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라이프 플레이어 (943)
비록 전력을 발휘하지 않은 대련이었다고는 하나·
제4기 십이좌 중 한 사람이자 〈심연의 던전〉의 공략자이기도 한 진파랑이었다·
그런 그의 패배는 사람들에게 다소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분위기가 술렁일 만도 했다·
‘파랑 형이 실전에는 강하고 대련에는 약한 타입이라지만 그렇다고 유성이한테 질 줄이야····’
은하는 턱을 쓰다듬었다·
미래 유성의 나이가 24 진파랑이 올해로 30세였다·
두 사람의 나이를 고려하자니 미래 유성의 승리가 더욱 대단하게 느껴지기만 했다·
‘응 역시 내 아들이라니까? 내 아들이라면 당연히 파랑 형 따위는 이길 줄 알아야지·’
굉장히 자랑스럽다·
절로 콧대가 솟는다·
은하는 씰룩이는 입꼬리를 참았다·
한편·
“야 유성아! 다시 하자니까!? 아까는 내가 깜빡 방심한 거고 이번엔 진짜 제대로 보여 줄게! 내 실력은 그게 전부가 아니라니까? 이번에는 분명 다를 거야!”
“하하····”
“우리 기프트도 쓰자! 어떠냐!?”
승패의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한 진파랑은 미래 유성을 보채는 중이었다·
미래 유성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질린다는 얼굴을 했다·
“추하다 진파랑· 더 추해지기 전에 얌전히 물러나라· 진 건 진 거야·”
“맞아· 그러다 파랑이가 아니라 추파랑이라고 불리고 싶니?”
“자기 자꾸 그러면 멋없어·”
“파랑 형이 그렇지 뭘····”
“쯧 어른스럽지 못하기는···· 진짜 바보 오빠가 따로 없네·”
“에휴 저 오빠는 참···· 혼자서 아인 망신이란 망신은 다 시킨다니까····”
“추해요·”
“····”
목민호 여우비 봉구래 강시형 김민지 진서나 등이 야유했다·
〈심연의 던전〉을 공략한 후로는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됐다지만 아직은 필담을 더 선호하는 손가연도 한마디 보탰다·
“오빠 그만해요····”
김메리까지 말렸다·
그녀는 지금 상황이 창피한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얼굴이 새빨갰다·
그럼에도 진파랑은 개의치 않고 꿋꿋하게 주장했지만····
“죄송해요· 순서는 지켜야 해서요···· 뒤에도 남훈 삼촌 어베니어 고모부 외에도 더 있거든요· 아무래도 재대련은 힘들 것 같아요·”
미래 유성은 난처해하면서도 조심스레 거절을 표했다·
그러자 유남훈 어베니어 등도 편을 들어 주었다·
“그래 파랑아· 마음은 이해하겠지만 뒷사람도 신경 써 줘야지· 너는 다음으로 미루도록 해· 아니면 다시 뒤로 서든가·”
“형 칭얼거리지 말고 좀 비켜! 우리도 해야지!”
“으으···· 젠장···· 알았어! 안 하면 될 거 아니야!”
이렇듯 여론이 심했다·
제아무리 철면피인 진파랑이라도 이제는 눈치가 보일 수밖에 없었다·
끝내 여론을 이기지 못한 그는 아쉬워하면서도 물러나야 했다·
늑대 꼬리를 크게 흔들며 성큼성큼 군중 속으로 돌아오는 그에게서는 잔뜩 불만이 묻어났다·
그런 그를 달래기 위해·
“오빠 잘했어요· 아깝더라고요· 그때 오빠 공격이 들어갔다면····”
김메리는 따스한 말을 건넸다·
다음에는 꼭 이길 거라는 둥 자신한테는 오빠가 최고라는 둥·
그녀의 진심 어린 위로에····
“메리 너도 그치? 그래 맞아· 다시 싸우면 내가 이긴다니까? 히히·”
진파랑은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그가 송곳니를 씩 내보였다·
사람들은 다루기 참 쉽다며 몰래 수군거렸지만·
한편·
“다음은 이제 내 차례인가· 유성아 괜찮겠어? 쉬지 않아도·”
“네 저는 괜찮아요! 이대로 계속해요!”
차례를 기다리던 유남훈이 앞으로 나서려 했다·
그러던 찰나·
“···은하야?”
“미안한데 내가 해도 될까? 나도 유성이랑 해 보고 싶거든·”
“····”
은하가 불쑥 팔을 뻗어서는 유남훈을 제지했다·
갑자기 길을 가로막힌 남훈은 당황스러운 눈치였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 또한 비슷한 심정이었다·
이내 남훈이 별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네 부탁인데 어쩌겠어· 나 대신 네가 나가도록 해·”
“고마워·”
일전에·
여우비의 목숨을 구해 준 대가로 은하에게 충성을 바친 그였다·
유남훈은 순순히 차례를 양보했다·
은하는 그에게 감사를 표하며 미래 유성에게로 나아갔다·
“나랑도 대련해 줄 거지?”
“당연하죠! 한 수 잘 부탁드립니다! 아버··· 아니 클랜 로드!”
서로를 마주한 채·
두 사람은 시원스레 웃었다·
* * *
“언니는 누가 이길 것 같아?”
“동생은?”
“음···· 나는 큰 유성이? 원래 젊은 게 실해서 좋다잖아·”
“나름 일리 있는 말이네· 그래도 나는 클랜 로드로 할게· 지금 클랜 로드 나이가 얼마나 좋은데? 적당히 무르익었으면서도 아직 파릇파릇할 때 아니겠니?”
“오호 언니도 일리 있어· 그러니까 괜히 고민되네····”
쌍둥이 자매 메이링 메이린·
두 사람이 군중 속에서 수군거린다·
우연히 그 소리를 들은 은하는 반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홱 고개를 돌렸다·
“너희 이상한 소리 하지 마라· 특히 유성이한테·”
“어머 클랜 로드랑 눈 맞았네· 우리 지금 찍힌 건가? 좋다! 짜릿해·”
“클랜 로드 시선이 너무 뜨겁다· 우리한테 반했나 봐·”
“····”
경고는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쌍둥이 자매가 서로를 껴안으며 꺄꺄 소리를 지른다·
정신 사납다·
은하는 눈살을 찌푸렸다·
‘진짜 저것들을 어떻게 하지····’
혼을 내도 좋다고 하고 벌을 줘도 좋다고 하고 지옥 훈련을 시켜도 좋다고 하고 그렇다고 포기하고 없는 사람처럼 무시하면 그것도 나름대로 신선하다며 좋아하는 쌍둥이 자매였다·
아주 괴인이 따로 없었다·
회귀 전에도 지금도 여전히 그녀들에게 애를 먹고 있는 은하는 깊이 한숨을 쉬었다·
그런 그의 고충을 아는지 미래 유성은 쓴웃음을 흘렸다·
“이모들이 수위가 없기는 하죠· 하하····”
“···혹시 내가 쟤들 때문에 미래에도 고생하니?”
“어···· 음···· 네····”
“미래에서도 못 잡는다는 거구나·”
“그래도 나쁜 분들은 아니잖아요· 플레이어로서 솜씨도 좋고· 다만 입담이 문제일 뿐이지····”
“후우····”
“저기···· 힘내세요·”
“오냐·”
차라리 클랜에서 퇴출해 버릴까·
미래 유성에게 힘없는 격려를 받으며 은하는 내심 진지하게 고민했다·
한편 대련장에 모인 사람들은 어느새 더 늘어나 있었다·
은하와 미래 유성이 대련한다는 소식을 접한 이들이 추가로 찾아온 것이다·
그중에는 한서현이나 노은아 류연화 등도 있었다·
“둘 다 너무 무리하지 말렴· 은하는 유성이 다치지 않게 하고·”
“은하야 유성아! 파이팅!”
“둘 다 힘내·”
세 사람을 비롯해 사람들이 응원을 보낸다·
정하양의 목소리도 들렸다·
“유성이 이겨라!”
“···아버 아니 클랜 로드 혹시 싸웠어요?”
“묻지 마라·”
“네·”
정하양이 토라지기는 했나 보다·
은하는 겸연쩍은 마음을 숨기며 답을 피했다·
미래 유성은 눈치껏 넘어가 주었다·
이윽고·
“그만· 대화는 여기까지 하고· 둘 다 준비는 됐지?”
“네 저는요·”
“저도요 선생님·”
판도라 클랜의 마법 고문 〈여제〉 신서영·
심판을 맡은 그녀가 말했다·
이에 은하와 미래 유성은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은하는 여명검과 황혼검을 미래 유성 또한 두 자루의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고는 자세를 잡는다·
“주위에 피해가 갈 수 있는 마법은 금지야· 기프트도 금지고· 모쪼록 서로 감정 상하지 않게 적당한 선에서 진행하길 바랄게· 그럼 시작!”
신서영이 신호했다·
그것으로 대련이 막을 올렸다·
하지만 은하와 미래 유성은 당장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일정 거리를 두고 서로 견제하기만 했다·
정확히는 은하는 가만히 있고 미래 유성은 틈을 엿보고 있었다·
은하는 그런 그에게 권했다·
“먼저 들어와· 받아 줄 테니까·”
“정말이죠? 그럼····”
갑니다!
은하가 친절히 기회를 내주자 미래 유성이 기다렸다는 듯이 지면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거리가 급격히 좁아졌다·
〈천보(天步)〉
‘천보를 쓸 줄 아는 건가· 하긴 내 아들이니 당연하겠지·’
장하다·
그러나 움직임은 빠른 반면 시선 처리가 어설프다·
어디를 노릴지 알고 있다면 조금도 경계할 필요가 없다·
은하는 여유롭게 막으려 했다·
바로 그때·
〈웜홀(Wormhole)〉
품속으로 파고들려는 듯하던 미래 유성이 갑자기 사라졌다·
직전에 은하의 의표를 찔러 진로 방향에 아공간을 만들어 다른 곳으로 이동한 것이다·
은하는 흠칫했다·
하지만 깜짝 말려들었다고 한들·
‘어차피 나타날 곳만 알면 못 피할 것도 없어·’
뒤다·
별안간 솟구친 기척을 느낀 은하는 급히 몸을 틀었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웜홀은 너만 쓸 수 있는 게 아니야·’
조금 전 미래 유성이 그랬듯·
등 뒤로 아공간을 만든 은하는 그대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 출구에서 나오자마자 첫발을 내디뎌 방향을 전환하며·
〈마나 크래셔(Mana Crasher)〉
“···!”
미래 유성의 배후를 잡은 은하는 냅다 여명검을 휘둘렀다·
그렇게 푸른빛을 머금은 칼날이 미래 유성에게 떨어지는 듯싶었으나·
──!
왼손에 쥔 맹고슈로·
미래 유성이 황급히 대응했다·
뫼 산(山)을 연상케 하는 크로스 가드 사이로 여명검을 끼어서는 강제로 궤도를 비튼다·
파직!
힐트와 여명검이 마찰을 일으켜 쇳소리가 나고 불똥이 튀는 한편·
여명검의 칼끝이 아래로 향한다·
그사이 보폭을 넓혀 반 회전한 미래 유성이 오른손에 쥔 검으로 반격에 나섰으나·
“큭!”
노림수는 실패로 그치고 말았다·
은하의 황혼검에 봉쇄된 탓이다·
미래 유성은 못내 분해하면서도 차분히 상황을 판단했다·
이 이상 파고들려고 해 봤자 무모한 도전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태세를 정비하기 위해 은하로부터 거리를 벌렸다·
은하는 흡족해했다·
“내가 잘 가르치기는 했나 보네· 내 전법은 다 배운 거야?”
“그럼요· 배우지 못한 건 없죠· 그리고····”
아버지가 미래에 익히는 것까지도요·
뒷말을 삼킨 미래 유성은 곧장 마법을 발동했다·
그 순간·
“고스트 블레이드(Ghost Blade)란 마법이에요·”
쏴아악!
미래 유성의 발밑에 있던 그림자가 물질의 속성을 띠며 여러 갈래로 솟구쳐 올랐다·
마치 칼날처럼 벼려진 그림자가 은하에게로 쇄도했다·
은하는 호기심을 보였다·
‘이것도 내가 가르친 건가·’
자신은 처음 접하는 마법이다·
그러나 마법을 이루는 근간은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원령 마법에····’
백서진의 신화를 계승하며 얻은 어둠을 다루는 섭리를 섞은 마법이 분명했다·
날아드는 그림자 칼날을 피하며·
은하는 입가를 끌어 올렸다·
‘어둠의 힘은 어떻게 사용할지 아직 감이 잡히지 않았는데···· 이런 식으로 사용할 수 있구나· 좋은데?’
은하는 미래의 자신의 지혜를 엿본 듯한 기분에 들뜨지 않을 수 없었다·
무척 공부가 됐다·
한편 그림자 칼날과 함께 은하에게로 달려들던 미래 유성은 어느새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아공간에 숨은 것은 아니야· 유성이는 지금····’
그림자 속에 숨은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미래 유성이 그림자 칼날 속에서 튀어나왔다·
“이런 들켰네요·”
“내 전법을 왜 모르겠어?”
미래 유성의 검에 대항하며 은하는 코웃음을 쳤다·
어느덧 주위를 휩쓸던 그림자는 존재를 잃고 본위로 돌아갔다·
은하에게는 기회였다·
이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월무(月舞)〉
두 자루의 검을 휘둘러 열여섯 번에 달하는 공격을 퍼붓는 연격기·
한 번 두 번 세 번····
은하는 틈을 주는 일 없이 미래 유성을 몰아붙였다·
허겁지겁 그의 맹공을 막는 미래 유성의 모양새는 엉망이었다·
그러던 도중·
〈블랙 커튼(Black Curtain)〉
다시금 미래 유성의 발밑에서 그림자가 솟구쳤다·
은하가 그 그림자를 베었을 때 미래 유성은 자리에 없었다·
그림자 뒤로 몸을 숨긴 사이에 어딘가로 이동한 것이다·
‘어디에 있는 거지?’
연기처럼 흩어지는 그림자가 은하의 시야를 가렸다·
나아가 어둠 특유의 힘이 기감 저하를 불러오기도 했다·
미래 유성을 찾아야 하는 은하는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목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다음에 보여 드리는 것도 아버지한테 배운 거예요·”
9시 방향·
은하는 즉각 지면을 박차고 어둠 속을 헤쳐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빛이 보였다·
밖이다·
그리고 미래 유성은····
“이건 어쩌지 못할걸요?”
은하의 예상과 달리·
미래 유성은 12시 방향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만 측면을 내주고 만 것이다·
은하는 세차게 혀를 찼다·
〈월광검무(月光劍舞)〉
미래 유성이 재빠른 속도로 거리를 좁혀 온다·
손에 쥐어진 두 자루의 검이 사나운 빛을 내뿜는다·
이윽고 그가 일격을 가했다·
거기에서부터·
휘익! 쏴아악!
연격이 이어졌다·
그 횟수가 열여섯 번에 달할 때쯤 은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검을 휘두르는 방식이 월무와 유사했기 때문이다·
즉·
‘월무에서 발전한 검술인가?’
내심 감탄하며·
은하는 매서운 칼바람 속에서도 미래 유성의 시선과 발끝 두 검이 지나가는 궤적을 분석했다·
그의 입꼬리가 호를 그렸다·
“고맙다·”
“네?”
“안 그래도·”
마침 월무를 토대로 삼아 새로운 연격기를 개발하고 있었다·
다만 중간에 풀리지 않아서 지지부진하던 차였는데····
은하는 미래 유성의 검술로 영감을 얻을 수 있었다·
아니····
‘미래의 나는 저렇게 했구나·’
해답을 얻었다·
그렇기에·
“나도 보여 줄게·”
“···네?”
지금 이 자리에서·
비로소 완성했다·
미래 유성이 검을 거두어들이며 방향을 트는 순간에 맞춰·
〈월광검무(月光劍舞)〉
은하는 곧장 공세에 들어갔다·
서른두 번에 이르는 연격기를 퍼붓는다·
졸지에 흐름이 끊겨 버린 데다 수세를 취하게 된 미래 유성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얼굴에 경악이 번졌다·
반면에 은하는 미소를 지었다·
‘아마 너는 방금 내가 그랬듯 기세가 죽는 틈을 노리려 들겠지·’
그렇게는 못 둔다·
이대로 끝내 주겠다·
은하는 몸을 회전하려는 순간 아공간을 만들어 냈다·
〈웜홀〉
“···!”
아공간 속으로 검을 들이밀어 미래 유성의 공격에 대응한다·
덕분에 은하는 흐트러짐 없이 공세를 이어 갈 수 있었다·
그리하여····
“내 승리인 것 같다·”
“···네· 한 수 잘 배웠습니다·”
결착이 났다·
미래 유성의 목덜미 앞에서 은하의 황혼검이 멈췄다·
미래 유성은 체념한 얼굴로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