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라이프 플레이어 (970)
―주님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그날 아침 이리야가 꺼낸 말은 분명 진심이 아니었다·
은하는 그녀가 거짓을 고하며 억지로 웃어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알았어· 미안하다·
―아니요···· 아니에요·
이리야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아직 갈피를 잡지 못했던 은하는 뭐라 따질 수 없었다·
그리고 은하 역시 알고 있었다·
추후에 잡음이 일어나지 않게 원만히 문제를 해결할 방도는 이대로 비밀에 부치는 것임을·
즉 이리야만 희생하면 됐다·
다만·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
당시 은하는 안도한 한편으로 죄책감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리야의 진심을 외면한 것도 모자라 그녀의 배려에 기대기로 한 자신이 굉장히 몹쓸 놈처럼 느껴졌다·
‘나는···· 진짜 쓰레기구나· 차라리 애들한테 부탁해서 이리야를 아내로 들이는 건····’
자신은 이리야를 좋아하는가?
좋아한다·
이성으로서 호감을 느끼는가?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아내들만큼 사랑하는가?
혹은 사랑할 수 있는가?
‘····’
스스로에게 질문한 은하는 선뜻 답할 수가 없었다·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괜히 그런 어중간한 마음으로 이리야를 책임지겠다고 했다가는 그녀는 물론이고 아내들에게까지 상처를 줄 것 같았다·
아니 필시 주고 말리라·
그리고 아이들에게도····
―주님이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요· 미안해야 할 사람은 저인걸요? 그리고···· 오히려 저한테는 좋은 일이죠· 마침내 주님의 성은을 얻었으니까·
―하여간 너란 애는····
―그러니까 주님·
―····
―주님은 아무 걱정 마세요· 모든 책임은 제가 질게요· 주님보다 나이 많은 저한테 다 믿고 맡기세요· 괜찮아요·
―그러고 보니 네가 나보다 6살은 많았지····
―주니임···· 그렇게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아도 되거든요? 갑자기 미워지네····
―미안 화났어?
결국 마음을 정하지 못한 은하는 이리야와 진솔하게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그녀의 희생에 눈을 감고 모르는 일인 척 없었던 일인 척 그렇게 어물쩍 넘어가야 했다·
다행히 이리야의 연기가 능숙해 두 사람은 최대한 이전처럼 지낼 수 있었지만····
간혹 어쩌다 눈이 마주치거나 손이 스칠 때면 서먹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 죄송해요·
―···아니야· 그냥 스친 건데 이걸로 왜 사과해?
―하하···· 그렇죠? 그러네요····
―그럼 설거지 좀 부탁할게· 냇가는 어디 있는지 알지? 아니면 내가 같이 가 줄까? 슬슬 어두워질 것 같은데····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저 혼자 다녀올 수 있어요· 그래도···· 고마워요 주님·
―···알았어· 너무 멀리 가지는 말고 여차하면 꼭 부르도록 해· 알았지?
―네···· 꼭 부를게요·
그로부터 시간이 흘렀다·
8층에 입장한 지 어느덧 2주가량이 지났을 무렵 은하와 이리야는 해주 조건을 충족할 수 있었다·
“드디어 소재를 다 모았네요· 아 힘들었다· 바로 갈 거죠?”
“힘들면 조금 쉬었다 갈까?”
“아니에요· 이미 중턱에 올랐는데 바로 올라가요· 쉬어도 정상에 올라가서 쉬면 되죠·”
“그래 그러자·”
이미 산을 오르던 중이었다·
마지막 소재를 챙긴 두 사람은 마저 산을 오르기로 했다·
머지않아 안개 속을 지난다·
“앞이 잘 보이지 않으니까 잘 따라와·”
“네 주님·”
“길도 미끄러우니 조심하고·”
이윽고·
“후우 후우 대단하네요····”
“···그러게· 여기 물· 아까 다 떨어졌지? 내 거 마셔·”
“아····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안개 속을 뚫고 정상에 도달한 은하와 이리야는 거대한 못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저주를 풀기 위한 사당은 그곳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었다·
근처에 보이는 바위에 앉아 숨을 고르고 물을 마시며 잠시 휴식을 취한 두 사람은 곧 몸을 일으켰다·
수면 위를 걸어 사당으로 향한다·
사당 안에는 제단이 있었다·
“이 제단에 소재들을 바치면 저주를 풀 수 있는 건가?”
“그리고 저희에게 저주를 건 몬스터가 나타날 거예요· 제 경우에는 서큐버스 퀸이 주님의 경우에는 블랙 드래곤이···· 주님 어떻게 할 건가요? 저는 일단 제 저주부터 푼 다음에 주님 저주를 푸는 게 좋지 않을까 싶은데····”
“우리 둘이서 제3위계 하나를 상대하기도 위험할 텐데 두 마리를 상대할 수는 없으니까?”
“네· 그리고 서큐버스 퀸이 블랙 드래곤보다는 덜 위험하잖아요·”
“하지만 너는 저주를 풀더라도 나는 저주를 풀지 않아 힘이 온전하지 않을 텐데···· 그 상태로 서큐버스 퀸을 제대로 상대할 수 있을까? 거기에 지금 나는 기프트도 쓰지 못하는데· 만약 놈이 세뇌라도 걸면····”
“아 그럼 안 되죠· 안 돼요· 사악한 몬스터 년 아니 따위가 감히 주님을 건드리는 꼴은 절대 못 봐요·”
“어 그래····”
“우리 블랙 드래곤부터 풀어요· 주님 저주 먼저 풀어야겠어요·”
“···그러자·”
이리야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두 손을 쥐고 흥 소리를 낸 그녀의 의견에 동의한 은하는 사당에 소재를 바쳤다·
화아악!
소재가 빛으로 화했다·
빛이 은하를 원래대로 되돌리고 붙어 있던 저주를 몰아낸다·
검은 연기의 형태로 승천한 저주는 곧····
크롸롸롹!
제3위계 몬스터 블랙 드래곤으로 변모했다·
상공에 나타난 놈을 올려다본 은하는 입가를 끌어 올렸다·
“내가 진짜 보고 싶었다·”
전투 시작이다·
* * *
After Story 16· 공성전
기프트 봉인과 더불어 실려 저하를 불러일으키던 저주가 풀린 이상 더는 주저할 필요가 없었다·
본신의 힘을 되찾은 은하는 과감한 전법도 마다하지 않고 블랙 드래곤에 뒤이어 서큐버스 퀸까지 토벌했다·
“신화를 현현하지 않더라도 이제 이 정도는 거뜬하지·”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아마 주님밖에 없을 거예요· 얼른 이리로 내려오세요· 치료해 드릴게요·”
물론 은하가 아무리 강할지라도 거의 단신으로 제3위계 몬스터 두 마리를 상대해 놓고 아무 상처가 없지는 않았다·
이리야는 그런 그를 타박하고는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그러던 중 던전 가이드가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8층 미션 완수를 축하드려요! 제가 지켜보지 못한 사이에 둘이서 잘 해결했나 보네요? 덕분에 시간은 걸린 것 같지만! 이곳에서 미션을 받은 사람은 대부분 다음 층으로 이동했거든요· 아니면 죽었거나 완전히 미쳐서 몬스터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거나·
“····”
여러분은 그러지 않았군요! 대단해요 과연 경험 있는 공략자들이군요! 그런데 개인적으로 궁금한 게 서큐버스 퀸의 저주를 받고 어떻게 아직까지도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 아 혹시!
“쓸데없는 소리 좀 하지 말지?”
던전 가이드를 뻔히 쳐다보던 은하가 불쾌하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던전 가이드는 치사하다는 듯 빛의 구체 속에서 입을 삐죽 내밀었다·
칫 궁금해서 물어볼 수도 있죠· 그래서 어떻게····
“됐고 9층으로 보내 주기나 해· 지금 당장·”
정말이지 붙임성이라고는 없는 공략자 아니 도전자로군요· 알겠어요·
던전 가이드가 자리를 비킨다·
그 자리에 문이 생겨났다·
인원도 적당히 모인 듯하니 여러분이 들어가는 대로 9층 미션을 시작해야겠네요· 자 들어가세요·
“가자·”
“네 주님·”
“삐삐삐 빠빠빠 뿌뿌뿌!”
더 이상 이곳에 미련은 없었다·
은하가 앞장서고 이리야와 불닭이가 뒤따라 문 너머로 발을 들였다·
빛에 삼켜져 정신이 들었을 때 그들은 9층으로 이동해 있었다·
‘일지에 적혀 있던 대로야· 역시 9층 미션은 공성전인가·’
은하와 이리야 불닭이는 먹구름이 낀 하늘 아래 어느 성벽 위에 서 있었다·
그리고 맞은편 거리에 있는 성채가 눈에 들어오기도 했다·
회귀 전의 기억에 따르면 9층 미션으로 공략해야 할 성채였다·
그렇게 간단히 주위를 살핀 은하는 곧 저만치서 뛰어오는 동료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은하은하! 지금까지 우리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리야 언니! 무사한 거야!? 어디 다친 데는 없어!?”
“라라라♪”
아리엘 조아라 라라를 비롯해 은하와 이리야에게 다가온 사람들이 저마다 안부를 물어 왔다·
그렇게 한데 모인 사람들은 서로의 무사를 확인하고는 회포를 풀었다·
때로는 혼이 나기도 했다·
“네가 갑자기 말도 없이 다른 게이트로 들어갔을 때 내가 얼마나 놀란 줄 알아? 그리고 내가 너 대신에 공략대를 지휘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진서나는 허리에 한쪽 손을 얹고 은하에게 쫑알거렸다·
그녀의 마음을 이해한 은하는 얌전히 잔소리를 받아 주었다·
“하하···· 미안 면목이 없다· 그래도 내가 없었던 동안에 잘 지휘한 것 같은데?”
“그거야 네가 골라 준 덕에 공략 난이도가 쉽기도 했고 사전에 너한테 공략 정보를 들어 두기도 했으니까· 큰 유성이도 있었고···· 아무튼 그것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나를 무슨 불세출의 지휘관처럼 여겨서 얼마나 난감했는데!”
“그래도 잘했어· 장하다 불세출의 천재 지휘관 진서나·”
“지금 누구 놀리니? 그리고 그렇게 나 칭찬해 주는 척 귀 만지려고 하지 말지?”
“아 이런···· 들켰네?”
“에휴 기분이다· 누나가 선심 쓴다· 만져라 만져····”
못 말리겠다는 듯 피식거린 진서나가 턱을 치켜세운다·
덕분에 은하는 마음 편히 그녀의 귀를 만질 수 있었다·
‘동물 귀가 부드럽기는 하네· 뿔은 딱딱하기만 했는데···· 그래도 나름의 매력이 있었지· 그것도 좋았어····’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우열을 가릴 수 없겠다·
은하는 시답잖은 생각을 했다·
그때 가늘게 뜬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던 진서나가 물었다·
“그런데 혹시 리야 언니랑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지?”
“어? 무슨 일 있었냐니···· 딱히 없었는데···?”
“흠···· 기분 탓인가 싶은데 아까 둘이 있을 때 보니까 뭔가 분위기가 묘해서···· 둘 사이가 서먹서먹해 보이면서도 전보다 더 끈끈하게 보였거든·”
진서나의 눈치가 기가 막혔다·
은하는 속으로 뜨끔하면서도 겉으로는 태연함을 가장했다·
“기분 탓이겠지·”
“그렇다고 하기에는···· 어째 리야 언니가 무서운 눈빛으로 날 노려보고 있는 것 같은데···· 아 눈 피했다·”
“···기분 탓이겠지·”
“아닌데· 아닌 것 같은데· 내 눈썰미가 좋다는 거 너도 알잖아· 소싯적에는 우스갯소리로 명탐정 진서나라고····”
“서나야 너 그거 의심병이야· 민지 따라 드라마 보다가 너무 망상에 빠진 거 아니야? 너 그러다 민지처럼 될라·”
은하는 가스라이팅을 시전했다·
하지만 진서나에게는 소용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반쯤 확신했다·
“진짜 무슨 일 있었어?”
“···아니 없었다니까·”
“에휴 일단은 넘어가 줄게· 주위에 보는 사람도 많으니까· 공략에 지장은 없는 거지?”
“···없을 거야·”
“알았어· 그럼 나중에 나가서 자세히 얘기해 줘·”
진서나가 에휴 한숨을 쉰다·
그녀를 속이는 것에 실패한 은하는 끝내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던전 가이드가 출현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인원도 적당히 다 모였겠다 지금부터 9층 미션을 진행하겠습니다! 여러분 저기 있는 성 보이죠?
“····”
던전 가이드가 맞은편에 있는 성채를 가리켰다·
사람들은 성채를 눈에 담았다·
〈심해의 던전〉의 마지막 10층 최심부로 가는 문은 바로 저 성 지하에 있어요· 여러분은 저 성을 공략하면 돼요·
그때 알버트가 손을 들었다·
“이번에도 7 8층에서처럼 그놈들···· 마이론 패거리가 나오는 건가·”
좋은 질문이에요· 네 맞아요· 그들은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여러분을 죽이기를 고대하며 저 성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던전 가이드가 입을 길게 찢는다·
7 8층에서 범죄자들의 습격으로 병력에 피해를 입은 공략대는 울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알버트가 그들의 감정을 대변했다·
“그런가···· 우리도 바라던 바다·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죽여 주지·”
그래요 누가 이길지 기대할게요· 그럼 공성전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 * *
던전 가이드로부터 설명을 들은 공략대는 공성전이 시작되기 전 짧게나마 정비 시간을 가졌다·
그사이 사람들을 격려하러 다닌 은하는 미래 유성을 찾았다·
“유성아·”
“아 아버지· 어쩐 일이세요?”
전장을 내다보고 있던 미래 유성·
은하에게 이름이 불린 그가 반가운 미소로 맞았다·
그런 그에게····
“너 알고 있었지?”
“····”
은하는 다짜고짜 따졌다·
순간적으로 흠칫한 미래 유성은 곧 해맑은 얼굴로 반문했다·
“네? 뭐가요?”
“···7층에서 있었던 일 말이야· 너라면 범죄자들이 습격할 걸 알고 있었을 텐데····”
“아 그거요?”
“····”
“저도 깜짝 놀랐지 뭐예요· 제가 있던 세상에선 없었거든요· 그래서 얼마나 당황했던지···· 아무래도 제가 개입하면서 나비 효과가 일어난 것 같아요· 저 때문에 죄송해요 아버지·”
“죄송할 것까지는 없는데····”
마치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너스레를 떠는 미래 유성·
그러다 보니 은하의 눈에는 너스레가 아닌 능청으로만 보였다·
어쩐지 위화감이 들었다·
‘아닌 것 같은데···· 왠지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수상쩍다 굉장히·
하지만 마땅한 증거도 없던 은하는 더는 추궁하지 못하고 자연히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 알았어· 수고해라·”
“네 아버지도요! 휴우····”
이때 미래 유성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음을 은하는 알지 못했다·
“살았다····”
잠시 후 공성전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