 변했더라고. 그전에는 저놈도 다른 신입과 똑같이 멍청했는데.”
주호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모르지 뭐. 그때 강감찬 라인에 선 놈들이 뭔가 제안을 했을지도.”
잠깐의 적막이 흐른 뒤 김동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자자. 하여간 배우 3실과 정 대리는 자네가 좀 잘 맡아서 처리하라고.”
“알겠습니다. 제가 특별히 신경을 쓰겠습니다. 그러니까 실장님은 이런 일은 잊고 이사님과 함께 큰일만 생각하십시오.”
김동수가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주호성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씨익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실장님. 제 스타일 잘 아시죠? 기존 팀장들하고 충돌이 좀 있을지 모르는데 괜찮겠습니까?”
“흐흐. 알아서 해. 당하는 놈이 멍청한 거 아니겠냐?”
히죽 웃어 보인 주호성이 엄지를 치켜들었다.
주호성이 나가자 김동수는 웃음 섞인 얼굴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김 실장님? 이 시간에 웬 일이십니까?
전화 너머에서 최성문 감독의 최측근인 제작실장 가은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저희 약속 말입니다만 5월 초로 좀 미뤘으면 해서요.”
-5월 초요?
“예. 이쪽에 사정이 생겼습니다.”
건너편에선 잠깐 고민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조금 빡빡하긴 하지만 그렇게 하시죠.
“감사합니다. 그리고 최 감독님 다음 작품 주연으로 차태훈 어떠십니까?”
-좀 앞서가는 거 아닙니까? 차태훈도 나쁘진 않은데 아직은 감독님 의중을 몰라서······
최성문 감독의 <경계 너머로>의 주연 오디션은 5월 15일.
김동수는 3실의 배우인 차태훈을 주연을 내정하려 하고 있었다.
상대가 고민에 빠지자 김동수는 슬그머니 제안을 건넸다.
“제대로 밀어주시면 리베이트로 출연료의 30% 떼 드리겠습니다.”
건너편의 남자가 키득대며 웃었다.
-좋습니다. 그러면 몸값을 최대한 높여 봐야겠네요. 차태훈 씨 정도면 7억 선에 맞춰 보죠.
“그러지 마시고 이번 기회에 10억까지 올려보시죠.”
편당 5억인 차태훈의 몸값을 더 올려보라는 김동수의 제안에 상대의 고민이 길어졌다.
하지만 성공한다면 10억 중 3억을 개인 호주머니로 챙길 수 있는 제안이다.
물론 이 돈은 김동수 측과 나눠야 하지만.
-끄응. 한번 해보죠. 그러면 하던 대로 제가 받는 금액에서 30%. 그러니까 9천만을 실장님 계좌로 넣어드리면 되죠?
“이번엔 50%까지 부탁드립니다.”
-1억 5천이요?
“예. 돈 들어갈 데가 좀 많이 있네요. 대신 다음 계약은 100%를 전부 김 실장님 몫으로 챙겨 드리겠습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평상시보다 더 달라는 김동수의 요구는 갑작스러웠지만 잠시의 고민 끝에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쩝. 이번은 액수가 크니까 그렇게 합시다.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은 김동수 실장이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크흐흐. 강 대표가 없어지니까 눈치 볼 사람이 없어서 좋네. 이대로 쭉 쉬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전화를 끊은 김동수가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다시 전화를 들었다.
“예. 김동숩니다. 호성이는 잘 왔습니다. 예 제가 잘 키워보겠습니다. 그리고 회사 상황은···. ”
김동수는 회사 밖 누군가에게 회사에 일어나는 상황을 보고하기 시작했다.
* * *
구성철 실장의 호출이 왔다.
그런데 막상 실장실 문을 열자 구성철 실장은 어디 갔는지 없고 신입인 정상봉만 홀로 소파에 몸을 구기고 앉아 있었다.
어찌나 다리가 긴지 굽힌 무릎의 높이가 내 허리까지 오는 것 같다.
정상봉이 날 발견하고 벌떡 일어나 마치 아이돌처럼 허리를 90도 각도로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정상봉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정윤호입니다.”
나는 정상봉에게 악수를 청했다.
“아 예. 정윤호 대리님. 제 사수가 되실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말씀 편하게 하십시오.”
“천천히 하죠.”
손을 맞잡자 굳은살이 있는 정상봉의 손이 느껴졌다.
순간.
회귀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정상봉은 잘생긴 외모와 스펙 때문에 잠시 매니저를 하다가 연예인으로 나갈 거로 다들 생각했었다.
하지만 굴렁쇠가 망할 때까지 정실모들과 함께 하며 끝끝내 매니저로 남는 심지 굳은 녀석이다.
그리고 내가 탑 엔터테인먼트로 갈 땐 날 찾아와서 격렬히 대들기도 했었다.
-형. 김 실장을 따라가? 미쳤어? 형이 어떻게 유진이랑 굴렁쇠를 배신할 수가 있어?
그때의 기억이 여전히 선명히 남아 있었다.
날 마치 친형처럼 따르던 정상봉과의 마지막 이별은 씁쓸했다.
두 번 다시 날 보지 않겠다고 다짐한 정상봉은 그 뒤로 자신의 말을 지켰다.
탑 엔터테인먼트로 간 이후로도 정상봉을 본 적은 없었으니까.
‘이번엔 안 떠날게 상봉아.’
내 흐뭇한 표정을 본 정상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리님? 제 얼굴에 뭐라고 묻었습니까?”
“아 죄송합니다. 하하. 금메달리스트를 직접 보니 감회가 남다르네요.”
정상봉이 부끄러워하는 기색을 띤다.
“아닙니다. 다 지나간 일입니다. 앞으론 매니저 일만 열심히 하겠습니다!”
정상봉을 마주하자 괜히 웃음이 난다.
뒤늦게 구성철 실장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벌써 인사들 했어? 일단 앉지.”
소파에 앉은 구성철 실장은 정식으로 정상봉을 내게 맡겼다.
“앞으로 여기 상봉이 데리고 잘 한번 해봐라. 상봉이 너도 열심히 배우고 니 사수 직책이 대리라지만 우리 2실의 실질적인 에이스다.”
“예. 실장님. 정 대리님 소문은 저도 들었습니다.”
“그래. 윤호 하는 거 반만 따라가면 너도 이 업계에서 쓸만한 놈이라는 평가는 받을 거다.”
“아 실장님도 참. 그만 좀 띄워주십시오.”
“뭘 맞는 소리만 했는데.”
우리 실장님이 후배 앞이라고 너무 띄워주시네.
“자 그러면 상봉 씨 아니. 상봉아. 갈까?”
평생 선배에게 반말만 듣던 정상봉이 너무도 불편해한 터라 결국엔 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예. 대리님!”
그제야 정상봉의 얼굴에 웃음이 돈다.
정상봉의 힘찬 목소리에 든든해졌다.
서예종 라인과 함께 싸울 동료가 또 하나 늘었으니까.
그것도 S급으로.
* * *
낯선 사람을 꺼리는 미소에게 정상봉을 어떻게 인사를 시킬까 걱정했다.
하지만 미소는 정상봉을 보자마자 짧은 다리로 기마 자세를 취하고는 주먹을 내질렀다.
“태권!”
미소가 정권 찌르기를 한 채 그대로 멈춰 있다.
왠지 칭찬하기 전에는 자세를 바로 하지 않을 거 같았다.
정상봉이 내 눈치를 보다 두 손을 몸 중심에 모으고 외쳤다.
“바로!”
순간 미소가 활기차게 말하며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네 선생님!”
씩씩한 표정으로 잠깐이나마 태권 소녀가 된 미소에게 물었다.
“미소야. 정상봉 매니저는 어떻게 알아? TV에서 봤어?”
미소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요. 작년에 체험 학습할 때 봤어요. 태권 선생님이 친구들 앞에서 시험 아니다 시범 보여주셨어요!”
미소는 작년 서울 전역에서 모인 유치원생의 태권도 체험 학습 때 정상봉을 만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래?”
“응! 태권 선생님이 그때 나 엄청 잘한다고 칭찬도 했어요!”
정상봉이 직접 손까지 잡아주며 자세를 교정해 줬단다.
이런 우연이 있나.
태권도 선생이니까 태권 선생이라고?
말 되네.
유진이도 만족한 듯 웃음을 지었다.
“오빠. 앞으로는 정상봉 매니저님이 우리 챙겨주시는 거예요?”
“내가 없을 때는. 왜? 마음에 안 들어?”
유진이가 미소를 안아 올려 눈을 맞췄다.
“미소야. 태권 선생님이 앞으로 엄마랑 우리 미소 도와준다는데 괜찮아?”
미소가 눈을 크게 뜨며 놀란 표정을 짓는다.
“진짜?”
“응. 미소 생각은 어때?”
미소가 아주 잠깐의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난 좋아!”
어차피 전담 매니저로 합격 불합격의 여부는 최종 심사관인 미소의 몫.
유진이도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부탁드려요. 정상봉 매니저님.”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유진 씨.”
정상봉이 유진이와 인사하는 동안 유진이의 곁에 있던 미소가 갑자기 내 곁으로 조로로 달려왔다.
“삼촌. 삼촌. 이거~!”
미소가 색종이를 잘라 만든 작품이라며 내밀었다.
“뭔데?”
“내가 만든 거예요.”
붉은 바탕색에 푸른 뿔 검은 꼬리가 있는데 악마인가?
도저히 정체를 모르겠다.
“이게 뭐야?”
“천사!”
아······ 뿔이 달리고 얼굴색이 붉긴 하지만 천사였구나······.
“우와! 예쁜 천사다! 그치?”
“응! 천사가 삼촌 아픈 거 다 무찔러줄 거예요. 부적이니까 꼭 가지고 다니세요!”
건강 검진 결과 위에서 헬리코박터균이 나왔기에 약을 먹는다고는 말을 했었다.
그걸 기억한 미소가 특별히 준비했다고 한다.
쳐다만 봐도 위염이 생길 거 같은 무서운 천사지만 괜찮다.
미소가 만들어 준 거니까.
난 조심스레 색종이로 만든 천사를 받아들였다.
“고마워. 미소야.”
미소가 배시시 웃는다.
“그리고 삼촌.”
미소가 손짓으로 날 앉아 보라고 한다.
왜 그러지?
“응? 왜?”
“빨리! 빨리.”
무릎을 살짝 꿇고 앉았더니 미소가 두 손을 모아 내 귀에 가져다 댄다.
“난. 태권 선생님보다 삼촌이 더 좋아!”
수줍은 고백을 마친 미소가 다시 한번 웃는다.
미소의 고백 때문에 하늘을 날아갈 거 같은 기분이 든다.
악마는 무슨?
내 손에 들린 건 진짜 천사가 확실했다.
비록 붉은 피부에 꼬리도 달리고 삼지창도 들고 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