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라이프 플레이어 (944)
“진짜 아버지한테는 못 당하겠네요· 지금이라면 나이대도 비슷해서 가능할 줄 알았는데····”
“아직은 아들한테 질 수 없지· 나도 체면이 있으니까·”
“그 소리 미래에서도 하더라고요·”
“그래? 내 벽이 높은 모양이네· 대단한 아버지를 뒀구나? 좋겠다·”
“좋죠 너무 대단해서 탈이지만···· 자식 입장에서는 늘 비교만 돼서 얼마나 곤란한데요· 대체 저는 언제 아버지를 이길 수 있을까요?”
“그건 지금의 내가 아니라 미래의 나한테 물어야지·”
미래 유성이 쓴웃음을 짓는다·
어쩐지 주눅이 든 것 같은 얼굴로 보이기도 했다·
은하는 그런 그를 격려하고자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래도 아직은 무리라고 하지만 언젠가는 이길 수 있겠지· 성장의 여지는 충분하니까·”
“과연 그럴까요?”
자신에게 확신을 갖지 못하는지 자조적으로 되묻는 미래 유성·
은하는 그런 그를 대신해 강한 긍정을 표했다·
“그러엄! 너는 할 수 있어· 나는 너만큼 강하지 않았는걸? 네 나이였더라면 아마 이렇게까지 싸우지도 못했을 거다· 네가 훨씬 강해· 장담할게·”
“···그럼 저도 2년만 있으면 매구를 쓰러뜨릴 수 있을까요?”
“갑자기 매구는 왜 나오는데?”
“아버지가 스물여섯 살에 쓰러뜨렸으니까요·”
“음 그랬지· 너도 할 수 있어····”
할 수 있을 거다·
좋은 동료들만 있다면 아마도····
은하는 구태여 뒷말을 삼켰다·
괜히 초를 칠 필요는 없었다·
덕분에·
“그런가요···· 그렇게 들으니 힘이 좀 나네요· 감사합니다·”
미래 유성의 안색이 밝아졌다·
그제야 은하는 걱정을 덜기로 했다·
두 사람은 악수했다·
“그래 힘내라· 열심히 하고· 어차피 내가 말하지 않아도 이미 열심히 하고 있겠지만·”
“네 당연하죠!”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뒤에 더 남아 있는 것 같은데 계속 대련할 거야?”
“음···· 아니요· 기다려 주신 분들한테 미안하지만 오늘은 이쯤에서 마무리해야 할 것 같네요· 아버지랑 싸우느라 진이 다 빠졌거든요·”
“그러냐· 그럼 들어가서 씻고 이따 밥이나····”
이변을 느낀 것은 그때였다·
은하와 미래 유성은 물론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순간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
별안간·
대규모 편재가 감지됐으니까·
그것도 클랜회관 상공에서·
* * *
서울은 코쿤의 보호를 받고 있다·
게다가 〈심연의 던전〉의 공략으로 한국의 편재 발생 비율은 감소세에 접어들기도 했다·
그런데 아무런 전조도 없이 대규모 편재가 발생하다니 예사롭게 여길 일이 아니었다·
명백한 이상 사태였다·
“아니 저게 대체 어떻게····”
“····”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클랜회관 옥상으로 나온 사람들은 모두 경악을 금하지 못했다·
푸르스름하게 물들고 있는 하늘에 거대한 편재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편재 중심부에서는 금방이라도 몬스터들을 토해 낼 것처럼 꿈틀거림을 보였다·
실제로 놈들의 신체 일부가 간간이 드러나기도 했다·
‘저 정도 규모의 편재라면 사전에 징조가 느껴졌을 만도 한데····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고?’
은하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넋이 나가 있을 때가 아니었다·
머지않아 일대가 편재로 인해 한바탕 곤욕을 치르게 되리라·
행정 기능의 마비는 물론 재물 손괴와 인명 피해 추가 편재가 발생할 수도 있다·
거기에 혼란을 틈타 일어날 각종 범죄에 대한 우려 또한 없지 않았다·
그러니·
“각자 순찰 구역으로 이동해 구역 방어에 대비하도록 해· 지휘는 구역장들에게 맡길게·”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도 시급히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은하는 클랜원들에게 지시했다·
정신을 차리고 대답한 그들이 곧장 행동에 나선다·
그들을 뒤로한 은하는 이내 한쪽에서 편재를 분석 중이던 온태희와 선미예를 찾았다·
“태희야 미예야 어떻게 됐어? 현재 상태는?”
“마나관리기구에서도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해요· 그 때문에 많이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더라고요· 지금 부랴부랴 파악 중이라고는 하는데···· 아무래도 정보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편재 위험도 측정은 완료했어요· 다행히 더 심화하지는 않아서 최소 4위계 최대로 잡는다면 4위계 오버 랭크에 수렴할 것 같아요·”
온태희 선미예가 보고했다·
은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분석은 계속 부탁할게· 보고할 게 있으면 알려 줘·”
“네 클랜 로드·”
이것으로 당장 할 수 있는 조치는 다 취했다·
나머지는 정하양 한서현에게 맡기기로 하며 은하는 조용히 편재를 응시했다·
‘내 역할은 이곳에 남아 추가 지원에 대비하는 거야· 가능하면 내가 나서야 하기 전에 끝나면 좋겠는데····’
순찰 구역으로 향하고 있을 클랜원들에게 건투를 빈다·
머지않아·
끼이이이익!
편재 중심부가 격렬하게 흔들리며 몬스터들이 출몰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네비게이터 텔레파시스트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들이 놈들의 정보를 파악하며 지역 방어에 임하고 있을 클랜원들에게 전달했다·
와중에·
후쉬이이익····
“····”
군단장으로 추정되는 몬스터가 편재 속에서 안면을 드러냈다·
혹이 달린 노인의 얼굴에 입 밖으로 튀어나온 송곳니 짙은 녹색으로 뒤덮인 피부·
거기에 머리 양옆으로 솟은 휘어진 뿔·
귓불이 축 늘어진 귀에는 귀걸이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머리가 저렇게 클 정도면 덩치도 어마어마하겠네·’
놈이 세상으로 나오기 위해 편재에 낀 몸을 버둥거렸다·
이내 손 하나가 튀어나온다·
그 손으로 지지대를 잡듯 허공을 움켜쥔 놈이 마저 다른 손을 뽑아 들었다·
그대로 차츰 상체를 내민다·
“플레이어 라이브러리에는 등록돼 있지 않은 몬스터지만···· 생김새로 봐서는 제4위계 몬스터 혹부리 귀신의 변종이 아닐까 해요· 위계는··· 제4위계 오버 랭크로 추정합니다·”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온태희 선미예가 알렸다·
목소리에는 긴장이 어려 있었다·
‘저 덩치로 난동을 부린다면 주변에 미치는 피해가 클 거야· 차라리 완전하게 출몰하기 전에 놈을 치는 게 나을지도····’
지금이라도 얼른 나서야 할까·
은하는 두 검집에 손을 대며 생각에 잠겼다·
바로 그때·
“저 때문이에요·”
“뭐?”
지금껏 침묵하고 있던 노유성이 대뜸 운을 뗐다·
은하는 그를 돌아보았다·
“■■이가 메모리 선생님이 저한테 그랬거든요· 어쩌면 저로 인해서 시공간에 왜곡이 생기고 편재가 발생할 수도 있다고요·”
“····”
“그러니 지금 생긴 편재는 아마도 저 때문일 거예요· 미리 말해 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해요·”
은하에게로 걸어 나오며·
미래 유성이 겸연쩍게 사과했다·
그가 쓴웃음을 흘렸다·
“이건 제 책임이니 제가 처리하도록 할게요·”
“너 혼자 어떻게 하겠다고····”
너무 무모하다·
은하는 기겁하며 말리려 들었다·
그러자 걱정하지 말라는 듯 미래 유성이 어깨를 으쓱였다·
“괜찮아요 아버지· 믿어 주세요· 그리고 아까 아버지도 말했잖아요· 제가 아버지 나이 때보다 더 강하다고요·”
“아니···· 그렇다고 너 혼자 책임질 필요는 없잖아····”
“마침 잘됐어요· 그러지 않아도 아버지한테 보여 드리고 싶었거든요·”
“부모 말 좀 들으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 유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은하를 지나쳤다·
오른손으로 검을 뽑아 들고 체내 마나를 발현한다·
직후·
────!!
기세가 바뀌었다·
미래 유성에게서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 뿜어져 나온 것이다·
마치 세상이 진동하는 듯했다·
은하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이건····’
신화를 현현할 때의 현상이다·
그렇다는 뜻은 즉·
“유성아 너···· 신화 보유자였어?”
“제가 저번에 얘기했었죠? 아버지랑 연화 어머니 외에도 미래에는 이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신화를 지니게 된다고요· 다음 시대에 살아 있는 신화로 추앙되는 아버지 세대의 안배로요·”
“····”
“닥쳐오는 재앙에 대항하기 위해 아버지와 ■■ 어머니의 신화의 격을 높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저도 신화를 이룩한 거예요·
아버지의 부담을 덜어 드리고 가족들을 지키고 싶었거든요·
미래 유성이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아버지도 아시겠지만 신화는 필연적으로 사멸을 불러올 수밖에 없어요· 그렇다 보니 미래에 아버지는 거듭되는 재앙으로 인해 언제 사멸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가 돼 버렸죠·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로요·”
“····”
“그래서 제가 여기에 온 거예요·”
아버지를 포함해·
앞으로 신화를 이룩하게 될 사람들의 사멸을 최대한 늦추기 위해·
“어떻게 해야 신화로 인한 부담을 줄일 수 있을까·”
미래 유성이 검을 쥔 손을 지면에서 수평으로 뻗었다·
“미래의 신화 보유자들은 고민하고 또 고민했어요· 그리고 고민 끝에····”
“····”
“가장 나은 답을 찾았죠· 바로 이렇게요·”
그 순간·
“신화를 세상에 현현하지 않고·”
미래 유성의 주위를 넘실거리던 기운이····
“무기에 현현하는 거예요·”
손에 쥔 검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신화 예장(神話 禮裝) – 천 번의 결실〉
검이 신묘한 빛에 휩싸인다·
‘···신화로 무기를 벼리고 있어·’
무의식적으로 홀리게 만드는 그 광경에 은하는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머리 한구석에서는 깨달음이 폭발하듯 번뜩였다·
한편 신화가 깃든 검을 쥔 미래 유성은 말을 이었다·
“저는 늘 아버지에게 비교됐고 아버지를 따라잡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어요·”
미래 유성이 자세를 취한다·
왼발을 내디디고 허리를 틀고 검을 쥔 오른쪽 어깨를 최대한 뒤로 잡아당긴다·
검신에 깃든 빛이 호응하듯 부드러이 기세를 부풀린다·
“한 번이 안 되면 열 번을 열 번이 안 되면 천 번을· 천 번이 안 되면 그 이상을·”
“····”
“남들은 무식하다고 할 정도로 될 때까지 아버지의 검을 쫓았어요·”
그렇게 해서 얻은 성취를 기어코 자신이 이룩한 신화를····
“지금 보여 드릴게요·”
미래 유성이 선언했다·
그가 검을 검에 깃든 빛을 신화의 빛을 휘둘렀다·
쏜살같은 속도로 날아간 빛이 편재 속에서 몸을 꺼내는 군단장에게 적중한다·
그리하여·
푸슉!
키히에에에엑!
얼굴과 가슴 위를 가로지르는 길고 깊은 상처를 새긴다·
상처 부위에서 푸른 피가 솟구쳤다·
군단장이 고통에 괴성을 질렀다·
그러나 빛은 꺼지지 않고·
───!
수십 수백 천에 달하는 크고 작은 줄기로 흩어져·
키에에에에엑!
군단장을 난도질했다·
놈은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마나의 입자로 산화하고 만다·
미래 유성은 시선을 거두며 눈에 보이는 몬스터들을 향해 연달아 신화의 빛을 쏘아 댔다·
놈들은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단숨에 입자로 변해 흩날렸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미래 유성의 신화를 목도한 은하는 얼떨떨한 심정이었다·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 그에게·
“한 번이 천 번이 되는 신화·”
미래 유성이 답했다·
빛이 떠난 검을 갈무리하며 뿌듯한 얼굴로 미소 짓는다·
“그게 제 신화예요 아버지·”
* * *
미래 유성의 활약 덕분에 사태는 무사히 일단락됐다·
현장에서 그의 신화를 접하거나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한서현은 예외였다·
“왜 너 혼자 책임지려 드니? 누가 너한테 강요라도 하디? 아주 네 아빠한테서 닮지 않아도 될 부분까지 닮은 모양이구나· 하필이면···· 그리고 신화를 다르게 사용하면 부담이 줄어든다 해도 아예 없는 건 아니지 않니? 그런데도 꼭 신화를 써야 했니? 그것도 굳이 쓰지 않아도 될 상황에서 말이야·”
세상에 자식을 걱정하지 않는 부모는 없었다·
한서현은 엄하게 혼을 내며 미래 유성의 볼을 잡아 늘였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모르지 않았기에·
“어 어머니 죄송해요····”
미래 유성은 대드는 일 없이 잠자코 벌을 받았다·
그는 그녀의 화가 풀릴 때까지 빌고 또 빌어야 했다·
한편·
‘신화로 무구를 벼린다라···· 확실히 그 방법이라면 신화로 인한 부담을 줄일 수 있어·’
은하는 생각을 정리했다·
미래 유성으로부터 얻은 신화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은 자신에게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웬만한 수준의 무구로는 신화를 담아낼 수 없으리란 점·
물론 태극 등급 국보로 제작된 여명검이라면 가능하겠으나····
“아니 여명검으로는 안 돼·”
애석하게도·
여명검은 〈심연의 던전〉 공략 과정에서 모든 힘을 소실해 버리고 말았다·
그렇다 보니 현재에 이르러서는 조금 좋은 검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 여명검에 비해 나을 뿐 황혼검의 상태 또한 매한가지였다·
그렇기에·
“여명검을 대신할 수 있는 검이 있으면 좋겠는데····”
은하는 소망했다·
이 평화가 언젠가는 끝나고 미래에 재앙이 도래한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이대로 안주할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