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라이프 플레이어 (981)
이따금 몬스터들을 맞닥뜨리거나 해적들의 습격을 받기도 했지만 별다른 문제는 되지 않았다·
한국으로의 항해는 순조로웠다·
“돌아왔구만 드디어····”
한국 영해에 진입한 지 어느덧 저 멀리 인천항이 보이고 있었다·
조금 후에는 부두에 닿으리라·
몇 개월간의 여정에 정식으로 마침표를 찍게 되는 셈이다·
“하아····”
십이좌 〈풍술사〉 채선우·
거의 난간에 매달리다시피 한 그는 문득 지난날을 회상하고는 묘한 아쉬움을 느꼈다·
그가 한숨을 토했다·
“막상 귀국하려니까 착잡하네···· 이탈리아에 있었을 때가 좋았어· 던전 공략이 힘들긴 했지만 다 같이 고생하는 분위기라 나만 억울하지는 않았으니까···· 복잡하게 머릴 굴릴 필요도 없지 딱히 책임을 지지도 않지 그냥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됐지 나름 소득이 아예 없지도 않았고···· 하 그립다····”
“····”
“무엇보다 던전을 공략하고 나서 대접받을 때가 제일 좋았는데···· 거기 미녀들이 아주····”
으헤헤헤 구시렁구시렁····
채선우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혼자 중얼거렸다·
우연히 옆에 있던 은하로서는 꺼림칙한 심정이기만 했다·
‘가까이 있지 말아야겠다·’
은하는 슬쩍 거리를 벌렸다·
한편 채선우의 푸념은 계속됐다·
“내가 왜 귀화를 거절했을까? 그때 귀화를 제안받았을 때 그냥 넙죽 받아들이는 거였는데···· 그놈의 애국심이 뭐라고 진짜····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그때로 확 되돌리고 싶네· 이봐요 십이좌 필두님아· 신화인지 뭔지 아무튼 그 힘으로 시간을 되돌려 주면 안 될까요? 응?”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다른 사람들도 보고 있는데 십이좌로서 체통이나 지켜요·”
“체통은 개뿔이···· 귀국하면 다시 일에 치여 살게 되겠죠? 아! 일하기 싫다 돌아가기 싫다···· 필두님도 공감하죠?”
“안 하는데요·”
“글쎄요 안 할 수 없을 텐데···· 〈판도라의 성녀〉와의 교제를 허락받을 자신이 있나 봅니다? 아니 이제는 〈판도라의 성모〉라고 불러야 할까요?”
“····”
채선우가 제 일이 아니란 양 낄낄 어깨를 들썩였다·
반면 생각지 못한 조롱을 당한 은하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미간이 꿈틀했다·
“〈풍술사〉 님·”
“아이 우리 필두님· 갑자기 왜 무게를 잡고 그러십니까 무섭게···· 미안해요· 장난이었어요·”
“그렇게 이탈리아가 그리우면 이탈리아로 돌아가는 게 어때요? 직접 바람을 타고 이동해서· 〈풍술사〉 님 실력이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데· 선녀님께는 제가 잘 말씀드릴 테니까 괜찮아요· 걱정하지 말고 이만 떠나세요· 잘 가요 그동안 고마웠어요·”
“죄송합니다 필두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쇼·”
“····”
채선우가 즉시 사과한다·
은하는 군기가 바짝 든 듯 뻣뻣한 자세로 허리를 편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내 눈길을 거뒀다·
“기어오르더라도 적당히 해요 제가 선배로 대우해 줄 때·”
“넵! 명심하겠습니다!”
일부러 씩씩하게 대답하는 채선우·
더 이상 쓴소리를 하고 싶지 않던 은하는 등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그러면서 근심을 드러냈다·
“진짜 어떡하지····”
잠시 후·
배가 인천항에 정박했다·
* * *
인천항 선착장·
주변 일대를 가득 메울 정도로 많은 사람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그들을 배에서 내리는 공략대에게 성대한 환영을 보냈다·
퍼펑!
[경] 한국 공략대의 공략과 귀국을 축하합니다! [축]
“····”
사람들이 크게 환영하는 가운데 곳곳에서 축하 폭죽이 터지고 꽃종이가 휘날렸다·
플래카드가 보이기도 했다·
공략대는 기대 이상의 축하에 다소 어안이 벙벙한 한편으로 환희에 차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입꼬리가 길게 올라갔다·
마중 나온 사람들을 대표하여 임가을과 하백련이 다가온 것은 그때였다·
“어서 와요 우리 공략대 여러분· 〈심해의 던전〉으로부터의 무사 귀국을 진심으로 축하해요· 제가 여러분 덕에 기가 사네요·”
“저도요· 다들 정말 축하해요· 그리고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임가을과 하백련이 축하를 건넸다·
공략대는 선녀와 차기 선녀에게 인정받은 기분에 자부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임가을은 은하를 포옹하며 친근감을 표현하기도 했다·
대외적 이미지를 위한 발로였다·
“잘했어 정말·”
“저 없는 동안에 별일 없었죠?”
“그래 다행히 평화로웠어·”
은하도 의도를 모르지 않았기에 일부러 임가을에게 맞춰 주었다·
그렇게 가볍게 포옹하고 나서는 하백련과 회포를 풀려 했는데····
“백련아 정말 오랜만····”
“잘 돌아왔어요 십이좌 필두님·”
“···?”
사담은 허락지 않겠다는 듯 까치발을 들어 은하를 포옹한 하백련은 형식적으로 응대했다·
은하는 거리를 둔 그녀의 태도에 당혹스러웠다·
‘백련이 얘가 왜 이러지? 설마 카메라를 의식하는 건가? 나랑 과하게 사이가 좋아 보였다가 유착 아니냐는 구설수에라도 오를까 봐? 백련이가 많이 조심스러워졌구나····’
상상의 날개를 펴게 된다·
오랜만에 하백련을 만나 기뻤던 은하는 끝내 아쉬움을 느끼며 포옹을 풀어야 했다·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해요· 알겠죠 십 이 좌 필 두 님? 그럼 저는 다른 분들에게도 인사해야 해서 이만 물러날게요·”
“네···· 알겠습니다 선녀 후계자님· 다음에 봬요·”
“····”
일순·
하백련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가 나직이 으름장을 놓았다·
“진짜···· 진짜 진짜 흥이에요· 흥이다 흥!”
“···?”
하백련이 홱 지나친다·
은하는 멀어지는 그녀를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백련이가···· 삐진 건가? 왜?’
잘 모르겠다·
은하가 고민할 즈음이었다·
“은하야!”
“···오!”
사람들 속에서 기다리고 있던 판도라 클랜원들이 주목을 유도했다·
그중에는 최은혁도 있었다·
은하는 반가운 마음에 냉큼 그에게 다가갔다·
서로 손을 맞잡는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음···· 그럭저럭? 누구 때문에 클랜 지키랴 의정부에 다녀오랴 좀 바쁘기는 했지·”
“미안 고생 많았지?”
“아니야 농담이었어· 은하 너야말로 고생 많았지? 공략 축하해·”
“그래 고맙다· 너 주려고 선물 사 왔으니까 이따 확인해 봐· 별일은 없었지?”
“별일은···· 음···· 없다면 없고 있다면 있었달까?”
“그게 무슨 소리야?”
최은혁의 눈동자가 굴러간다·
은하는 그를 따라 시선을 향했다·
그곳에서····
“아무리 은혁이가 반가웠다지만 그래도 우리부터 먼저 찾는 게 맞지 않나 싶은데···· 좀 서운하네· 아니 많이·”
“다들···· 오랜만이야· 정말 보고 싶었어·”
한서현 정하양 이유정 노은아 노유성 노유란 노유린이 빤히 은하를 쳐다보고 있었다·
뒤늦게 그들을 발견한 은하는 낭패감에 휩싸였다·
이에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얼른 말을 걸었건만····
“그래 우리도 정말 보고 싶었어· 돌아와서 기뻐· 그런데 아무래도 중요한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일단 그것부터 풀어야지 않겠니?”
돌아온 한서현의 답변에는 묘하게 가시가 박혀 있었다·
그녀만 아니라 정하양 이유정 노은아의 시선도 어딘가 매서웠다·
은하는 직감했다·
‘걸렸구나·’
착각이 아니리라·
땀이 삐질삐질 흐르는 기분이다·
은하는 제자리에서 얼어붙었다·
한편·
“그 그럼 나는 이제 서나랑 다른 애들이나 만나러 가야겠다! 은하야 안녕!”
싸늘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한 최은혁은 냅다 줄행랑을 쳤다·
* * *
‘숨 막힌다····’
서울 중구 판도라 클랜회관·
한서현 정하양 이유정 노은아에게 거의 연행되다시피 끌려온 은하는 복도를 걸었다·
곁에는 이리야도 있었다·
“····”
이리야는 주위 여성들의 기세에 잔뜩 주눅이 든 상태였다·
은하로서는 안쓰럽기만 했다·
그러면서도 눈치가 보인 탓에 별다른 도움도 주지 못해 미안할 따름이었다·
그때쯤 복도를 걷던 사람들은 은하의 집무실 앞에 다다랐다·
“들어가자·”
“···그래·”
한서현이 문을 열었다·
은하는 그녀의 뒤를 따라 오랜만에 찾는 자신의 집무실로 발을 들였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 있는 류연화를 발견했다·
“어서 와 기다리고 있었어·”
“연화야·”
류연화가 살가운 티를 내비쳤다·
한편 품에는 아이가 안겨 있었다·
“응애?”
마치 류연화를 연상케 하는 연푸른 머리칼과 눈동자·
은하가 〈심해의 던전〉을 공략하러 간 사이 태어난 아이였다·
아들 노유설·
“···네가 유설이구나· 노유설·”
“응애·”
“안녕? 내가 네 아빠란다· 아빠가 늦게 봐서 미안해· 앞으로는 자주 보도록 할게· 알았지?”
“응애·”
말똥말똥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푸른 눈이 너무나도 사랑스럽다·
노유설에게 다가가 자신을 소개한 은하는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유설아 아빠가 안아 봐도 될까? 연화야 유설이 좀····”
은하는 노유설을 안기 위해 아이에게 손을 뻗으려 했다·
바로 그때·
“안 돼·”
“···뭐?”
류연화가 딱 잘라 거절했다·
뒤이어 정하양 이유정도 끼어들었다·
“그래 안 돼· 뭘 잘했다고 유설이한테 아빠 행세를 하려고? 유설이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이탈리아에서 즐길 대로 즐겼을 테면서·”
“맞아요 안 돼요· 유설이도 얼른 아빠한테 안 된다고 말할까요? 아빠 지지! 때찌! 맴매!”
“····”
어느새 류연화의 뒤편에 선 정하양과 이유정이 은하를 째려본다·
은하는 시무룩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로 인해 세 사람의 마음이 잠시 흔들리기는 했으나····
“유설이 아빠 노릇을 하기 전에 먼저 처리해야 할 일부터 끝내야 하지 않을까?”
“응응 서현이 말이 맞지·”
한서현이 분위기를 다잡았다·
게다가 노은아가 거들기도 하면서 정하양 이유정 류연화의 눈에서는 다시금 전투 의지가 싹텄다·
그리하여·
“이제 집을 떠나 있던 동안에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낱낱이 말해 주지 않을래? 만약 거짓말이라도 한다면···· 말 안 해도 잘 알고 있겠지?”
“····”
한서현의 주도하에 본격적으로 심문이 시작됐다·
은하는 그동안 있었던 사정을 자세히 설명해야 했다·
그리고 이리야의 임신을 고백하는 대목에 이르렀을 때····
“····”
은하는 시퍼런 살기에 노출됐다·
아내들과 노은아가 죽일 듯이 그를 노려본 것이다·
“허·”
“····”
그나마 유한 시선을 보냈던 류연화는 언제 그랬냐는 듯 얼음장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탄식하듯 혀를 찼다·
다른 사람들의 반응 또한 냉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한서현이 냉엄한 어조로 운을 뗐다·
“그래서 요지는 이리야 언니를 아내로 받아들이겠다는 거니? 다섯 번째로?”
“····”
아내들과 노은아가 쏘아본다·
은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정말 미안하지만 그래도 이리야를····”
“미안하면 안 해야 되지 않겠니? 누누이 말하지만·”
한서현이 대뜸 말을 끊으며 대놓고 코웃음을 쳤다·
그녀가 따지듯이 물었다·
“이리야 언니를 우리보다 사랑하니?”
“···아니·”
은하는 힘겹게 부정했다·
“우리만큼은?”
“····”
은하는 답하지 않았다·
“그것도 아니면서 이리야 언니를 아내로 들이겠다는 거니? 왜? 아이 때문에?”
“····”
이번에도 은하는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서현은 기프트를 통해 그의 감정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아니 굳이 기프트를 쓰지 않아도 함께한 시간이 가능하게 했다·
“단지 아이 때문이라면 간단하네· 그냥 아이만 거두어들이도록 해·”
“뭐?”
“그 아이 우리가 키울게·”
“····”
“내가 유성이 동생으로 들여서 친자식처럼 키우면 되지 않겠니? 마침 아인으로 태어날 것 같다면서· 잘됐네 나중에 혹시라도 아이가 부모를 의심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은하의 말문이 막힌 가운데 한서현이 차갑게 미소 짓는다·
그녀가 처음으로 이리야에게 눈길을 주었다·
“언니는 어떻게 생각해?”
“····”
“그게 가장 평화로운 방법이라 생각하지 않아?”
“저는····”
서릿발처럼 차가운 한서현의 눈빛·
그 눈빛을 마주한 이리야는 입술을 달싹였다·
“저는····”
무서웠다·
무섭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디 그뿐인가?
자존심이 상하고 죄책감이 들고 수치스럽고 창피하고 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아이를 낳고 싶어요 제가 직접 키우고 싶어요·”
이리야는 굴하지 않았다·
배에 손을 가져다 대자니 없던 용기가 샘솟는 기분이었다·
반면 한서현의 얼굴은 굳어졌다·
“····”
정하양 이유정 류연화 역시 얼굴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이리야는 그녀들의 심정을 짐작하면서도 결코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그녀가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제발 이렇게 부탁드릴게요· 제가 아이를 키우게 해 주세요· 아이를 뺏어 가지 말아 주세요·”
“····”
“만약에 인정받을 수 없다면···· 그렇다면 혼자서라도 키울게요· 그때는 주님과의 관계에 대해 아이에게 절대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드릴게요· 그러니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이리야가 간절히 호소했다·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착잡한 심정이 아닐 수 없었다·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니? 잘 생각하고 결정해·”
한서현이 은하에게 물었다·
그녀가 재촉했다·
“네 선택에 따를게 우리는· 늘 그래 왔듯이·”
“····”
은하는 고심했다·
그러나 결단을 내리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몇 번을 재고해도 같았으니까·
은하는 입을 열었다·
“너희한테는 미안해·”
“····”
“정말···· 정말 면목이 없어· 그래도 이리야에게 아이를 빼앗아 아이에게 부모에 대해 속이고 싶지는 않아· 이리야 혼자 키우게 하고 싶지도 않고· 그러니 허락해 줬으면 해·”
은하의 태도는 한없이 진지했다·
예상했지만 꺾을 수 없다·
끝내 그렇게 판단한 사람들은 그만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결국 또 이렇게 되는구나···· 알았어 네가 원하는 대로 해· 하지만 선택에는 책임을 지고 후회하는 일이 없길 바랄게· 너한테도 우리한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