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라이프 플레이어 (958)
미래 유성의 이야기에 따르면·
자신은 눈앞에 있는 방패 아이기스를 재료로 만든 검으로 미래에 닥치는 재앙에 대항하고 세상에 위명을 떨쳤다고 한다·
그만큼 자신에게 잘 어울렸노라고····
‘확실히 내가 골랐을 만해· 지금까지 봤던 보물 중에서 제일 마음에 들어·’
실제로 아이기스에서 발해지는 기운은 미래 유성의 이야기가 허언이 아니란 것을 증명하는 듯했다·
무엇보다 은하는 끌림을 느끼고 있었다·
여명검을 만드는 재료로 쓰인 태극 등급의 보물 서천 꽃밭의 꽃들에 버금가는····
‘이 방패를 재료로 사용한다면 분명 여명검을 대신할 만한 검을 만들 수 있을 거야·’
이 끌림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아이기스를 선택하지 않으면 크게 후회할 것이다·
그러니 반드시 선택해야 한다·
꼴깍·
은하는 강하게 직감했다·
무심코 손을 뻗는다·
만약····
―미래의 아버지는 후회했어요· 이탈리아에 그런 국보가 있을 줄 알았다면 분명 그것을 골랐을 거라고····
“····”
일전에 미래 유성과 나눈 대화가 떠오르지 않았다면 필시 아이기스의 기운에 홀려 영혼의 끌림을 거부하지 못하고 아이기스를 선택하고 말았으리라·
은하는 아이기스에 닿기 직전 가까스로 손을 거두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 아 큰일은 아닌가?”
우우웅·
손을 쥐었다 편다·
서서히 현실감이 돌아온다·
은하는 자신을 바라보는 듯한 아이기스를 향해 쓴웃음을 지었다·
“미안해 널 골라 주지 못해서·”
우우웅····
아이기스가 부르르 진동한다·
서운해하는 것 같다·
그럼에도 은하는 손을 흔들며 아이기스를 지나쳤다·
우우웅····
문득 은하는 뒤를 돌아보았다·
지금까지 본 보물들과 달리 아이기스는 자신을 쫓아오지 않고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모습이 처량하게만 느껴졌다·
마음이 흔들리고 만다·
“····”
발걸음을 돌리고 싶다·
하지만 그 마음을 억누르며 은하는 억지로 걸음을 뗐다·
다시 안개 속을 나아간다·
“쳇 이럴 줄 알았었다면 두 점이 아니라 세 점을 받겠다고 조건을 높이는 거였는데····”
은하는 아쉬움에 투덜거렸다·
* * *
아이기스를 뒤로한 이후로 모습을 드러내는 보물은 없었다·
보물의 구애가 끊어진 것이다·
은하는 내심 불안했다·
‘유성이 말대로 하기는 했는데···· 잘한 거겠지?’
미래 유성의 이야기에 따르면·
먼 미래 이 보고를 방문하는 어느 플레이어도 지금의 자신처럼 수많은 보물의 구애를 받는다고 한다·
그리고·
‘무슨 생각에서인지는 몰라도 전부 뿌리친다지····’
결국 플레이어는 어느 순간 보물의 구애가 끊어진 채로 아무것도 없는 안개 속을 한참이나 나아가야 했다는 모양이다·
그러다 마지막에 나타난 보물이 바로 미래의 자신이 탐을 낸다는 보물이라고 한다·
은하가 아이기스를 포기하면서까지 안개 속을 걷고 있는 이유였다·
‘슬슬 나와 주면 좋겠는데···· 설마 안 나오지는···· 않겠지?’
아마도 그러지는 않으리라·
미래 유성에게 듣기로 그 보물은 다른 보물들의 구애에 혹하지 않은 플레이어에게 흥미를 느끼고 접근했다는 모양이니까·
‘그래야만 한다····’
은하는 간절히 기도했다·
그 기도가 통하기라도 했는지 난데없이 나아가는 방향 저편에서 푸른 빛이 솟구쳐 올랐다·
화아악!
“····”
푸른 빛의 기세에 밀려나듯 순식간에 안개가 걷힌다·
순백의 세상이 펼쳐진다·
그 세상에 선 은하는 망연히 빛의 기둥을 올려다보았다·
빛의 기둥에서 흘러나오는 신비하면서도 상서로운 기운에 완전히 압도된 것이다·
‘틀림없어 저거야·’
정신을 차린다·
행여나 빛이 사라져 버릴세라 은하는 푸른 빛의 기둥을 쫓아 무작정 뛰었다·
다행히 빛은 도망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기다려 주고 있었다·
“····”
올려다보았던 시선이 이제는 마주 보는 시선이 됐다·
푸른빛의 기둥을 눈앞에 둔 은하는 차분히 호흡을 고른 뒤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그때 푸른 빛이 일렁였다·
동시에 은하의 머릿속으로 어떤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나는 대양의 신 오케아노스와 바다의 여신 테티스(Tethys)의 딸·
“····”
부드러우면서도 강단이 느껴지는 맑은 여성의 목소리·
은하는 머릿속에서 울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태초의 지혜·
티탄의 몰락과 올림포스 탄생의 배경·
하늘의 신 제우스의 첫 번째 아내·
실현되지 않은 또 다른 몰락의 예언·
지혜와 전쟁의 여신 아테나의 어머니·
그리고····
다음에 이어진 목소리에서는 한 맺힌 감정이 묻어났다·
한 남자에게 눈이 멀었던 어리석고 멍청한 여자·
그의 파멸을 바라는 자·
“····”
그때 푸른 빛의 기둥 속에서 둥그런 구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넘실거리는 빛이 깃든 구슬·
은하가 찾고 있던 보물이었다·
은하는 그 구슬을 향해 빛 속으로 손을 뻗었다·
손가락 사이로 푸른 빛이 얽힌다·
그러니 나의 아들이 될 아이야·
어서 나의 이름을 부르거라·
두 손으로 구슬을 감싸 쥔다·
은하는 머릿속으로 파고드는 목소리 주인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지혜의 여신 메티스·”
그 순간 구슬이 빛을 뿜었다·
보물 메티스의 지혜가 은하를 제 주인으로 인정한다·
* * *
영롱한 빛을 머금고 있는 푸른 구슬 메티스의 지혜·
마침내 노리고 있던 보물을 얻은 은하는 입가를 끌어 올렸다·
무척 만족스러웠다·
‘아이기스도 마음에 들었지만 이것도 정말 마음에 들어· 미래의 내가 왜 후회했다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손안에 있는 메티스의 지혜는 자신과 아주 잘 맞을 것이라고·
이 보물을 재료로 사용한다면 분명 여명검을 대신할 만한 검을 만들 수 있으리라·
은하는 확신했다·
“어서 해수 형한테 보여 줘야겠다· 보면 엄청 좋아하겠지?”
체감상 보고에 들어온 지 시간이 한참이나 지난 것 같다·
위에서 기다리고 있을 일행이 자신이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는다고 걱정하고 있을라·
슬슬 보고를 나가야겠다·
은하는 왔던 걸음을 돌렸다·
‘출구가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가 태극 등급 보고와 같다면 나가고 싶다는 마음으로 걷다 보면 언젠가 나오겠지·’
그때 메티스의 지혜가 한순간 푸른 빛을 반짝였다·
은하의 생각을 긍정한 것이다·
더욱더 주저할 필요가 없어졌다·
은하는 나가고 싶다는 마음으로 순백의 세상을 걸어 나갔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철문이 눈에 들어왔다·
‘출구다·’
걸음을 재촉해 철문 앞에 선다·
은하는 철문에 손을 댔다·
우우웅·
“····”
기척이 느껴진 것은 그때였다·
철문을 열려다 멈칫한 은하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 아이기스가 있었다·
“너였구나· 따라온 거야?”
우우웅····
자신도 데려가 달라는 듯이 아이기스가 진동음을 낸다·
거기에 맞춰 메티스의 지혜가 푸른 빛을 반짝이며 호응했다·
한편으로 은하는 두 보물이 반갑게 교신을 나누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마냥 착각은 아니리라·
메티스가 직접 말하기도 했었고 그리스 로마 신화에 따르면····
‘아이기스의 주인인 아테나가 메티스의 딸이라지· 하지만 메티스는 제우스의 머릿속에 갇혀 있던 터라 서로 얼굴을 본 적이 없다고····’
그런 의미에서 두 보물은 지금 모녀 상봉을 이룬 셈이리라·
서로 반가워할 만도 했다·
그렇다 보니 은하는 더더욱 미안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이기스를 가지고 나가지 못해 두 모녀를 찢어 놓아야 했으니까·
“나도 널 데려가고 싶지만···· 미안 안 될 것 같아·”
우우웅····
어쩔 수 없었다·
메티스의 지혜와 아이기스가 아무리 은하에게 호소하더라도 마땅한 방도가 없었다·
은하는 아이기스를 뒤로하며 철문을 지나 보고를 나와야 했다·
“노은하 플레이어·”
보고 앞에서는 최고 관리자가 은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말을 걸어왔다·
“보물을 얻은 것을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들어간 지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건가요?”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이제···· 10분이군요·”
“10분이요?”
“네 반응을 보아하니 안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모양이군요·”
“네 뭐···· 그렇죠·”
“기록에 따르면 보고 안은 시간 흐름이 다르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느끼는 거겠지요·”
“···그런 것 같네요·”
생각해 보면 태극 등급 보고에서도 시간 흐름이 현실 시간과 다르게 흐른 감이 있었다·
은하는 납득했다·
그때 최고 관리자가 물었다·
“어떤 보물을 가지고 나왔는지 저한테 좀 보여 주시겠습니까? 기록에 남겨야 하는 터라····”
“네 여기요·”
은하는 쥐고 있던 손을 풀며 메티스의 지혜를 보여 주었다·
흘러나오는 기운에 감탄한 최고 관리자는 조심스럽게 보물을 살폈다·
“과연 최고 등급 보물이군요···· 다만 이 보물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진 바가 없어서···· 어떤 보물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네요· 저한테 잘 맞겠다는 기분에 무심결에 덥석 고른 거라서요· 그래서 이름도 모르겠네요·”
“아드리아의 보옥이라고 합니다· 아드리아해에서 발견된 거라 그렇게 이름이 지어졌다지요·”
“아드리아의 보옥···· 그렇군요·”
구태여 메티스의 지혜에 대해 알려 줄 필요는 없었다·
뒤늦게 보물의 가치를 깨달은 이탈리아가 지급을 거절할 가능성이 없지도 않았으니까·
은하는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그럼 이만 올라가도록 하지요·”
“네·”
최고 관리자는 의심하지 않았다·
덕분에 은하는 별 탈 없이 메티스의 지혜를 수령하고 지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기다리고 있던 일행에게 메티스의 지혜를 공개하자 사람들은 무척 흥미로워했다·
특히 벽해수는 완전히 홀렸다·
“형이 봤을 때는 어때? 좋은 것 같아?”
“···알면서 묻는 거냐? 엄청 좋다· 이건···· 안에 어떤 섭리가 깃들어 있는지는 도통 감도 잡히지 않지만···· 아무튼 엄청 좋은 것은 확실해· 네가 전에 서천 꽃밭의 꽃들을 가져왔을 때 느낀 기분이야·”
당장 소재로 사용하고 싶다·
벽해수는 솔직하게 표했다·
그리고 그 심정을 증명하듯 잔뜩 흥분해서는 그날 당장 헤르미트와 백현율을 데리고 공방으로 떠나 버렸다·
“저 형도 참···· 오기 전에는 실컷 견문이나 쌓을 거라더니···· 뭐 나야 좋은가?”
은하는 쓴웃음을 지었다·
* * *
로마에서 다소 떨어져 있는 이탈리아 라치오주의 브라차노·
브라차노는 화산 폭발로 생겨난 칼데라호가 근처에 자리 잡고 있어 물을 끌어 쓰기에 용이한 입지에 있었다·
무엇보다 칼데라호의 물에 함유된 마나가 풍부했기에····
이탈리아 장인들은 이곳에 모여 마을을 형성하고 살았다·
뚜깡뚜깡! 뚜깡뚜깡! 뚜깡뚜····
“오오···· 과연 장인들의 마을이구만· 소리가 정말 듣기 좋네·”
그래서 이곳에서는 어디를 가든 쉽게 공방을 찾아 볼 수 있고 망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벽해수는 들뜨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걸으면서 연신 감탄사를 터뜨렸다·
“하하···· 그렇게 좋을까요·”
“나는 숙소에 있고 싶었는데····”
반면에 벽해수를 따라 동행한 헤르미트는 쓴웃음을 지었고 백현율은 졸린 눈을 비볐다·
이탈리아 관료의 안내를 받아 어느 공방에 도착한 것은 그러던 중이었다·
“여기가 이탈리아에서 제일가는 공방이라고? 느낌 있는데?”
붉은 지붕과 굴뚝이 인상적인 공방 앞에 선 벽해수는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고는 이탈리아에 오기 전 사전에 조사한 내용을 떠올렸다·
한국에 정확히는 판도라 클랜에 헤파이스토스의 용광로가 있다면·
이탈리아 제일로 평가된다는 이 공방에는····
‘불카누스의 용광로가 있다지·’
대장장이의 신 불카누스·
로마 신화에서 그렇게 불리는 그가 그리스 신화에서는····
공교롭게도 헤파이스토스로 불렸다·
“그래서 더 마음에 들어!”
헤파이스토스의 용광로 대신에 불카누스의 용광로라니!
벽해수는 말장난 같은 상황에 묘한 인연을 느꼈다·
어쩐지 잘 풀릴 것 같다·
실제로 불카누스의 용광로를 직접 눈에 담고는 확신했다·
이 용광로라면····
‘은하의 기대에 부응하는 좋은 검을 만들 수 있을 거야· 할 수 있어·’
심장이 어서 일을 하란 듯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한다·
벽해수는 입가를 끌어 올렸다·
바로 그때·
“어이 거기!”
“···어?”
한국어로 뒤에서 여성 특유의 앙칼진 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을 부르는 듯한 소리에 벽해수는 뒤를 돌았다·
그곳에·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며? 〈백은〉을 무기에 새겼다는 최초의 마에스트로·”
“····”
하얀 티셔츠를 말아 올려 배꼽을 드러낸 웬 여성이 한 명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