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라이프 플레이어 (942)
After Story 7· 미래에서의 전수
한때 〈어둠의 왕〉으로 군림하며 이면에서 한국을 지배하던 백서진·
생전에 그가 이룩한 신화 암흑지근은 한국에 근간을 둔 것에 한해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했다·
그러니 백서진에게 승리를 거두고 그의 신화를 계승하기까지 한 〈군주〉 노은하는 명실상부 한국 최강이라 할 수 있었다·
이론상 은하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한국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아직도 부족해·’
은하는 만족하지 않았다·
한국 최강이란 영광에 취해 안주해서는 안 됐다·
자만심은 언젠가 방심을 불러오고 쓰지 않는 칼은 반드시 무뎌지기 마련이니까·
세상은 약육강식이었다·
약자는 잡아먹힌다·
겉으로는 문명의 탈을 쓰고 있을 뿐 세상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
따라서 이 세상을 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신을 단련해서 강해져야 했다·
행복한 일상을 유지하고 싶다면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고 싶다면 더더욱·
더군다나 미래 유성이 말하지 않았던가·
‘국가 간의 전쟁이 벌어지고 〈세기말 디스트럭션〉에 버금가는 재앙이 발생한댔지···· 어쩌면 지금까지 겪은 것보다 심한····’
그 미래를 알게 된 이상 이대로 가만있을 수는 없었다·
지금보다 더 강해져야 한다·
다른 나라에 나아가 대재앙에 대항할 수 있을 정도로·
은하는 새로 목표를 세웠다·
현재 하고 있는 훈련 또한 그 일환 중 하나였다·
“후우····”
클랜회관 내 클랜 로드 집무실·
한 차례 호흡을 가다듬은 은하는 눈앞에 놓인 마네킹 2개를 바라보았다·
한쪽 마네킹은 아무것도 입혀져 있지 않은 반면 다른 한쪽은 여성용 제복이 입혀져 있었다·
‘공간 조작과 관련된 섭리는 활용방식이 무궁해· 그러니 지금보다 더 정교하게 다룰 수 있다면 분명 앞으로의 전투에 도움이 될 거야·’
제2위계 몬스터 매구·
은하는 놈의 스킬석으로부터 얻은 이제는 자신의 영혼에 깃든 섭리를 의식했다·
그대로 두 마네킹에 손을 댄다·
이윽고·
‘지금이야·’
은하는 마법을 발동했다·
직후 마네킹에 입혀져 있던 제복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다른 마네킹으로 이동했다·
그 과정에서 실수는 없었다·
대상의 범위를 잘못 지정해 제복 일부가 손상돼 버리거나 이동 좌표를 잘못 계산한 탓에 그만 제복이 해당 좌표에 있던 마네킹과 분자적으로 합체해 버리거나 그러다가 끔찍한 괴생물체가 탄생해 버리는 등····
그런 사고가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제복과 두 마네킹은 멀쩡했다·
“좋았어·”
이제는 실전에서 사용해도 손색이 없겠다·
은하는 주먹을 쥐었다·
그러고는 다시 제복을 옮기며 반복 연습에 들어갔다·
‘손에 닿는 감각에 집중해서····’
언뜻 보기에는 간단해 보이는 실상은 복잡한 연산을 요하는 훈련이었다·
단순히 물체를 옮길 뿐만 아니라 이동 좌표에 있는 존재까지 완벽히 고려해야 했으니까·
은하는 매진했다·
그러던 그때였다·
“여보야 뭐 해?”
“아 하양아·”
빼꼼·
문이 열리고 그 틈 사이로 분홍 리본이 나오는가 싶더니 정하양이 고개를 내밀었다·
이내 집무실 안으로 들어와 은하의 팔을 끌어안는다·
은하를 올려다보던 시선은 곧 마네킹들로 향했다·
“또 이걸 하고 있었구나· 어때? 연습은 잘돼 가?”
“어 이제는 감을 잡았거든· 조만간에 실전에서 써 보려고·”
이참에 정하양에게 자랑이나 해야겠다·
가볍게 어깨를 으쓱인 은하는 훈련의 성과를 보여 주었다·
마네킹에 입혀져 있던 제복이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차례로 다른 마네킹에게로 이동한 것이다·
“어때? 잘하지?”
“와아· 역시 우리 여보라니까? 전보다 마나 제어 능력이 더 정교해진 것 같은데?”
“그렇지?”
정하양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기대하는 반응을 얻은 은하는 가슴을 활짝 폈다·
그러자 그녀가 귀엽다는 듯이 일부러 더 추켜세워 주었다·
“그런데 여보야 경찰 제복은 어떻게 가지고 있는 거야? 그것도 여성용을····”
“진짜 경찰 제복은 아니야· 여경이 저렇게 입는 거 봤어?”
“아 그러네· 다시 보니까 다르네· 경찰 치마가 저렇게 짧진 않지···· 코스프레 용인가? 그래서 어디에서 난 건데? 혹시····”
유정이나 언니들한테서 난 옷은 아니겠지?
그러니까 저 옷으로 나 몰래 밤에 재미있게 놀았다거나····
정하양이 뾰로통해진 얼굴로 은하를 노려보았다·
눈빛에서는 질투심이 묻어났다·
이에 쓴웃음을 지은 은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쌍둥이들한테서 압수한 거야·”
“쌍둥이들? 링이랑 린?”
“맞아 메이링이랑 메이린· 얼마 전에 걔네가 별 해괴한 옷들을 사 와서는 놀리려 들더라고· 그래서 홧김에 몇 벌 뺏어 버렸지· 이건 그거야·”
“아 그런 일이 있었지 참····”
정하양이 기억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제복으로 손을 뻗는다·
잠시 옷감을 매만진 그녀가 장난스럽게 운을 뗐다·
“우리 어렸을 때 생각난다· 어릴 때 서나랑 민지랑 은혁이랑 같이 경찰과 도둑 놀이 했었잖아· 그때 참 재밌었는데····”
“훈련을 겸해서 그렇게 놀았었지···· 가끔 누나도 꼈었고· 추억이네·”
“우리 오랜만에 한번 해 볼까? 여보랑 나 단둘이서·”
“단둘이?”
“응 단둘이· 밤에 성인용으로·”
“····”
“여보는 도둑 해· 나는 경찰 할게· 내가 저 옷을 입고서 여보를 잡으려 드는 거야· 아니면···· 여보가 잡으려 들어도 되고· 사실 나는 그쪽이 더 좋을 것 같아·”
윗입술을 핥으며·
정하양이 은하를 더듬는다·
손길이 꼭 뱀 같았다·
은하는 그런 그녀의 유혹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잠깐에 불과했지만·
그가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좋아 그럴까? 그런데 밤에 말고 지금 바로 할까?”
“지금? 바로? 여기서?”
“응 여기서· 마침 침대도 저기 있잖아?”
“음····”
“왜? 싫어?”
“아니 좋아· 유란이도 지금 유정이가 보고 있기도 하고·”
은하가 그윽한 시선을 보내자 정하양이 혀 짧은 소리로 냉큼 대답한다·
두 사람은 그대로 키득거렸다·
“그럼 옷 갈아입어야겠네· 여보는 밖에 문 좀 잠가 줘· 아 당연히 서현 언니 방이랑 연결된 비밀 문도 잠가야 하는 거 알지?”
“굳이 잠글 필요가 있을까? 들키면 서현이도 같이····”
“나는 혼자 독점하는 쪽이 더 좋거든요? 그리고 민망하잖아· 저 옷을 어떻게 보여 주니?”
“알았어 네 말대로 할게· 그런데 옷은 갈아입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어? 왜?”
“왜냐하면····”
순간 기발한 발상이 떠올랐다·
블레이저 단추를 풀던 정하양이 고개를 갸웃하는 가운데·
은하는 악동 같은 얼굴로 입가를 끌어 올렸다·
직후 그녀의 어깨에 손을 댄 그가 마법을 전개했다·
“내가 갈아입혀 줄 테니까·”
“···뭐?”
정하양이 미처 인지하기도 전에·
환의는 순식간에 일어났다·
그녀의 옷이 속옷만 남겨 둔 채 벌거벗은 마네킹에게 입혀지는 동시에 다른 마네킹에 입혀져 있던 제복이 그녀에게 입혀진 것이다·
“꺄아악!”
정하양은 바뀐 복장을 확인하고 화들짝 놀라며 제 몸을 끌어안았다·
“····”
“어때? 나 잘하지?”
이때 은하의 눈에는 정하양이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우쭐했건만·
“···하양아?”
“····”
뒤늦게 깨달았다·
정하양이 화가 났다는 것을·
은하는 심장이 철렁이는 심정으로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이윽고·
“은 하 야?”
“····”
한동안 불러도 답이 없던 정하양이 입을 열었다·
활짝 웃는 얼굴과 달리 목소리는 스산하기 그지없었다·
은하는 제 운명을 직감했다·
아니나 다를까 한바탕 야단을 맞았다·
* * *
세상에 어떻게 나한테 아직 실전에서 검증해 보지도 않은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느냐·
설령 실전에서 검증했더라도 사전에 안전성을 확신했을지라도 절대 보장할 수는 없지 않으냐·
그리고 만약 내가 무심결에 마법에 간섭이라도 했으면?
아무리 나를 놀래고 싶었더라도 나에 대한 배려가 없었던 것 아니냐·
너무 안이했다·
잘못됐으면 어쩔 뻔했느냐·
왜? 그때 가서 나는 잊고 새 여자나 들이려고?
이제 나는 잡은 물고기라고 막 대해도 된다는 거니?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내가 가벼워? 응? 만만해?
대체 너한테 나는 뭐야?
더 이상 나는 안 소중해?
진짜 실망이다·
제발 철 좀 들어라·
또····
“내가 안이했어····”
정하양의 분노는 지당했다·
그녀에게 단단히 혼쭐이 난 은하는 후회막심한 심정이었다·
계속 한숨만 나왔다·
‘하양이가 많이 삐진 것 같던데 어떡하지····’
설움이 터진 정하양을 달래고 그녀에게 용서를 구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기분이 완전히 풀린 것은 아니었다·
은하는 모르지 않았다·
‘일단···· 괜히 더 건드리지 않게 당분간 조심스럽게 대하자·’
당연하게도·
식을 대로 식은 분위기에서 오붓하게 사랑을 나눌 수 있었을 리 없다·
정하양은 옷도 갈아입지 않고 원래 입고 있던 옷이 입혀진 마네킹을 가지고 나가 버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안 되겠다·’
은하 또한 집무실을 나왔다·
안에 홀로 갇혀 있는 것 같아 답답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땀이나 흘려야지· 가서 검이나 휘두르자·’
기분이라도 전환하기 위해·
은하는 무작정 계단을 내려가 훈련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복도를 걷던 중·
“은하야·”
“아빠!”
이유정 노유란과 노유린을 만났다·
자연히 은하의 얼굴은 환해졌다·
그가 자신에게 와다다 달려온 딸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구 우리 유란이 유린이· 아빠가 그렇게 보고 싶어서 뛰어온 거야? 잘 뛰네·”
“네에!”
“그래도 다음부터는 뛰지 말고 천천히 걸어서 오자· 그러다 다치면 어쩌려고?”
“네에!”
제대로 듣지도 않고 답하는 듯한 열심히 은하의 손길을 즐기는 노유란과 노유린·
은하는 그녀들의 애정 표현에 미소가 지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역시 우리 애들이 최고야···· 우울했던 게 싹 낫는 것 같네·”
“왜? 무슨 일 있었어?”
“아 그게····”
유란과 유린의 시선에 맞춰서 무릎을 꿇은 은하의 머리 위에서·
이유정이 궁금해하며 묻는다·
이에 은하는 뺨을 긁적이며 조금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 설명했다·
잠시 후 대략적인 사정을 들은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은하 네가 잘못하기는 했네· 다음부터는 그러면 안 돼 알겠지? 하양이한테는 사과했지?”
“어 다시는 안 그래야지· 하양이한테도 이미 사과했고···· 아직도 화가 난 것 같지만····”
“하양이가 많이 놀라서 그럴 거야· 내가 이따 찾아가 볼게· 하양이도 속 시원하게 이야기하면 분명 기분이 풀릴 테니까· 그럼 그때 가서 다시 사과해 보도록 해·”
천사처럼 자애로운 미소와 함께·
이유정이 은하에게 손을 뻗어 부드러이 머리를 쓰다듬는다·
은하는 감동했다·
“유정아···· 역시 너밖에 없다·”
“어머 얘 좀 봐? 그러면서 나 빼고 여자가 세 명이나 되니? 나는 첫 번째도 아니고?”
“하하····”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유정은 가볍게 받아쳤다·
은하는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대답을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는 냅다 품에 안겼다·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는다·
“조금만 이러고 있어야겠다· 안정감이 들어서 좋네·”
“어쩔 수 없네· 그래 착하지~·”
포근하고 부드럽다·
은하는 그대로 눈을 감고 그녀의 품속을 즐겼다·
그때 노유린이 딴지를 걸었다·
“아빠는 아기예요? 엄마 가슴이 좋아요?”
“맞아 아빠는 사실 아기야·”
“정말요?”
노유린이 처음 알았다는 듯이 동그란 눈을 깜빡인다·
은하와 이유정은 그녀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
이유정도 장난에 동참했다·
“그래 맞아· 아빠는 사실 유린이보다 더 아기란다?”
“와아····”
“그러니까 유린이도 엄마처럼 아빠를 안아 주지 않을래?”
“네 좋아요!”
“나도요! 유란이도요!”
노유린과 노유란이 방방 뛴다·
이유정의 품에서 벗어난 은하는 얼른 두 팔을 벌렸다·
그러자 두 딸아이가 달려와서는 그를 끌어안아 주었다·
물론 은하나 유정이 보기에는 안기려 드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럼에도 은하는 개의치 않고 두 딸아이의 포옹을 즐겼다·
“그나저나 여기에는 웬일이야? 애들 데리고·”
“애들이 심심해해서· 그런데 마침 유성이가 훈련장에서 클랜원들과 대련하고 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그거 보려고 왔지·”
“유성이가? 큰 유성이?”
“응 큰 유성이·”
그러고 보니·
미래 유성의 실력을 아직 확인해 보지 않았다·
은하는 호기심이 동했다·
‘내 아들이 얼마나 강하려나·’
일찍이 클랜원들의 보고를 통해 미래 유성의 실력을 파악해 두기는 했다·
즉시 위험한 임무에 투입해도 전혀 무리가 없을 정도라고·
그러나 간접적인 정보만으로는 제대로 가늠할 수 없었다·
이참에 직접 판단해 봐야겠다·
은하는 눈을 빛냈다·
“그래? 그럼 나도 가 볼까?”
“응 좋아· 너희도 좋지?”
“네에!”
그길로·
은하는 이유정 노유란 노유린과 함께 미래 유성이 대련을 벌이고 있다는 장소로 향했다·
그곳은 이미 소식을 듣고 모여든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미안 좀 지나갈게·”
“아 클랜 로드· 어서 오세요·”
사람들 너머로 금속음이 들렸다·
미래 유성이 누군가와 대련하고 있는 듯했다·
은하는 딸들이 볼 수 있도록 주위 클랜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대련 상대를 확인하고 눈을 의심했다·
‘파랑이 형?’
〈뇌랑〉 진파랑·
미래 유성은 그를 상대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놀라울진대·
“큭 젠장!”
미래 유성에게 일격을 허용하고·
진파랑이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의 목덜미에 검이 드리워졌다·
“····”
승패가 결정됐다·
미래 유성의 승리요 진파랑의 패배였다·
대련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모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
“한 수 잘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역시 큰아버지네요!”
“한 수 잘 배우기는 무슨! 야 다시 해! 한 번 더!”
상대에 대한 예를 표하는 미래 유성과 달리·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진파랑이 분하다는 듯이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