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라이프 플레이어 (982)
After Story 21· 모녀
“언니는 조만간 시간 좀 내 줘· 앞으로 가족으로 묶이는 만큼 우리끼리 짚고 넘어가야 할 이야기가 있지 않겠어?”
“네 알겠어요· 제가 언제든 시간 낼 수 있도록 할게요·”
“그리고 은하 너는 당분간은 우리한테 시간을 쓰도록 하고·”
“알고 있어 당연히 그래야지·”
이리하여 걱정하고 있던 문제는 어찌어찌 무사히 일단락됐다·
이리야와의 결혼을 허락받은 은하는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안도했다·
‘어떻게 잘 끝나서 다행이야· 한동안 가족들 눈치가 보이고 사람들 입방아에도 오르겠지만 어쩔 수 없지·’
온전히 감내해야 할 몫이다·
은하는 마음을 다잡기로 했다·
그러나 삐진 하백련 앞에서는 쩔쩔맬 수밖에 없었다·
“안녕하세요 십 이 좌 필 두 님?”
“백련아 나랑 얘기 좀····”
“어머나 이거 죄송해서 어쩌죠? 안타깝게도 제가 좀 바빠서 시간을 내기 힘들 것 같네요·”
“····”
“혹시 중요한 용무인 거라면 제 비서한테 문의해 주세요· 시간 조율해 보도록 할게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아····”
한동안 하백련은 거리를 두듯 은하를 대하고는 했다·
은하는 그녀의 무관심한 태도에 충격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안 돼 이대로 두면····”
하백련에게 미움받고 싶지는 않았다·
그날부로 은하는 어떻게든 그녀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갖은 애를 써 댔다·
다행히도 노력은 빛을 발했고 마침내 자리가 마련됐다·
꼴깍! 꼴깍! 꼴깍····
“카악!”
“····”
판도라 클랜회관 근처의 치킨점·
하백련이 주문한 맥주가 나오자마자 대뜸 벌컥 들이켰다·
그녀가 준성인으로 인정받고 처음 술을 마신 날을 기억하는 은하로서는 얼떨떨할 수밖에 없었다·
‘얘가 잘 마시지도 못하면서 갑자기 왜 이래?’
입에 쓰다며 잔뜩 인상을 쓰고 이후로는 굳이 찾아 마시지 않고 분위기에 낄 겸 홀짝이기만 하던 하백련은 어디에 갔다는 말인가·
설마 자신이 공략하러 떠난 사이 하백련의 입맛이 변하기라도 한 걸까?
머릿속에서 온갖 상상을 펼친 은하는 떨떠름하게 타일렀다·
“백련아 천천히 마셔· 혼자서 막 나가면 어떡해? 안주도 먹고·”
“진짜 어떻게 이럴 수 있어요!?”
탕!
은하의 충고는 듣지도 않고 끝내 술잔을 바닥까지 비운 하백련이 울컥하며 따졌다·
그러면서 일부러 소리가 나도록 술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오빠가 사람이에요? 짐승이지! 아니 여자라면 다 좋은 거예요? 가서 던전만 공략하고 와야지 왜 이리야 언니를 공략해 오냐고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맨날 어쩌다 보니지!”
테이블에서 반쯤 몸을 일으킨 하백련이 씩씩거린다·
마땅히 변명할 말이 없던 은하는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하백련은 볼을 부풀렸다·
“진짜····”
“백련아 일단 물부터 마시자· 취하겠다· 너는 더 마시지 마· 콜라 시켜 줄게·”
“애처럼 취급하지 마요· 저도 이제 준성인이거든요? 정식으로도 이제 2년도 안 남았거든요?”
은하가 컵에 물을 따라 건네자 하백련이 홱 받아 갔다·
이번에는 물을 벌컥 들이켠 그녀가 입을 열었다·
“다섯 명까지는 이해했거든요? 근데! 여섯 명은 너무하지 않아요?”
“무슨 소리야? 여섯 명이라니? 이리야를 더하면 다섯 명인데?”
은하는 고개를 갸웃했다·
한편으로 하백련이 취한 건지 염려가 되기도 했다·
얼굴이 빨개지고 있었으니 더더욱·
“거 거기서 더 들일 거잖아요· 그럼 여섯 명이지·”
“아니 더 이상은 안 들일 거야· 진짜 이리야까지가 끝이다 끝· 내가 하렘에 미친 놈도 아니고····”
“네에!? 왜 안 들일 건데요!? 더 들여요!”
“뭐?”
“다섯 명이나 여섯 명이나 한 명밖에 차이 안 나잖아요! 그리고 홀수보다는 짝수가 낫고!”
“너 취했니?”
“으으····”
하백련의 눈동자가 핑핑 돈다·
그녀가 은하의 시선을 피해서는 테이블에 콩 머리를 박았다·
‘취한 게 분명하네·’
은하는 납득했다·
이내 키득 웃음이 나왔다·
‘취하면 헛소리를 하는 건가? 귀엽네·’
은하는 조용히 손을 뻗어 하백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테이블에 엎드려 있던 그녀는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손목을 잡아서는 다른 곳으로 가져다 대기도 했다·
“더 해 줘요· 오빠 없는 동안 이거 그리웠단 말이에요·”
“그래 알았다·”
“이제 어디 멀리 안 갈 거죠?”
“음···· 아마도?”
“그럼 이제 제 옆에 있어요· 십이좌 필두란 사람이 말이에요 얌전히 선녀 옆에 있어야지 다른 나라에 가 있어서 되겠어요?”
“미안하다 잘못했다· 앞으로는 백련이 네 곁에 있을게·”
“약속이에요·”
하백련이 새끼손가락을 내민다·
은하는 순순히 그녀의 새끼손가락에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자 약속· 이제 용서해 줄 거지?”
“흥 겨우 한 번으로는 안 먹혀요· 당분간 제가 잘 지켜볼 거예요· 저한테 잘해 주나 안 해 주나·”
고개를 돌려 옆얼굴을 드러낸 하백련이 흥 소리를 낸다·
은하는 피식했다·
“그래 내가 얼마나 잘해 줄지 기대하고 있어·”
이로써 하백련의 화가 풀렸다·
은하는 만족했다·
벽해수로부터 연락이 온 것은 그로부터 얼마 뒤였다·
[은하야 얼른 공방으로 와라! 드디어 완성했다!]
* * *
벽해수에게 연락을 받고 나서 그의 공방으로 향하는 길·
생각할수록 황당할 수밖에 없던 은하는 혀를 내둘렀다·
‘이 형도 참···· 결혼을 했으면 신혼 생활이나 좀 즐길 것이지 귀국하자마자 내내 공방에 틀어박혀 작업이나 하고 있었다니····’
벽해수답다면 참으로 벽해수다웠다·
다만 신부에게 바가지를 긁히기 십상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마르티나 씨···· 아니 형수님을 잘 만난 셈인가·’
조금 전에 벽해수에게 듣기로는 마르티나와 함께 작업에 매진하며 행복한 신혼을 구가하는 중이라나····
용광로의 열기로 몸을 데우고 땀을 흘리고 합을 맞추며 매일같이 자식이나 다름없는 무구들을 만들고 있다나 뭐라나····
은하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딱히 이해하고 싶지도 않고···· 두 사람이 좋다면 좋은 거지· 둘이 아주 천생연분이라니까·’
어느덧 공방에 도착했다·
은하는 벽해수를 찾았다·
방 안으로 들어선다·
“해수 형 나 왔어·”
“어 왔어? 들어와 들어와!”
“어서 와 은하 동생·”
안에는 마르티나도 있었다·
그녀가 벽해수와 함께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은하는 두 사람과 인사했다·
한편으로는 물음이 나왔다·
“그런데 형수님 방금 저한테 동생이라고 한 거예요? 이제 저를 뭐라 부를지 정했나 보네요·”
“응 이 사람이랑 머리 맞대고 고민하느라 참 힘들었지 뭐야· 내가 편하게 한국의 예법에 따라 서방님이라 부르자니까····”
“서방님이란 호칭은 껄끄럽잖냐·”
“나는 신경 안 쓴다는데도 이 사람이 계속 안 된다고 우기는 거 있지?”
“네가 한국인이 아니라서 그래·”
“나도 이제 한국인이거든?”
“아무튼· 얘 서방은 나뿐인데 왜 너한테도 부르냐는 말이지· 은하야 너는 안 불편하냐?”
“뭐···· 익숙지 않아서 그런지 불편한 느낌이 없지는 않지?”
“거봐 얘도 그러잖아·”
장난스럽게 눈을 흘기며 말하는 벽해수와 마르티나의 사이가 정답다·
은하는 그 모습을 달가워하며 쓴웃음을 흘렸다·
“아무튼 서방님이 안 된다니까 그럼 은하 씨라고 하자고 했거든? 그랬더니 이 사람이····”
“씨 호칭은 거리감이 느껴지잖아·”
“이랬다니까? 그래서 고민 끝에 은하 동생으로 타협하기로 했지· 마침 내가 연상이기도 하고· 혹시 기분 나쁜 건 아니지?”
“아니요 저도 동생이란 호칭이 더 마음에 드는데요? 앞으로도 그렇게 불러 주세요·”
“그래 은하 동생! 앞으로 잘 부탁해·”
“저도요·”
그렇게 호칭을 정리하고 난 뒤·
세 사람은 본론으로 넘어갔다·
“그래서 형 검은? 이제 슬슬 보고 싶은데····”
“어 따라와· 안에 있어·”
은하는 벽해수의 안내에 따라 별도로 마련된 공간으로 들어갔다·
가지런히 정돈된 테이블 위에는 목함이 하나 놓여 있었다·
“웬일이야?”
“뭐가?”
“형이 정리를 다 해 놓고· 원래 안 이랬잖아·”
“아아 우리 아내님 덕분이지· 너 온다고 하니까 치우더라고· 그나저나··· 너는 평소에 나를 어떻게 보고 있던 거냐?”
“이 사람이 장인 정신만 있지 다른 데에는 통 관심을 안 두니까···· 그러면서 나한텐 관심을 가지고 참 신기하단 말이야?”
“···형수님 앞으로도 우리 형 잘 부탁드릴게요·”
벽해수가 사람을 잘 만났다·
새삼 그 사실을 실감한 은하는 농담조로 소감을 전했다·
그러자 벽해수는 어처구니없어했고 마르티나는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그렇고 이 사람이 처음에 아이기스를 보여 줬을 때는 진짜 깜짝 놀랐지 뭐야? 세상에 이탈리아의 국보를 훔쳐 올 생각을 하다니···· 뭐 덕분에 즐거운 경험이기는 했지만·”
“훔쳐 오다니 그런 적 없는데요? 아이기스가 알아서 따라온 거지·”
“크흠! 은하 말이 틀리지는 않지· 어쨌든 어서 열어 보기나 해·”
“응 그게 낫겠다·”
새로운 맹고슈를 확인하기로 한다·
은하는 목함을 열었다·
“····”
뫼 산(山) 형태로 본뜬 가드에 새하얀 검신으로 이루어진 맹고슈·
은하는 강렬한 끌림을 느끼고 그대로 홀리지 않을 수 없었다·
손으로 가져간다·
“어때? 마음에 들어?”
“···어· 마음에 들어 엄청·”
“그럴 줄 알았다·”
벽해수가 자랑스러워하는 가운데 은하는 찬찬히 맹고슈를 살폈다·
아니 감상했다·
이내 체내 마나를 불어넣자·
화아악!
“····”
새하얀 검신에 변화가 일며 흩날리는 푸른 꽃잎들이 나타났다·
입체적이면서 생생한 움직임에 은하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홍화검이랑 모녀 검이라 그런가? 이 검에도 꽃이 피더라고·”
“좋네· 더 마음에 들어·”
“네 기대에 부응한다니 다행이네· 어떤 섭리가 깃들었는지는 알겠어?”
“···어· 지금 막 흘러들어 왔어·”
상대의 공격을 흡수해 반사하거나 다른 방식으로 응용·활용할 수 있다·
그리고 피해를 준 대상에게 고차원적인 석화 마법을 건다·
이외에도 손에 쥔 맹고슈에는 여러 섭리가 깃들어 있었다·
하나의 디바이스나 아티펙트에는 하나의 섭리만 깃들 수 있다는 하나하나 법칙에 위배되지 않게 ‘아테나의 권능’이란 명칭 아래 하나의 섭리로 묶여서·
은하는 입가를 끌어 올렸다·
흡족했다·
“이름은 네가 지어 줘라·”
“···푸른 꽃잎이 인상적이니까 푸를 청(靑)에 꽃 화(花)를 써서 청화검(靑花劍)이 좋겠어·”
“어째 너라면 그럴 줄 알았다· 괜찮네· 홍화검이랑도 연관성 있고·”
은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청화검도 찬성한다는 듯이 맑은 진동 소리를 냈다·
우우웅!
그러는가 싶더니····
“···어?”
화아악!
별안간 청화검이 빛을 내뿜었다·
그리고 은하의 손에서 벗어나서는····
“드디어 이렇게 만나는구나·”
여인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 * *
다소 곱슬거리는 갈색 머리칼에 이채를 띠는 회색 눈동자·
그리고 머리에 쓴 월계관과 가슴에 찬 푸른 흉갑이 인상적인 장신의 여성·
은하는 단번에 정체를 알아보았다·
“아테나?”
“이름으로 부르다니 서운하구나· 누나라고 부르거라·”
아테나가 입술을 삐죽였다·
그러더니 대뜸 손을 뻗어 은하를 품속으로 끌어당겼다·
졸지에 그녀에게 껴안긴 은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키 차이가 난 탓에 그녀의 흉갑에 파묻히고 말았으니····
숨이 막힐 듯이 괴로웠다·
“우웁! 자 잠깐 아테나···!”
“어허 누나라니까·”
아테나가 근엄하게 대꾸했다·
은하는 얼른 항복이라도 하듯 그녀의 호칭을 정정해 주었다·
“누 누나····”
“그래 동생아·”
아테나의 토라진 얼굴이 풀리고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그제야 그녀는 만족한다는 양 은하를 풀어 주었다·
은하는 연유를 파악하려 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그냥 편하게 부르거라· 어차피 나는 근본적으로 네 검이니·”
“알았어· 어떻게 된 일이야?”
“아버지가 왕홀을 매개로 삼아 현현했을 때와 같은 이치다· 우리 같은 격을 지닌 존재라면 못할 것도 없지· 지금까지는 그릇이 불안정하기도 했고 동생을 위해 눈에 띌 수는 없어서 자중하고 있었던 거다·”
“여명검은 안 이랬는데····”
“어머니 이전의 검 말이냐? 우리와 같은 격을 지녔다면···· 할 수는 있었지만 구태여 안 했다고 봐야겠지· 무구로서의 존재에 집중하기 위해· 하지만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들은 보다 인격 신에 가깝거든· 무구로서만 존재하고 싶지는 않다고 할까· 그런 의미에서····”
아테나가 회색 눈동자를 굴렸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홍화검이 있었다·
“어머니도 모습을 드러내시지요· 계속 그 상태로만 계실 겁니까?”
나 나는 이대로라도 좋구나····
홍화검이 우물쭈물 사념을 전달했다·
간접적인 거절이었다·
하지만 아테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낯을 가리지 말아 주세요 어머니· 부디 딸한테 옥안을 보여 주시지요· 그동안 쭉 뵙고 싶었으니까요·”
····
“어머니도 저나 여기 동생을 직접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녀는 거듭 설득하려 들었고 끝내 성공했다·
홍화검이 마지못해 응한 것이다·
···알았다·
직후 홍화검이 빛을 발했다·
은하의 허리춤에서 벗어나서는 여인의 형상으로 화한다·
화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