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라이프 플레이어 (932)
노은하가 아닌 다른 남자들에게는 맨살을 보여 주고 싶지 않다·
이유정은 고민 끝에 노출이 과한 수영복은 삼가기로 했다·
어디까지나 다른 남자들 앞에서만·
“이건 은하한테만 보여 줘야겠네·”
입지 않겠다고는 하지 않았다·
수영복을 수영할 때만 입으란 법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바다나 수영장이 아닌 곳에서라도 충분히 입을 수 있었다·
욕실도 있고 침실도 있다·
집안에서 물놀이할 때 입어도 되고·
은하와 단둘이 있고 분위기 좋을 때 입으면 될 뿐이다·
‘은하가 좋아하겠지?’
입는 데 용기가 필요한 수영복이다·
면적이 작은 천과 끈으로 이루어진 방어력을 도외시한 듯한 수영복·
심지어 뒤에는 끈밖에 없다!
시착한 사진을 찍어 은하에게 보낸 이유정은 물놀이하며 입고 놀 수영복과 은하에게만 보여 줄 수영복을 하나씩 구매하기로 했다·
옷을 갈아입은 그녀는 신발을 신고 탈의실에서 나왔다·
“다 입어 본 거예요? 어땠어요?”
“응 이거랑 이걸로 사려고·”
“두 벌이나요? 둘 다 마음에 드는 수영복이었나 봐요· 어떻게 생긴···· 아····”
탈의실 근처에서·
노유린이 탄 유모차를 지키고 있던 하백련은 이유정이 고른 수영복에 관심을 보였다·
이내 수영복을 확인한 그녀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그 그걸 입으려고요? 사람들한테 다 보일 것 같은데···· 언니 이건 아무래도 좀····”
“응 나도 알아· 그래서 은하한테만 보여 줄 생각이야·”
“아····”
하백련도 이제 어린 나이가 아니다·
남녀 간의 사랑이 무엇인지 이제는 알 만한 나이였고 애초 차기 선녀로서 받는 교육 중에는 성교육이 있기도 했다·
이유정이 단편적으로 암시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차린 그녀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러니까 오빠랑 언니가····’
노은하와 이유정은 부부다·
부부 사이이니 그렇고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하백련은 상상하는 것만으로 얼굴이 붉어졌다·
‘으으····’
머리에서 김이 피어오를 것 같다·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키게 된다·
‘후아아····’
수영복을 어떻게 보여 주려는 걸까·
유정 언니는 대체 어떤 플레이를····
하백련은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어른의 미지의 세계에 몸을 떨었다·
이유정은 그런 그녀를 지나쳐서는 수영복들을 사러 카운터로 향했다·
“이렇게 계산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봉투도 같이 드릴까요? 봉투를 추가할 경우 추가 비용이····”
“그렇게 해 주세요· 여기요·”
이유정은 카드를 건넸다·
우측 하단에 ‘루미너스’라고 적힌 블랙 카드였다·
그녀를 정중하게 응대하던 직원은 그 카드를 보고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야 어떤 각도에서 카드를 보든 루미너스그룹에서 직급이 높은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카드였으니까·
“고객님 혹시····”
“네?”
이 카드를 가지고 있을 수 있는 사람 중 20대 여성은 많지 않았다·
직계의 경우 한 명밖에 없었다·
이유정에게 카드를 받아 든 직원은 조심스럽게 카드 뒷면을 살폈다·
소유주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
Lee Yujeong·
그것으로 직원은 이유정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루미너스그룹의 금지옥엽·
한 명밖에 없는 직계 여성·
〈군주〉 노은하의 세 번째 아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직원은 즉시 허리가 직각이 될 정도로 숙였다·
“미처 알아보지 못해 죄송합니다! 저희가 실례를 범했습니다!”
“네?”
이유정의 방문 소식이 알려지며 루미너스 백화점에 비상이 걸렸다·
* * *
보통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쾌적하게 쇼핑을 하기 위해서라도 언질을 주고 방문하기 마련이다·
그게 그들이나 백화점 입장에서나 서로 편하다·
그들로서는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쾌적하고 여유롭게 쇼핑할 수 있어 좋기 때문이고·
백화점 입장에서는 그들로 인해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특별 대우가 부담스러워서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고 조용히 쇼핑하고 돌아가는 부류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유정은 다르다·
루미너스그룹에 속하는 백화점에서 그 그룹의 직계를 어찌 소홀히 대할 수 있겠는가·
불경한 짓이다·
만약 그녀에게 불편이라도 줬다면 크나큰 문제가 된다·
그녀가 조용히 둘러보려 했더라도 백화점에서는 절대 그녀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었다·
“안녕하세요 사모님· 저는 이곳의 지부장을 맡고 있는 김승희라고 합니다· 혹여 저희 측에서 이용에 불편을 드렸거나 실례를 저질렀다면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아니요 저는 괜찮아요·”
이유정의 정체가 밝혀지고 난 뒤·
백화점을 관리하는 지점장이 몸소 그녀에게 인사하러 내려왔다·
가벼운 마음으로 수영복을 사러 온 그녀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점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깍듯하게 대하며 그녀에게 호위를 붙여 주기까지 했다·
지점장의 뒤에 있던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이유정의 뒤편으로 이동했다·
“짐이 많아 보이는군요· 사모님께서 저희 지점을 편안히 살필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아 그럴 필요는····”
“이유천 상무님께서 필히 사모님을 보필하란 연락이 있었습니다·”
“아···· 그렇군요·”
호위라면 이미 일반인 복장을 한 하백련의 호위사들로 충분했건만·
추가로 호위가 늘어나니 이유정은 난감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그렇다고 자신의 오빠 이유천이 명령한 일을 거절할 수도 없었다·
“그럼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제가 필요한 일이 있다면 언제든 개의치 않고 바로 연락해 주십시오·”
“···수고하세요·”
결국에는 받아들여야 했다·
이유정은 지점장의 배웅을 받으며 또한 보디가드들의 호위를 받으며 자리를 떠나야 했다·
“미안해· 사람들 시선을 받지 않고 돌아다니고 싶었을 텐데····”
“아니에요 언니· 저는 괜찮아요· 그것보다 배도 고픈데 저녁이라도 먹으러 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럴까? 유린이도 배고파요?”
“네에!”
“뭐 먹고 싶은 건 있니?”
“음···· 언니 떡볶이는 어때요?”
“떡볶이? 그럼 그거 먹으러 갈까?”
하백련은 이유정을 탓하지 않았다·
그녀의 배려를 모르지 않았던 데다 애초 호위를 달고 사는 몸이다 보니 이제는 호위를 받는 상황에 익숙해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과 노유린은 기분을 전환해 저녁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이유천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온 것은 그러던 중이었다·
“여보세요? 오빠?”
[어 유정아· 백화점에 갔다면서? 갈 거면 미리 말을 해 주지 그랬어·]
“말하면 일이 이렇게 될 것 같아서 일부러 말하지 않았던 거지· 그냥 편안히 구경하고 갈 생각이었는데 이게 뭐야?”
[직계의 숙명이야· 어쩔 수 없어· 그냥 받아들이도록 해· 그래서 지금 어디에 있는데?]
“지금 10층 식당가로 가는 중이야· 그건 왜?”
[마침 일이 있어서 근처에 있거든· 잠깐 너랑 유린이 좀 보고 가게· 식당 들어가면 알려 줘·]
“힘들게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알았어 그럼 이따 전화할게·”
정말이지·
자신을 끔찍이도 생각하는 오빠다·
이유정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전화를 끊은 그녀는 저녁을 먹을 분식집을 찾았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그녀가 뒤를 돌아보며 권유했다·
“여러분도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사양하지 말고 편히 시키세요· 오늘 저희 곁에 있어 주는 보답으로 제가 쏠게요· 여기 사장님을 위해서라도 자리만 차지해서는 안 되잖아요·”
그러니 거절은 거절할게요·
이유정은 따라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다른 선택지는 주지 않았다·
권유 아닌 명령이었다·
* * *
고추장과 크림을 넣은 소스로 만든 로제 떡볶이·
이유정과 하백련은 최근 유행하는 로제 떡볶이를 먹어 보기로 했다·
한편 가게에는 어린아이들을 위한 놀이터가 조성되어 있었다·
노유린이 흥미를 보일 만도 했다·
“유린아 언니랑 같이 놀다 올까?”
“네에!”
“유린이 백련이 언니 말 잘 들을 수 있죠? 위험하게 놀며 안 돼요?”
하백련은 선뜻 노유린의 손을 잡고 놀이터로 데려갔다·
아장아장 뒤뚱뒤뚱하고 걸어가는 노유린은 앙증맞기만 했다·
이유정은 자리에서 딸의 뒷모습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그때쯤 이유천이 가게에 들어왔다·
“오빠 여기야·”
“음식은? 시켰어? 내가 쏠 테니까 저 사람들 몫까지 사 드려·”
“이미 내가 사기로 했어· 그런데 일하고 있었을 텐데 이렇게 나와도 되는 거야?”
“잠깐 시간이 남아서 그런 거지· 조금 있다가 바로 돌아가야 해·”
“힘들게 뭐 하러 이렇게 왔어···· 떡볶이도 못 먹고 가는 거야?”
“너희끼리 맛있게 먹도록 해· 나는 그냥 너랑 유린이 얼굴 보러 온 거니까· 유린이는?”
“저기서 백련이랑 놀고 있어·”
“아 머리카락이 검은 여자애하고 같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백련이였구나·”
“그래 백련이랑 느긋하게 둘러볼 생각이었는데 이게 뭐야?”
이유정은 항의하듯 맞은편에 앉은 이유천을 째릿 노려보았다·
다만 겉으로 행동하는 것과 달리 언짢아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녀 나름의 장난이었다·
당연히 그것을 모를 리 없던 그는 가볍게 웃음을 흘리기나 했다·
“요새 바빠서 연락하기도 힘들고···· 어떻게 지내고 있어? 후계자 수업은 잘 받고 있어? 어때? 많이 힘들어?”
“말도 마라· 아버지가 이번 기회에 업적이나 쌓으라고 자꾸 날 의정부로 보내려는 거 있지? 의정부에서는 통신도 잘 되지 않아서 한번 들어가면 연락하기도 힘든데····”
“은하한테 그 얘기를 듣기는 했어· 그래도 초기에 자리를 잡는 게 힘들어도 자리만 잡게 되면 그 이후에는 편해지지 않을까? 의정부는 북부 개척의 전초 기지이자 북부 교통의 중심이 될 거잖아· 오빠한테는 중요한 업적이 될 거야·”
“알고 있어· 그걸 아니까 힘들어도 의정부에 올라가서 일을 보는 거지···· 유정이 너는 어떻게 지내고 있어? 오늘 여기는 왜 온 거야?”
“아 그게 있지···· 이번에 은하랑 다른 애들이랑 여행을 가기로 해서 수영복을 사러 온 거야·”
“하 은하는 나보다 더 바쁠 텐데 놀 시간이 있는 건가?”
“음···· 은하 말로는 밑의 사람들이 열심히 일해 줄 거라고 하더라고·”
“···악덕 업자가 따로 없구만·”
이유천이 음료를 시키고 머지않아 두 사람 앞으로 음료가 나왔다·
그들은 시원한 음료로 목을 축이며 두런두런 대화를 나눴다·
이유정은 의정부로 올라간 이후로 연락이 잘 되지 않던 그와 오랜만에 대화를 나눌 수 있어 즐거웠다·
그녀는 이따금 그에게 장난을 치며 짓궂은 모습을 보여 주기도 했다·
그때마다 그는 번번이 당해 주었다·
그러던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쳤다·
“요새 많이 변한 것 같네· 얼굴이 더 밝아진 것 같아·”
“응? 그런가?”
“내가 봤을 때는 그래· 보기 좋네· 눈을 볼 수 있게 되면서부터인가? 아니지 은하가 흑색던전을 공략한 이후부터인가·”
“····”
“네가 행복한 것 같아서 다행이야·”
“···응 내 생각에도 그런 것 같아·”
이유정은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최근 들어서 변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짚이는 구석이라면 있었다·
그녀는 결혼반지를 매만지며 놀이터에서 노는 노유린과 하백련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마 회귀 전의 기억 때문이겠지·’
어쩌면 자신은 두 번째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자각은 예전부터 기억이 있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있기는 했다·
이유정은 일상을 살아가다 이따금 한 번 경험한 듯한 기시감을 느끼거나 자신과 닮은 사람의 목소리를 환청으로 듣고는 했다·
그러나 그때는 단순한 착각으로만 환상으로만 여겼을 뿐이다·
가족들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 굳이 이야기하지도 않았다·
―보여 전부····
그것이 착각도 환상이 아니란 걸 자각하게 된 것은 눈을 보게 되면서부터였다·
눈을 봉인하던 섭리가 사라지면서 그녀는 그동안 몸속 깊숙이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눈을 뜬 것만 같은 감각을 느꼈다·
그 이후로 자신의 기억에는 없던 기억이 서서히 섞여 들었다·
돌이켜 보면 아마도 그것은 그동안 〈기적〉에 의해 억눌려 있었던 회귀 전의 기억이었으리라·
그리고 은하가 흑색던전을 공략해 소원을 비는 것으로 던전에 녹아든 마나가 세상에 퍼져 나가게 되며·
―이 바보야 그런 말은 회귀 전에 말했어야지· 겁쟁이 멍텅구리·
―이건···· 나?
이유정은 또 하나의 자신을 느꼈다·
그때 그녀는 어렴풋이 깨달았다·
자신은 두 번째 삶을 살고 있다고·
그 후 은하가 회귀를 고백한 일은 그것을 사실로 입증해 준 셈에 불과했다·
―〈심연의 던전〉을 공략하게 되면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고 약속했지? 그동안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 사실 내가 미래를 알고 있는 이유는····
그때부터였다·
그때부터 그녀는 회귀 전의 기억을 꿈으로 꾸기 시작했다·
회귀 전의 자아와 현재의 자아가 본격적으로 어우러지게 된 것이다·
“행복해 너무· 오빠하고 이렇게 사이좋게 지낼 수 있어서·”
“응?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우리가 언제 사이가 좋지 않았던 적이 있었어?”
“아니 예전에도 사이가 좋긴 했지·”
그렇게 이유정은 이유정이 됐다·
은하와 몇몇 사람만 아는 일이다·
되도록 밝히고 싶지 않았다·
엄밀히 따지자면 자신은 은하처럼 회귀했다기보다 기억하고 있는 것에 더 가까웠으니까·
더군다나 회귀 전의 기억은 마냥 밝지 않아 이야기하기가 꺼려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은하가 그랬었듯 괜히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았다·
특히 자신을 낳아 준 부모님이나 친오빠에게는·
‘이렇게 어른이 된 오빠를 볼 수 있어서 너무 기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