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라이프 플레이어 (930)
노은아의 결혼을 인정하기는 했으나 한창진을 인정했다는 것은 아니다·
과연 그에게 은아의 배우자가 될 자격이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하나밖에 없는 누나고 마찬가지로 하나밖에 없는 딸이다·
그녀의 마음이 어떠하든 어디 사는 개뼈다귀인지 모를 놈팡이한테 맡길 수는 없다는 뜻이다·
‘우리 누나를 고이 보낼 수는 없지·’
‘내 딸을 함부로 줄 수는 없지 암·’
부자의 생각은 일치했다·
은하와 그의 아버지는 오늘 마지막으로 한창진을 시험하고자 했다·
물론 두 사람은 한창진의 마음이 얼마나 깊은지 잘 알고 있었다·
존재를 상실한 은아를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흑색던전을 공략하려던 마음은 인정할 만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일 뿐이다·
노은아와 남은 인생을 함께 걸어갈 배우자로서 어울리는지는 따로 확인해야 할 일이다·
―저기요 주인님? 일단 사모님이 넷이나 있는 주인님이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양심은 있어요?
―닥쳐· 나는 되고 그 형은 안 돼·
―이제는 아마 모르는 사람이 없을 주인님 인성····
한창진과 어둠의 한 축을 담당하는 은하의 수하 이십오·
며칠 전 은하에게 이야기를 들은 그는 어처구니없어했다·
은하는 신경 쓰지 않았다·
사실 본심을 말하자면····
‘한창진 이 죽일 놈의 자식·’
‘감히 내 딸의 마음을 훔쳐?’
은하와 그의 아버지는 그저 은아를 한창진에게 내주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그렇다고 은아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에서 무시할 수는 없었으니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보내며 그에게 애꿎은 화풀이를 하기로 한 것이다·
유치하다고 해도 좋다·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오히려 자신이 살아온 세월에 갇혀 속이 꽉 막히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상에 감사하고 추억에 젖으며 유치해지는 법이다·
회귀 전의 재앙을 모두 극복하고 비서실장 자리에서 물러나며 그동안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은하와 그의 아버지는 충분히 유치해질 만했다·
그리하여·
탕!
“아까는 며느리들과 애들이 있어서 마시지 못한 고량주나 마셔 볼까?”
“저는 찬성이에요 완전·”
“얼쑤! 아저씨 최고다!”
“흠·”
“와 도수가 장난이 아닌데요?”
집 근처 펍(Pub)·
가게 전체를 대관한 은하의 아버지가 오늘을 위해 예약한 술들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남자들은 환호했다·
“····”
한창진만 빼고·
그는 사방에서 자신을 노리려 드는 그들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때 은하의 아버지가 불렀다·
“창진아·”
“네 아버님·”
“오늘 우리가 주는 술을 마시고 여기 있는 술을 전부 비우기 전까지는 집에 못 갈 줄 알아라· 혹시 두렵다면 지금이라도 일어나라·”
“···아니요 아버님· 마시겠습니다· 한 잔 따라 주십시오·”
은하의 아버지가 목소리를 내리깔며 한창진을 위협했다·
하지만 그는 굴하지 않았다·
고지가 이제 코앞인데 겁을 먹고 물러날 수는 없었다·
은아를 포기하고 싶지 않다·
그는 유리잔을 앞으로 내밀었다·
“기개는 가상하구나· 그럼 어디···· 내가 주는 술을 받아 보거라·”
“네· 어떤 술이든 반드시 아버님의 인정을 받고 말겠습니다·”
꼭 높은 경지에 오른 검사가 상대에게 자신의 검을 받아 보라고 말하는 듯한 말투다·
실제로 은하의 아버지는 고수 같은 움직임을 보여 주었다·
딸그락! 휙! 사라락! 파샤샥!
눈은 한창진을 응시한 채로·
그러나 손은 어디에 뭐가 있는지 다 안다는 듯이 술들을 집어 든다·
현란한 손길로 각종 술을 조합하고 빠른 속도로 셰이커를 흔들어 대며 술을 섞는 모습은 가히 감탄이 일게 했다·
이내 그가 잔을 척 내놓았다·
“오랫동안 비서실장으로 있다 보면 폭탄주를 제조하는 스킬이 자동으로 몸에 배기 마련이지· 내 인생을 갈아 만든 폭탄주다· 마셔라 창진아·”
“····”
한창진은 잔을 내려다보았다·
도대체 무슨 조화를 부린 것인지 온갖 종류의 술을 섞은 폭탄주는 투명하기만 했다·
그래서 더 긴장됐다·
얼마나 독한 술일지 짐작이 가지 않았으니까·
온갖 독에 대한 내성을 지닌 그도 처음 접하는 미지였다·
“잘 마시겠습니다 아버님·”
그럼에도 한창진은 마음을 다지고 단숨에 폭탄주를 들이켰다·
과연 도수는 상상 이상이었다·
마치 뜨겁게 이글거리는 태양을 삼키는 것만 같았다·
식도가 불에 타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았다·
“···잘 마셨습니다 아버님·”
“그걸 마시다니 제법이구나···· 그래 나는 더는 뭐라 안 하마·”
“감사합니다· 제가 은아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하겠습니다·”
“결혼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같이’ 살기 위해서 하는 거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서로를 지탱해 주는 게 부부야· 네 독단적인 생각만으로 은아를 행복하게 할 생각은 하지 마라· 행복해질 거라면 둘이서 같이 생각하라고· 잊지 마·”
은하의 아버지는 결국 손을 들었다·
한창진을 보고 혀를 내두른 그가 결혼 생활에 관한 덕담을 건넸다·
마침내 그에게 인정을 받은 창진은 새겨듣기로 했다·
이어서 진파랑의 차례였다·
“우리 노씨 집안의 사람이 되려면 이 정도는 마셔야 하지 않겠어!? 자 마셔! 창진이 형!”
“····”
너는 노씨 아니잖아·
한창진은 차마 하고 싶은 말을 꾹 참았다·
그는 진파랑이 내준 술을 살피고 조금 전과 다른 의미로 얼굴을 굳혔다·
“이게 뭔····”
“오늘 만든 진파랑 스페셜이야!”
“····”
3000cc 맥주 피쳐컵에 담겨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내용물·
온갖 술과 온갖 안주가 뒤섞인 그것은 술이라고 할 수 없었다·
만약 술을 신으로 떠받드는 사람이 있다면 단호하게 신성 모독이라고 말해도 이상하지 않을 비주얼이었다·
‘그래도···· 민지가 만든 것도 아니니 위험하지는 않을 거야·’
시궁창 물을 마시는 심정으로·
한창진은 눈을 질끈 감고 들이켰다·
악취가 났다·
도대체 무엇을 집어넣은 것인지 식감이 걸쭉하기만 했다·
간간이 무언가가 씹히기도 했다·
‘윽····’
술의 도수가 세지 않은 대신 양이 너무 많다·
그것을 한 번에 다 마시려고 하니 대단히 버겁기만 했다·
순식간에 위가 부푸는 듯한 느낌·
“다 다 마셨어····”
“와 진짜 그걸 다 마시네?”
한창진은 겨우 피쳐컵을 비워 냈다·
손등으로 흘러내린 술을 닦은 그는 필사적으로 정신을 부여잡았다·
그러지 않으면 토할 것 같았다·
그런 상황에서 브루노가 나섰다·
“마셔라·”
“작은아버님 이건····”
은하의 아버지와 진파랑이 준 잔이 큰 편에 속했다 보니 브루노가 내준 잔은 상대적으로 작았다·
손가락 한 뼘 정도·
문제는 잔에 담긴 내용물이었다·
속을 들여다볼 수 없을 정도로 새까맣기만 했다·
이에 브루노가 대답하기를·
“내가 조직에 몸을 담갔을 시절에 조직에서 제조한 술이다· 오늘을 위해 이탈리아에서 사들여 제조한 것이다·”
“···술 이름이 뭔가요?”
“흠 조직원들은 이 술을 발렌타인의 은총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름과 달리 색이 불안하게 검군요·”
“그야 자결주니까·”
“자결···주요···?”
“주로 배신자들에게 주던 술이었지·”
“····”
그걸 왜 저한테 주시는 건데요?
한창진이 흔들리는 눈동자로 물었다·
브루노가 덤덤히 대꾸했다·
“너는 독에 내성을 지니고 있으니 이 정도는 마셔도 괜찮겠지·”
“저한테 내성이 없는 독을 먹으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만····”
“그렇게 된다면 유감이겠구나·”
“····”
“장난이다· 이건 자결주가 아니다·”
“장난이었군요····”
“이건 자결주를 희석한 거다·”
“····”
안심하려던 한창진은 흠칫했다·
잔을 앞에 둔 그가 고민에 잠겼다·
그때 은하가 친절히 제안했다·
“걱정하지 마 형· 만약에 죽으면 내가 신화로 되살려 줄 테니까·”
“····”
“내가 우리 누나 슬프게 할 리가 없잖아? 안심하고 마셔· 그러니 마시고 죽어· 어둠의 인계는 이십오에게 맡기고 양지바른 현충원에 묻어 줄게·”
말과는 정반대되는 행동이다·
한창진은 은하의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은하라면 정말 할 것 같았다·
그러나 마시지 않을 수는 없다·
사람은 때로는 꿈을 이루기 위해 죽음도 불살라야 했다·
그가 자결주를 입에 털었다·
“커헉!”
“훌륭하구나·”
독이 즉각적으로 효력을 발휘했다·
한창진은 필사적으로 독에 저항해 내성을 발휘할 수 있었다·
브루노는 그를 대견하게 여기고는 알약을 하나 꺼냈다·
“해독제다· 힘들면 먹어라·”
“괘 괜찮습니다···· 작은아버님····”
혹시나 하고 해독제를 가져갔지만 한창진은 입에 가져다 대지 않았다·
순전히 자존심 때문이었다·
그는 어느 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그들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다음으로는 어베니어의 차례였다·
“어··· 난 딱히 준비한 게 없는데····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은 다 했는데 나만 평범하게 갈 수는 없고··· 음 어떻게 하지····”
“···그냥 평범하게 가면 안 될까·”
“아! 이렇게 하면 되겠다!”
어베니어가 보드카를 마구 섞은 뒤 유리잔을 하나 쥐었다·
파직!
유리잔이 그의 악력을 이기지 못하고 산산이 깨져 나갔다·
유리 가루가 보드카를 섞은 술에 사르르 섞여 들었다····
“자 마셔! 창진이 형!”
“그걸···· 마시라고?”
“독도 먹었는데 설마 이 정도도 못 먹겠어? 그리고 내가 가루가 되도록 으깨 놨으니까 마셔도 잘 모를 거야·”
“····”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태연하게 위험을 권하는 어베니어·
한창진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조금도 악의가 없는 듯한 그를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악의 없는 순수함이란 무서웠다·
그러나 그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진파랑과 브루노의 술에 비하자면 비교적 덜한 편이다·
어느새 자신이 처한 상황에 적응한 한창진은 끝내 술을 마셨다·
“크윽····”
“은아 누나 울리지 마 형!”
“그 그래····”
한창진은 해냈다·
이제 그는 마지막 한 사람의 인정만을 남겨 두게 되었다·
노은하·
필시 은하는 지금까지 상대한 어느 적보다도 강할 터였다·
한창진은 방심하지 않으려 했다·
“은하야····”
“여기까지 오다니 대단하네· 나는 파랑 형 선에서 끝날 줄 알았는데·”
“····”
마치 악역 같은 말을 지껄이며·
은하는 잔에 보드카를 따랐다·
그가 조그마한 병을 하나 꺼내 보드카에 내용물을 부었다·
보드카가 분홍색으로 변했다·
“자 마셔·”
“···방금 뭘 넣은 거야?”
“그건 다 마신 다음에 말해 줄게· 걱정하지 마· 독은 아니니까·”
노은하는 무슨 생각인 걸까·
한창진은 의도를 헤아리려고 했다·
하지만 포커페이스를 가장하고 있는 그의 의도를 읽을 수 없었다·
창진은 어쩔 수 없이 그가 아니라 잔으로 시선을 향했다·
‘도대체 뭐지?’
술에서 달콤한 향이 났다·
한창진은 정체를 파악할 수 없어 미간을 모았다·
마셔서 확인해 보는 수밖에 없다·
은하가 말을 꺼낸 것은 그때였다·
그의 눈빛은 한없이 진지했다·
“창진 형·”
“어 은하야·”
“그걸 마시면 이제 우리는 정말 가족이 되는 거야·”
“····”
“앞으로 잘 지내보자· 싫지만···· 은아 누나를 잘 부탁할게·”
은하가 고개를 숙였다·
한창진은 그동안 자신을 못살게 굴던 그에게 인정을 받은 것 같아서 가슴이 울컥했다·
자신의 마음이 드디어 그에게도 통한 것이다·
“은하야···· 이전 삶에서는 내가 네 적이었을지 몰라도 이번 삶에서 나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절대 네 적이 되지 않을 거야· 그러니 앞으로 잘 지내보자·”
〈심연의 던전〉을 공략하고·
은하는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던 사람들에게 회귀 사실을 밝혔다·
그렇기에 한창진은 자신이 회귀 전에 그의 숙적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전 삶에 은아가 없었다면···· 확실히 나는 백서진의 편에 서서 은하를 적대했을지도 몰라·’
그때 한창진은 속으로 납득했다·
의외로 놀랍지 않았다·
은아를 만나기 전의 자신이라면 한창 백서진에게 심취한 한편으로 은연중 선녀 정부에 불만을 품고 있었으니까·
만약 백서진이 자신을 부추겼다면 자신은 주저하지 않고 선녀 정부를 적대했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은아를 만나지 않았다면·
‘은하가 날 경계했었을 만도 해·’
은하가 회귀 전의 〈그림자의 왕〉과 현재의 자신을 동일시하고 경계한 게 억울하기도 했지만·
한창진은 비로소 그가 지금까지 자신을 경계한 이유를 납득하고 안심할 수 있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동생이다·
그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창진은 그가 의심이 많은 사람인 것을 알고 있었다·
이에 그가 자신을 의심하지 않게 솔직한 심정을 드러낸 것이다·
“나도 알아· 내가 형을 의심했다면 처음부터 어둠을 맡기지도 않았을 거야·”
“은하야····”
“그러니 형이라면 누나를 맡겨도 괜찮겠다고 생각한 거고· 이강혁이나 누나한테 껄떡거리는 다른 놈들보다는 형이 훨씬 낫잖아?”
“처남····”
“앞으로 잘 지내보자 매형· 마셔·”
본심을 꺼낸 은하가 낯간지럽다는 듯이 키득거렸다·
한창진의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의 눈망울이 그렁그렁했다·
‘앞으로 나는 이 집 사람이 된다·’
의지할 수 있는 가족이 생긴다·
한창진은 기쁜 마음으로 잔에 든 술을 한 번에 삼켰다·
달콤한 향이 나던 술은 과일주처럼 달고 맛있었다·
은하의 배려가 담긴 맛이었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고마워 처남· 처남이 주니까 정말 맛있네·”
“그게 좀 맛있는 술이기는 해· 그만큼 효과도 좋고 구하기 어렵지·”
“날 위해 귀한 술을 가져오다니···· 결혼하고 나서 내가 꼭 대접할게· 그런데 무슨 술이야?”
“그거? 초강력 정력 증강제·”
“···뭐?”
“앨리스그룹과 루미너스그룹에서 이번에 몽마(夢魔) 계열 몬스터의 마석을 이용해서 만든 정력제야· 아직 시판되지 않고 있는 건데···· 전에 한 번 써 보니까 효과가 대단하더라고·”
“그걸···· 왜 나한테 먹인 거야?”
“그거 먹고 집에 돌아가서 잠이나 푹 자라고·”
“····”
“혼자서 정욕에 몸부림쳐 봐 어디·”
은하의 얼굴에 활짝 웃음이 펴졌다·
한창진은 소름이 돋았다·
악마가 눈앞에 있었다·
“어쨌든 우리 누나 잘 부탁해·”
누나 울리면 나한테 죽는다·
히죽거리는 악마의 눈은 꼭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