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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ter Story 5· 간만에 휴가를
은하가 가족 여행을 계획한 시기·
소식을 접한 김민지는 그날 즉시 친구들을 소집했다·
“지금부터 멋쟁이 여자들 회의를 시작하도록 할게·”
판도라 클랜이 창설된 지 어언 10년·
강산이 한 번 바뀌는 시간을 거쳐 국내 제일의 클랜으로 자리를 잡은 판도라 클랜에는 그만큼 클랜원들이 친목을 다지는 다양한 사교 모임이 존재했다·
그중 여성 클랜원들이 선망하는 사교 모임이 바로 김민지가 주최하는 멋쟁이 여자들 회의였다·
그녀가 중등 아카데미에 재학할 때 마음 맞는 친구들과 시작한 멋쟁이 기숙사 여자들 회의를 전신으로 두고 있는 회의·
클랜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지닌 여성 간부 대다수가 참여하는 회의는 클랜의 여론과 유행을 주도하며 출세의 지름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땅땅! 이러니까 정말 회의하는 분위기 나지 않아? 내가 오는 길에 사 온 뿅망치인데 앞으로 이럴 때마다 사용하면 되겠다! 이건 민지 방에다 기증할게!”
그 회의의 원년 멤버에 해당하는 아리엘은 뿅망치를 뿅뿅 두드려 댔다·
그때마다 그녀의 머리 양옆에 난 푸른 비늘이 파닥거리고 분홍 머리칼이 흔들렸다·
언젠가부터 그녀의 뒤치다꺼리를 담당하게 된 호시미야 카에데는 한숨을 푹 쉬었다·
“아리엘 정신 사나우니까 그것 좀 그만 두드리도록 해· 밤중에 소리····”
“에잇!”
뿅뿅!
“····”
카에데가 채 말을 끝맺기도 전에·
얌전하게 있지 못하는 아리엘이 뿅망치로 그녀의 머리를 때렸다·
“카에데의 키는 줄어드는 대신 내 키야 늘어나랏! 에잇! 에잇!”
“····”
“···화났어?”
아리엘이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지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는 반면·
카에데는 화를 억누르는 듯한 얼굴로 눈썹을 꿈틀거리기만 했다·
그제야 아리엘이 눈치를 살폈다·
카에데가 휙 뿅망치를 낚아챈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앗! 내 뿅망치가···!”
“줄어든 키를 찾아와야겠군·”
뿅!
“아얏! 미 미안! 내가 잘못···!”
“0·1cm 찾아왔다·”
뿅!
“으응? 얼마나 때리려고 그러는 거야? 미안해! 이제 장난 안 칠···!”
뿅!
“0·2cm· 이러니까 쌓인 스트레스가 좀 풀리는 것 같긴 하네·”
“포 폭력 반대!”
뿅!
“미안한데 한국어가 잘 안 들려서 일본어로 대답해 주면 좋겠네·”
“와아! 치사하다! 나빴어!”
뿅!
“아니 나는 야사시이하거든·”
“···응? 그게 한국어야 일본어야?”
“····”
“그래도 무슨 소리인지는 알겠다! 아야!”
뿅!
“잊어 기억에서 지워 버려·”
“괜찮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돼! 나도 카와이이하고 야사시이하거든! 무엇보다 세쿠시이하지!”
뿅!
“내가 잊으라고 했을 텐데·”
“이 이제 야메떼····”
“더 맞아야겠군·”
뿅 뿅 뿅 뿅 뿅····
카에데는 아리엘이 애원하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뿅망치를 휘둘렀다·
결국 아리엘은 무릎걸음을 하며 조아라에게로 피신해야 했다·
“아라아라! 카에데 좀 막아 줘!”
“저기···· 리엘아? 나를 방패막이로 삼지 말았으면 하는데····”
“라라라~”
“조아라 고개 옆으로 비키도록 해· 잘못하면 맞을 수 있으니까·”
“으음 이거 어떡하지···?”
뒤에서 조아라의 어깨를 붙든 채 여성 클랜원 중 제일 키가 작은 아리엘이 움츠리며 조아라의 등 뒤로 숨는다·
졸지에 아리엘과 카에데 사이에 낀 조아라는 난처하다는 듯 뺨을 긁적였다·
아리엘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으며 머리 위로 쫓겨난 라라도 같은 반응이었다·
한편 뿅망치를 손에 쥔 카에데는 물러날 기색이 없어 보였다·
“다들 장난은 거기까지만 하고 본론이나 얘기하도록 하자·”
“···어쩔 수 없군·”
“휴우 살았다·”
“아리엘 얼른 자리로 돌아와라·”
“으엑···· 나 때릴 거야?”
“너 하는 거 봐서·”
김민지는 그런 상황을 중재했다·
카에데는 그녀의 의사를 존중해서 뿅망치를 든 손을 내려놓았다·
덕분에 아리엘은 안도할 수 있었다·
한편 맞은편에서 두 사람의 장난을 가만히 지켜보던 배수빈은·
“이참에 활에서 뿅망치로 갈아타지? 이제 보니 너는 활보다 뿅망치가 더 어울리는 것 같은데?”
입꼬리를 올리며 〈신궁〉이라 추앙받는 카에데의 심기를 건드렸다·
당연히 그녀가 가만있을 리 없었다·
그녀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지금 뭐라고 했냐·”
“뿅망치를 주 무기로 쓰라고·”
“흥 너도 이걸로 놀고 싶나 보지? 그런 식으로 비아냥대지 말고 그냥 솔직하게 말하지 그래· 원한다면 줄게· 자 가져가라·”
“내가 언제 달라고 했어?”
“부러워하는 거 다 알거든?”
“아니거든?”
“줄 때 가져가라니까·”
“너나 가지고 놀라니까?”
오늘도 어김없이 눈이 마주치자 서로를 원수처럼 여기며 싸우려 드는 배수빈과 카에데·
안주와 술을 사이에 둔 두 사람은 그렇게 치열하게 눈싸움을 벌였다·
“애들아? 아까 내 말 못 들었니? 회의 좀 하게 그만하라니까?”
김민지는 이번에도 상황에 개입해 두 사람의 신경전을 말려야 했다·
“에휴···· 내가 늙는다 늙어·”
정말이지 개성 강한 클랜원들이다·
가장 평범한 축에 속한다고 그렇게 내심 자부하는 김민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고는 자신이 성심껏 만든 지금까지 누구 하나 손댄 적 없던 안주에 손을 댔다·
“음 역시 내가 만든 거라 맛있네· 얘들아 너희도 먹어 봐· 맥주든 소주든 뭐랑 같이 먹어도 잘 어울리거든?”
“····”
김민지는 자신이 평범한 줄 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녀도 평범한 축에 속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요리 실력이 절대 그렇게 괴상할 리 없었으니까·
···미각도 평범하지 않았다·
이에 그들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그녀의 권유를 사양했다·
그때 그녀가 비로소 본론을 꺼냈다·
“이미 들은 사람들도 있을 거야· 이번에 은하 걔가 휴가를 내서는 가족들하고 은아 언니 신혼여행을 따라가겠다나 봐· 어처구니없지만 노은하가 노은하한 거지·”
노은하가 노은하했다·
어느새 그 말이 입에 착 달라붙었듯 이제는 그가 벌이는 기행에도 그다지 놀라워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실소를 흘리기는 할지언정 그러려니 하며 받아들였다·
다만 불만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우리한테 일을 떠맡기고 여행을 간다는 거지? 언니 내가 들은 소리 맞아?”
“동생 나도 똑같이 들었어· 혼자서···· 아니지 자기들끼리 놀러 갈 생각이라니 너무하네· 우리도 놀고 싶은데!”
“맞아 맞아! 방탕하게 놀고 싶은데 클랜에 입단하고 지금까지 한 번도 그렇게 논 기억이 없다니까?”
“동생 말이 맞아· 클랜 로드 때문에 문란하게 놀아 보지도 못하고 이러다 죽을 때까지 일만 할 것 같다니까?”
쌍둥이 자매 메이링 메이린·
개인 차이는 있을지라도 그녀들이 앓는 소리를 내는 것처럼 클랜원들은 분주하게 살다 보니 좀처럼 휴식을 취하지 못했다·
그러니 은하와 그의 아내들의 여행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하물며 은하는 네 번의 결혼으로 긴 휴가를 보내기까지 했다!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오늘 모이자고 한 거야· 걔네만 휴가를 간다는 게 말이 돼? 응? 우리가 일하는 노예도 아니고 우리도 휴가를 가야 하지 않겠어?”
“···틀린 말은 아니네·”
“우이씨 나도 휴가 가고 싶은데·”
“저도요·”
김민지가 개탄하듯 호응을 유도하자 몇몇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에데는 소주를 삼키며 동조했고 조아라는 과자를 와그작 씹었으며 손가연은 살며시 말을 보탰다·
“주님과 천사님들이 여행을 간다니 정말 부럽네요· 저도 같이 가고 싶지만 가족들끼리 보내는 오붓한 여행에 저는 방해만 될 테니 배웅이나 해야겠네요· 신교의 일도 있고요·”
예외는 은하를 병적으로 숭배하는 이리야밖에 없었다·
한편 김민지의 의견에 수긍하면서도 의문을 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은아 언니랑 은하 오빠네가 같은 시기에 휴가를 내는데 저희가 휴가를 낼 수 있을까요?”
“휴가를 가도 그분들이 다녀온 다음에 갈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브라우저〉 온태희·
십이좌 〈거목〉 선기준의 하나뿐인 딸인 선미예·
어깨가 닿을 정도로 가까이 앉아 술을 홀짝이던 두 사람이 물었다·
김민지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들의 질문에 답했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은우랑 메리 우비 언니랑 다른 사람들이 그 기간에 고생해 주기로 했거든·”
“은우은우랑 음메메리가? 거기에 우비 언니도 있고···· 다들 웬일이래?”
“그쪽도 조만간 휴가를 내서 여행을 떠나야 하니까· 그래서 우리 눈치가 보여서 그러는 거지·”
“아·”
사람들은 뒤늦게 깨달았다는 듯이 짧은소리를 냈다·
사실 은아와 한창진의 신혼여행은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몇 개월 뒤에는 진파랑과 김메리의 결혼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 후에 목민호의 차은우의 결혼이 예정되어 있었고····
여우비와 유남훈도 그때쯤에 결혼을 염두에 두고 있기도 했다·
그밖에 다른 클랜원들도 있었다·
겹경사가 끊이지 않았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기는 했다·
“언니 우리만 없어····”
“우리만 모쏠이야···· 이러다 동생이랑 평생 같이 살겠어····”
“근데 언니 그것도 나쁘지 않지 않아? 언니랑 나랑 그러다 남자 하나 잡아서····”
“어머· 동생 화끈한데?”
선력 15년의 서울 재앙을 기점으로 제2차 의정부 탈환전 칠마의 테러 백서진의 국가 전복 〈심연의 던전〉 공략 등·
판도라 클랜원들은 생사를 오가는 굵직한 사건을 여러 차례 겪었다·
죽음이 바로 곁에 있다는 말을 여실히 실감한 것이다·
특히 흑색던전 공략은 그들에게 있어 상당한 심력을 소모하게 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은 삶에 감사하고 현재의 행복에 충실하게 됐다·
그로 인해 깊은 사이로 발전하게 된 사람들이 상당수 나온 것이다·
“····”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제외하고·
그녀들은 다양한 이유로 연인 없는 솔로의 삶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그녀들은 우스갯소리로 회의명을 바꿔야 하지 않느냐고 말하기도 했다·
기존의 멋쟁이 여자들 회의가 아닌 멋쟁이 솔로녀들의 회의로·
“흥 혼자 사는 게 제일 편할 텐데 왜 같이 살려고 그러는지···· 진짜 이해할 수 없다니까·”
“그 말에는 동감이다· 혼자가 편하지·”
“아 그래? 그런 사람이 회귀 전에는 온태양이랑 결혼을 해? 몇 번째였더라? 기억이 가물가물하네?”
“큭···· 그 입 닥치지· 분명 무언가 이유가 있었을 거다· 회귀 전의 내가 그놈의 하렘원이 될 정도로 멍청했었을 리 없어· 그러는 지도 회귀 전에는 남자한테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주다 노예로 전락했었다면서 무슨·”
“뚫린 입이라고 말을 험하게 하는데 머리를 확 뚫어 버리는 수가 있다·”
“뚫어 보든가· 그 전에 내 화살이 먼저 네 빨간 눈을 뚫어 버리겠지만·”
“저기 얘들아? 우리 회귀 전에 있던 이야기는 가슴속에 묻기로 했잖아? 그리고 여기에 나랑 태희가 있으니까 태양이 얘기는 자제해 주지 않을래?”
“네 좀···· 그러네요·”
“···미안하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어·”
“···나도 사과할게· 미안해·”
순간 분위기가 싸해졌다·
서로 못마땅하게 여기는 배수빈과 카에데는 조아라와 온태희의 언질에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다행히 다른 사람들이 나서 준 덕에 분위기는 어찌어찌 무마됐다·
그러고는 회귀 전에 일어난 일은 거론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어쨌든 우리도 이번에 여행 가서 신나게 놀다 오는 거야· 노은하 걔랑 같은 곳으로 갔다가는 자칫 사건 사고에 휘말릴 수 있으니까 다른 데로!”
“민지야! 나! 나! 나! 나 바다에서 헤엄치고 싶어! 우리 바다 가자!”
여하튼 그리하여·
그녀들도 휴가를 떠나기로 했다·
“····”
한편 서나는 조용히 술을 홀짝이며 주로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그녀는 여행 계획을 세우며 떠드는 친구들을 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신혼여행···· 부럽네·”
여우 꼬리를 살랑거리며·
진서나는 쓸쓸히 추억을 삼켰다·
그러나 추억에만 빠져서는 안 된다·
“캬아!”
진서나는 잔에 담긴 술을 들이켜고는 떠오르는 생각을 잊기로 했다·
지난 일이다·
되돌릴 수 없다·
과거에 얽매여 있어서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현실에 충실해야 한다·
〈심연의 던전〉에서 깨닫지 않았던가·
그러니 지금은····
‘솔로들끼리 여행 떠나는 것도 좋지· 애들이랑 즐겁게 놀 생각만 하자·’
서나는 현재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에 한창 여행 계획을 세우는 친구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애들아 기념으로 수영복도 새로 맞추는 것은 어떨까? 시형이도 이참에 비키니로 입어 보는 건 어때?”
“···내가 잘못 들은 건가? 비키니? 아니 서나야· 그건 무슨····”
“시형이 비키니에 찬성하는 사람?”
“찬성!”
“아니 얘들아····”
“자기 이제는 인정할 때도 됐잖아· 포기하고 이쪽으로 넘어와·”
“나는 남자야· 남자라고 얘들아····”
멋쟁이 여자들 회의의 명예 회원인 〈이중관통〉 봉구래와 〈작은 거인〉 강시형·
두 사람의 반응은 극명하게 달랐다·
구래는 회의에 참석해 뿌듯해했고 시형은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아 술이 이것밖에 없었나? 아마 냉장고에 더 있을 텐데···· 시형아 가서 꺼내 와·”
“그래···· 또 날 시킬 줄 알았다· 일어날게 일어나면 되잖아·”
참고로 강시형은 그녀들 사이에서 최약체로 통하고 있었다·
* * *
“호텔로 모시겠습니다·”
“잘 부탁할게요·”
가이드들이 제주공항에 도착한 은하와 가족들을 반겼다·
그들이 그와 가족들이 가지고 있던 짐들을 차에 싣고 호텔로 안내했다·
그때쯤에는 날이 저물고 있었다·
“서현아 오늘 일정은 없는 거지?”
“다들 피곤하기도 할 테고 시간이 시간이라서 오늘은 호텔에서 쉬고 내일부터 돌아다닐 거야·”
“짐을 푸는 대로 저녁이나 먹으러 가는 게 어떨까? 애들도 공항에서 먹고 나서 먹은 게 없어서 배가 고플 것 같은데·”
“여기 식사가 맛있어· 나가지 말고 호텔에서 먹는 게 어떨까? 야경도 그렇게 예쁘다던데···· 나 이번에는 꼭 야경이 보고 싶어·”
“응 나도 그게 좋을 것 같아·”
저녁 먹을 시간이 되기는 했다·
은하와 가족들은 짐을 푸는 대로 레스토랑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문제는 이때 일어났다·
“근데 은하 짐은 어디에다 풀지?”
“····”
그들이 여행 기간에 머무르기 위해 예약한 방은 총 4개였다·
각 방은 한서현 정하양 이유정 류연화가 사용하기로 했다·
은하는 날마다 돌아가면서 그녀들과 동침하기로 되어 있었고·
그런데 그의 짐을 어느 방에 둘지는 논의하지 않았다·
“하하····”
“····”
네 명의 여성들이 은하를 중심으로 시선을 교환했다·
사이에 낀 은하로서는 여간 불편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삐삐삐 빠빠빠 뿌뿌뿌!”
“깡!”
짐이 필요 없는 불닭이와 깡이는 상황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어차피 두 마리는 마음 가는 대로 방에 들어가서 은하의 아이들하고 잠을 잘 생각이었다·
그때 노유성이 해결책을 내놓았다·
“아빠는 짐 안 풀면 되지 않아요?”
“···우리 아들이 천재네· 은하 너는 캐리어 들고 돌아다니도록 해·”
“내가 무슨 난민이냐·”
안타깝게도 은하에게는 무언가를 결정할 권리가 없었다·
아내를 넷이나 데리고 사는 그는 가장으로서 권위가 낮았다·
권위가 높을 때는 어둠이 드리운 밤이 되었을 때만이었다·
그런 한편·
“···나보고 이걸 먹으라고?”
은하에게는 먹고 싶은 것을 선택할 권리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저녁을 먹으러 레스토랑으로 향한 그는 자신의 앞에 놓인 음식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장어며 굴이며 전복이며 부추며 생강 오미자 다시마 초콜릿 자라 요리 등·
죄다 정력에 좋은 음식뿐이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느라 힘들 텐데 몸보신을 해야 하지 않겠니?”
“여행지 돌아다니는데 뭐 이렇게····”
“여행지만 돌아다니는 게 아니잖아? 그렇지 유정아? 연화 언니?”
“은하야 많이 먹고 힘내도록 해·”
“···부족하면 더 챙겨 줄게·”
“····”
가끔 아주 가끔 은하는 생각했다·
자신이 잡아먹는 게 아니라 사실 아내들이 잡아먹는 게 아닐까 하고·
‘···어쩔 수 없네·’
그러나 화목한 가정을 유지하려면 눈앞에 놓인 음식을 먹어야 했다·
은하는 체념하고 그녀들이 내주는 음식을 입에 집어넣었다·
문득 얼마 전에 유도준이 낄낄대며 꺼낸 말이 생각났다·
―은하야 네가 선택한 하렘이다· 후회하지 말고 악으로 깡으로 버티고 참아라· 왜 버티는 사람이 일류라는 말도 있잖아?
음식을 꾸역꾸역 우물거리며·
은하는 다짐했다·
‘내가 또 결혼하나 봐라····’
자신이 이 이상 아내를 맞는 일은 절대로 없으리라·
이때의 은하는 3년 뒤의 자신이 코웃음 칠 결심을 품었다·
그러던 그때였다·
“자 은하야· 이것도 먹어야 해·”
“···이건 또 뭐야?”
정하양이 비타민 음료처럼 생긴 병을 은하에게 내밀었다·
은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는 활짝 웃으며 답했다·
“이번에 앨리스그룹에서 출시하려는 자양 강장제야· 남자한테 좋대·”
“····”
“엄청 좋다는 모양이야· 은하 너는 기프트 때문에 문제없겠지만 그래도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
“듣자 하니 전에 먹었던 것보다 효과가 훨씬 좋다더라고·”
정하양이 손수 뚜껑을 따 준다·
진하고 달콤한 냄새가 올라오면서 은하의 코끝을 간질였다·
“자 마셔·”
“···그래·”
“한 박스나 가져왔으니까 아침 점심 저녁 때마다 한 병씩 마시도록 해· 모처럼 온 여행인데 힘을 많이 쓰는 게 좋잖아?”
“····”
전 세계 최초로 흑색던전을 공략한 〈군주〉 노은하·
아무리 그라도 무서운 게 있었으니 바로 아내들의 기대를 충족하려는 남편으로서의 책임감이었다·
그는 앞으로 보낼 밤이 무척 무섭기만 했다·
자신을 향하는 끈적한 시선들이 너무나도 두려웠다·
“자 은하야·”
“유정아 이건····”
“로열 비즈야· 이것도 꼭 먹어·”
“····”
더는 아내를 들이지 않으리라·
은하는 지키지도 못할 다짐을 했다·
* * *
은하가 보양식만 먹은 것은 아니다·
간간이 아이들이 불쌍한 그를 위해 다른 음식을 먹여 주기도 했다·
“유성아 아빠도 맛보게 해 주렴·”
“네! 아빠 여기요! 아~ 하세요·”
“···유성이 너밖에 없다·”
한서현이 키득거리는 가운데 노유성이 은하에게 음식을 건넸다·
은하는 환한 얼굴로 아들의 재롱에 입을 벌렸다·
뒤이어 노유란 노유린이 움직였다·
“유란이도 아빠 먹여 줘야지·”
“아빠! 아아아아!”
“유린이도 가서 아빠한테 줘 볼래?”
“네에· 아빠 아아~·”
“둘 다 나한테 주는 거야? 고마워 응 진짜 맛있다·”
노유란 노유린이 아장아장 걸어서 은하에게 걸어갔다·
은하는 두 딸이 건넨 음식을 먹고 과장된 감상을 보여 주었다·
두 딸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어느새 노유린은 그의 무릎에 앉아 이것저것 떠먹여 주기까지 했다·
‘나도 아이가 있었으면····’
류연화는 아이들의 재롱을 보면서 속으로 부러워했다·
은하와 아내들이 아이들을 통해서 교감을 나누는 모습이 샘이 났다·
그 광경을 보고 있노라니 소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연화야·”
“···어?”
은하가 갑자기 부른 것이다·
상념에서 깨어난 류연화가 푸른 눈을 깜빡였다·
“이번에는 누나가 주는 게 먹고 싶네· 아~·”
“····”
은하가 장난스럽게 입을 벌린다·
자신을 향하는 눈빛을 마주하게 된 류연화는 무심결에 입가가 올라갔다·
그녀의 얼굴이 미소로 물들었다·
“응 여기 있어· 아~·”
“역시 내 아내가 주는 거라 그런지 더 맛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