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라이프 플레이어 (969)
“아니요 제의는 감사하지만 사양할게요· 저희끼리 다니려고요·”
이리야의 상태를 고려할 때 그녀의 주위에는 가급적 사람이 없는 편이 나았다·
괜히 남자들 무리에 합류했다가 그녀에게 걸린 저주를 더 자극할 위험이 있었다·
‘게다가 같이 행동하게 되면 자연히 이 사람들의 해주도 우리가 도와줘야 할 텐데 우리한테 그럴 여력은 없어· 지금은 우리 저주를 푸는 것만으로도 벅찬 상황이야· 반대로 이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우리를 도와줄지도 알 수 없고····’
언어도 제대로 통하지 않고 오늘 처음 만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쉬이 믿을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도 대화하는 사이 자신의 뒤에 숨어 있는 이리야를 쳐다보는 그들의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은하는 제안을 거절했다·
“Why don’t you think about it again?”
남자들은 호의로든 다른 의도로든 아쉬워하는 눈치를 보였다·
곧 몬스터가 흉포해지는 밤이다 밤중에 둘이 다니면 위험하다 불침번은 어떻게 설 생각이냐 등·
그들이 영어로 재고를 권했으나 은하의 결정은 바뀌지 않았다·
“No thank you·”
“Okay Do whatever you want· But if you change····”
결국 남자들은 은하의 태도에 제안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아쉬워하며 물러났다·
은하는 뒤에서 옷깃을 붙잡고 있던 이리야에게 말했다·
“지금 지나간 사람들 야영지가 근처에 있다니까 우리는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도록 하자· 괜찮지?”
“네 주님 의견에 따를게요· 사실 저도 저 사람들하고는 별로 엮이고 싶지 않았거든요· 눈빛이 아주 음흉하더라고요·”
“그래 혹시나 또 마주치지 않게 어딘가 인적 없는 곳에다 자리를 잡도록 하자·”
“네 좋아요·”
이후로 은하는 이리야를 데리고 숲속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해가 완전히 저물었을 때쯤에는 외진 곳에 위치한 동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크르륵!
〈바일런트 베놈〉
패혈증 감염을 일으키는 독으로 동굴 안에 있던 몬스터들을 모조리 정리한 뒤·
동굴 입구에 앉은 은하는 숲속에서 모은 마른 가지로 모닥불을 피웠다·
“지금쯤이면 독은 사라져서 안에 들어가도 괜찮을 거야·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 안에서 짐을 풀기 전에 정화 좀 해 줘·”
“네 그럴게요·”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음···· 주님?”
“야····”
훅 치고 들어온 답변에 은하가 뒤를 돌아보았다·
은하의 망토를 모포처럼 두른 이리야가 혀를 삐죽 내밀었다·
“장난이고요 음···· 저는 그냥 주님이 주는 거라면 뭐든 좋아요·”
“하여간···· 그럼 적당히 만들도록 할게·”
“저도 도울게요·”
“아니야 들어가서 쉬고 있어· 다 되면 부를 테니까·”
하루 종일 숲속을 돌아다니며 몬스터만 찾아 헤맨 게 아니다·
은하는 겸사겸사 챙긴 식재료와 가방에 넣어 둔 식량으로 저녁을 만들기로 했다·
물론 숲에서 얻은 식재료는 바깥세상에는 없는 경우도 있어 독을 함유하고 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하기는 했지만····
어차피 은하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바일런트 베놈의 섭리가 있었으니까·
아삭!
‘음···· 이건 독이 있어서 식재료로는 사용할 수 없겠네· 어떻게 조리하느냐에 따라 제거할 수도 있을 것 같지만···· 내가 딱히 요리사도 아니고 그걸 어느 세월에 하겠어·’
바일런트 베놈의 섭리가 발동해 체내에 침입한 독을 남김없이 포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독으로 만든다·
덕분에 은하는 섭리도 강화하고 안전하게 먹을 수 있는 식재료들을 가려낼 수 있었다·
그렇게 저녁이 만들어졌다·
“와아 이 스튜는 뭐예요? 정말 맛있어요·”
“원래 가지고 있던 식량에다 숲에서 얻은 것들로 만든 거야· 더 있으니까 많이 먹어·”
“네! 저 한 그릇만 더 주세요!”
은하가 만든 음식을 먹은 이리야는 활짝 얼굴을 폈다·
그대로 두 사람은 남김없이 저녁을 해치웠다·
“그럼 나는 잘게· 무슨 일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깨우고·”
“네 주님· 안녕히 주무세요·”
어느덧 밤이 깊었다·
은하는 먼저 눈을 붙이고 이리야는 불침번을 서기로 했다·
이리야를 등지는 형태로 누운 은하는 눈을 감았다·
타닥타닥!
모닥불이 타는 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한다·
은하의 의식은 점점 침잠했다·
그러던 그때·
“주님 주무세요?”
“····”
모닥불을 지키고 있을 이리야가 자그만 소리로 불렀다·
은하는 일부러 반응하지 않고 마저 잠기운에 몸을 맡기려 했다·
한편 이리야는 답변이 없자 그가 잠들었다고 오해했는지····
부스럭부스럭····
‘···쟤 지금 뭐 하는 거야?’
은하는 경악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도저히 잠을 잘 수도 그렇다고 벌떡 일어나 따질 수도 없었다····
* * *
8층에 진입한 지 어느덧 일주일이 넘게 흘렀다·
그동안 은하와 이리야는 차근차근 해주에 필요한 재료들을 모았다·
그리고····
“주님 주무세요?”
‘···또다·’
은하는 매일 밤 이리야로 인해 도통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불침번을 설 때마다 저주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아니 그녀 나름의 방식으로 은하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해소하려 했다고 할까····
‘모른 척하자 모른 척····’
이리야의 사정을 이해한 은하는 비록 잠을 자지 못할지라도 최대한 그녀를 배려하고자 했다·
그녀 역시 신경이 쓰이고 또 창피한지 처음에만 해도 최대한 감추려던 기색이었다·
―주 주님 이제 시간이에요· 일어나세요·
―아···· 어···· 무슨 일 없었지?
―네에····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 그럼 저는 자러 갈게요· 고생하세요·
―어···· 너도···· 잘 자·
은하는 불침번을 바꿀 때마다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자신을 피해 후다닥 지나치던 이리야가 기억에 선명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주님 주니임····”
“····”
이리야는 상황에 익숙해졌는지 점점 과감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이제는 아예 위험을 무릅쓰고 은하에게 접근하기까지 했다·
그가 깊이 잠들어 있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아니 그의 배려를 눈치채고 마음껏 기대기로 한 것이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진짜 너무하는 거 아니야? 얘가 적당히를 몰라 적당히를····’
은하는 속으로 어이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갈수록 심해지는 듯한 이리야의 상태를 걱정했다·
현재 그녀의 상태를 비유하자면 목말라 죽을 듯한 상황에서 갈증을 해소할 만한 물이 버젓이 눈앞에 존재하고 있음에도 간신히 입가심만 하고 있어 애가 타는 심정이리라·
바로 그때·
쪽·
은하의 뺨에 부드러우면서도 살짝 딱딱한 무언가가 닿았다·
이리야의 입술 다음으로는 입술이 펴지며 느껴진 치아의 감촉이었다·
은하는 속으로 흠칫했다·
그런데·
쪽····
접촉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리야는 새들이 부리를 맞추듯 은하의 뺨에 몇 번에 걸쳐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때마다 은하는 점점 흐트러지는 그녀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윽고 그녀가 얼굴을 뗐다·
“죄송해요 주님· 정말 죄송해요····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죄송해요· 앞으로는 다시는 안 이럴 거예요· 죄송해요 흑····”
자신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이리야가 울음을 삼킨다·
그녀가 급히 물러나려 했다·
은하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그는 곧장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꺄악!”
붙잡은 손에 힘을 주어서는 이리야를 잡아당긴다·
어찌 대응할 새도 없던 그녀는 그대로 균형을 잃고 은하가 인도하는 대로 쓰러졌다·
그 위로 은하가 올라왔다·
“···주님?”
“내가 깨어 있는 걸 뻔히 알고 있었으면서···· 괘씸해도 너무 괘씸한 거 아니야?”
“그 그건···· 잘못했어요····”
“거기에 남의 뺨에다 멋대로 입을 맞추고 말이야· 너 그거 성희롱이야 알아?”
“···죄송해요····”
모닥불이 은은하게 밝히는 동굴 안에서·
한쪽 손등으로 얼굴을 가린 이리야가 눈물을 흘렸다·
곧이어 흐느껴 울기 시작한다·
은하는 그런 그녀를 달랬다·
“울지 마· 전이랑은 딴판이네· 전에는 갑자기 내 방에 찾아와 성은을 달라느니 했으면서····”
“흑 그건···· 그때는 저도 마음의 준비를 했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이건····”
“마음의 준비를 한 것도 아니고 의지랑 다르게 저지른 거라서 부끄럽다?”
“네에····”
이리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은하는 피식 웃었다·
그녀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아 준 그는 그대로····
“짜네·”
그 손가락을 핥았다·
이리야의 눈이 크게 떠졌다·
“···주님? 지금 뭘····”
“짜다고·”
“아니요 그걸 물으려던 게 아니···· 흐읍! 주님!?”
순식간에 은하에게 입술을 빼앗긴 이리야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얼른 고개를 틀어 은하를 떼어내려 했다·
그럼에도 은하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금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
“너도 나한테 아까 했잖아· 이건 복수야·”
“복수라니···· 제정신인 거예요? 설마 주님 저주가 도진 건····”
“눈이 예쁘네· 그대로 계속 나만 보고 있어·”
“···아닌 것 같은데···· 주님 혹시 장난치는 건가요?”
“시끄러워· 복종이나 해·”
“····”
“이번에는 마음의 준비나 제대로 하고 있어·”
은하의 얼굴이 다가온다·
그를 홀린 듯이 올려다보던 이리야는 수줍게 답했다·
“···네·”
* * *
“주님····”
“괜찮아·”
이리야의 상태를 걱정한 나머지 이성적으로 내린 결단이었는지·
혹은 저주에 휩쓸린 결과 우발적으로 저지른 실수였는지·
그것은 은하 본인도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그녀가 충동을 억제하지 못해 서서히 무너져 가던 모습을 눈물을 흘리며 울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내가 사과하지 말랬지· 너는 그냥 내 말에만 따르면 돼·”
“···네 복종할게요· 아 지금 부끄러워한 거죠? 맞죠? 역시 저주가 아닌····”
“나한테 살심도 있던 거 알지?”
“무서워요· 잘못했어요·”
“그럼 얌전히 있어·”
“네에···· 그래도 주님 욕심이지만 한 번만이라도 듣고 싶어요· 제가···· 제 눈이 예뻐요?”
“···예뻐· 가지고 싶을 정도로·”
“후훗 소유욕이 도졌나 보네요· 고마워요 주님· 비록···· 저주에 걸려서 한 말이라도 기뻐요·”
“···그래·”
“···좋아해요 주님· 오늘만이라도 저를 지배해 주세요·”
“····”
그렇게 길고 긴 밤이 지났다·
밤중에 감정의 격류에 올라탄 은하와 이리야는 날이 밝자 서로를 겸연쩍게 대했다·
“괜찮아?”
“네···· 주님은요?”
“나도야· 그래도 오늘 하루는 너무 무리하지 말고 조금만 움직이자·”
“배려해 줘서 고마워요 주님·”
이전보다 얼굴이 많이 밝아진 이리야가 배시시 웃는다·
그녀의 미소를 본 은하는 따라 웃음이 나오는 한편 절로 안심이 들었다·
한편 종종걸음으로 나타난 불닭이는 타박하는 눈초리를 보냈다·
“빠빠···· 삐삐···· 뿌뿌····”
“····”
본의 아니게 두 사람을 대신해 밤사이 불침번을 선 불닭이·
시선을 받은 은하와 이리야는 당당하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어젯밤은···· 미안·”
“저도요 신수님· 죄송했어요·”
“삐뿌삐뿌삐·”
알면 됐다는 양 홱 고개를 돌린 불닭이는 근처 나무로 날아갔다·
서로를 힐끗한 은하와 이리야는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일단···· 옷이나 갈아입을까?”
“아···· 네···· 그래야겠네요·”
“아침 먹고 얼른 출발하자·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또 주님이 만들어 주시는 거예요?”
“그럼·”
“어제랑 오늘은 참 행복하네요· 저는 주님이 해 주신 거라면 뭐든 좋아요·”
“알았어· 그럼 적당히 만들게·”
대화를 마친 은하와 이리야는 서로 등을 돌리고 앉아 옷을 갈아입었다·
동굴 밖을 보며 단추를 채우던 은하는 점차 현실을 자각했다·
상념에 빠졌다·
‘이제 어떻게 하지····’
그만 사고를 치고 말았다·
이리야와 간밤에 있었던 일을 어떻게 정리하는 게 좋을지 선뜻 판단이 서지 않았다·
서로 없었던 일로 합의하고 하룻밤의 불장난으로 여길지 아니면····
바로 그때였다·
“주님·”
“응? 왜?”
이리야가 불렀다·
은하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아직 등을 돌린 채로 옷을 갈아입던 중이었다·
그녀가 그 상태로 운을 뗐다·
“저는···· 저 때문에 주님이 곤란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주님께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
“그 일은 없었던 거로 해요·”
“하지만····”
“말했잖아요·”
은하의 입을 다물게 하듯 대뜸 말을 자른 이리야가 고개를 돌린다·
긴 머리칼을 정리하듯 쓸어내린 그녀가 쓴웃음을 지었다·
“저는 한 번으로 만족한다고요· 그 이상은 바라지 않아요· 욕심이니까· 주님한테···· 저보다 더 좋아하는 분들이 있다는 것도 알고요· 그래서 죄송해요 괜히 주님을 심란하게 해서····”
“····”
“소재도 이제 거의 다 모았고 앞으로 이런 일은 없을 거예요· 절대 없도록 할게요· 그러니 주님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자상한 선 긋기였다·
그렇기에 가식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