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라이프 플레이어 (976)
‘정말···· 괜찮은 거겠지?’
아이기스를 품에 숨긴 은하는 보고를 나왔다·
행여나 들키는 것은 아닐까 조마조마한 심정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 최고 관리자는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그의 관심은 은하가 손에 쥔 유피테르의 왕홀을 향해 있었다·
“보물은 잘 고르셨습니까? 제가 잠시 확인해도 될는지요?”
“네 여기요·”
최고 관리자가 인자한 미소로 허락을 구했다·
은하는 태연함을 가장하고서는 유피테르의 왕홀을 내밀었다·
‘내가 꼭 도둑이라도 된 기분이네····’
사실 도둑이 맞기는 했다·
이내 은하는 생각을 고쳤다·
‘아니지· 내가 왜 도둑이야?’
스스로에게 맹세컨대 자신은 절대 아이기스를 훔치지 않았다·
아이기스가 자유 의지에 따라 자신을 따라온 것이다·
과연 보물에도 의지가 있느냐 하면····
은하는 있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우우웅!
마침 생각을 읽기나 한 듯 품속에 있던 아이기스가 미약하게 진동했다·
혹여나 기척을 들킬까 흠칫한 은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황급히 가슴에 손을 댔다·
그사이 유피테르의 왕홀을 살피던 최고 관리자는 감정을 끝마쳤다·
노인이 보물을 돌려주었다·
“제노바의 왕홀이로군요· 확인했습니다· 모쪼록 노은하 플레이어에게 잘 어울리는 보물이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그것으로 보고에서의 절차는 모두 끝났다·
은하는 아무 의심도 받지 않고 무사히 판테온을 나올 수 있었다·
판테온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그를 반겼다·
그중에는 진서나 이리야 등 다른 보고에 입장하느라 헤어진 사람들도 있었다·
‘아이기스를 얻을 줄이야····’
그제야 은하는 실감했다·
가슴이 벅차오를 정도로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기회가 되는 대로 친구들에게도 이 기쁜 소식을····
그때였다·
‘저 자식이····’
사람들에게 향하던 은하의 눈에 이리야와 로베르토가 들어왔다·
로베르토가 이리야에게 살갑게 말을 걸고 있었다·
“뭐 먹고 싶은 게 있습니까? 무엇이든 말만 하세요· 당신은 그래도 되는 사람이니까·”
“후후 저는 아무거나 좋아요· 그런데 아무래도 오늘은····”
이리야가 눈웃음을 짓는다·
은하는 욱하는 마음을 참고 얼른 그녀에게 다가갔다·
“아 주···님!?”
뒤에서 이리야의 어깨를 감싸고 품으로 끌어당긴다·
그녀를 제게 기대게 한 은하는 로베르토에게 말했다·
“미안해서 어쩌죠? 이리야는 저희랑 회식이 있어서요·”
“····”
로베르토의 대꾸는 필요 없다·
은하는 그를 자리에 세워 둔 채 이리야를 데리고 돌아섰다·
은하를 이기지 못하고 따라가는 이리야는 투정하듯 항의했다·
“아니 주니임····”
“뭐 왜 뭐·”
“에휴····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도 오늘은 거절하려 했으니까요·”
“오늘만 아니라 내일도 모레도 한국에 돌아갈 때까지 계속해·”
“주님이 애예요? 자꾸 떼를 쓰고····”
“어 나 애 맞아· 응애 응애·”
“아니이···· 풋!”
이리야가 언제 그랬냐는 듯 피식 웃음을 터뜨린다·
그녀를 따라 웃은 은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니까 맘마나 먹으러 가자· 배고프다·”
“네 네 좋아요· 우리 주님 맘마나 먹으러 가요·”
“뭐 먹고 싶은 건 있어?”
“음····”
손가락을 입술에 대는 이리야·
이내 그녀가 생긋 대답했다·
“매운 음식이 먹고 싶어요! 부대찌개?”
“부대찌개? 여기에도 있으려나····”
“한인 타운에서 팔더라고요· 저번에 로베르토 플레이어랑 밥 먹으러 갔는데····”
“내 앞에서 그놈 얘기 꺼내지도 마·”
“아 네····”
* * *
이탈리아 로마 한국 공략대 숙소·
한동안 브라차노의 공방에서 지내다 얼마 전에 돌아온 벽해수는 반갑게 한국 공략대를 맞았다·
“다들 어서 와! 별일은 없었지?”
“안녕· 오늘 판테온에 들렀다며? 국보를 받게 된 것을 축하해!”
한국 공략대의 보물을 기대하며 초롱초롱 눈을 빛내는 벽해수·
곁에는 그의 연인 얼마 후에는 부인이 되는 마르티나도 있었다·
‘해수 형이 어떻게 설득했는지 한국으로 귀화하기로 했다지·’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은하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로서는 벽해수와 마르티나가 함께 행복하게 살길 바랐다·
그렇게 피식거리는 가운데 두 사람은 공략대를 닦달했다·
“보물은 어디 있어? 꺼내 봐! 어디 한번 좀 보자!”
“괜찮아 경계하지 않아도 돼! 본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살짝 보기만 할 거니까! 나중에 재료로 사용하기 위해서라도 미리 봐 둬야지!”
이때를 기점으로·
두 사람에게 보물을 소재로 제작을 의뢰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방에서 한 명씩 그들을 맞는 두 사람은 보물을 접할 때마다 감탄을 금하지 못하고는 했다·
밖에서도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은하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다 빠지고 나서 찾아가야겠네·’
자신이 아이기스를 얻은 사실은 가급적 비밀로 해야 했다·
이에 은하는 시간이 흐른 뒤 은밀히 벽해수와 접선했다·
그리고 돌멩이처럼 변해 있던 아이기스를 원래대로 되돌리자····
“너 너 미쳤어!?”
유피테르의 왕홀을 보고 놀란 벽해수는 아이기스의 등장에 아예 기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니 세상에 국보를 훔치다니···· 그것도 태극 등급에 준하는····”
“훔치다니? 내가 언제 훔쳤는데? 아이기스가 따라온 거지·”
우우웅!
피가 마르는 기분을 느낀 벽해수가 파리해진 얼굴로 타박했다·
이에 은하는 당당하게 발뺌했고 아이기스 또한 동의했다·
“하아···· 이 일을 어쩌냐····”
“어쩌기는 어째? 가져가야지·”
“····”
벽해수가 큼지막한 손으로 제 얼굴을 덮었다·
한숨을 쉰다·
하지만 알고 지낸 시간이 긴 은하는 그의 심정을 모르지 않았다·
“형 지금 입꼬리 올라간 거 다 보인다?”
“····”
벽해수가 움찔했다·
은하는 키득거리며 물었다·
“그래서 솔직히 어때 보여? 좋은 것 같아?”
“···개인적으로 나는 왕홀보다 아이기스가 더 좋아 보인다· 소재로 쓰면 홍화검에 버금가는 검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애초 유피테르의 왕홀은 딱히 소재로 쓰려고 챙긴 게 아니니까· 뭐 잘됐네· 안 그래도 황혼검의 상태가 좋지 않았는데·”
“〈심연〉에 이어 〈심해〉에서도 무리해 댔으니 어쩔 수 없지·”
“아무튼 잘 부탁할게·”
“후우···· 그래 알았다·”
이리하여·
은하는 아이기스와 황혼검으로 새로운 맹고슈를 만들기로 했다·
다만 아이기스의 사정으로 인해 제작은 한국으로 돌아가고 나서 진행하기로 정해졌다·
* * *
밤이 깊었다·
잠을 자러 침대에 누운 은하는 온종일 소지하고 있던 아이기스를 꺼내 들었다·
손안에 쥐고 올려다보자니 절로 입가가 올라갔다·
‘어서 한국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그러던 중·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아이기스를 보고 잘까?’
불쑥 충동심이 일었다·
때마침 방 안에 거울도 있겠다 원래 모습으로 돌린 아이기스를 다시 석화 상태로 바꾸기는 어렵지 않을 듯했다·
은하가 그렇게 판단할 때였다·
“노은하 플레이어·”
“····”
“아직 깨어 있을까요?”
별안간 노크 소리가 울리고 문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하의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빅 마마의 목소리였다·
“저예요 빅 마마·”
확실했다·
‘···빅 마마가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돌연 야심한 밤에 방문이라니 은하로서는 의아하기만 했다·
그러나 빅 마마의 방문을 이대로 무시하고 넘길 수는 없었다·
황급히 아이기스를 품에 넣은 은하는 그녀를 맞기로 했다·
“아직 자고 있지 않다면 문 좀 열어 주겠어요?”
“잠깐만요 지금 나갈게요!”
옷가지를 추스른다·
은하는 빅 마마를 응대하려 방문을 열었다·
문밖에 있던 그녀는····
“어쩐 일···로····”
빅 마마는 네글리제를 입고 있었다·
잠옷 차림을 한 그녀를 본 은하는 순간 멈칫했다·
빅 마마는 눈웃음을 그렸다·
“후후 고마워요· 말도 없이 늦은 시간에 찾아와서 미안해요· 면목이 없네요·”
“아뇨···· 무슨 일인가요?”
“다름이 아니라 얼마 전에 귀한 술이 선물로 들어와서요· 시간 되면 같이 마실 수 있을까 해서요·”
“죄송한데 술은 다음에 따로 시간을 잡아서····”
은하는 빅 마마의 의도를 경계했다·
그래서 그녀를 돌려보내려 했건만 그녀는 능청스레 방 안에 들어섰다·
그의 팔 아래를 지나가서는 자연스레 소파에 앉았다·
“이제 곧 돌아가야 하잖아요· 그 전에 노은하 플레이어랑 조금이라도 더 친해져 두려고요· 한국과 이탈리아의 외교를 위해·”
“····”
“뭐 해요? 앉아요· 한잔해요·”
섣불리 한 나라의 권력자인 빅 마마를 내쫓을 수는 없었다·
자칫 문제가 될 수 있다·
은하는 불편한 심정을 이끌고 그녀와 멀리 떨어져 앉았다·
그러자 그녀가 엉덩이를 옮겨 그에게 바짝 붙었다·
“····”
“받아요·”
은하의 얼굴이 굳어지는 가운데 빅 마마가 술을 권했다·
두 사람은 술잔을 부딪쳤다·
이후로 빅 마마는 주도적으로 대화를 이끌어 나갔다·
술잔은 거듭 비워지고 채워졌다·
그때 빅 마마가 운을 뗐다·
“그거 알아요? 제가 어떻게 이 나라를 장악했는지·”
“···글쎄요·”
“간단해요· 권력자란 권력자는 다 자빠뜨렸거든요· 그 상대가 남자든 여자든 관계없이 모조리· 제가 좀 매력이 넘쳐서요·”
“그래서요?”
은하가 무뚝뚝하게 물었다·
은근슬쩍 그에게 몸을 기댄 빅 마마는 입술을 핥았다·
“당신도 자빠뜨려 버리려고요·”
“····”
“원래는 체통을 지키려 했는데 안 되겠어요· 당신 같은 사람을 놓칠 수는 없겠더라고요·”
빅 마마가 네글리제를 벗는다·
실오라기 하나 없는 몸이 된 그녀가 은하에게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당신에 대해 조사는 했어요· 부인이 넷이나 된다죠? 당신도 많이 밝히나 보네요·”
“····”
“그런데 멀고 먼 타지에서 금욕 중이라 많이 힘들겠어요· 제가 도와줄게요·”
“나이도 꽤 있으실 텐데·”
“···괜찮아요· 아직 창창하니까· 〈백은〉 덕에 노화가 늦기도 하고·”
순간적으로 미간을 찌푸린 빅 마마는 금세 표정을 고쳤다·
“한 나라의 절대자로 군림하는 여자를 발아래에 둘 기회예요· 어때요 너무 끌리지 않나요? 저라면 분명 당신의 욕망을 충족해 줄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저를 가지세요· 대신에 당신을 주세요·”
“저한테 귀화를 제의하는 건가요?”
“네 맞아요· 이탈리아로 오세요· 당신이 이탈리아로 귀화해 준다면 제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원하는 모든 걸 이뤄 줄게요· 괜한 갈등을 줄이기 위해 한국에도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할 용의가 있고요· 혹시 한국에 남아 있는 가족들이 걱정된다면····”
“····”
“힘들겠지만 어떻게든 수를 써서 그들까지 데려오도록 할게요· 어떤가요? 이 정도면 충분히 매력적인 제안 아닌가요?”
유혹하듯 미소 짓는 빅 마마·
은하는 코웃음을 쳤다·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왜요? 더 원하는 게 있나요? 있다면 망설이지 말고 말해요· 아니면···· 저로는 부족한 건가요?”
“····”
“좋아요 그런 거라면·”
빅 마마가 눈매를 좁힌다·
은하를 빤히 바라보던 그녀는 곧 퉁명스레 손가락을 튕겼다·
“혹시 몰라 준비했는데 잘됐네요· 들어와요·”
별안간 문이 열렸다·
이내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여인들이 걸어 들어왔다·
모두 한껏 꾸미기라도 한 듯 차림새가 범상치 않았다·
“자 이 미녀들도 얹어 줄게요· 부족하면 더 얹어 주고요·”
“하····”
수십의 여인들이 다가오는 모습은 과히 압도적이었다·
은하는 말도 안 되는 광경에 어처구니없기만 했다·
그리고 몹시 불쾌했다·
“····”
“···노은하 플레이어?”
더 이상 참아 줄 필요는 없었다·
은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 안 하지만·”
“····”
빅 마마와 여인들로부터 거리를 벌려 달빛이 비치는 테라스를 등진다·
바람이 불었다·
동시에 은하의 발밑에 있던 그림자가 꿈틀거렸다·
“제안은 거절하도록 할게요· 그리고····”
그 순간 솟구쳐 오른 그림자가 은하를 감쌌다·
은하는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며 아직 가려지지 않은 시야로 빅 마마에게 고했다·
“이 일은 선녀 정부에서 정식으로 아주 강하게 항의할 겁니다·”
직후 은하는 자취를 감췄다·
그곳에는 달빛만 있었을 뿐이다·
“···텄네· 실패했어·”
은하가 홀연히 사라짐으로써 졸지에 테라스를 쳐다보게 된 빅 마마는 처량하게 중얼거렸다·
자존심이 상하고 수치스러웠다·
“내가 바람맞을 줄이야····”
* * *
“시리우스 기술이 좋기는 하네·”
어쩐지 미심쩍은 기분이 들어 녹음을 해 두길 잘했다·
그림자를 통해 아래층으로 이동해 녹음 상태를 확인한 은하는 만족스러워했다·
그러고는 투덜거렸다·
“내가 빅 마마만 아니었으면 아주····”
작살을 내 버렸을 것이다·
뒷말을 삼킨 은하는 혀를 찼다·
“사람을 무슨 여자나 밝히는 짐승처럼 취급하다니····”
생각할수록 언짢지 않을 수 없었다·
은하는 녹음본을 송윤서에게 넘겨 선녀 정부 차원에서 빅 마마에게 응당 조치를 취하도록 꾀하기로 했다·
그나저나····
‘이제 나는 어디서 자냐·’
빅 마마가 점거하고 있는 이상 방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설사 빅 마마가 돌아간다더라도 그녀가 언제 또 찾아올지 몰랐다·
아무래도 이탈리아에 체류하는 남은 기간에는 다른 사람과 함께 지내는 편이 나을 듯했다·
문제는 누구와 지내느냐였다·
당장 오늘 밤에 찾아갈 만한 사람은····
“시형이한테 갈까·”
어베니어는 워낙 덩치가 커서 한방을 쓰기 불편할 듯했다·
은하는 결론을 내렸다·
바로 그때·
“주님?”
“어?”
벌컥 테라스 문이 열리더니 안에서 이리야가 몸을 내밀었다·
은하를 보고 당황한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은하 역시 마찬가지였다·
“주님 여기는 어떻게····”
“너야말로 어떻게····”
“제 방이니까요·”
“···그랬지·”
은하는 납득했다·
“····”
이후로 은하와 이리야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생각지 못한 상황을 맞닥뜨리고 어색함을 느낀 것이다·
그때 눈치를 보던 이리야가 슬며시 운을 뗐다·
“그···· 일단 들어오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