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라이프 플레이어 (938)
쏴아아 하고·
흐린 하늘 아래로 쏟아져 내리는 빗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
툇마루에 걸터앉은 은하는 멍하니 비가 내리는 전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옆에 털썩 앉았다·
인기척을 느낀 은하는 고개를 돌려 정체를 확인했다·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는 것 같은 털털한 인상의 노인이었다·
은하가 기억을 떠올리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빗소리가 듣기 좋지? 내가 처음에 네 할머니를 만났을 때도 이랬단다·”
“할아버지?”
“어떠냐? 비 오는 날에는 파전이랑 막걸리를 먹어야 하지 않겠냐? 모처럼 여기에 오게 됐는데 빗소리만 듣고 가서야 되겠어? 할아버지랑 술 한잔해야지! 나도 이제야 손주 놈이 따라 주는 술을 받아 마실 수 있겠구만· 나중에 영감들한테 자랑해야겠어·”
“····”
할아버지가 껄껄 웃음을 터뜨린다·
은하는 상황이 잘 이해되지 않아 눈을 깜빡이기나 했다·
그가 알기로는····
생각을 방해받은 것은 그때였다·
“자! 일단 받거라·”
“네····”
조금 전에는 없었던 것 같건만·
별안간 할아버지의 손에는 막걸리가 한 병 쥐어져 있었다·
실실거리며 가라앉은 내용물을 흔든 할아버지가 뚜껑을 땄다·
잔은 어느새 툇마루에 놓여 있었다·
딸딸····
할아버지는 은하에게 막걸리를 따라 주었다·
그러고는 바닥에 놓인 잔을 들고 막걸리를 그에게 넘겼다·
“그러면 나도 어디 한 잔 받아 볼까?”
“···제가 따라 드릴게요·”
은하는 정중히 할아버지의 잔에 막걸리를 따랐다·
그의 시야 끝에서 또 다른 잔이 들이밀어진 것은 그때였다·
“나도 한 잔 주겠니? 오랜만에 은하가 따라 주는 게 마시고 싶네·”
“···할머니?”
“파전이랑 김치전도 만들어 왔으니까 안주로 같이 먹으렴·”
어느새 옆자리에 앉아 있는 할머니·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를 본 은하의 눈이 크게 떠졌다·
“····”
“왜 그러니?”
“···아니에요· 따라 드릴게요·”
은하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이내 의문은 뒷전으로 밀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만날 수 있어 반갑고 기쁘기만 했으니까·
“당신 솜씨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은하야 어떠냐· 맛있지 않냐?”
“당신도 참·”
“···네· 맛있어요 정말·”
할아버지와 할머니 사이에서 은하는 술을 마시고 안주를 먹으며 그들과 즐겁게 대화를 나눴다·
한편으로는 안도했다·
“다행이에요·”
“뭐가 말이니?”
“할머니 얼굴이 좋아 보여서요· 잘 지내고 계시는 것 같네요·”
“···그렇지· 그러니 가족들한테 나는 잘 지내고 있다고 전해 주려무나·”
“네···· 그럴게요·”
은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로도 그는 두 사람과 함께 화목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중 그의 눈에 들어오는 인영이 하나 있었다·
‘저 애는 누구지?’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저 멀리 처마 밑에서 웬 아이가 비를 피하고 있었다·
쏴아아·
푸른 수국을 연상케 하는 듯한 색을 품은 머리카락과 눈·
은하는 묘하게 류연화를 닮은 듯한 남자아이가 신경 쓰였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아이의 존재를 눈치챈 듯했다·
“저런 우산이 없는 모양이구나·”
“저기서 저러고 있으면 추울 텐데 은하 네가 데려오지 않으렴? 여기 우산 챙겨 가도록 하고·”
“···네 그럴게요·”
할아버지가 은하에게 눈짓하고 할머니가 우산을 건넨다·
자리에서 일어난 은하는 우산을 쓰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빗방울이 우산에 투둑투둑 튀면서 소리를 냈다·
이윽고 그는 아이를 마주했다·
“꼬마야 여기서 뭐 해?”
“····”
“여기 있으면 감기 걸릴 텐데 저기 가서 쉬지 않을래?”
“····”
푸른 눈이 은하를 올려다본다·
아이는 그가 아무리 말을 걸어도 대답이 없었다·
다만 그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더니·
끄덕·
아이는 행동으로 대답했다·
볼수록 류연화를 떠올리게 만드는 아이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경계심이 풀린 듯한 얼굴로·
“그럼 갈까?”
덩달아 아이를 따라 웃으며·
은하는 아이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 * *
“····”
아이의 손을 잡은 감각이 현실처럼 이리도 선명하건만·
아무래도 꿈을 꿨던 모양이다·
침대에서 눈을 뜬 은하는 자신이 가족 여행을 온 것을 깨달았다·
‘꿈인 것치고는 어째 묘한데···· 내가 무슨 꿈을 꾼 거지?’
자신의 상상이 만들었던 것일까·
아니면 안면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은하는 이상하게도 꿈속에서 만난 아이의 정체가 궁금하기만 했다·
단순한 꿈이라고는 넘길 수 없었다·
그런 한편으로·
‘할머니는 잘 계신 것 같아 다행이네·’
비록 꿈에 지나지 않았지만·
할머니가 할아버지와 오순도순하게 지내는 모습을 볼 수 있어 좋았다·
그러자니 남자아이에 대한 관심은 다소 덜해졌다·
불쾌함을 주는 꿈도 아니었겠다 긍정적으로 여기기로 했다·
“일어났니?”
옆에서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한서현이 스마트폰을 하고 있었다·
상태가 단정한 것으로 보아하니 먼저 일어나서 씻은 듯했다·
이내 은하와 눈을 마주친 그녀가 싱긋 눈웃음을 지었다·
눈빛에서 마음을 따스하게 데우는 감정이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응· 잘 잤어?”
“누구 때문에 잘 자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다른 쪽으로는 잘 잤어·”
“안 재워 주겠다고 한 게 누구인데·”
“그러는 너야말로 어때? 잘 잤니?”
“얼마 자지 못해 피곤하기는 한데 이 정도는 거뜬····”
“아니 그쪽 말고·”
“···그럼 어느 쪽?”
“거기는 잘 잤냐고· 만족했니?”
“····”
장난을 치듯 키득거리며·
스마트폰에서 시선을 뗀 한서현이 세워 둔 침대에 몸을 기댄다·
은하에게로 시선을 집중한 그녀가 슬그머니 손을 움직인다·
섬섬옥수와 같은 손이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
마치 뱀처럼 땅을 기듯·
이내 은하는 움찔했다·
“그제랑 어제도 힘을 썼을 텐데 많이 건강하구나···· 아직 만족하지 못했나 보네?”
“···아침부터 유혹하지 마· 그리고 아침에는 원래 그런 거야·”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고상하고 도도한 면모를 보여 주는 그녀건만·
한서현은 은하와 단둘이 있다고 수위를 가리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녀의 은은한 행위가 은하의 마음을 간지럽혔다·
“어떻게 할래?”
“····”
그녀는 번민에 빠진 그를 보고는 흐뭇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가 자신에게 반응한다는 것이 충족감을 안겨 주는 것이다·
결국 두 사람은 잠을 깨고서도 한동안 침대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고 나서 시간이 흘러·
“그만 일어나자· 애들 기다리겠다· 아침 먹으러 가야지·”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얼른 준비해야겠다·”
은하와 한서현은 몸을 씻는 대로 호텔 레스토랑으로 내려갔다·
그녀의 경우에는 아침에 일어나서 한 번 더 씻어야 했다·
“둘 다···· 잘 잤나 보네?”
“은하야 서현 언니 좋은 아침·”
“둘 다 잘 잤어?”
“엄마 아빠! 안녕히 주무셨어요!”
정하양 이유정 류연화 노유성 노유란과 노유린은 이미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은하와 한서현은 겸연쩍어하면서 자리에 앉았다·
이내 그들은 아침을 먹기 시작하며 셋째 날 일정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던 그때·
‘응? 뭐지?’
음식을 먹던 은하는 갑작스러운 거북함을 느꼈다·
뱃속에 무언가가 얹힌 것 같았고 메스껍기까지 했다·
급기야·
“웁!”
“···?”
욕지기를 느낀 은하는 황급히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아침을 먹던 사람들은 모두 그를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왜 그러니? 무슨 일이야?”
“속이 안 좋은 거야? 혹시 어제 뭐라도 잘못 먹은 건가····”
“혹시 몰라 약을 챙겨 오기는 했어· 가져다줄 테니까 그걸 먹을래?”
“우리는 아무렇지 않은 것을 보면 음식이 잘못되지는 않은 것 같은데····”
“···아니야 나는 괜찮아· 지금은 나아진 것 같아·”
한 차례 구역질을 참으니 상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졌다·
몸에도 아무 이상이 없었다·
괜히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던 은하는 그녀들을 다독였다·
하지만 구역질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웁!”
“····”
“나 나는 괜찮···· 웁!”
“····”
“웁!”
은하의 몸은 그의 의사에 반하며 제멋대로 반응했다·
그는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감각에 놀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를 지켜보던 그녀들도 하나같이 비슷한 심정이었다·
당황하고 불안해할 수밖에 없었다·
“웁!”
“····”
그러는 사이에도 은하의 구역질은 어김없이 계속됐다·
‘뭐지? 대체 뭐지?’
음식을 먹지 않아도 몸이 반응하니 미칠 노릇이었다·
물을 마시다 갑자기 구역질이 들어 쿨럭쿨럭 내뱉기까지 했다·
은하는 생전 처음 경험하는 감각에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었다·
그가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에 대한 인과성을 알아차린 것은 그때였다·
‘연화가 먹을 때마다 하고 있어?’
은하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류연화·
그녀가 음식을 입에 집어넣을 때마다 욕지기가 찾아오고 있었다·
착각이 아닌 듯했다·
“얌·”
“웁!”
“얌····”
“웁!”
“···정말 괜찮은 거야?”
“나 나는 괜찮으니까···· 그러니까 연화야···· 한 번만 더 먹어줘····”
“응···· 얌·”
“웁!”
“····”
류연화가 안절부절못하는 가운데·
은하는 구역질을 억누르지 못하고 결국 화장실로 뛰어갔다·
그제야 무언가를 짐작한 사람들은 다소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 * *
흔치 않지만 남편이 아내를 대신해 입덧을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은하가 보인 증상은 충분히 그것을 의심케 했다·
그래서 혹시나 하고 병원을 찾은 가족들은 다음과 같은 진단 결과를 받을 수 있었다·
“축하합니다 임신입니다· 4주 차군요·”
“····”
“정말···· 인가요?”
“네 여기 아기집이 생성돼 있네요· 4주 차라 이제 막 만들어진 단계라서 알아보기가 힘들 텐데····”
은하와 가족들이 우르르 진료실을 찾아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의사는 당황하지 않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들은 초음파 사진을 확인하고는 완전히 현실을 받아들였다·
류연화가 임신했다·
“설마 설마 하기는 했지만 설마 진짜였을 줄은···· 축하해 언니·”
“언니 임신 축하해! 그동안 계속 아이가 생기면 좋겠다고 했었는데 드디어 소원을 이뤘네!”
“나도 축하해 언니· 정말 잘됐다· 언니도 이제 엄마가 되는 거구나?”
류연화가 진단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초음파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가운데·
한서현 정하양 이유정은 진심으로 그녀의 임신을 축하해 주었다·
그녀가 아이를 바라던 것을 아는 그녀들은 제 일처럼 기뻐했다·
“아··· 얘들아 정말 고마워· 정말····”
류연화는 여전히 얼떨떨해하면서도 연신 감사를 입에 담았다·
감정이 벅차오르는 것인지 목소리에 미약한 떨림이 있었다·
‘연화가 임신했다니···· 그럼 그건 태몽이었던 거구나·’
은하는 상념에 빠져 있었다·
아침에 꾼 꿈이 범상치 않아 잊히지 않더니만 태몽이었다는 사실에 납득이 갔다·
돌아가신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꿈에 나온 이유는 어쩌면 아이를 점지해 주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신이 우산을 씌워 주고 집으로 데려온 아이는····
‘내 애? 아들?’
현재로서는 성별을 알 수 없지만·
은하는 어렴풋이 류연화가 임신한 아이가 아들임을 직감했다·
다만 혹시 모를 혼란을 방지하고자 아이의 성별이 확실해질 때까지는 비밀로 간직하기로 했다·
‘그나저나 내가 입덧이라니····’
은하는 힘없이 어깨를 들썩였다·
다른 아내들이 아이를 품었을 때는 입덧을 겪지 않은 그로서는 내심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증상이 가시기 전까지 일상생활이 여러모로 불편할 듯했다·
그럼에도 류연화가 출산 과정에서 겪을 고통을 분담할 수 있을 테니 다행이란 생각도 있었다·
문제는 눈치가 보인다는 점이다·
다른 아내들의 눈치가····
“남편이 아내를 너무 사랑하면 입덧을 대신하는 경우도 있다던데 연화 언니를 너무 사랑했나 보구나? 우리보다도 훨씬·”
“연화 언니는 좋겠다· 우리 중에서 은하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라서·”
“은하가 연화 언니랑 회귀 전부터 인연이 있어서 그랬던 걸까? 그런데 나도 은하랑 회귀 전부터 인연이 있었는데 나 때는 왜 그러지 않았던 거지? 응? 은하야 어떻게 생각해?”
“하하····”
서로 시기하지 않기로 다짐했건만 사람 마음을 기계처럼 재단할 수는 없는 법이다·
한서현은 말을 돌려 가며 은하에게 언짢은 티를 드러냈으며·
정하양은 두 번째 임신을 계획하며 조만간 그를 쥐어짜기로 다짐했고·
이유정은 평소 상냥한 성격과 달리 은은히 그를 추궁하는 듯한 태도를 내비쳤다·
그런 상황에서 그는 억울하면서도 자칫 불을 지피기라도 할까 어색한 웃음으로 대답을 피했다·
‘내 뱃속에···· 은하의 아이가 있는 거구나· 은하가···· 나를 정말 사랑하는구나·’
류연화는 그녀들의 눈치를 살피며 격한 감동을 억눌렀다·
그러면서도 움찔움찔 올라가려는 입꼬리는 어찌하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은하의 축복을 바랐다·
그녀는 한서현 정하양 이유정에게 모종의 압박을 받고 있는 그를 연신 힐끗했다·
이내 시선을 느낀 그가 그녀와 눈을 맞췄다·
“연화야·”
“응·”
류연화가 직접 표현하지 않더라도 은하는 그녀의 마음을 안다는 양 피식 웃으며 말을 꺼냈다·
“고마워 정말·”
“···응· 나야말로 정말 고마워·”
살얼음이 녹는 듯한 미소와 함께·
류연화는 눈가를 훔치며 화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